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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이덕일. 7월19일
저자는 머리말에 “ 닫힌 시대, 증오의 시대가 한 인간과 집안. 그리고 사회에 얼마나 큰 불행인지는 정약용과 그 형제들이 잘 보여준다. 우리 역사에서 정약용과 그 형제처럼 한 집안의 어깨에, 닫힌 시대의 무게가 온전히 지워진 경우는 없다. 그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으나 단지 열린사회를 지행했다는 이유로 저주 받고 비참하게 죽어 갔다.” 고 썼다. 닫힌 시대에 살았던 조선의 선비들은 16세기 말부터 들어온 서양문물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그들이 가졌던 우주관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지구는 둥글고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열린사회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서학이라는 학문에서 종교도 접한 것이다. 조선과 천주교의 만남도 서양 문물의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는 서학에 관심을 가진 경기지역의 남인계 실학자들이었다. 이 중심에는 정약용의 형제들이 있었다. 정약용의 형제들의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조선과 천주교의 만남을 살펴보자.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16일 사시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 에서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 태어났다. 태어 낳을 때 이미 위로 이복 맏형 약현, 동복형 약전, 약종, 동복 누이가 있었다. 부친 정재원은 부인 해남 윤씨가 세상을 뜨자 정약용이 12살 때 스무 살의 장성 김씨를 후취로 삼아 이복동생 약황을 낳았다. 이 다섯 형제 중에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격은 형제는 해남 윤씨 소생의 3형제 약전, 약종, 약용과 누이였다. 그의 누이가 이승훈에게 시집감으로써 격랑의 역사 속으로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윤씨 소생의 3남1녀 모두가 거센 시대의 풍랑을 온몸으로 맞는 것은 孤山 윤선도의 피가 흐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복 맏형 약현의 부인은 한국 천주교회 성조라고 일컷는 광암 이벽의 누이였고, 딸 명련의 남편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백서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이며, 약황의 누이는 남인 영수 체재공의 서자 체홍근에게 시집가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하여튼 정약용의 집안은 사형당하거나 귀양가고, 노비로 전략하는 등 형제자매가 모두 이런 운명에 처해진 것은 특이한 일이며 남다른 형제들이며 남다른 시대였다.
정약용에게는 뚜렷한 스승이 없었다. 중형 약전은 성호 이익의 제자인 녹암 권철신에게 사사했으나 약용은 부친 외에 스승으로 삼은 사람이 없었으나, 홀로 성호 이익을 사숙(私淑 :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 받아서 도나 학문을 받는 것)했다. 이가환과 이승훈을 통해서 접한 이익의 사상은, 새로운 학문체계인 실학이었다. 주자학 이래 이기론, 사단칠정론 등 극도의 관념론에 빠진 유학을 일거에 뒤엎은 이가 이익이었다. 이익의 학문이 개혁적이었던 것은 중형 이잠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이잠은 숙종 32년(1706) 노론 김춘택과 이이명이 세자(경종)을 해치려 한다는 상소를 올려 큰 파란을 일으키고 극형에 처해졌다. 중형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한 이익은 평생 벼슬을 포기하고, 선영이 있는 안산 집성촌의 성호라는 호숫가 근처에 은거하고, 지배층의 눈이 아닌 민중의 눈으로 학문을 실천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기나 사단이나 하는 사변론을 박차고 실천하는 학문으로 나아갔다. 이런 점에서 이익의 학문은 사상계의 혁명이었다. 이런 이익이란 大道가 있음을 알려준 인물이 희대의 천재 정헌 이가환이며, 그는 이익의 종손이었다. 정약용은 이가환의 천재성에 여려 차려 놀랐고 그에 관한 기록도 남겼다.
남인 중에서 베이징까지 가서 영세를 자청하고 천주교 서적을 가져온 인물은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이었다. 이로써 정약용의 형제들에게는 천주교가 하나의 운명이었다. 남인들은 천주교 서적을 서양학을 뜻하는 서학이라고 부르며 학문서로 받아들였다. 정조와 이가환도 선교사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에 대해서 스스럼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비밀서적이 아니었다. 정쟁에 이용되기 전까지 서양서는 선진국의 학문서에 불과했다. 이익도 생전에 천주교 서적 판토쟈의 『칠극』과 마테오 리치의 『천주칠의』를 보고 평가를 했다. 이승훈이 베이징으로 가는 진짜 목적은 정약현의 처남 이벽의 권유였다. 그는 이승훈에게 베이징에 가면 천주당을 찾아가 신부를 만나 천주교 입교를 하려고 권했다. 이승훈은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북당(천주당)을 찾아갔다. 신부 그라몽은 이승훈의 방문에 깜짝 놀란다. 그 전에 조선 사신들이 호기심이나 학문 교류를 위해 천주당을 방문한 적이 있으나 입교를 위한 방문은 처음이었다. 약 130여 년 전 베이징에서 아담 샬을 만났던 소현세자가 중국인 환관, 궁녀들을 대동하고 귀국했다가 독살당한 이래 천주교인들이 조선땅을 밟은 적이 없었다. 이런 나라에서 온 이승훈이 천주교 입교를 요청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라몽 신부에게 필담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베드로처럼 조선 천주교의 주춧돌이 되라는 의미였다.
베이징에서 천주교 서적을 구입해온 인물은 이승훈이지만 정약용에게 천주교를 가르쳐준 인물은 맏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 이였다. 이벽은 선교사가 없는 조선땅에서 스스로 천주교 조직을 만든 수수께기 인물이었다. 이벽의 집안은 본래 문관이었으나 증조부 때부터 무관으로 전환해 조부, 부친, 형과 동생이 모두 무과를 역임했다. 이벽은 키가 8척이고 한 손으로 무쇠 백근을 드는 장사였으며, 성호 이익으로부터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 칭송을 들을 정도로 머리가 총명했다. 그러기에 그의 부친 이부만은 이벽의 입신출세를 바랬지만 이벽은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명산대찰을 찾아다니거나 뜻 맞는 선비들과 교류하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이벽은 천주교를 접한 것은 그의 고조부 이경상 때문이다. 이경상은 선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 세자를 모셨는데 이 과정에서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이 집안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벽은 이승훈이 귀국하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천주교 전파에 나섰다. 이익의 종손에다 유명한 천재 이가환을 전교하여 입교시키지는 못했지만 훗날 천주교 신자로 몰려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그리고 천진암 강학회를 이끌었던 권철신과 그의 동생 일신도 입교시켰다. 이벽은 중인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파했다. 역관이나 의관이었던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김범우. 지황 등이었다. 천주교 박해가 시작하자 대부분의 양반들은 배교했지만 이들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입국시키는 등 끗끗하게 신앙을 이어갔다. 그리고 권일신은 중인 이단원을 입교시키는데 그는 충청도 천안 출신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중심지인 내포지역의 천주교회의 기틀을 세웠다. 또한 아산 출신 이존창과 전주 출신 유황검도 입교시키는데 이존창은 훗날 정약용에게 체포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승훈이 귀국한 후 빠른 속도로 천주교가 전파되었는데 그 대상에는 정약용 형제들도 있었다.
정약용이 태학생으로 있던 정조 9년(1785) 봄, 형조의 금리가 명례방(명동)을 지나다가 중인 김범우의 집으로 여려 사람들이 들낙거리는 것을 보고 노름현장으로 알고 들이닥쳤다. 집안에는 이상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양반 한 명이 중앙에서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벽이었다. 그리고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이승훈, 권일신. 권상학 부자, 정약전, 정약종 형제들도 있었다. 금리들이 방 안에 있던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을 압수해 형조에 바쳤다. 조선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이 사건이 확대되는 것이 현명치 않다고 판단하여 중인 김범우만 밀양 단장으로 유배 보내고 천주교 서적 등은 소각령을 내렸다. 김범우는 1년 만에 사망함으로써 천주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은 겉으로는 한 중인의 희생으로 종결되었는데 이는 앞으로 전개될 수많은 비극적 사건에 서막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유학자들이 위기감을 고조시켜 반천주교 운동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그 중심은 성균관 태학생들이었다.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이 민감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한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 하나는 조선 성리학의 교조화 였다. 노론은 일당독재를 계속하면서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체계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두 번째는 천주교를 선봉한 양반 대다수가 남인이라는데 있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남인들을 중용하려 하자 노론은 천주교를 빌미로 실각시키려고 했다. 세 번째는 당시 교황청의 정치적 교리 해석과 그 기계적 강요에 있었다. 특히 제사와 장례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경직된 해석과 강요는 노론뿐만 아니라 대다수 조선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에서 충격적인 소문이 들려왔다. 진사 윤지충과 그의 내외종 사촌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부모의 위패를 불태웠다는 것이었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종 육촌이었다. 신주의 소각으로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해 11월 13일 전주 풍납문 밖 형장에서 참수 당했다.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사형당한 최초의 인물들이었다. 진산군은 5년 동안 현으로 강등되었다.
정조 18년(1794) 12월 말,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이었던 변문을 향했다. 책문이라고 불리는 변문은 압록강 북쪽 봉황성 부근에 세운 것인데 사신 일행이 드나들 때 문이 열려 장사를 했다. 주문모는 변문에서 지황을 만났다. 진산사건으로 많은 양반 사대부들은 천주교를 버렸으나 중인들은 건재했다. 쑤저우 출신의 주문모는 베이징 교구 첫 번째 졸업생이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밑에 자라다가 20세 때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상처한 경력이 있었다. 지황과 윤유일의 안내를 받은 주문모, 당시 나이 42세 였다.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그는 윤유일이 마려해준 거처에서 여려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6개월 동안 사제활동을 하였을 때,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즉시 체포령이 내려졌다. 역관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를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이 신부 행세를 하였지만 신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신부를 안내해 온 윤유일과 지황도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목숨을 잃을 때까지 강완숙의 집을 자백하지 않았다. 충남 내포의 양반가에서 태어난 강완숙은 덕산 홍지영의 후처로 시집을 갔고, 『천주실의』를 보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진산사건 때 잠시 옥에 갇혔지만 부녀자라는 이유로 석방되었고, 석방 후 시어머니와 전 처 소생의 아들 홍필주와 자신의 딸과 함께 서울로 이사 했다. 그녀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두려워한 남편이 별거를 원했다. 그리고 최인길의 요청으로 여성만 사는 집에 신부를 받아들여 6년 동안 교회이자 주교관 역할을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체포되지 않았으나 노론 벽파는 신부가 입국했다는 사실만으로 남인들을 공격하였다.
진산사건 이후로 정약용은 천주교를 버렸다. 다만 노론에서 그를 제거하기 위해 계속 천주교 신자라고 공격할 뿐이었다. 그는 입으로만 천주교를 버린 것이 아니고, 금정찰방 시절 이존창을 체포하였는데 그는 충청도 예산 출신으로 권일신의 권유로 입교하였고, 가성직제도 시절에는 신부로서 교세를 확장시켜 ‘내포의 사도’라는 별칭을 얻었다. 기호지방의 천주교계의 핵심인물을 정약용이 체포 한 것은 천주교와 완전히 절연했다는 증거였다. 정조는 정약용을 조정으로 불려 들였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첫째 이유는 천문, 농경, 측량 등에 관한 서양 과학기술의 일환으로 받아들였고, 두 번째는 사생설에 얽히기는 했지만 서학을 천주교라는 새로운 교리체계를 가진 종교가 아니라 유학의 한 별파로 생각해, 즉 보유론(補儒論 )의 견지에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해남 윤씨 소생의 3형제 중 천주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인물은 정약종이었다. 정약전과 약용이 천주교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신선사상에 심취해 있었고, 도교의 한 갈래인 선도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일찍이 과거 공부도 포기했다. 1786년 아우구스티노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뒤늦게 천주교에 입교했지만 흔들림이 없었고, 진산사건 때 형 약전과 동생 약용은 천주교를 버렸지만 그는 동요됨이 없었고, 교리에 따라 제사를 거부했다. 부친과 형제들이 제사를 종용하자 그는 형제들과 떨어져 살기로 하고 고향 마재를 떠나 한강 건너편 양근의 분원으로 이주했다. 이사는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한 결단이었으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그는 유일하게 남은 양반 출신의 신자로서 교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식인답게 교리연구에 전심하여 한글로 된 『주교요지』 두 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조선의 천주교인 쓴 최초의 교리서였다. 『주교요지』에서 그가 천주교 교리에 해박한 인물이자 독실한 신자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정조 없는 노론 세상에서는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이 사상세계는 죽음을 부르는 초청장이었다.
순조1년(1801)1월10일 정순왕후는 사학을 엄금하라는 하교. 이른바 자교를 내린다. 이 滋敎는 천주교도의 사냥의 신호탄으로 전국에 대대적인 천주교도 검거가 자행되었다. 정약종도 검거선풍이 자신에게 곧 오리라고 예상하고 죽음을 각오했다. 자신이 죽더라도 천주교 관련 서적과 성물과 문서 편지들을 안전하게 보관 하리라 생각하고 책롱에 넣어 옮기기로 했다. 조카사위 황사영 집이 가장 안전하리라 하여 하인 임대인을 시켜 옮기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관가에 끌려가 책롱을 열자 여기에 수많은 천주교 관련 물건들이 나왔다. 이것이 천주교도 검거에 기름을 부은 책롱사건이며 신유박해의 시작이었다. 주문모 신부에 의해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 받았던 정약종은 모든 것을 각오하고 서울로 올라와 옥에 갇혔다.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나갔다. 천주교도라는 죄목에다 부도죄까지 보태져 사형이 확정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그는 형장에서 목덜미를 형틀에 대고 하늘을 보면서 “ 땅을 내려다보며 죽는 것보다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났다” 고 말했다. 집안에서 가장 늦게 천주교를 만났지만 가장 마지막까지 온몸과 마음을 다해 믿었던 정약종은 불의한 세상을 떠나 그가 그렇게 바라던 저 세상으로 갔다.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황사영은 사악한 정권에 제 발로 들어가 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피신하였다. 강완숙의 도움으로 홍필주의 집에 숨는 둥 특별검거령 속에서도 잘 피해 다녔다. 그는 장기 피신할 생각으로 수염을 깍고 상복을 입고 서울을 빠져나와 제천 배론리에 있는 김귀동의 집에 도착했다. 김한빈과 김귀동은 토굴을 파고 은폐를 위해 옹기를 겹겹이 쌓아 멀리서 보면 비탈진 언덕처럼 보이게 하고 그 안에 황사영을 머물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황사영 체포 독촉 명령이 내려지고 국외로 빠져나갈 것을 대비해 국경 지역을 엄하게 방비했다. 조정이 독촉이 하다 엄하다 보니 가짜 황사영이 만들어 지기도 했다. 황사영은 김한빈을 서울로 보내 그간의 사정을 알아오게 했다. 그가 가져온 소식은 정약종, 이승훈외 여섯명이 참수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 등은 장사(杖死) 했으며, 지방에서도 천주교도 사냥이 계속되고 있다는 비보였다. 그래서 황사영은 이 살육의 전말을 베이징 주교에게 알리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베이징 주교가 청나라 조정을 움직이며 이 살육의 현장을 멈출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서’ 라고 유명한 편지를 작성하게 되었다.
황사영은 자신의 거처를 아는 신자들에게 체포되어 극단의 일이 생기면 자신을 밀고하라고 말했다. 황심이 체포된지 10일 만에 포졸들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한 때 신동이라 불리었던 황사영은 열여섯 어린나이에 사마시에 급제해 진사가 되어 정조를 만났는데 정조가 “네가 20세가 되면 나를 찾아 오너라” 하고 앞날이 보장된 그였다. 그해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하면서 그의 인생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정약현은 천주교도는 아니지만 그의 첫째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황사영의 셋째 동서는 정약종과 함께 사형당한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이었다. 황사영을 결혼해 천주교에 입교하고 알렉시오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황제로 하여금 서양선교사를 받으려고 권하는 칙서를 보내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그리고 주문모가 청나라 사람이었다는 것을 사실을 청나라에 보고 하는 일 등이었다. 그만큼 황사영은 당시의 조선 시대상황을 알고 있었다. 국청에 끌려와 혹독한 심문을 받은 황사영은 11월5일 대역부도의 죄로 서소문 밖에서 온 몸이 찢기는 능지처사를 당했다. 그리고 그의 가족 모두가 큰 불행을 당했다. 모친 이윤해와 부인 정명련은 노비가 되어 각각 거제도와 제주도로, 두 살이었던 황경한은 명련의 기지로 추자도로,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그리고 종 육손은 갑산, 돌이는 삼수, 여종들도 단성으로 흥양으로 거창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의 집은 헐어 버리고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고 했다. 시대는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수몰되었다.
정약용은 귀향 18년 만에 同腹 同氣로는 그 혼자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날이 순조18년(1818) 9월 보름이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헤아려 보니 경신년(1800) 벼슬길에서 물려나던 때로부터 또 19년이 되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자찬묘지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가 특이하게도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저술하는 이유는 지난 인생을 회개하려는 의도만 아니고, 자신의 생애가 왜곡되어 전해 질것을 염려했고, 그리고 천주교 관계까지도 숨기지 않고 서술하였다. ‘자산묘지명’을 쓰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몰랐다. 정약용은 回婚日인 2월22일(1836년, 헌종2년 75세) 마재 정침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현재 우리 사회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다산이 꿈꾸었던 사회로 가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