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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속의 전쟁사 원문보기 글쓴이: 나마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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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 Gi Kim
2월 24일 오후 11:11 ·
다큐영화 건국전쟁 후기: 영화가 보이는 오류에 대하여
드디어 이 다큐영화 한편을 봤다. 바로 ‘건국전쟁’이라는 영화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알려진 우남 이승만을 재평가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사실 사회적 현상으로써 나타난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현상은 1990년대 이후다. 특히나 2000년대 들어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는 이명박과 박근혜 시절에도 강력하게 나타났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승만 재평가의 움직임은 이승만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의 재평가와 항상 맥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승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기본적으로 미국의 영향하에 탄생한 정치인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미국이라는 존재에 의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해방 이후 이승만에겐 대중적 지지기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과거 미국에 의해 창조된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있다. 과거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응오딘지엠을 ‘베트남의 이승만’이라 비유한 데에는 아마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이승만을 재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놀랍게도 이 영화에 나온 사람들 중 역사학을 전공한 이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이를 매춘으로 규정하여 거센 규탄을 받은 류석춘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안티 페미니즘·친기독교·반공 성향을 가진 트루스포럼 인사가 등장한 것도 다큐 영화의 성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 할 수 있다. 몇몇 외국 학자나 하와이 교민들도 등장하긴 하나, 하나같이 이승만을 좋아하는 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얘기는 하나로 연결이 된다. 그것은 바로 “이승만은 위대한 건국 대통령이며, 지금까지의 부정적 평가와 비판은 좌파들의 왜곡이고, 따라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말이다. 과거 국정 교과서를 찬성하고, 정말 못 만든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을 찬양하는 이들 다운 주장이다. 등장하는 이들이 기독교 계열 사람이 많고, 이승만 부터가 기독교 신자니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도 기독교 찬송가 같은 것들이 많이 흘러나온다. 그런 점에서 친 기독교적인 색체도 띄고 있다. 그러다보니 나는 영화적 감동 같은거 하나도 못 느꼈다. 그냥 전형적인 반공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 정치깡패 임화수가 만든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게 내가 받은 느낌이다. 물론 영화관에 있는 나이든 중년 어르신들이야 감동받고 훌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영화에 대해 약간의 변론을 하자면, 이 영화에서 말하는 것들이 100% 다 거짓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영화에서 묘사된 이승만이 4.19 이후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 위로했다든지, 주변 지인들에게 잘해주고 나름 지나친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는 점 등은 약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승만 시절 문맹률이 점차 낮아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긴 하다. 영화에서는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의 재산이나 살던 집을 이승만이 하와이 망명 시절 살던 집과 비교했다. 그렇게 비교하면 이승만의 재산착복이 다른 친미 독재자 보다 나았다고 볼 여지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승만 자체가 엄청 소박했다고 볼 수 있는 완벽한 반론이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당장 구글에 ‘이승만 재산’이라고 검색을 하면, “이승만·이기붕 일가 재산 지금 돈으로 93억원”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참고로 이 기사는 2001년 기사다. 20년도 더 지났으니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0억이 넘어갈 것이다. 물론 1975년 금괴 16톤을 들고 튄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옌반티우에 비하면 깨끗하게 산거라 말 할 수 있긴 하겠다.
이승만이 지인에게 잘해준 것이나, 독립운동 시절 자신의 파벌 세력 안에 있는 이들에게 잘 해준 것은 사실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으로 유럽 전선 참전했고,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김영옥의 경우 집안이 1920년대 이승만 계열 독립운동 지원자였다. 김영옥이 한국전쟁에 참전할 당시, 그의 어머니가 “한국에 가면 대통령이신 이승만 박사를 만나 보라.”고 말한 걸 보면, 이승만이 자신의 파벌을 잘해줬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이승만이 나름 자신만의 민족주의적 신념이 있었다거나, 기독교 국가를 만들려 했던 것은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그 목적과 방법이 아주 잘못됐으며,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을 변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영화 리뷰에서 내가 정말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영화가 이승만을 옹호하려는 과정에서 보인 역사적 사실관계의 오류와 맥락생략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이 영화의 오류나 문제점 등에 대해 비판하려면 정말 한도 끝도 없이 비판할 수 있겠지만, 지면상의 한계가 있기에 정말 공감하지 못한 부분만 얘기하도록 하겠다. 일단 역사적 사실관계 오류 3가지와 맥락생략의 문제 1가지를 지적하겠다. 전자는 “이승만이 민중친화적인 인물”, “북한의 친일파 청산”, “제주 4.3과 여순에서의 좌익 테러 언급”이고, 후자는 “국민 보도연맹 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 언급 생략”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승만은 절대 민중친화적인 인물이 아니다. 애초에 이승만이 추구한 국가의 목표가 기독교 국가고, 미국식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소수의 자본가가 부를 독점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즉, 이승만은 극단적 반공주의자였기에 빈부 격차의 문제와 외세의 문제를 너무나도 쉽게 옹호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 민중은 이와 같은 가치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우익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당시 민중의 최소 70% 이상은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설사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소련식 사회가 아닌 말 그대로 이상적인 국가였다 치더라도, 적어도 이승만이 추구한 사회하고는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승만이 정말 민중친화적인 지도자라면, 왜 이승만이 추구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제주도와 여순에서 일어난 것일까?
이것은 결국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과 연결이 된다. 제주 4.3과 여순이 일어난 배경에는 미군정의 반민중성에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친일경찰 및 친일파 등용과 민중이 원하는 것에 반하는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취해왔다. 대표적으로 제주도는 미군정의 친일경찰 배치 및 좌익들에 대한 탄압을 목표로한 민중들에 대한 고도의 탄압이 겹치면서 발생했다. 우익들 말대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이 먼저 봉기를 일으킨 것은 맞으나,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순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의 투쟁 속에는 미군정이 전혀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요구가 들어가 있었고, 실제로 항쟁에 가담한 민중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제주 4.3과 여순에서 남로당이 우익계열 인사를 학살했다고 말한다. 물론 있었던 일이다. 영화는 제주 4.3 당시 남로당과 좌파 그리고 봉기 가담자에 의해 죽은 사람이 1,000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제주도를 적색지대로 설정해 놓고,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에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하는 작전”을 벌인 주체는 결과적으로 이승만이 보낸 우익 진압군과 이를 군사적으로 지휘했던 미군이다. 마찬가지로 여순에서의 학살도 그러했다. 따라서 제주 4.3이나 여순에서 학살당한 사람들 대부분은 이승만이 보낸 우익 진압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제주도의 경우 대략 3만 명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고, 학살의 최소 80% 이상은 우익이 저지른 것으로 판단한다. 많게는 90%까지도 추정하며, 이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순에서도 1만 명이 학살당했다. 여순항쟁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한 김득중의 논문에 따르면, “여순항쟁으로 인한 피해자 규모는 여수, 순천, 보성, 고흥, 광양, 구례, 곡성을 합쳐서 총 1만 명인데, 이 중 지방좌익과 빨치산에 의한 학살은 500명인데 반해, 국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은 무려 9,500명”이다.(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353쪽.) 말 그대로 학살의 대다수는 우익이 한 것이다. 무려 학살 비율이 95%와 5%다. 2005년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서 1,450건의 접수됐고 832건을 조사했다. 2년 간의 조사 결과 832건 중 진압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626건(2,043명, 75.2%), 반란군과 좌익 등에 의한 희생이 74건(189명, 8.9%)이었다. 이러한 수치를 보자면, 제주 4.3과 여순에서 좌익의 테러가 가장 큰 문제였다는 식의 서술이 과연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러한 학살의 중심에 선 인물이 이승만이었고, 이승만은 제주와 여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진압을 강화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제주 학살과 여순학살은 변론 불가능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언급된 역사적 사실관계 오류 중 가장 황당했던 것은 남북한의 친일파 청산 왜곡이다. 영화는 “북한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안됐다.”는 황당무계한 변론을 내세운다. 나는 우익들이 북한 친일파 청산에 대해 심각한 왜곡을 저지를 때마다 한심함을 느낀다. 이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반론은 다음에 보다 더 상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한이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심각한 역사왜곡이며 오류다. 무엇보다 북한은 친일경찰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시 소련의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김일성 정권이 반일 정권이 되기를 원했고, 친일파 청산을 지원했다.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과 소련 공산당의 지침은 북한이 친일파 청산을 돕는 것이었다. 거기다 1946년 김일성이 토지개혁을 했을 당시, 토지개혁의 핵심은 “과거 친일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들에게 5정보 이하 단위로 분배하는 것”이었다. 작년(2023년)에 번역된 김수지의 책에 나오는 내용을 아래에 인용하겠다.
“혁명정부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이하〈토지개혁법〉)이 1946년 3월 5일 공표되었다. 이 법령에서는 일본 정부 일본 국민과 기관 그리고 “일본인에 협력한 조선인 반역자들”이 소유한 토지를 몰수하도록 했다. 5정보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 역시 무상으로 몰수됐다. 지주들이 계속해서 소작을 주고 있던 토지는 면적과 상관없이 몰수됐다. 해방 이후 월남한 사람들이 소유한 토지 부재지주가 소유한 토지 교회 사원 및 기타 종교 단체의 소유지 역시 무상으로 몰수됐다. 몰수된 토지는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에게”라는 원칙에 따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다.(중략....) 토지 재산과 정부 관직의 결합을 배경으로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던 양반 지주들의 지위는 식민 통치 시기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지주는 일본인에게 협력하며 권력과 부를 유지했고 식민지 정부는 지주를 활용해 농촌을 다스렸다. 조선왕조 500년은 물론 식민 통치 기간에도 지주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토대가 마침내 토지개혁으로 무너지게 된 것이다.”(김수지, 윤철기·안중철 옮김,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1950, 후마니타스, 2023, 133~136쪽.)
방금 인용한 내용은 영미권 학계의 최신 북한사 연구다. 이 책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노획한 노획문서를 중심으로 작성됐다. 이 문장만 보더라도 북한이 남한 보다 친일파를 덜 청산했다거나, 친일파 청산을 국가적으로 마치 안했다는 식의 주장은 말 그대로 역사왜곡이며 현실도피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이런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했다.
영화가 이승만을 조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엉성함이 발견되기도 한다. 소위 이들이 보기에 좌파로 보이는 세력들이 이승만을 비판할 때 얘기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국민 보도연맹 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보도연맹 학살은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 하에서 일어난 무차별 학살이다. 보도연맹원 할당량을 늘리기 위해 이들은 보도연맹원 모집 대상을 일반 민간인으로 늘렸다. 일반 민간인 대다수가 보리나 쌀을 준다는 이유로 서명을 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그 결과 20~30만 명의 민간인이 2~3개월 동안 무차별 학살당했다.
후자인 국민방위군 사건은 자국 군인을 방산비리로 대량으로 아사시킨 사건이다. 1950년 12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세에서 40세 정도의 남성을 방위군에 편입시켜 50만 명을 모집했다.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는 서북청년단 출신이자 대한청년단 간부 출신인 김윤근이라는 사람을 준장 계급에 임명했는데, 김윤근은 방위군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뒤에서 챙겼다. 그는 기생집에 가서 원하는 만큼 돈을 쏟아 부었다. 예산횡령이 횡행한 것이다. 최소 100일 동안 자국 군인이 대량으로 아사 및 동사 그리고 병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결과 대략 10만 명의 자국군인이 방산비리로 아사했다.
이승만에게 책임이 있는 이 사건에 대한 반론이 영화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승만을 칭송하는 영화에서 그런 최악의 과오가 등장 안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영화에 대해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과거 ‘대한뉴스’나 ‘똘이장군’을 보던 감성 혹은 8년 전 ‘인천상륙작전’의 감성을 가지고 본다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 본다면,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엉성함과 오류가 눈에 띄게 보일 것이다. 영화를 감상한 나는 결과적으로 후자였다. 솔직히 반박할 얘기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지면상의 한계로 영화 관련 리뷰는 여기서 마무리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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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석
이승만때 문맹률이 낮았다는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문맹율이 높았다는 뜻이고,이는 일제시대 일본이 한국인들 교육을 제도적으로 제약을 걸었다는 뜻이고,이는 식민지시절에 고안된 제도는 어디까지 일본인만을 위한,일본인들 편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것 의미하죠.
현 우파들은 일본 제국주의는 훌륭하다면서,이승만은 훌륭한 지도자라다라고 하는데,사실 이승만이 외국 외딴 섬에서 건국한게 아니라,빼앗긴 조국을 회복하고 난 연휴에 건국한거라,만일 이승만이 훌륭하면,일제 시대는 훌륭할수 없고,반대로 일제시대가 훌륭하면 이승만은 훌륭할수 없죠.왜냐면 지들이 그토록 원하는 황국신민이 될 기회를 아작(?)낸게 이승만이니.
즉 양쪽은 서료 양립할수 없는데도,똑같이 양립을 시키는 우파들은 정신병자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