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길_경남 함양 최치원 산책로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천령(지금의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조성한 천연기념물 제154호 함양 상림과 인근 필봉산(309m)을 잇는 '최치원 산책로'가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숲과 사색의 길로 거듭났다.
상림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이다. 고운이 약 1100년 전 천령 태수로 있으면서 홍수 방지를 위해 상림에서 하림까지 둑을 쌓아 물길을 돌리고, 그 둑을 보강하기 위해 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이다. 지금 하림은 없어지고 상림만 남아 최치원의 선정을 전하고 있다.
- ▲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최초로 조림한 함양 상림은 100~500년 이상 된 낙엽관목과 110여종의 다양한 수종으로 이뤄져, 한번 들어서면 하늘을 보기 힘들 정도로 우거졌다.
'최치원 산책로'는 올 5월 함양군에서 조성했다. 196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림을 거닐며 1000여 년 전의 신라 최고의 문장가이자, 우리나라 한문학의 시조인 최치원의 삶을 되새겨보자는 의미에서다.
상림과 인근 필봉산까지 원점회귀하는 코스는 총 5.6㎞다. 길 안내는 함양문화해설사 이지현씨가 나섰다. 상림숲의 진한 감동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필봉산을 먼저 돌고 상림으로 가기로 했다. 필봉산 자락으로 들어섰다. 참나무가 군락을 이룬, 말 그대로 호젓한 산책로다.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이 가끔 눈에 띈다. 상쾌한 공기가 코를 상큼하게 자극했다.
어디선가 "뚝딱뚝딱 뚜따닥~~"하고 나무 찍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눈도 동시에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았다. 이 야트막한 산속 숲길에 오색딱따구리가 연방 머리를 앞뒤로 젖히며 나무를 쪼고 있는 게 아닌가.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지. 오염에 찌든 도심에서 듣기 힘든 천연의 소리다.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렸다. 도망가지 않게 살금살금 방향을 틀어 렌즈를 들이댔다. 딱따구리의 부리에 나무껍질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한참 감상하다 발길을 돌렸다.
참나무에서 어느덧 소나무숲으로 바뀌었다. 참나무와 소나무는 한국의 대표 수종이다. 어느 산, 어느 곳을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강산을 지키는 나무들이다. 길옆 모퉁이에 제법 단장한 묘지가 한 기 나왔다. 세종대왕의 열두 번째 아들 한남군의 묘다. 그의 묘가 왜 여기 안장돼 있을까?
한남군은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소생으로 문종의 이복동생이고 단종의 삼촌이다. 한남군은 둘째형인 수양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 복위를 꾀하다 적발돼 함양 휴천면 새우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4년 만에 생을 마쳤다. 그 뒤 버려져 있던 시신을 수습해서 이곳에 매장했다. 역사는 때로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니, 길을 걸으며 역사를 되새겨보는 재미는 덤으로 주어진다.
- ▲ 좌)최치원 산책로에 있는 물레방아. / 우)최치원 신도비.
이젠 본격 상림숲이다. 숲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여름이면 피서지로 안성맞춤이다. 우거진 숲은 또한 가을이면 낙엽을 만든다. 길바닥은 낙엽으로 뒤덮여 있다. 전형적인 가을의 모습이다. 울긋불긋 물든 단풍은 여심(女心)을 적시고 가을의 정취를 더욱 자아내고 있다. 느티나무, 이팝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때죽나무, 후박나무, 서어나무, 층층나무 등 온갖 수종들이 형형색색의 색깔을 뽐낸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니, 과연 천연기념물 상림이다.
상림숲속을 가로지르는 냇가 바로 옆 정자가 탐방객들에게 쉬어가라고 손짓한다. 사운정(思雲亭)이다. '천 년의 숲'을 조성한 고운 최치원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43년(1906)에 후손들이 '고운 최치원을 추모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건립했다. 사운정의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천 년 전에 학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있었다는데/우거진 숲에 가려 보이지를 않는구나/고을원들의 칭송이 백 리까지 자자하고/이 정자에서 보이는 경치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도다/꾀꼬리가 우는 소리 들으며 시를 짓는데/힘차게 헤엄치는 붕어를 보니 젊음이 그립구나/고을 사람들이 이런 물고기를 잡아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로다/이 모든 풍광이 선정의 덕으로 오랫동안 전해지리라.'고운 최치원은 '최치원 산책로' 길 위에는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
여행수첩
탐방가이드: 상림주차장에서 상림숲으로 갈 수도 있고, 필봉산자락으로든 어느 쪽으로 먼저 가도 상관없다. 주차장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봉산 자락으로 갈 경우 거쳐 가려면 함양중학교 앞 늘봄가든 왼쪽 '최치원 산책로' 이정표 앞으로 접어들어 상수도관리사업소→필봉산(233m) 비석→한남군 묘→대병저수지 방향→필봉산 정상과 운동시설→대병저수지 오른쪽 방향→뇌계정→물레방아→최치원 신도비와 사운정→함양 이은리 석불→함화루→함양 척화비→화장실→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면 된다. 총 5.6㎞ 거리에 소요시간 2시간 30분~3시간 정도.
교통(서울 기준): 승용차로는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에서 함양IC로 빠져나와 함양읍내에서 상림으로 찾으면 된다. 고속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양까지 하루 11회 왕복운행 한다. 편도요금 1만7200원. 예상 소요시간 3시간. 함양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림주차장까지 택시로 10분 내외이고,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 함양지리산고속 예약문의 (055)963-3745~6. 개인택시 문의 011-553-4817(055-963-3354) 또는 011-835-3955.
맛집: 상림주차장 인근에 음식점들이 몇 군데 있다. 그중 함양에서 가장 친절하고 맛있는 집으로 선정된 늘봄가든(055-963-7722 또는 011-872-0930)의 오곡밥이 먹을 만하다. 가격도 1인당 8000원으로 저렴한 편. 사장이 직접 나와 손님을 맞고 안내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