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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의 동서남북 (Ⅱ)
― 서정, 관념, 사물, 기호, 주지의 바닥
심상(沈相運: 시인, 문학평론가): 저는 이 대화에서 질문하면서 얘기를 유도하는 입장이 되겠습니다. 선생님의 몇 번째 시집입니까? 심산(心汕: 文德守의 아호):『 문덕수시전집』(시문학사, 2006) 이후의 작품집이지요. 심상: 병원에서의 큰 수술 이후 건강도 안 좋은데, 일 하시는 모습이 저희들 귀감입니다. 최근 한국시의 전방위적 모습이라고 할까, 시의 방방곡곡을 조감하려고 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 동기에서 쓴 논문이 「한국시의 동서남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논문은 한국시단에 대한 일부 왜곡이나 편견을 수정하고, 어떤 당위성(當爲性)의 방향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기서 좀더 합리적․당위적 근거라고 할까, 바닥을 다진 논리를 명확히 알고 싶습니다.
기호, 대상, 주체
심산: 나는 『오늘의 시작법』(개정판, 2004) 서문에서 “시는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선다”고 했습니다만,
이 말은 언어예술임을 긍정하면서 부정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는 ‘언어(기호) 체계’이나 텍스트 바깥의 현실이나 그 사물과 관련된 지향대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기호를 넘어섭니다.
시는 쓰는 사람인 ‘주체’,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표현하는 ‘대상’(사물), 표현매체인 ‘기호’의 세 요소가 있습니다. 최소한도로 추린 이 세 요소를 연결하면 편의상 ‘시의 삼각도’ 같은 것이 형성됩니다. ‘기호’, ‘대상’, ‘주체’라는 각 변이 분명하게 표시된다면 물론 ‘원형’이라도 무방합니다. 각 변을 ⇠┈┈┈⇢으로 표시한 것은, 각 변이 고정된 의미가 아니고 각 변(기호, 주체, 대상)의 상호영향을 교환하면서 어떤 의미를 실현한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심상: 이해가 됩니다만, 몇 가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의 ‘독자’는 없어도 괜찮은가,
또 ‘대상’(사물)이라고 한 것은 ‘이미지’나 ‘표상’(表象)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물 자체’(物自体)를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 대상의 문화적․사회적 맥락은 어떻게 되는지?
심산: 독자, 출판, 기타 사회적․문화적 맥락 등, 이른바 ‘시적 상황’까지 고려하면 삼각도는 훨씬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시도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이라고 보면 발신자, 수신자, 메시지, 미디어 등을 넣은 커뮤니케이션의 도형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대상’(사물)은 물 자체와 그것의 표상 즉 이미지를 다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대상의 기호이면서 그 기호를 넘어서서, 텍스트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까지의 관계를 암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보면, “시는 주체에 의해 창조된, 기호를 넘어서는 기호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심상: “시는 주체에 의해 씌어진,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예술”과 같은 정의가 아닙니까. 줄여서 “기호를 넘어서는 기호체계”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기호’(sign)라는 말에서 소쉬르를, ‘사물’(또는 물)이라는 말에서는 존 로크와 같은 사람을 연상하게 되어, 문제가 현학적 미로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심산: 그런 느낌도 듭니다. 어쨌든 한국시가 도달한 전방위적인 오늘의 국면을 망라한 시론이라고 할까, 이론이라고 할까 그 전개를 위한 스타트라인 쯤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심상: 선생님께서는 오늘의 ‘한국시의 동서남북’으로 1)전통적 서정시, 2)관념시, 3)물리시, 4)실험시, 5)주지시 등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 이러한 지형도와 앞서 말한 시의 ‘삼각도’와는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심산: 한국시의 동서남북은 여러 가지 기준(사상, 종교, 현실인식의 차이 등) 중에서 시의 ‘방법’을 잣대로 하여 오늘의 한국시를 전반적으로 반성해서 작성해 본 지형도이나, 이 지형도 바탕에는 “기호, 대상, 주체”라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심상: 내재되어 있다는 말씀은 시의 다섯 계열을 ‘기호, 대상, 주체’의 각 부분으로 배치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서정과 관념
심산: 기계적․공식적 분배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 오해해선 안됩니다. 어쨌든 ‘1)전통적 서정시, 2)관념시’는 어느 쪽이냐 하면 ‘주체’의 주관 쪽에 더 많이 그 무게가 실립니다. ‘서정’(抒情)은 보통 ‘감정을 펴서 나타냄’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감정’과 ‘정서’를 합친 뜻의 ‘정서’라는 의미로 보겠습니다. ‘정서’도 물론 시의 대상입니다만(“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김소월), 그러나 사물(事物)과는 전혀 다르고, 굳이 말한다면 일종의 ‘분위기’(atmosphere)인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이는 ‘분위기’와 ‘분위기적인 것’으로 구별해서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슈미츠(Hermann Schmitz)나 뵈메(Gernot BӦhme)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들은 ‘분위기’와 분위기적인 것 즉 ‘준물체’(準物体)로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밝고 시원한 분위기’라든지, ‘침울하고 찌무룩한 분위기’라든지, ‘긴장된 분위기’와 같은 말들을 많이 씁니다. ‘찌무룩함’, ‘우울함’, ‘답답함’과 같은 감정은 모두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움, 사랑, 고독, 불안, 슬픔, 기쁨과 같은 감정도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동적(情動的)인 것이어서 그 실재가 없고, 단지 어떤 사물인 대상과 그것을 지각하는 주체 사이의 중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뵈메는 “분위기의 특징은 확실히 준객관적(準客觀的)인 위치에 있으며, 동시에 또 주관적인 현실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슈미츠는 ‘바람(風), 시선(視線), 소리, 어둠, 밤, 추위, 차가움’ 등을 준물체(準物体)라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준물체란 반쯤은 물과 같은 중간적 물체이다. 준물체란 물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결락되어 있다. 즉 실체성이 없고, 시간에 대한 내구성(耐久性)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슈미츠가 말하는 이러한 준물체를 뵈메는 ‘분위기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분위기적인 것’은 감각으로서 그 실체를 지각할 수 있는 사물로 보고자 합니다. 시에서는 그렇게 보아도 괜찮고 또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심상: “바람, 시선, 소리, 어둠, 밤, 추위, 차가움” 등의 준물체는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므로 ‘물’에 넣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앞에서 열거한 ‘분위기’의 카테고리에 속한 것들을 모두 정동적․정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사물이 아닌 이 분위기, 다분히 주체의 주관적 현실로 볼 수 있는 이 ‘분위기’야말로 서정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 민족의 전통과 관련된 분위기야말로 ‘전통적 서정시’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분위기는 또는 분위기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타자를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가 잠재하고 있음도 무시할 수 없겠습니다. 그것을 ‘심리적 에너지’라고 해도….
심산: 그렇습니다.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전통적 서정시는, 미학에서 말하는 ‘분위기’를 바탕으로 한 시의 유형입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이 분위기 즉 여러 가지 정서는 사물과 주체 사이의 중간적인 존재이지만, 사물 쪽에서 본 중간물이라기보다는 주체 쪽에서 본 중간물입니다. 즉 주체의 주관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심상: 서정시의 바탕이나 근거에 대한 중요한 이슈를 지적해 주신 것 같습니다. 늘 궁금했던 문제입니다. 그런데 ‘중간적인 것’이란 뭔가 실체성이 없는 것도 같고, ‘대상, 기호, 주체’에 비하여 존재성이나 존재능력도 약한 것 같습니다.
심산: 바로 그 점입니다. 그 점이 서정시의 기반을 흔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존재 기반은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내가 부정적인 어조로 말한 것도 존재기반이 약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서정과 관념은 어디까지나 ‘주체의 정서’요, ‘주체의 관념’ 아닙니까. 주체의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서정시, 관념시 등이 장르로서의 그 정당성을 갖는 것 같습니다. 사랑, 연민, 동정 등은 휴머니즘의 근거가 되고, 소외자의 인권이나 평등을 기본으로 한 이데올로기 형성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서정시도 여러 갈래입니다. 소월 미당의 계열이나 샤머니즘(박재릉), 인륜의 보편성(허영자), 리비도의 추구, 센티멘털리즘의 뿌리 찾기(박용래, 박재삼), 자연과 심령(心靈)의 교류, 전통적 설화 찾기, 내관력(內觀力)의 중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심상: 관념의 바탕이 궁금해지네요.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관념’(觀念)은 ‘이데아’(idea)의 역어입니다. 원래 불교 용어로서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의 준말이 ‘관념’(觀念) 아닙니까. ‘이데아’에는 ‘본다’는 감각적 의미가 어원에 있으나, 플라톤은 ‘사물의 본질적 존재’(사물의 모범적인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인간에게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본 것입니다. 뒤에 기독교에 도입되어 신(神)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만, 데카르트는 이러한 전통적인 용법과는 달리 “인간의 마음 속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산: 말씀한 대로, 관념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이 아닌, 감각과는 관계가 먼 개념(槪念)이라는 근대적 의미로 굳어져 내려온 것으로 압니다. 심지어 인간의 정신은, 외부에 있는 ‘물’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관념’만을 지각할 수 있다는 편견(?)까지 형성된 것입니다.
사물은 지각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대리하여 나타내는 ‘관념’만이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견해를 ‘지각표상설’(知覺表象說)이라고 합니다.
심상: 데카르트의 근대적 의미는 존 로크(1632-1704)에게로도 계승되었습니까?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심산: 관념론이나 사물론에서 로크를 빼고서는 얘기가 안되지요. 로크는 관념에 대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 나타나는 기호(sign)나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라고 말합니다. 기호나 표상이 사물을 대신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마음이나 의식을 제외하면 사물은 나타나지 않으므로 지각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의 외부에는, 이러한 관념을 마음 속에 생기게 하는 ‘물’이나 ‘물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각하는 마음의 바깥에, 즉 관념 외에, 물이나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그 뒤의 학자들의 견해도 분분해졌습니다만, 전문적인 학설보다는 상식에 가까운 시론의 입장에서 논의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심상: 아포리아의 미로로 들어가기보다는 시론적 입장, 시론적 입장보다는 상식적 입장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 ‘관념’이 사물과 동일한 대상이 아니라는 점, 둘째 관념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이른바 정서와 비슷한 ‘중간물’이라는 점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상과 주체 사이의 중간물이라고 말했지만, 선생님의 지론에서는 추측컨대 오히려 그 무게는 ‘주체’ 쪽에 실리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심산: 그렇습니다. ‘관념’은 대상(사물)도 아니고 주체도 아닌 중간물이면서 주체에 비중이 실린 대상인 것 같습니다. 사물에 대한 직접적 감각이나 디지털적 기호(또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오늘의 시의 방향에서 볼 때, 관념은 분명히 정서와 동류(同類)의 것으로 간주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탈관념’(脫觀念)을 외치고 있으나, 사물의 실재(實在)나 실체(實体)와는 동떨어진, 관념만의 관념, 기존 관념에의 안주(安住), 관념 유희 등에 대해서는 안티한 입장을 취합니다. 어디까지나 사물의 지각을 토대로 한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관념형성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요. 즉 오리지널한, 유니크한 관념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요. 편의상 관념의 목록을 한번 작성해 봅시다.
1)자유민주주의, 민중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민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사상,
2)전통, 윤리, 풍속, 인권, 평등, 자유, 도덕 등의 사회생활과 관련된 사상,
3)사랑, 이별, 그리움, 고민, 고독, 불안, 기쁨, 슬픔 등 정서와 관련된 사상,
4)정당, 단체, 국가, 가정 등 사회제도에 관련된 사상……. 이 중의
3)은 이미 말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의 모든 종류의 관념을 다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관념도 현실적 사실이나 사물의 실재나 실체의 자각을 바탕으로 인식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감도 안 나고 허위일 때도 많습니다. 선동적인 포퓰리즘이나 민중주의, 걸핏하면 내세우는 분단, 통일, 평화 등의 구호도 어떤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때, 허구성이 주는 심리
조작의 폐해가 큽니다.
심상: 관념시가 우리에게 준 부정은 생경하고 조잡한 카프계부터가 아닙니까.
심산: 그렇습니다. 그 피해가 큽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시성(詩性)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습니다만, 격한 메시지는 여전히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유치환, 김수영의 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념시의 온건 모델(함동선)도 있지요. ‘분단’이나 ‘통일’이나 우리 끼리를 노래하면 무조건 ‘좋은시’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되지요. 이 밖에 기독교, 삶의 체험적 관념, 불교, 에콜로지, 존재론적 자의식 등의 여러 갈래가 보입니다.
물 또는 사물
심상: 선생님께서는 ‘물’이라고 했다간 또 ‘사물’이라고도 합니다. ‘물’(物)은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유형체이며, ‘사물’(事物)이란 ‘일과 물건’이라고 사전에 정의하고 있습니다만, 혼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심산: ‘물’은 라틴어 ‘rēs’의 역어입니다만, 한자의 ‘物’은 본디 잡색(雜色)의 소를 말합니다만,
여기서 여러 가지 색과 형(形)의 만물을 의미하게 됩니다. 영어(thing), 프랑스어(chose),
라틴어는 ‘물과 일’의 두 가지를 다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rēs’를 ‘물’이라고 하거나 ‘사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물리시’라는 말의 ‘물리’(物理)를 제외하고는,
앞으로는 ‘사물’이라는 말을 주로 쓰겠습니다. 사물이란 ‘의식의 대상이 되는 실재적 사물’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한국시에서 ‘사물’이 도입되고, 사물을 중시한 때는 1930년대 이후인 것 같습니다.
이미지즘이나 모더니즘에서 사물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가령 로월(Amy Lowell)이 주재한 『이미지스트 시인선집』(Some Imagist Poets: An Anthology, 1915)에서 말한 이미지즘 강령 6항 중에는, ‘명확한 이미지’, ‘정확한 사물의 언어’이라는 말들이 보이며, 이러한 이미지즘의 강령이 김기림을 통해 한국에 도입된 때가 30년대입니다. 백석(白石)이 아무리 많이 읽혀도 김기림의 역사적 업적을 누를 수 없습니다.
이 무렵의 이미지즘의 대표 시인이 정지용입니다. 그러나 이론의 도입과 수용은 매우 불완전하고 수동적이었습니다.
어떤 것이 정확한 사물의 언어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을 가지지 않은 듯합니다. 이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날벌레 떼처럼 매달리고
미끄러지고 엉키고 또그르 궁글고 홈이 지고 한다”(정지용의 「비」의 한 대목)와 같은 시가 바로 ‘사물’이라는 정도의
이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상: 정지용의 시사적(詩史的) 의의는 매우 큽니다. 물리시는 거의 정지용 계열이지요.
그건 그렇고 사물에 대해 좀 더 바닥으로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사물의 성질
심산: T.E. 흄이 말한 “건조한 견고성”(dry hardness), 앞에서 인용한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사물’의 성질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오늘의 우리 시의 한 방향이 ‘물리시’(또는 물질시)인데, 그 물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히 ‘꽃’이나 ‘구름’이나 ‘바위’ 같은 사물을 제시하여 ‘사물 운운…’하는 것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상: 앞에서 존 로크를 거론했는데, 사물론에서는 그를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반왕(反王) 폭동에 연좌되어 네덜란드로 망명한 로크는 그곳에서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지성론』(1689)에서 말하고 있는, 사물과 관련된 관념은 우리에게 굉장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산: 아는 대로 조금 언급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정신’이나 ‘의식’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은, 현전(現前)한 사물의 기호나 표상을 지각할 수 있으며, 이것을 두고 ‘관념’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관념은 사물에 대한 경험이 그 근원입니다. 경험에는 ‘감각’(sensation)과 ‘반성’(reflection)의 두 가지가 있는데, 반성은 경험한 것을 되짚어 생각해 보는 활동이며, 경험 중에서도 색, 성, 향, 미 같은 인식은 감각적 경험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감각적 관념이지요. 다른 관념과 마찬가지로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바깥에는 ‘물’(thing) 내지 ‘물체’(body)가 존재한다고 로크는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은, 앞에서 말한 관념을 마음 속에서 생성케 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 안에서 지각하거나 사고하게 하는 직접적 대상은 관념이며, 이 관념을 마음 속에서 생성케 하는 능력이 있음을 말하면서, 그 능력을 로크는 사물의 ‘성질’(quality)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직관이 아닌 분석적 고찰이지요. 우리 시의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좀 설명해 봅시다. 그 성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물체의 고성(固性)을 가진 여러 가지 부분인 양, 형, 수, 위치, 그리고 운동 또는 정지(靜止)
2)물체 안에 있는, 그것을 감각할 수 없는 1차성질에 의하여 어떤 특유한 방식으로 우리의 어떤 한 감관(感官)에 작용하며, 그것에 의해 다양한 색, 성, 향, 미 등의 여러 가지 관념을 우리 마음 속에 생성케 하는 능력(可感的 성질)
3)물체 내에 있으며, 그 1차성질의 특정된 구성에 의해 타 물체의 양, 형, 조직, 운동을 변화시켜,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감관에 작용하는 능력. 예를 들면 ‘불’은 쇠나 납을 녹이는 힘을 가짐
1)은 ‘1차성질’, 2)는 ‘2차성질’, 3)은 ‘능력’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물체의 본질을 연장(延長 extension)이라고 했으나, 로크는 고성(固性 solidity)이라고 말합니다. ‘고성’이란 다른 사물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그 물의 고유한 단단한 성질입니다만, 금세기 초 영국의 이미지즘 시인 T.E. 흄이 주장한 ‘건조한 견고성’(dry hardness)은 바로 로크의 고성(固性)에 관련해서 말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낭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그의 고전주의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바로 사물의 고성(固性)을 기초로 해서 ‘건조한 견고성’이라는 이론의 타당성이 설 자리를 얻게 됩니다.
T.E.흄은 그의 논문에서 사물의 고성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굳이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영국의 지(知)의 역사는 그런 이론적 업적이 전제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부러운 일입니다. 2차성질은 “색성향미”(色聲香味) 같은 여러 가지 관념을, 인간의 마음 안에 생성케 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나오는 ‘색 성 향 미 촉 법’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서양철학과 불교가 만나게 되는군요. 불교나 로크의 이론의 깊이를 실감하게 됩니다. 로크의 2차성질에 관한 이론(1차성질도 그렇습니다만)은 불교와 관련된 흥미 있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심상: 로크의 사물의 제2성질이 불교의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경(六境)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창발론(創發論)을 주장하는 승계호(承啓浩, 미국 텍사스 대 교수, 2007년 6월 1일, 서울 금융회관에서 강연)는 사물이 갖는 원소결합은 자기 조직화의 내부적 원리에 의해서 집단적 존재자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크의 ‘고성’(固性)에 대한 해석에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불교와 관련되는 이야기가 또 있는지, 계속해 주십시오.
심산: 예를 들면 ‘꽃병’은 시의 대상이 됩니다만, 불교 특히 아비다르마(阿毘達磨 abhidharma) 불교에서는 대상이 안됩니다. 아비다르마 불교에서 말한 인식의 대상은 색(시각 대상), 성(청각 대상), 향(후각 대상), 미(미각 대상), 촉(촉각 대상) 등입니다. 대상이 되는 색성… 등은 각각 존재의 최소단위로서의 원자(原子)와 같은 극미(極微)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개의 극미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틈새[隙間]를 가진 것이
모인 집합적 다수의 극미이거나,
혹은 틈새가 없는 많은 극미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꽃병은 가존재(仮存在)이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도자기나 유리 같은 병이나 직물이나 가옥과 같이 파괴될 때 그 관념이 소멸되는 것, 또는 물, 불 등과 같이 사고(思考)에 의해 색과 같은 것으로 환원될 때, 그 관념이 소멸되는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는 ‘가존재’(仮存在, 世俗有)로 보는 것입니다. 색․성․향․미․촉 같은 것은 더 이상 파괴되거나 사고에 의해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것으로서 ‘진실한 존재’[勝義有]이며, 따라서 지각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에서는 객관적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위의 아비다르마 불교에서의 이론은 불교적 인식론의 한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또 한 가지 비교거리는 ‘인과설’과, 다른 또 한 가지는 ‘지각표상설’(知覺表象說)입니다. 여기서 장황하게 말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물은 기호나 표상으로서 마음 속에 나타나는 ‘관념’이라는 견해가 이른바 지각표상설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로크의 이론은 ‘지각표상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물을 대신한 기호나 표상을 관념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관념 형성의 근거는 주체의 마음 바깥에 있는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관념과 물의 성질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인과설의 주장이 있습니다. 인과설의 당연한 귀결로서, 진실한 대상은 지각의 원인이며, 그 지각에 사물이 자기의 상(像)을 인도(引渡)해 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상: 불교의 인식론과 서양 철학에서의 관념론과의 관련성은 퍽 흥미 있게 들립니다.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문덕수 「나의 쓰기」, 『문덕수시전집』). 이것을 ‘슈퍼비니언스(supervenience)의 원리’라고 말했습니다. 넓은 의미의 ‘물리주의’(physicalism)라고 할까, “수반의 이론”이라고 할까, 그런 시론상의 중요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이 원리는 김재권 교수(미국 브라운 대)가 주장한 수반(隨伴)의 원리와 관련 있는 명제가 아닙니까.
심산: 그렇습니다. 김재권 교수는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석학입니다. 하종호 교수(고려대)가 옮긴 그의 『물리계 안에서의 마음』(Mind in a Physical World, 철학과 현실사, 1999), 『물리주의』(Physicalism)(아카넷, 2007) 등의 저서가 한국에서 이미 출간되었습니다. 철학은 시론의 중요국면의 이론을 제공해 줍니다.
물리시의 방향
심산: 우리가 말하는 ‘사물시’ 또는 ‘물리시’라는 것은 영미 쪽에서 말하는 ‘피지컬 포에트리’(physical poetry)와 관련됩니다. 사물시라고 하건 ‘물리시’라고 하건 ‘물질시’라고 하건 어느 것이든 상관 없겠습니다만 나는 ‘물리시’로 부르고 싶습니다. 일찍이 존 크로우 랜슴이 말한 것같이 관념이 아니라 사물을 다루는 시가 물리시입니다.
심상: 관념시도 영미 쪽의 ‘플라토닉 포에트리’(Platonic poetry)와 관련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물을 다룬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다룬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걸 좀 분명히 하면 좋겠습니다.
심산: 사물을 다루는 한국시의 경우, 현재 세 가지 경향이 보입니다. 앞에 든 사물의 1차성질(양, 형, 수, 위치, 운동 또는 정지 등), 2차성질(색 성 향 미 촉 등), 그리고 ‘능력’ 등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사생시(寫生詩)지요. 이 방면의 물리시의 효시는 정지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윤성, 김종길, 그리고 50년대의 김광림과 전봉건 등이 있습니다. 첫째, 바다를 보고 “사금파리로 날을/ 얇게 세워/ 거침없이 달려오다가”(박명용의 「보길도․2」)는 로크가 말한
1차성질이며, “가을 아침 잘 익은 사과를 깨물면”(심상운의 「사과」)은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라는 점에서 로크가
말한 사물의 능력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둘째는 사물에서 기존의 관념이나 의미를 배출하려고 하는 경향입니다.
오규원, 조영서가 그렇습니다. 셋째는 사물이 관념을 비유하거나 상징하여 일종의 유의(喩義)로 바뀌는 경향입니다.
우리 시에서는 이 경향의 시들이 제일 많습니다.
심상: 흔히 ‘벌거숭이 언어’, ‘날 이미지’, ‘언어 이전의 사물’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는데,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요?
심산: ‘언어 이전의 사물’이 어떤 것인지, 나로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불교의 이론에서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직접 지각한 대상에 대하여 “이것은 장미꽃이다”, “저것은 고층빌딩이다”라고 언표하면 이것을 개념적 사유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한편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합니다만 언표할 수 없는, 즉 대상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타자와도 공통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자상’(自相 savalakṣaṇa)이라고 부르고, 한편 “이것은 장미꽃이다”, “저것은 고층빌딩이다”와 같은 언표된 지각의 대상은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동종(同種)의 다른 표상과 공통성을 가지므로, 이를 ‘공상’(共相, sāmānyalakṣaṇa)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상(自相:독자상)이 말하자면 ‘언어 이전의 사물’에 해당한다고 봅니다만,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공상(共相)이 됩니다.
심상: 불교 연구가들이 말하는 ‘자상’(自相)이라는 것은 ‘언어 이전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일종의 논거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산: 글쎄. 최근 미국의 철학자인 퍼스(1839~1914)의 기호론에서 재미 있는 대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퍼스는 존재의 보편적 카테고리를 설정하여 이를 1차성, 2차성, 3차성으로 나눕니다.
이 중의 1차성(firstness)은, 다른 어떤 것도 참조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사물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지각되기 이전의 감각적 성질(qualities of feeling)은 이와 같은 모양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울타리의 빨간 장미꽃을 보고, ‘장미꽃’이라고 언표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물리적 모습을 존재 카테고리의 ‘일차성’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불교의 자상(自相)과 비슷한 이론이지요.
심상: 그런 방향으로의 접근 가능성을 말한 것이겠지요.
심산: 그렇게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네요. ‘언어 이전의 사물’에 대해서는 나도 논문에서 구약의 창세기 이야기를 논거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천지창조에 6일간이 걸리고 아담이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기 이전의 며칠간, 이름 없는 사물로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지요.(「사물과 언어와의 만남」, 시집 �꽃잎세기�(2002)에 수록)
기호와 실험
심상: 기호와 실험시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언어 실험’에 의한 아방가르드 시운동 쪽이 되겠습니다. 우리 시의 실험적 모험은 이미지즘이나 쉬르리얼리즘의 도입에서부터이고, 특히 언어 기호의 반통사론적 실험의 바닥에는 일반적으로 프로이트나 융의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논의였습니다. 통사론에서 이탈한 기호의 운동을, 무의식의 레벨에서 논의하는 것이라면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심산: 지적한 대로이나 이 부분은 우리 시론의 최대 취약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알면서, 기호학이나 기호론자인 소쉬르나 퍼스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한국의 아방가르드시나 실험시의 이론이 조금 겉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 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体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 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말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언어 즉 ‘기호’입니다. 한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고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상식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어떤 사태나 사물을 언어화하여 기억한다고 가정합시다. 자기의 경험을 언어화하여 기억해 두어서 필요한 때에 이 언어기억을 끄집어내어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잠세태(潛勢態)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버철화입니다. 심상운 씨는 이와 유사한 토픽을 다른 각도에서 ‘모듈(module)론’으로 말한 적이 있지요. 사진이나 도상과 같은 것이 잠세되어 있다가, 필요한 때에 반복해서 끄집어내어 의미 경험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쓰기에서, 우리의 경험을 언어화한다는 것은 즉 버철화한다는 것이 되며, 우리의 모든 경험을 기호의 잠세태로 전위(轉位)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컴퓨터 언어라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인터넷 언어 또는 디지털 언어지요. 우리는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이미지나 텍스트나 음성을 보고 듣습니다만, 이러한 것들은 컴퓨터에 입력되면 일단 이진법(0과 1), 또는 화소(畵素)와 같은 인공기호로 바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입력된 모든 기호는 대상과의 관계(‘참조관계’라고도 합니다)를 끊고, 외부 사물과의 지표적(指標的)인 연결(쓰는 이나 말하는 이)도 절단되어 변형 가능성이라는 잠세적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즉 버철화합니다. 버철화된 정보는 컴퓨터 화면에서 화소나 문자나 음소로서 다시 인공적으로 합성되며, 외부의 대상과는 간접적으로 관계를 갖는 기호(자연기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입력에서부터 출력에 이르는 기호의 이러한 합성이나 변화의 과정은 현실의 소멸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호의 이러한 버철화 과정은 언어 실험이나 모험의 가능성을 정당화 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즉 하이퍼텍스트
심상: 저의 모듈론과 버철화와의 관계는 언젠가 다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압니다. 이야기를 계속하시죠.
심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일까 합니다. 셋째입니다. 컴퓨터에서는 ‘시프터’를 통하여 메시지의 문맥을 자기의 시점으로 마음대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문맥을 자기의 시점으로 얼마든지 전환할 수 있음은 이른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선조적(線條的)인 구조의 통사론을 깨는 언어기호의 다양한 혁명적인 실험을 밑받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언어모험의 남상인 이상(李箱)에게서 봅시다.
線上의 一點 A
線上의 一點 B
線上의 一點 C
A+B+C=A
A+B+C=B
A+B+C=C
이상의 「선에 관한 각서」의 한 대목인데, 통사론을 파괴한 하이퍼텍스트의 한 보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線上’은 통사론적 구문의 선조성(線條性)을 암시하는 것 같고, 일점(一點)의 ‘A, B, C’는 선조적으로 연결된 텍스트의 임의(任意)의 세 지점들인데 (A의 지점에서는 A+B+C=A와 같은 맥락으로 갈라짐), 이 지점에 링크가 되어 별개의 텍스트로 갈라져 연결되어 마침내 크고 복잡한 네트워크 관계가 형성됩니다. 기호 모험의 시는 이상에서부터 조향(趙鄕), 김춘수의 실험, 졸저인 초기 시집 『선공간』(1966) 등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심상운 씨의 최근작도 이 계열이지요. 심형의 시 「오토바이가 달린다」(시문학, 2007. 6)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 텍스트의 구조에서는 “푸른 오토바이가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1연),
“빨간 오토바이가 여름바다 위를 달린다”(2연), “하얀 오토바이가 산맥을 넘어 도시 위를 달린다”
(3연)의 세 화소(話素)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모두 현실에서는 실현이 가능하지 않는, 즉 버철화되어 있습니다.
(제1화소는 현실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사건이지요. 이런 경우도 나는 하이퍼텍스트로 보고 싶습니다. ‘오토바이가 달린다’라는 화소에서 주어가 되는 지점 “오토바이”에 집중되어 문맥이 주체(시인)의 시선에 따라 갈려서 푸른, 빨간, 하얀 오토바이로 분화되고, 달리는 장소(바그다드, 바다, 산맥을 넘어 도시)도 전환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프터에 의하여 유서(user)의 행위가 문맥을 전환시킨 일종의 상호행위(interactivity)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 텍스트의 끝의 “그때 그는 손에서 리모콘을 아주 놓아버린 것이다”라는 대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인터넷에 접속하여 유서가 자기 시점으로 문맥을 전환하여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하고 있는 상황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텍스트에서는 ‘오토바이’는 유서의 상호행위가 접속된 지점입니다만, 가령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대목을 예로 들면 “달린다”, “푸른 소리”, “사방”, “뿌리며” 등의 지점에서의 접선과 전환도 가능합니다. 이러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대시의 한 혁명적 방향임이 분명하고 기존의 구문(構文)을 부정할 문맥 분산화의
모든 실험도 비로소 정당성의 근거를 얻게 됩니다.
심상: 시에서 기존의 ‘구문파괴’가 과연 가능할까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좀더 설명해 주십시오. 실험시의 텍스트로 제 시가 언급된 것을 의미 깊게 생각합니다.
심산: 소쉬르가 말한 파라디금(paradigme)과 생타금(syntagme)의 시스템을 먼저 말해야 되겠네요. 이것은 물론 주요한 기호 시스템이고, 이 특성의 본질은 ‘반복’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파라디금을 ‘범열’(範列)로, 생타금을 ‘연사’(連辭)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반복 가능의 시스템인 파라디금은 ‘세로’ 방향을 취하고, 생타금은 ‘가로’ 방향(수평 방향)을 취합니다. 세로의 방향과 가로의 방향으로 기호관계가 규칙적으로 형성되어 나타나는 언어가 파롤(parole)입니다.(‘주어+서술어+목적어’와 같은 것도 그와 같은 보기입니다.) 파라디금과 생타금의 관계로 생성되는 언어인 파롤은 시공화(時空化)되지 않는 잠재적인 언어체계인 랑그(langue)와는 구별됩니다. “푸른, 오토바이, 달린다” 등,
각기 분산된 독립된 기호들은 의미가 실현되지 않는, 즉 파라디금과 생타금의 결합규칙에 의하여 생성된 언어 즉 파롤이 아닙니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라는 선조적 구문에서, 비로소 랑그들이 결합되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파롤로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문법에서 말하는 시 텍스트도 파라디금과 생타금의 관계 결합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얘기가 길어졌으므로 결론을 서두르겠습니다. 기호가 실현된다든지, 시 텍스트가 구현되는 것은 잠재적인 시스템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터넷이나 가상 공간에서의 기호 실현은 파라디금과 생타금의 확장이라고 할까. 어쨌든 그러한 규칙의 파괴 같은 실험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기호를 중시하는 현대시는 ‘하이퍼텍스트’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기존의 통사구조 내에서의 실험이어서 결국 좌절된 것으로 보입니다. 통사론도 깨지 못하고, 또 하이퍼텍스트의 이해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지시
심상: 결국 구문론의 원리를 깨는 데서 현대시의 아방가르드적 방향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것은 그렇고, 주지시(主知詩) 쪽으로 화제를 옮기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시의 주지주의적 남상을 김기림의 『기상도』(1936)에서부터 김현승, 송욱, 박진환 등으로 계승된다고 말하는데,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
심산: 그렇습니다. 시에서 “완결을 확정할 수 있는 시의 모델”은 없다고 하더라도 주지시야말로 우리가 나가야 할 좌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물리시’, ‘기호시’(흔히 말하는 탈관념시, 디카詩 등을 포함)의 실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규호의 공연시(公演詩) 운동을 포함해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고, 주지시는 앞에서 말한 서정, 관념, 사물, 기호 등을 각각 분리시켜서 일방적으로 한쪽으로만 비대화시켜 나가는 것보다는 서정, 관념, 사물, 기호 등이 이룩한 각각의 특성, 독자성, 실험적인 여러 가치를 어떤 관계원리에 의해서 통합할 수 있는 그러한 포괄성이 있는 시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구상에서 일단 ‘주지시’(主知詩)라고 명명해 봅니다.
심상: 영국의 형이상시(形而上詩, metaphysical poetry)와도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요.
심산: 영국의 형이상시에 대해서는 나의 저서 군데군데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중언부언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국의 형이상시의 특성은 ‘형이상적 존재의 인식’, ‘사상과 감각의 통합’ 같은 특성을 들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가치를 무시하거나 놓치지 않고 통합하려고 하면 그런 것이 다 보이는, 그리고 사정(射程)에 다 들어오는 높은 시점(視點)이 필요합니다. ‘이천시물’(以天視物)이라고나 할까, 그런 고지(高地) 말입니다. 높이도 한계가 있겠지만, 나는 그 시점을 ‘주지적 시점’ 또는 형이상적 시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기독교나 불교의 시점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낮고 좁은 공간의 시야는 편견과 한계가 있습니다. 주지시는 무엇보다도 낮고 좁은 편협된 공간의 한계성을 초극할 수 있는 ‘주지적 시점’의 확고한 설정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주지주의적인 방향이나 방법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요소의 감정적, 지역적 분열에 편승한 편협이나 일방통행 같은 것은 안될 것입니다. 일종의 이상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통합관계의 큰 원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시의 흐름은 좁고 편협된 감정과 관념 일변도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위험한가는 광복 후 오늘날까지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되돌아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의 역사에는 지성(知性)이나 지식이 많이 결락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박이 폭풍을 만나 한쪽으로 기우러지는 것 같은 그런 한심스러운 유행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감정이나 관념이 선동의 바람을 타고 전염병처럼 온 사회를 뒤덮는 현상도 보게 됩니다.
소월이나 미당의 시가 우리 사회나 한 시대의 감수성 전체의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볼 수 있겠습니까.
역사의 마스크를 쓴 관념주의의 횡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건전하고 통합적인 감수성(sensibility)의 향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위적 차원에서나 현실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요청과 그 방법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사상과 감각의 통합’이라는 것도 일종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감수성의 입장에서만 보지 말고, 사물이나 역사의 지각이라는 차원에서도 보아야 하겠지요. 주체, 대상, 기호의 미적 조화와 통합이 요구됩니다. 무의식과 의식, 이상과 현실, 사이버와 실재,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두 세계를 다 보고 그 관계 정립도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새타이어, 아이러니, 병치, 역설, 인유(引喩), 유머 등의 지적 방법도 있습니다. 앞에서 김기림(金起林)을 주지시의 남상으로 보았습니다만, 그의 장시 「기상도」는 미숙하긴 하나 주지적 방법의 보고로 보입니다. 그 뒤의 김현승의 형이상적 존재 인식, 송욱의 비판과 풍자, 김남조․홍윤숙의 높은 시점 설정(두 분이 모두 가톨릭입니다), 박진환의 풍자와 해학 등이 있습니다만 아직은 모두 부분적으로 분열되어 있어 안타깝습니다. 장시(long poem)의 시도도 주지시의 주요한 장르로 추가해야 되겠지요. 우리는 몇몇 시인들에게서 기대를 가져봅니다.
심상: 구상하는 주지시의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시인들에게는 높은 ‘주지적 시점의 설정’이 절실하다는 말씀은 감동적으로 들립니다. 공자의 “인에 사는 것은 아름답다”(里仁爲美)라든지, 제자인 안연이 죽자 “아,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噫天喪予) 등의 시점도 주지적 시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불교의 공관(空觀)이나 열반, 자유에의 의지 등도 높은 시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점 설정도 어렵지만, 통합원리의 발견, 구성 방법의 정립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선생님의 주지시 구상은 동양적 지성의 도입이라는 점에서 영국의 주지시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보다 한국적 역사나 현실의 반성에서 탄생한 주지(主知)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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