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White Nights)
최용현(수필가)
백야는 위도가 높은 지방에서 여름밤에 해가 지지 않거나 해가 진 뒤에도 어두워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러시아에서는 하얀 밤, 즉 백야(白夜)라 하고,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등에서는 한밤의 태양이라고 한다.
영화 ‘백야(White Nights)’는 미국과 소련을 두 축으로 한 냉전시대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던 1985년에 나온 영화로, ‘사관과 신사’(1982년)를 연출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작품이다. 러닝 타임은 2시간이 조금 넘는 136분인데, 제작비 3,000만 달러를 들여서 4,6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으니 무난한 성적을 거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서만 36만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니콜라이(미하일 바리시니코프 扮)는 예술의 자유를 찾아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발레리노이다. 그가 탄 비행기가 런던을 출발하여 일본 도쿄로 가던 중 백야의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가다가 기체 고장을 일으킨다. 소련의 공군기지에 불시착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화장실로 뛰어간 니콜라이는 자신의 여권과 신분증을 찢어서 변기에 버리고 나오다가 비행기가 요동치는 바람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는다.
깨어나 보니 시베리아의 한 병원이었고 KGB 요원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미국 국민이니 미국 대사관에 연락해 달라.’고 말하는 니콜라이에게 KGB의 차이코 대령(예르지 스콜리모브스키 扮)은 ‘네가 누군지 잘 안다.’며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면 조국을 배신한 죄는 덮어주겠다.’고 말한다.
니콜라이는 미국의 월남전 참전에 불만을 품고 소련으로 망명한 흑인 탭댄서 레이먼드(그레고리 하인즈 扮)와 그의 소련인 아내 다리아(이사벨라 로셀리니 扮)의 집에 맡겨진다. 레이먼드는 매사에 도청과 감시를 당하는 등 자신의 상상과 다른 소련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틈만 나면 도망치는 등 여러 번 레이먼드를 당황시킨다.
차이코 대령은 니콜라이를 레닌그라드로 데려가 예전에 니콜라이가 살던 집을 보여준다. 전에 살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차이코 대령은 니콜라이에게 고향 키로프 극장의 개관기념공연 무대에 서라고 회유한다. 조국을 위해서 다시 헌신한다면 예전처럼 문화적 영웅에 준해서 자가용과 연습실, 음식 등을 대우해주겠다면서.
차이코 대령은 니콜라이의 옛 애인 갈리나(헬렌 미렌 扮)를 8년 만에 다시 만나게 해준다. 출세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차이코 대령 밑에서 일하는 갈리나는 자신을 버리고 망명한 니콜라이를 원망하면서도 애틋한 연민을 지니고 있었다. 갈리나는 차이코 대령이 시키는 대로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얼마든지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전에 소련에서 자유로운 표현을 하다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는 니콜라이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니콜라이는 소련의 반체제 가수 비소츠키의 ‘야생마’를 틀어놓고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갈리나는 니콜라이의 자유에 대한 갈증을 알겠다는 듯 흐느끼기 시작한다. 이윽고 춤을 멈춘 니콜라이도 눈물을 흘리고…. 갈리나는 니콜라이에게 탈출을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니콜라이는 KGB 요원들이 지켜보는 감시화면을 의식하며 열심히 춤 연습을 하다가 기회를 포착하여 레이먼드에게 함께 탈출하자고 제의한다. 자유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레이먼드가 동의를 하자, 임신한 다리아도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남편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갈리나는 외교관들의 파티에서 미국 대사관 직원에게 니콜라이가 이곳에 감금되어 있으며, 곧 서방으로 탈출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탈출하는 날, 다리아가 양탄자를 풀어서 만든 밧줄을 니콜라이가 창문을 통해 건너편 옥외계단으로 연결한다. 니콜라이와 다리아는 밧줄을 타고 계단을 내려오지만, 뒤따라오던 레이먼드는 KGB 요원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약속장소에서 미국 대사관 요원의 차를 탄 니콜라이와 다리아는 뒤따라오는 KGB 요원들의 차를 가까스로 따돌리고 미국 대사관 진입에 성공한다.
니콜라이의 끈질긴 노력으로 미국에 구금되어있는 소련 첩자와 레이먼드의 맞교환이 결정된다. 마침내 자유를 찾은 레이몬드는 아내 다리아와 황홀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다시 니콜라이와 진하게 포옹하는데, 이때 엔딩 크레딧과 함께 ‘Say You Say Me’가 울려 퍼지면서 영화가 끝난다.
춤과 음악,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탈출극이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영화에 잘 녹아있어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주인공 니콜라이 역을 맡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실제로 1974년 캐나다 공연 때 캐나다로 망명했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소련 출신의 세계적인 발레리노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 나오는 니콜라이의 의자 타는 장면을 오마주한 탤런트 이종원의 의자춤 CF가 1980년대 후반에 방송가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리아 역을 맡은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왕년의 명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이다. 또 갈리나로 나오는 헬렌 미렌은 1997년에 테일러 핵포드 감독과 결혼했고, ‘더 퀸’(2007년)에서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역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노년에도 활발하게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
비소츠키는 소련의 압제(壓制)에 저항하는 노래로 국민가수가 되었으나, 1980년 42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가 피를 토하듯 부른 ‘야생마’를 틀어놓고 추는 니콜라이의 발레 춤사위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눈물겨운 장면으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라이오넬 리치가 부른 엔딩 곡 ‘Say You, Say Me’는 빌보드 차트에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였고, 아카데미 주제가상과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을 석권하였다. 이 곡의 감미로운 선율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자유의 품에서 다시 만난 세 사람의 환희에 찬 모습과 함께.
첫댓글 좋은 영화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끔씩 듣는 세이 유 세이 미 지금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네, 언제 들어도 감미로운 곡입니다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들으면 가슴이 더욱 벅차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