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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의 생애 |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도(燕都)로 가서 인도승 지공(志空)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다. 이듬해 법천사(法泉寺)에서 나옹(懶翁)을 만났는데, 나옹은 그가 큰 그릇임을 간파하였다. 그 뒤 무령(霧靈)·오대산 등을 거쳐 서산(西山)의 영암사(靈巖寺)로 나옹을 찾아갔으며 그곳에서 몇 해를 머무르면서 수도하였다.
1356년 나옹을 하직하고 귀국하였으며, 나옹 역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元曉庵)에 머물렀다.
1359년 다시 나옹을 찾아가자 나옹은 법을 전하는 표시로 불자(拂子)를 주었다. 그뒤 나옹이 신광사(神光寺)로 자리를 옮기자 찾아갔다가, 그곳 대중 속에 그를 꺼리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고달산(高達山)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살았다.
1376년(우왕 2)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그를 불러 수좌(首座)로 삼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그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명산을 유력(遊歷)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1392년(태조 1) 겨울,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 者)'라는 호를 내렸다.
이때 태조에게, 유교는 인(仁)을 말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지만 그 작용이 하나라는 것과,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필 때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나라는 저절로 잘될 수 있음을 설법하였다.
그리고 죄를 지어 옥에 갇힌 사람들을 용서하여 새로운 삶을 열어줄 것을 청원하였다. 태조는 그 청에 따라 죄수를 방면하였고, 그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1393년 왕도(王都)를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 등을 돌아다니며 지상(地相)을 보고, 마침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데 찬성하였다. 1397년 태조의 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으며, 1398년 용문사(龍門寺)로 들어가서 살았다.
1402년(태종 2) 왕명을 받아 회암사로 옮겼으나, 이듬해 다시 사퇴하고 금강산 진불암(眞佛庵)으로 들어갔다. 1405년 금강암으로 옮겨 그곳에서 나이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인공음(印空音)>1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며, <무학대사어록(無學大師語錄)>1권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분명한 저서로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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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와 간월도 |
간월도는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超:1327~1405)가 창건한 암자로서 당시의 무학스님이 이 곳에서 달을 보고 홀연히 깨치셨다 하여 암자의 이름을 간월암이라 하고 따라서 섬 이름도 간월도라 한다.
무학스님은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가 고향이며, 스님이 아직 어머니 태중에 계실 때 부친이 보시던 일이 잘못되어 나라의 빚을 진지라 빚을 갚을 길이 없어 피신하여 포졸이 부인을 대신 호송하여 서산현으로 가던 중에 갑자기 산기를 느껴 쉴 곳을 찾게 되었다.
엄동설한이라 적설이 산천에 가득 찼는데 오직 한 곳이 기이하게 눈이 없어 마침내 이곳에 몸을 풀고 아이를 낳아 옷가지로 덮어두고 현에 이르니 원이 부인이 몹시 피곤해함을 이상히 여겨 그 연유를 물어 알게 되어 인간의 도리로서 이럴 수 있으랴 하며 포졸을 아이 있는 곳으로 보내니 큰 학이 두 날개를 깔고 덮어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지라 돌아와 이야기를 하니 원이 크게 상서로운 일이라 하며 부인을 보고 아이의 이름을 무학(舞鶴)이라고 지어주었다. 후에 무학스님이 출태한 곳을 학돌재라 하였다.
무학이 20세에 나옹스님으로 인하여 출가했다. 이때가 공민왕 3년 1353년경이다. 스님은 이곳 간월암에 토굴을 지어 열심히 수도하던 차 달을 보고 도를 깨우치시니 나옹스님이 더 배울 것 없다 하여 법호을 무학(無學)으로 지어주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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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조(李太祖)와 무학(無學) |
고려(高慮)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에게 도선대사가 있었다면, 조선(朝鮮)을 세운 이태조(李太祖)에게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있었다.
이러한 무학대사와 이성계(李成桂)의 첫 만남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대사가 원(元)나라에서 귀국한 후 새 왕조 창업을 도와야 하는 운명을 직감한 후 스승인 나옹선사(懶翁禪師)와 함께 함주에 가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묘를 정해 주면서 이루어졌다.
이후 고려 우왕 10년(1384)에 이성계는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완산부원군이 되어 함경도 학성 지방에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이성계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으니 그것은 ‘1만 집의 닭이 한꺼번에 울고 천여 집의 다듬이 소리가 일시에 들렸으며, 꽃이 지는 것도 보이고 거울이 떨어지는 것도 보였으며 또한 허물어진 집에 들어간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오는’ 꿈이었다.
꿈을 깬 이성계는 궁금하여 해몽(解夢)을 잘한다는 마을 노파를 찾았으나 그 노파는 미천한 소견으로 대장부의 꿈을 풀 수 없다며 설봉산 토굴에 고승이 9년동안 은거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물어 보라고 소개 해 주었다. 이에 이성계는 그 고승이 무학대사임을 직감하고 바로 설봉산 토굴로 가 대사를 만나게 되었으며 꿈 해몽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무학대사가 해몽하길 “그것은 모두 임금이 된다는 것을 예고하는 꿈이며, 1만 닭 우는 소리는 높고 귀한 지위(高貴位고귀위 : 꼬끼요의 음역)를 축하하는 뜻이고 천여 집의 다듬이 소리는 임금에 즉위할 때가 가까워져 왔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또한 서가래 셋을 지고 나온 것은 임금왕(王) 자(字)를 뜻하오며 꽃과 거울은 왕업(王業)을 재촉하는 뜻입니다.”하고 말하였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이 꿈은 절대 비밀로 할 것과 바로 이 자리에 절 하나를 세우고 이름을 ‘왕이 될 꿈을 해몽한 절’이라는 뜻의 ‘석왕사(釋王寺)’라 하고 정성으로 기도하면 왕업을 이루는데 도움이 됨을 당부하였다. 이에 이성계도 대사에게 큰 일이 원만히 이루어지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다.
2) 무학대사의 왕사(王師) 책봉
우왕 14년(1388)에 명(明)나라를 치기 위하여 이성계는 출병하였으나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적인 최영(崔塋)장군을 제거하는 한편 우왕을 폐하고 창왕(昌王)을 옹립하면서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 했지만 1392년에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하고 7월에 개경 수창궁에서 새로운 조선 왕조의 태조로 즉위하게 되었다.
한편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꿈을 해몽한 이후 전국의 산천과 사찰을 편력하면서 이성계와 조선 창업을 위해 기도하다가 황해도 곡산 고달굴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하면서 무학대사를 찾을 것을 8도 지방방백에게 지시하였고 3개월 후에 황해도 곡산 고달굴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하면서 무학대사를 찾을 것을 8도 지방방백에게 지시하였고 3개월 후에 황해도 곡산에서 대사를 찾으니, 마침내 이태조와 무학대사는 1392년 10월에 개경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대사를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와 왕이 되기 전부터 친밀하였으니 이태조의 부친 묘 터를 잡아 준 일, 안변 석왕사에서 왕이 될 꿈을 해몽한 일, 그리고 여러 사찰에서 조선 창업을 위해 기도한 것 등이다.
이러한 관계는 조선을 창업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면서 유명한 설화를 남기게 되었다.
어느 봄날, 이태조는 스승인 무학대사와 함께 수창궁의 송헌(松軒)에 마주 앉았다.
왕은 농을 걸어 투열(鬪劣:일종의 해학으로 문자로서 상대방을 욕함)을 청하자 대사가 말하였다.
“대왕께서 먼저 말을 거십시오.”
이에 이태조가 말하길
“내가 대사를 보니 돼지 같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가 말하길
“나는 대왕을 보니 부처 같습니다.”
이를 들은 이태조가 “대사께서는 어찌하여 투열을 하지 않습니까?”하니 대사가 답하길 “용의 눈으로 보면 용이요, 부처님 눈으로 보면 부처입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아름답구나, 고기와 물의 만남(水魚之交:친밀한 벗)이여! 이 아니 천연인가, 이 아니 천연인가.
(청허당 휴정 「설봉산 석왕사기」)
3)무학대사의 한양 도읍
무학대사는 왕사로 책봉된 후 회암사에 머물다가 조선의 새 도읍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 당시 이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안된 1392년 8월경부터 천도할 후보지를 선정하도록 하였으니, 한반도 십여 곳이 거론되었고 그 가운데 유력했던 곳은 계룡산 일대의 신도안, 무악산 아래 연희동, 그리고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이었다.
무학대사와 이태조는 먼저 계룡산의 신도안 일대를 둘러보고 새 도읍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터를 닦고 주춧돌 공사를 하였었다.
하지만 「계룡산록」이라는 책에 의하면 대사를 비롯한 신하들의 간청에 따라 이태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이곳은 너의 땅이 아니니 너는 한양으로 가거라.”라고 하여 공사를 중단하였다 한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경기도 관찰사 하륜(河淪)이 계룡산 일대가 도읍지로 적당치 않다고 주장하여 궁궐공사를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계룡산 도읍터의 위치는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석계리 일대 계룡산 남쪽에 있으며 신도안 혹은 신도내(新都內)로 불리고 있으며, 이곳은 사방 10km정도 되는 산의 평야지대로 신도안의 장터를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대궐 터가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하여 암석이 양립하고 협곡을 이루어 동문, 북문, 남문으로 부르고 있다.
4) 무학대사와 계룡산
계룡산 신도안이 조선의 도읍지가 아님을 알고 무학대사는 다시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삼각산(북한산)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에서 지세를 살피니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져 있고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그 가운데로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조선의 새 도읍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이태조에게 천거하게 되었다.
이에 이태조와 신하들이 남경(조선시대-한양)을 둘러보고 이곳을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곳 남경은 신라 때 잠시 한양으로 불린 적이 있고 고려 때 3경(개경.서경.남경)의 하나였으며 고려말엽인 1382년에 우왕과 1390년 공양왕이 잠시 이곳에 천도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그리하여 도읍지를 정하였지만 주산(主山)을 어디로 삼아서 좌향(坐向)을 동으로 하느냐, 남으로 하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의견이 대립되었다.
즉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산과 백악산(북악산)을 백호와 청룡으로 도읍을 동향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정도전은 예로부터 군주(君主)는 ‘남쪽을 바라보고 북쪽을 등진다.(南面北向)’는 이유를 내세워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인왕산이 백호, 남산이 청룡이 되어, 궁궐을 남쪽으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현재의 경복궁과 같이 남향이 되었다. 이에 대해 무학대사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고 나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의상대사가 쓴 「산수비기(山水秘記)」에 의하면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점차 국운이 좋아지겠지만,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하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자리다툼의 화가 생기고, 200년이 못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날것이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이후 무학대사는 궁궐의 터를 정하는 일을 맡고 주춧돌과 기둥을 세웠는데 자꾸 넘어져 버렸다.
이때 늙은 농부의 가르침대로 하여 일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이다.
그 농부의 가르침이란 남산에서 본 궁궐 뒷산이 흡사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그곳에 궁궐을 지으려면 학의 날개를 누른 뒤에야 학이 날지 못하니, 도성을 먼저 세우고 다음에 궁궐을 세우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무학대사는 한양 땅에 조선의 도읍을 정하였으며 궁궐과 도성까지 축조하게 되니, 마침내 이태조는 1394년 8월에 개경에서 한양을 천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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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 관련 설화 |
1)왕십리(往十里)
무학대사는 계룡산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현재의 하 왕십리 무학산(無學山)에 올라 왕십리 일대를 살폈었다. 대사는 이곳의 지형을 살피고 새 도읍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한 노인이 소를 몰고 가면서 소리치기를 “꼭 무학 같구나. 왜 바른 길을 가지 않고 굳이 굽은 길로 들어서냐?”하였다.
순간 대사는 정신이 번쩍 들어 범상치 않은 노인임을 깨닫고 정중히 인사를 드린 다음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노인은 한참 바라보다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아하니 대사는 왕명을 받아 도읍지를 정하려 터를 찾는 모양인데 여기에서 10리를 더 들어가면 대사가 가히 짐작할 곳에 이를 것이오.” 무학대사가 정중히 절을 하고 보니 소도 노인도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이 왕십리는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가서 찾았다’는 뜻의 왕심(往尋)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과 처음에 ‘잘못 찾았다’는 왕심(往尋)이라 불러온 데서 연유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불교설화대사전)
2)서울의 유래
무학대사와 재상들 사이에 궁궐의 외성(外城)을 쌓을 자리를 놓고 의견이 엇갈려 성의 둘레와 거리등을 결정하지 못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밤에 천하를 모두 뒤덮기라도 하려는 듯 많은 눈이 내려 안으로는 깎이고 밖으로는 계속 쌓여 성의 형상을 이루게 되었다.
이태조는 이에 명령을 내려 눈을 좇아서 성을 쌓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성(城)이다.
뒷날 ‘눈 울타리’라는 뜻의 ‘설울’로 불리다가 ‘서울’로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다.
(불교설화대사전)
3)인왕산 중 바위
세상에 전하기를 한양 도성을 쌓을 때 바위가 중이 장삼을 입은 모양 같은 것이 인왕산 모퉁이에 서 있어 선암(禪岩)이라 불렀다 한다.
무학대사는 중 바위를 성안으로 하여 도성을 쌓으려 하였고 정도전은 성밖으로 하려고 하였다.
이에 이태조가 그 이유를 물은 즉 정도전이 말하기를 “그 바위를 도성 안으로 하면 불교가 성하고, 성밖으로 하면 유교가 흥합니다.”하니 태조가 명하여 정도전의 말을 쫓게 하였다.
무학대사가 탄식하여 말하길 “이후로는 중들이 선비의 책보를 지고 따르게 되겠구나.”하였다.
(동국여지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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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眞經) 관련 구절 |
태극 7:91 “고려 말의 나옹(懶翁)은 어려서부터 특수한 재질이 있었느니라. 문경(聞慶)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積庵)에 있을 때 그 스승이 점심 공양에 먹을‘상추’를 뜯어 오라고 밭에 보냈는데 점심 공양이 끝난 후에야 빈손으로 돌아오므로 크게 꾸짖으니 ‘해인사에 불이 나서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가 탈 것 같아 그 불을 끄고 오느라 늦었나이다.’하니라. 스승은 황당하게 여겼으나 그의 평소 언어 행동이 수승(殊勝)하였으므로 채근하지 않았더니, 그 후에 해인사에 다녀 온 사람의 말을 들으매 과연 그 시각에 불이 나서 경판고에 옮겨 붙으려 하는데 별안간 소낙비가 쏟아져서 진화되었다 하니라. 더욱 이상한 일은 빗속에‘상추’가 섞여 떨어졌다 하니 선천사승(先天寺僧)의 술법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후천진법(後天眞法)의 도력이야 어떠하겠느냐.”하시니라.
무극진경 9:111 한 종도가 계룡산 정씨 왕국에 관한 비결을 여쭈니, 하교하시기를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섬 속까지 샅샅이 뒤져보고 물밑까지 더듬었느니, 정씨가 몸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요? 그런 생각은 다 버리라." 하시니라.
무극진경 9:131 한 종도가 계룡산 도읍의 비결을 여쭈니 "동서양을 통일하게 할터인데, 계룡산에 도읍하여 무슨 일을 하리요?" 하시므로 "언어가 같지 아니하니 어찌 통일하오리까?" 하매 "언어도 장차 통일하게 하리라." 하시니라.
태극진경 6:66 "예로부터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에 해인(海印)이라는 보물이 있어 이로써 산하를 좌우하며 천지를 개벽한다는 전설이 있고, 일설에는 '정만인(鄭萬人)이 그 해인을 훔쳐 해도(海島)로 들어가 장차 계룡산에 도읍할 대사를 꾸미리라' 전하나 이는 도시 허언이니라. 다만, 구천상제님께서 '잘 믿는 자에게 해인을 전하여 주리라.' 하셨으니 이는 본시 무극의 체와 태극의 용을 이름이니라. 내가 성경신을 다한 일심자에게 일시에 전하여 주리라." 하시니라.
태극진경 7:75 상제님께서 이날부터 동학사 염화실(拈華室)에서 7일 간 공부하시고 시종들에게 말씀하시기를“이번 공부는‘만고충신신명(萬古忠臣神明)의 해원도수’를 봄이니라.” 하시니라. 이어 하교하시기를 “이곳 계룡산에는 예로부터 전설이 많으니라. 이곳을‘정씨도읍 8백년지지(鄭氏都邑 八百年之地)’라 하거니와, 조선 개국 초에 태조가 궁궐터를 닦고 정초(定礎)까지 하였으나 신명들의 저해로 중단하고 한양으로 옮겼는데, 이로 인하여 조선 5백년 간 신하로서 이심(二心)을 가진 자가 많았으므로 증산상제님께서 그에 관한 공사를 보셨느니라. 이곳을‘신도(新都)안이라’ 함은 실은‘신도(新都)가 아니라’는 말이고 신도는 신도(神都) 곧 신명의 도읍지라는 뜻이니라.”하시니라
첫댓글 너무 많은 내용을 한꺼번에 이해 하려니 골치가 띵 합니다만 많이 배우고 갑니다
ㅎㅎ 고생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