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할 때는 며칠씩 책 읽고 고민하는데, 노동은 행복해요. 새벽같이 일어나서 땀나게 일하고 맛있게 밥 먹고,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목사보다 목수가 체질인 모양이지요.” 볕에 그을려 까맣게 탄 얼굴, 손 발 할 것 없이 온통 흙범벅이다. 새벽 다섯 시부터 시작된 흙집 짓는 노동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된다. 대패질도 수준급이고, 흙벽 쌓는 데도 이력이 붙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타고난 ‘노가다 체질’이란다. “콘크리트 문화 속에서 우리가 경험해온 집들은 너무 ‘편리’라는 기능만을 강조해온 집들이었구나 싶어요. 그 안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어떻게 아침을 맞고, 차를 마실 때는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뭐 이런 철학이나 예술적 감성은 전혀 고려가 되질 않았지요.”
그렇다면 남상도 목사가 짓는 흙집은 어떻게 다를까. 그가 지은 다섯 번째 흙집이라는 나주의 작고 둥근 흙집을 보았다. 지붕은 쿠키처럼 둥글납작하고 들어가는 문 양옆으로는 기분 좋게 웃어젖히는 얼굴이 둘 있다. 거실 한 벽은 온통 유리다. 집의 동쪽으로 난 커다란 유리벽이 마당과 텃밭을 비추는 창이 된다. 눈이라도 내리면,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엔, 넓은 창이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겠구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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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닷컴 | 황토 흙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흙빛의 차이를 이용한 그림들이 보인다. 달과 별, 초가집과 하늘로 날아가는 연기. 거리에서 주워왔다는 은행나무 고목은 벽에 박혀 한지와 나뭇잎 옷을 입고 옷걸이가 되었다. 둥근 벽에 맞도록 나무로 짠 의자와 테이블이 딱딱하지 않아 좋다. 흙벽에 구들, 황토냄새… 이런 집에서 살면 참말로 좋겠네, 어떤 고급 아파트나 으리으리한 건축물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집 욕심’이 왈칵 난다.
대한민국의 사십대들이 스물 몇 평에서 서른 몇 평, 마흔 몇 평을 위해 적금을 붓거나 재테크를 고민하고 있을 때, 제 손으로 집 한 채를 너끈히 짓는 사람, 집 앞 마트에 갈 때조차도 십여 분의 걸음조차 버거워 자동차 운전대를 잡을 나이에 새벽부터 한밤중까지의 노동이 꿀처럼 달다는 사람, 그의 얼굴에 땀 흘려 노동한 자만이 피워낼 수 있는 생기가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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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닷컴 | 제 손으로 집 한 채를 너끈히 짓는 사람 올해 나이 마흔 아홉, 스물 아홉에 장성 남면으로 부임해와 꼬박 이십여 년을 농촌교회의 목사로 살았다. 처음엔 남들처럼 2∼3년 있다가 도시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운명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는 얌전히 잔에 담긴 물로 있질 못했다. “성경책에 손을 올리고 승리를 염원하는 기도를 한 다음,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이라크로 쳐들어가는 부시를 보십시오. 기도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현실에 눈감은 채로 교회가 가질 수 있는 설득력은 없는 겁니다.”
현실에 눈감지 않은 젊은 목사. 80년대 그는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로 시작되는 농민가를 찬송가 대신 부르고 수세거부시위를 하다 닭장차에 실리면 차창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짓찧어 전경들을 질색하게 만들었던 과격한 운동권 목사였다. 피아노 대신 북 장단, 꽹과리 반주에 찬송가를 불렀던 문화운동가이기도 했다. 정부의 증산정책에 맞서 친환경농법을 시작하고, 농약 안 한 못난 참외를 팔다가 시장바닥에서 피눈물을 흘려보기도 했다. 그의 목회는 이렇듯 논두렁에서, 집회현장에서, 시장바닥에서 이뤄졌다. 풍년은 풍년이어서, 흉년은 흉년이어서 고달픈 농촌 현실로 깊이 빠져들어간 것이다.
“나는 사실 아주 보수적인 목사였어요. 내가 농촌을 바꿨다기보다는 농촌이 나를 바꾼 거죠. 처음 시골교회로 와서 배추밭을 지나며 기도를 했습니다. 풍년 들게 해달라고. 기도대로 정말 풍년이 들었는데 그 해 전국이 배추풍년입디다. 배추 한 포기가 십원, 기가 콱 막히고 눈물이 났지요.” 해방신학을 공부한 적도, 운동권 언저리에 있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원칙론자였다. 열심히 일하면 그만한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온당한 섭리였다. 잘못된 정책과 그릇된 집행을 모른 체하고 천국을 설교할 순 없었다. 그렇게 아픈 현실과 마주하며 농민운동을 시작했고, 이후엔 유기농법,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하는 생협 운동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농토를 배고프게 두자는 무투입 농법(예술 자연농) “남상도 목사와 둘이서 박종철 추모집회에 올라갔다가 최루탄을 맞고는 성대를 크게 다쳤어요. 그 통에 목소리가 가 부렀제. 생각해보면 그 양반하고 겪은 일이 너무 많소. 정부에서는 증산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풀 뽑고 퇴비허고 있었으니 싸움도 많았지. 그래도 그 양반하고 나는 생각이 똑같애요. 농사는 부자 될라고 짓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니 땅 죽이고 사람 죽임서 농사 질 것이 아니지. 그래서 유기농을 하자 헐 때도 두말없이 따랐제. 남 목사하고 살아온 이십 년 동안 내가 배운 게 너무 많애요. 인자는 공부도 합니다. 중국 쪽하고 교류를 하고 싶어서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 양반도 오페라 듣는다고 독일어 공부 한답디다. 우리는 나이 상관 안해요. 헐 것 허믄 되제,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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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닷컴 | 올해 나이 예순 여덟, 장성 남면에서 농사짓는 전춘섭씨의 이야기였다. 남상도 목사를 통해 농사가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과정임을 깊이 인식했다는 늙은 농군을 보면서 모름지기 일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이 이런 것이었으면 싶어진다. 농부도, 장사꾼도, 늙었거나 젊었거나 필요하면 외국어 공부도 하고, 오페라도 듣는다. 누구하고나 자유롭게 교류하고 정보를 나눈다. 배움이란 게 어디 학력 있는 자들만의 전유물이던가. 흔히들 도시소비자가 함께 출자해서 만든 남상도 목사의 한마음공동체는 유기농업계의 대단한 성공이라고들 한다. 농촌생산물의 이익을 도시소비자에게 지분으로 돌려주고 있고, 실질적인 도농 교류의 모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가 공동체를 통해 이뤄낸 성과물은 ‘잘 팔리는 유기농 제품’이 아니라 이렇게 공부하고 배우면서 자기 분야의 일을 진보시켜나가는 공동체 사람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는 농부, 공동체를 걱정하는 소비자들, 정신의 양식만을 강조하기보다는 몸에 좋은 먹거리와 집을 고민하는 목사. “학창시절엔 산에 미쳐서 맨날 지리산에서 살았어요. 그러고 보면 나는 재밌는 일만 쫓아서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엔 흙집 지으면서 무투입 농법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올해 무투입 농법으로 쌀 수확은 성공을 했는데 사과를 해 보려구요.”
그가 시작한 무투입 농법, 일명 예술 자연농은 농토를 좀 배고프게 두자는 농법이다. 유기질 비료를 투입하는 대신 땅을 배고프게 하면 농작물의 뿌리가 깊이 뻗어가고 먹이를 구하는 지렁이가 땅 속을 부지런히 유영하며 땅을 부드럽게 간다. 땅이 스스로 건강을 찾도록, 바람과 햇빛과 비가 농사를 짓도록 기다리는 농법인 셈이다. 남들 안하는 어려운 시절에 유기농을 시작했지만 이제 그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한발 더 자연 가까이로 다가서려는 고민을 시작한 것이다.
뼈골 빠지는 노동도 신명나게 지난 해 그는 정확히 19년 만에 백운교회 담임목사를 그만뒀다. 교회 담임목사로 20년을 채우면 평생 연금이 나오는데, 19년 만에 교회일을 마감한 이유를 물었다. 연금이 나오면 혹 게을러져서 일하기 싫어질까봐 눈 딱 감고 내린 결정이란다. 흙집 짓는 목수로 먹고살지도 모르겠다며 웃지만 아직까지 흙집은 준공검사도 쉽게 나지 않는 형편이다. 새로 개척해 가는 길이라 풀어나갈 숙제가 적지 않다. 사실 생산 공동체 일이라는 것도 사람들과 공감대를 만들어가야만 가능한 일이라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노동도 이미 즐길 수준을 넘어선 뼈골 빠지는 분량이다. 그런데도 남 목사가 일하는 모습은 신명이 나 보인다. 세상에 쉬운 삶이란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복잡한 계산보다는 몸으로 부딪쳐 겪어가자고 스스로를 잘 단도리하고 있기 때문일까.
간디중학교를 마치고 흙집 짓는 과정을 통해 고등학교 공부를 해나가는 원중과 범린, 어린 두 제자와 함께 흙집을 짓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우리시대의 부족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흙집 짓고, 보일러 대신 구들 놓고, 해와 비로 땅을 다루고, 누에를 쳐서 명주옷을 지을 계획도 세우고 있다. 넘쳐서 탈인 것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가난했기에 배불렀던 옛 시절’로 돌아갈 작정을 우리시대의 부족장은 단단히 한 모양이다.
김인정 <방송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