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이 되자 주식은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
황홀감이 파리으 거리를 휩쓸엇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고 대규모 대출을 받아 미시시피사의 주식을 샀다.
부자가 되는 손쉬운 방법을 발견했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엇다.
일부 투자자들은 주식 가격이 완전히 비현실적이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았다.
이들은 가격이 정점을 찍을 때 파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매도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빨리 손을 털고 싶었고,
가격은 더욱더 떨어져서 눈사태처럼 무너져 버렸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총재인 존 로의 지시에 따라 미시시피 주식을 구매했지만,
영원히 매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자금이 떨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부 재정 총책임자이기도 했던 존 로는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을 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재정 시스테 전체가 거품 속으로 들어갓다.
더군다나 그런 금융상의 마법으로도 곤경을 면할 수 없었다.
미시시피 사의 주식 값은 1만 리브르에서 1천 리브르로 떨어졌고,
그 아음에 완전히 붕괴하여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이즈음 프앙스 중앙은행과 왕국 재무성은 돈을 한 푼도 없으면서 부가치한 주식만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금융붕괴 사태였고,
프랑스의 금융 시스템을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미시시피 사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연줄을 이용해서 주가를 조작하고
매수 광풍에 불을 질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대중은 프랑스 은행 시스템과 프랑스 왕의 현명함에 대해 불신했다.
루이 15세는 신용대출을 받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것은 해외의 프랑스 제국이 영국의 손에 떨어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영국인들은 자금을 저리로 쉽게 빌릴 수 있었던 데 비해,
프랑스인들은 융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 왕은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더욱더 높은 이자율로 빌려야 했다.
그가 죽자 앙위에 오른 (1774년) 손자 루이 16세는
1780년데에 이르러 자신이 파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간 예산의 절반이 대출금에 대한 이자 지불금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1789년 그는 마지 못해 삼부회(사제, 귀족 제3신분으로 이뤄진 신분 의회)를 소집한다.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150년 동안 열린 적이 없던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해외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대영제국은 급속히 팽창했다.
이전의 네델란드 제국처럼 대영제국은 대체로 인간 주식회사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었고,
이들 회사는 런던 주식거리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북미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는 런던 사, 프라이마우수 사, 도체스터 사, 매사추세츠 사 같은
17세기 초 주식회사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인도 아대륙을 정복한 것도 영국 정부가 아니라 영국 동인도회사의 용병들이었다.
이 회사의 실적은 심지어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를 넘어섰다.
런던 데든홀 스트리트에 있는 본부를 기반으로 한 회사는 막강한 인도 제국을 약 1백 년 동안 지배했다.
막대한 군대를 유지했는데, 군인이 많을 때는 35만 명에 이르러 영국 왕이 보유한 군대를 크게 상회했다.
영국 왕은 1858년에 이르러서야 인도를 국유화했고, 동인도회사의 민영 군대로 이때 국유화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가게 주인들의 나라라며 비웃었지만, 결국 그 가게 주인들에게 패배했다.
가게 주인들이 세운 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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