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언제 디시 그 종소리를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내 자취에 남아 있는 종소리에 귀 기울여 간다. 내 맘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종소리를 단 한번이라도 다시 듣게 된다면 금방 따라나서 보련만, 종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고 나는 이 밤 기다림에 목을 놓고 있다.
종소리, 그것에는 환희와 희망, 뚫림과 소생, 감격의 만남이 있었고, 끝없이 펼쳐진 신천지가 있었다. 산골마을에서 자란 나는, 산허리를 타고 드는 새벽 종소리에 다시 잠들지 못한 때가 많았었다. ‘땡~땡, 땡~땡, 땡그랑 땡~’, 꿈결처럼 밀려드는 그 여음은 어린 내 가슴에 늘 어떤 동경의 파문을 일으키곤 하였다.
달빛에 물들여가던 코스모스가 찬이슬 맞아가던 어느 새벽, 그 종소리를 좇아 나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 이 나섬까지 어린 나로선 엄청스런 용단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성품으로 봐선 도저히 용납하지 않으실 것 같고, 기미를 채시는 날은 당장 쫓겨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점을 보는 이를 집으로 불러들인다거나, 굿판을 벌이는 일은 아예 금기시(禁忌視)하였고, 나아가 어느 종교든 그에 빠져드는 것을 완강하게 경계하셨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그 즈음, 처음으로 ‘아버님, 어머님 전 상서’라고 시작한 장문의 편지를 쓴 적 있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그 은덕 어느 때에 갚으랴.’라고 한 옛 시인의 심경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써 놓곤 지우고 써 놓곤 지우기를 여러 차례, 집을 뛰쳐나와 엄동설한에 절룩거리며 방황하는 내 모습과, 그러한 나로 인해 사시장철 눈물로 지새울 어머니가 눈에 보여 제 풀에 누그러지고 말았던, 내 어린 날의 긴 애태움을 어이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중학생 때, 영남루를 거쳐 무봉사를 향해 올라가는 중 우연히 보게 된 관상에서 "학생은 여색에 쉽게 빠져 들 사주팔자라서 최소한 서른 살을 넘겨서 장가가야 하고, 그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외간 여자의 손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하며, 외간 여자의 손 한번 잡을 때마다 앞길이 3년씩 막힌다 하며, 무슨 종교든 하나의 종교를 가져야 어느 정도라도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있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러한 말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킨 게 없다. 그래서 그러한지 무엇이든 내가 바라는 대로 술술 이뤄진 게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사람살이에선 타고난 사주팔자를 온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일이 이어져 오는 것 같다.
평소에 절(寺院), 성당, 교회 가까이에서 머물기를 좋아는 하지만,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면서도 그 영역 안으로 쉬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가슴에 젖어드는 새벅 종소리 따라 선뜻 나설 수 없었던 내 소년 때의 기억 때문일까, 그 때의 요동친 갈등이 내 한 생에서 이렇게 깊은 골이 될 줄을 모른 채 살아왔던 것이다.
이젠 학교의 종소리, 교회나 성당의 종소리는 사라진지 오래 됐고, 새벽을 열어가는 절 종소리마저 쉽게 들을 수 없는 공간에서 오로지 내 맘에 젖어있는 그 종소리에 귀 기울여 가고 있을 뿐.....
이상과 현실이 괴리된 삶의 한 가운데서 긴 세월 용하게 버티어 왔다. 아집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는 일 없이 아우름과 이해하는 맘 팽개쳐 두고, 오기와 욕심 아니면 질시와 저주로 일관했던 내 삶이었기에, 새벽 기류를 타고 들던 그 종소리가 더욱 절실하기만 하다.
지은 업(業) 두고두고 버거워하면서도, 맘속에 껴 있는 짙은 파문들을 지금도 다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나의 겉과 속은 늘 이렇게 달랐던 것 같다. 나이 육십 줄에 접어든 이 고비에서나마, 내 맘의 신천지를 다시 열어 줄 그 종소리, 그 종소리를 언제 다시 들을 수 있으랴.
2003, 11, 3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