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로 쓰는 시
해돋이詩돋이 20210211
이모티콘 '찰깍'
(창령사터 오백나한)
최길하
옛 사람들은 돌을
그냥 돌로 보지 않고
나와 내 이웃으로 보았다.
어머니 치마 속에 숨듯
돌 속으로 숨기도 하고
돌 속에 숨은 나를 꺼내놓기도 했다.
돌에서 나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절에 갔다가
돌에서 나온 스님과 사진 한 장 찰깍.
<시상록>
재 넘어 어상천과, 재 넘어 영월의 경계인 창령사 터에서 발굴된 오백나한.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할머니, 바위 뒤에 숨어서 어떤 낯뜨거운 광경을
훔쳐보는지 반쯤 가려진 얼굴, 아주 쪼끔 언짢은 듯한 표정, 아주 순간적으
로 쪼끔 삐친 얼굴.
제천 송학 채석광에서 짜투리 돌들을 모아다가 동네 사람들을 만들고 신도
를 만들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만세다. 만세는 잘난 사람 못난 사
람 층계가 없다. 모두가 어울려 한 판 세상을 짜는 것이다.
천 년 전 쯤 나와 내 이웃이, 천 년 후 내게 카톡으로 이모티콘을 전송해
온다면 어떤 모습일까? 지금 나는 천 년 전 쯤 나와 내 이웃이, 천 년 후
내게 보내 온 이모티콘에 푹 젖어 있다.
수평에 가까운, 골과 마루가 축축 늘어진 마을 뒷산 같은 저주파의 리듬이
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안온한 고향 동네 사람들이다.
이모티콘이란 ‘정신줄 놓은’ ‘멍때리기’ ‘백치미’를 말한다. 표정도 표현이지만,
내게 보내온 천 년 전 나와 내 이웃의 이모티콘은 기쁨 속에 슬픔이, 슬픔
속에 기쁨이, 희노애락이 한 덩어리에 녹아 있는 참 묘한 표정이다. 抽象과
肖像이 혼재 된, 경계가 지워진 표정이다. 象과 像, 象이 像을 드러내고, 像
에 象의 구름이 아롱이는 것이다. 파와 파장, 물체와 물체의 아우라 후광이
반도체처럼 깜빡이는 것이다.
우리 공예 미술품은 부족한 표현이 오히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주
특이한 역설의 미학이다. 주로 역사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나, 역사가
크게 소용돌이쳐 바뀌는 전환기에 나타난다. 대충 만들어 조악한데 한편 넉
넉함이 비치는 것이다.
화려하고 정교했던 고려가 쇠퇴하면서 려말선초에 만들어진 분청자기가 그
렇고, 한말 해주가마 회령가마가 그렇고 달항아리가 그렇다. 운주사 천불천
탑이 그렇고, 바보산수가 그렇다. 이날치의 퓨전음악 ‘범내려온다’ utv가 그
렇다. 대칭과 비례미가 아름다움의 씨앗이라 하는데, 그 대칭의 질서가 무너
진 비대칭의 자유스러움, 의도 하지 않은, 만든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 머리
가 아니라 몸이 그렇게 궤도를 따라 간 비대칭 곡선. 이 아름다움은 말로 표
현 할 수가 없다.
이런 미학은 어디서 왔을까? 잠재된 저 깊은 저층의 내가 나와 그 작품 속
으로 나도 모르게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은하게 밖으로 비친 것이다.
밖으로 비쳤는데 안이 보이는 것이다. 波의 藏이 된 것이고, 후광, 아우라가
된 것이다.
시도 그렇다. 알뜰하게 다 표현 하려고 하니 속은 얕아져 드러나고, 호수는
작아진다. 부족한 것이 넘치는 것 보다 낫다. 비어야 누구나 들어와 자유롭
게 자기를 대보는 것이다.
우리민족은 돌과 나무가 신앙이었다. 부처님 예수님은 가공석이고. 뒷산 바
위가 원석이었다. 그게 내 탯줄 칠성님이다. 우리 탯줄은 뒷산 칠성바위에
달려있다. 그 원석으로 부처님도 관음보살도 마리아도 동네 순이 철수도
다 만들 수 있다.
얼굴에만 표정이 담긴 것이 아니라 옷 속에 감춰진 볼륨, 뭉개져 희미한 리
듬에서도 얼굴과 똑 같은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옴몸으로 활짝 번진 꽃, 은은
하게 삼라만상 희로애락이 한 덩어리에 녹아 있는 얼굴. 창령사 오백 나한은
천 년 전 나와 내 이웃이, 천 년이 지난 지금 내게 이모콘티를 보내 온 것. 언
어가 서툴다고 이모티콘을 보내 궁금함을 타진하는 그가 바로 천 년 전 나다.
첫댓글 민초들의 대단한 힘입니다.
그들은 오직 바람이자 소망이자 믿음으로 가슴속에 있는 나한을 밖으로 모셔온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