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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rl/ 한일우호 대표자회의(5월18일-20일) 연수 원본 < http://cafe.daum.net/dkzbaudgh/dW5M/68 >
2000년5월18일부터 20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한국교류단 일행이 일본 창가학회를 방문하여 선생님슬하에서 광포의 마디를 새기는 연수를 받고 돌아왔다. 대표단은 석남수 참의회 의장, 최종순 부지도장, 우영숙 부부인부장, 김영환 부이사장, 최낙준 부이사장, 김만수 부이사장, 최일출 방면장, 유긍무 전청년부장, 김태균 청년부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번 연수회를 일정별로 정리해 본다.
반담용녀/ 스승의 깊으신 자애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누군가 동지의 정의를 이용해 나를 속일지라도 나는 그 사람과 동지의 의를 지키리라.” 단결 제일로 사이 좋게 전진하겠습니다! |
● 연수회에 참석한 사람보다 위대한 사제맹세를 실천하는 사람이 위대
Rmsrl님께 감사드립니다. ‘한일우호대표자회 연수’ 소식은 처음 들었습니다.
반담용녀님도 스승의 깊으신 자애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도 마치 그 자리에 참석한 것처럼 스승의 자애에 온 몸이 감싸이는 느낌입니다.
오늘은 ‘한일우호대표자회 연수’ 소식을 마음에 색이며 3.16의식과 5.15지도의 맹세에 대해 대화하고 싶습니다.
3.16의식은 도다 선생님이 제자에게 광포의 일체를 의탁하는 광선유포 모의 의식입니다. ‘한일우호대표자회 연수’는 이케다 선생님이 한국제자에게 5.15지도의 실천을 의탁한 사제맹세의 의식입니다.
‘연수’에 참석한 사람과,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다르지만, 누가 참석했느냐 보다 이 위대한 사제의 맹세를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경법중의 행자에 있어서는 하열의 법사라 할지라도, 당여경불의 도리에 따라서 신경을 해야할 것”(어서 1618쪽) 자신의 몸을 던져 광선유포에 헌신하는 행동의 사람을 입장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존경해 가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신경법중으로 대성인의 불법을 행하고 넓히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개혁을 위해 투쟁하시는 여러분들입니다.
● 도다 선생님이 제자에게 광포의 일체를 의탁하신 3.16의식
모든 의식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16의식은 도다 선생님이 제자에게 광포의 일체를 의탁하는 광선유포 모의 의식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오늘 나는 청년부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다.미래는 여러분에게 맡긴다. 부탁한다. 광선유포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3.16기념일이 오면 내 가슴은 불타오른다. 아니, 내게는 하루하루가 3.16이었다. 날마다 은사와 대화하고, 은사에게 맹세하며, 은사와 함께 투쟁했다. 한순간도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스승에게 보은하는 여로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스승이 제자에게 5.15지도의 실천을 의탁한 한일우호대표자회의
2000년 5월 18일 일본 학회본부에서 개최된 한일우호대표자회는 이케다 선생님이 한국의 제자들에게 5.15지도의 실천을 의탁하신 날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본 학회본부의 대표
와다 이사장, 야마자키 부회장, 하라다 사무총장, 기타노 사무총장, 츠츠미 부회장, 아키야마 부인부장 등
한국의 대표
석남수 참의회 의장, 최종순 부지도장, 우영숙 부부인부장, 김영환 부이사장, 최낙준 부이사장, 김만수 부이사장, 최일출 방면장, 유긍무 전청년부장, 김태균 청년부장
이 자리에는 새로운 지도체제의 소개가 있었습니다. 연로하신 이즈미 지도장이 교체된 내용과 새로운 한국담당의 소개가 이어졌습니다.
야마자키 부회장(장년부), 아키야마 부인부장(부인부),
스기야마 부남자부장(남자부), 고야나기 여자부서기장(여자부)이 부서별 한국담당으로 정해졌고, 한국문제 상담은 하라다 사무총장, 한국 연락담당은 츠츠미 부회장과 기타노 사무총장으로 체제가 갖추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분들에게 5.15지도의 실천을 의탁하셨습니다.
● 3.16의식과 5.15지도의 실천을 위한 한일우호대표자회의
(1) 3.16의식: 지금부터 58년 전 1958년에 3월 16일, 전국의 청년부 6천명이 이른 새벽부터 스승이 계신 곳으로 모였습니다. 도다 제2대 회장은 이날 제자에게 광선유포의 일체를 의탁하는 광선유로 모의의식을 진행했습니다.
도다 2대 회장은 쇠약해진 몸으로 걸음을 옮기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제자가 준비한 거가를 타고 청년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전 혼을 다해 사자후 하셨습니다.
“창가학회는 종교계의 왕자다”
“오늘 나는 청년부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다. 미래는 여러분에게 맡긴다. 부탁한다. 광선유포를!”
그 후 58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의 활약에 의해 SGI는 196개 회원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2) 한일우호대표자회의: 지금부터 16년전, 2000년 5월 18일, 한국SGI 대표가 모여 5.15지도의 실천을 위한 사제맹세의 한일우호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대표로 참석했던 간부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석남수 참의회 의장, 최종순 부지도장, 우영숙 부부인부장, 김영환 부이사장, 최낙준 부이사장, 김만수 부이사장, 최일출 방면장, 유긍무 전청년부장, 김태균 청년부장
지금 이들은 그날의 맹세를 잊고 악에 영합하고 있습니다.
● 2000년 와다이사장 일행과 한일우호대표자 간부들의 활동
(1) 2000년 5월 18일, <한일우호대표자 연수>의 내용은 아래 게시글을 참고하면 됩니다.
< http://cafe.daum.net/dkzbaudgh/dW5M/68> 두 시간 반 동안의 역사적인 <신생한국>의 새 출발을 기념하는 회식이 선생님의 자애 속에 성공리에 마치게 되었습니다.
(2) 2000년 6월 4일,< 전국방면장회의>에서 5.15 지도를 발표했습니다.
< http://cafe.daum.net/dkzbaudgh/YvGS/724> 여기에서 5.15지도를 화광신문에 게재했어야 했습니다. 집행부는 비리를 막기 위해 5.15지도를 숨기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3) 2000년 6월 5일,< 와다이사장과 간담회> 유긍무외 9명이 참석하였습니다.
< http://cafe.daum.net/dkzbaudgh/dW5M/61>
(4) 2000년 6월 5일, 광선회관에서 개최한 <광역지도회>
< http://cafe.daum.net/dkzbaudgh/dW5M/64> 여기서도 5.15지도가 발표되지만, 화광신문에 게재하지 않았습니다.
(5) 2000년 7월 23일, 광선회관에서 <신생한국위원회 결성식(신한위)> 와다이사장 참석, 4부대표(여:박기연, 남:김응석, 부:박순자, 위원장: 유긍무)
(6) 2000년 7월 23일, <제1회 신생한국위원회 개최> 불교회 집행부의 비협조로 신생한국위원회는 1회로 끝납니다. 와다이사장 일행의 활동을 보면,
일체 포커스는 유긍무 신한위 위원장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 2001년의 활동
(1) 2001년 1월, <여상락씨가 한국SGI 5대 이사장에 선임>
(2) 2001년 2월, <집행부는 이종달 방면장을 시켜 와다이사장 일행을 내정간섭이라고 협박하게 하고, 모 지방신문사 사장을 시켜 선생님을 협박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3) 2001년 3월, <감사보고서 공개파문>
감사들은 20억원 불법유출 등의 금전적문제와 프린스호텔 매입, 신본부동 3자 매입과 관련된 건설비리, 불교회 조직의 불합리한 의결제도 등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4) 2001년 5월31일, <부인부의 나홀로 시위> KSGI본부 정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재단법인설립, 부동산매입, 현창사업 등의 부패한 사실에 대한 금전적 손실, 부적격 묘광건설 본부동 건립 중단, 등을 외치며, 피켓을 든 부인부의 나홀로 시위가 시작됐읍니다.
(5) 2001년 6월 6일, <신한위와 선의연대 회원 구로회관 앞 시위>
6월 6일 한국SGI본부 앞 인도에서 600여명의 전국 선의연대 회원이 모여 불교회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에 신한위 대표자와 대구간부등 19명은 여상락 이사장과 16개항에 걸친 합의 사항을 도출,
이후 집행부는 중앙회의를 소집 16개항의 합의 사항을 무효화시켰으며 신한위대표 등 8명을 제명하였습니다.
● 전국 총현장 메시지(2000.6.30)와 와다이사장 일행의 패배 요인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2000년 6월 30일 전국 총현장 메시지에서 <나일강 전투/ 나폴레옹과 넬슨>에 대해 말씀하시며, 패배한 나폴레옹군의 오판과 방심에 대해 지적해 주셨습니다.
< http://cafe.daum.net/dkzbaudgh/dW5M/69>
이 지도는 당시 한국에서 5.15지도의 실천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와다이사장 일행에게
투쟁에 임해 ‘오판과 방심’은 금물이라고 엄하게 지도하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지도에도 불구하고 와다이사장일행은 한국의 싸움에서 패배했고 철수해야 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월월(月月)·일일(日日)·강성해 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解弛)한 마음이 있다면 마(魔)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
“사광(師曠)의 귀·이루(離婁)의 눈과 같이 듣고 보시라”(어서 1448쪽)
광선유포의 싸움은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로 끊임없이 선수(先手)에 선수를 써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연대’를 밀접하게 취하여 이체동심으로 단결해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니치렌 대성인은 세세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총현장의 메시지를 근본으로 와다이사장 일행의 실패 요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 와다이사장 일행의 실패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위의 와다이사장 일행의 활동을 보면 인사의 실패와 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 그리고 방심이었습니다.
(1) 인사에 대한 실패
신한위 위원장 유긍무, 5대 이사장 여상락, 총장 김인수에 대한 인사 실패입니다.
신한위 위원장은 진상규명이라는 막중한 힘을 갖고 있었음에도 싸우지 않았습니다.
위원장의 신뢰가 인기영합의 신뢰인지, 사제정신에 의한 신뢰인지, 그리고 95사태의 원흉인 박덕현, 박재일과 어떤 관계였으며,
95사태를 지혜롭게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인지 등의 정보가 부족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상락, 김인수는 박재일과 불법파괴의 공범자입니다.
이들은 가책하고, 규탄하고, 추방해야 할 불법 파괴자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여상락을 이사장에 임명하고, 김인수를 총장에 임명했다는 것은, 설마 이들이 선생님의 5.15지도를 반대하고 사적대를 하겠느냐 라는 방심이었을 것입니다.
(2) 상황 판단에 대한 오판과 방심
▶ 5.15지도 발표 후 화광신문에 게재하지 않은 방심입니다.
< 2000년 6월 5일 와다이사장 간담회>에서
와다이사장은 참석자들에게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한국협의회에서 해결할 테니 기다려라. 2~3개월만 기다리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집행부라는 참성증산만에 대한 잘목된 판단이며 방심었습니다.
▶ 불교회 집행부의 비협조로 <신생한국위원회>가 1회로 끝난 것입니다.
진상규명이라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위원장이 싸움을 포기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이권 관계인지, 겁쟁이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와다이사장은 즉시 위원장을 교체하던가 부위원장을 임명하여 진상규명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방치하여 스승이 만들어주신 신한위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 5.15지도를 내정간섭이라고 스승을 협박한 집행부의 사적대 행위입니다.
방면장 회의에서 이종달 방면장이 “‘와다 이사장의 지도를 거부한다’ 면서 한국에서 물러갈 것을 주장했고, 이어 ‘언론을 통해 내정간섭을 폭로하겠다’고 SGI를 내정간섭으로 협박하며, 신한위를 불법단체로 규정”했습니다.
방면장 회의에 참석했던 ‘한일우호대표자회 연수’에 참석했던 대표자를 비롯한 전국 방면 사부들이 모두 침묵하며 와다이사장 일행을 외면했습니다.
스승의 지도를 외면한다는 것은, 신심 혈맥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마침내 와다이사장 일행의 배는 이러한 집중포화를 맞고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 맺음 말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도다 선생님은 항상 역사의 사상(事象)을 통해서 ‘승리와 패배’ ‘흥륭과 쇠망’을 판단하는 요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면서 ‘장군학’‘지도자론’의 정수를 가르쳐 주셨다.”고 하시며, 200년 전의 <나일강 전투의 드라마>는
지금도 여러 가지를 말해 주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나일강 전투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프랑스 함대 중 아직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던 두척의 함대가 도망친 사실입니다.
이들 함대가 용기를 내어 싸움에 가담했다면 전쟁 국면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지 명령을 기다리고 우유부단하게 방관할 뿐 마지막에는 도망쳐 버렸습니다.
2001년 2월 방면장 회의에서 ‘한일우호대표자회 연수’멤버들이 이종달의 망언을 가책하며 5.15지도의 실천을 외쳤다면 95사태의 국면은 바뀌었을 지도 모릅니다.
싸우지 않고 5.15지도 이외에 특별한 지도가 있을 것이라고 기다리던 간부들도
끝내는 변절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의 개혁을 위해 알아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민감한 문제이니 여러분들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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