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골목길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박근형 작, 연출)
2019, 7, 5. 나우씨어터.
예전에 KBS에서 주말에 하던 단막극장 본 듯한 느낌.
연출가 박근형, 인터넷에서 이름을 확인해 본다.
"연극협회 신인 연출상, 평론가협회 작품상,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동아연극상 희곡상 등 다수의 연극상 수상. 현재 극단 골목길 대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출과 교수.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 연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가끔 목소리가 약하게 들린다 싶을 정도로 힘을 있는대로 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두어 번 대사가 엉키고 먼저 치고들어오는 부분이나 이름을 틀리는 등의 옥의 티도 있었던 듯.
연출과 연기에서 한예종 연출 (영화) 감독들의 공통적 특징이 보인다, 그러면 과한 일반화긴 하겠으나, 생각이 나는 건 사실. 힘 다 뺀 일상적 연기, 희극은 분명 아니지만 관객들에게는 웃음을 유발하는 중간중간 연주자의 등장처럼 좀 코미디 혹은 환상 같은 장치 등.
배우들의 연기에서 연극적 상황을 가능한 탈색하려는 연출가의 의도가 분명해 보이는 연기와 대사. 반복해서 들려오는 김민기의 귀에 익은 음악이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다. (노래는 귀에 익었으나 제목은 몰랐다. 나중에 함께 본 동호회 분이 "가뭄"이라고 알려줬다.) 찾아 다시 들어보니 노래는 이미 곡명은 물론 가사가 이 연극의 서사를 통해 전달하려는 의미를 담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간중간 등장한 연주자, 백구 역할의 여배우도 관객들의 웃음을 불러왔으나 연주자는 좀 튀었고, 백구는 마지막에 재철의 자살과 대비되는 새끼 출산 장면을 강조하기 위한 점이라는 면에서 이해할 만.
재철의 자살은 "Surprising ending scene"인 동시에 개연성 인정할 만 하지만 재철 부인의 자살에 대한 암시는 개연성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물론 처음부터 역을 맡은 방은희 배우에게서 어두운 기운의 비극성을 풍긴 면은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있는 상황이나 인물의 성격으로나 조금 나간 것 같다는 인상.
대사 속에 등장하는몇몇 오브제와 재철의 성범죄 상황을 제외하면 7,80년대 상황이라고 해도 충분할 배경과 상황.
관객들에게 과하게 의미부여 강요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연출과 힘 최대한 뺀 배우들의 연기 아닌 듯한 편안한 연기만으로도 시간 비용 아깝지 않은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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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 이 글과 관련된 이여기가 좀 진행되어 덧붙이는
글.
내가 저 극을 보고 난 다음 내용에 별로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사실 납득이 잘 안 가고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다.
글에서 썼던 것처럼 재철의 자살은 개연성이라도 인정되지만 재철 부인의 암시된 자살은 여전히 개연성도 선뜻 인정하기 어렵다.
이 극에서 중요한 한 축--사실 후반부 전체의 극을 이끌어간 주요 사건이기도 하다--인 재철의 몰락과 마지막 자살이라는 결말은 충격 이외의 어떤 연민이나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부여한 걸까. 나는 그 어떤 것도 사실 재철의 죽음에서 느끼지 못했다, 죽음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 말고는.
비극에서 취하지 말아야 플롯 가운데 하나가 관객들에게 당연한 죄값이라 여길 수 있는 악한 인물의 몰락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옛 말을 꼭 여기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재철의 죄도 죄거니와 그에 따른 결말이 관객에게 얼마나 공감을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극에서 더 많이 눈에 든 것은 재철 부모였다. 아들이며 형이며 아기를 안은 조카며느리까지 마지막으로 찾아든 그들이야말로 이 극의 진짜 주인공이며 또 연극이 의도하는 비극성을 관객에게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모두에게 그렇지만 특히 이 둘에게 가문 여름은 더웠으며 다가올 길고 긴 겨울은 끝이 없을 듯 하다.
한 가지, 사실 이 부분이 진짜 극에서 말하려는 혹은 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면이자 관객으로서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 나름의 죄--형의 도박, 재철의 반복된 성추행--, 결함--조카며느리의 무지, 집배원의 위선과 불륜--, 그리고 분노--재철의 부인--를 지닌 인물들 모두에게 인간적 면모가 분명하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재철은 자신의 죄를 책임질 줄 알고, 형은 철없는 조카며느리를 내치지 못하며, 집배원은 아들 없는 동생 부부 집에서 아들 역할을 한다. 재철 처가 마지막으로 재철과 시부모를 찾아와 재철의 모친, 자신의 시어머니와 작별하는 장면은 그들 사이의 인간적 관계를 보여준다. 아들의 자살과 며느리의 (암시된)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 할 재철 부모와 다른 인물들 앞에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무더운 여름과 긴 겨울을 보는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큰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기도 할 터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