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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내이름을 두리라하신 곳/대하 6:18-31
성경본문 : 역대하 6:18-31
18.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19.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0.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1.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22.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하므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23.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대로 갚으시옵소서
24.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25.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와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26.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27.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28.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29.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30.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31.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며 주의 길로 행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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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외견상으로 볼 때에 태평 성세를 이루고 역사적 황금시대에 도달한 때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 부왕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여 나라를 치세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던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되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정권이 쇠퇴해지면서 그의 육체도 쇠퇴해져 왕으로서 직임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전개될 것을 알고 왕위를 넘나보는 자들의 치열한 암투가 보이지않게 진행되었고 무서운 경합현상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부왕이 살아있을 때 아들 중에서 연장자였던 아도니야는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을 위해 충성하고 있던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참으로 지지하고 나섰으며 그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집회 추진을 안암리에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솔로몬을 지지하고 있던 선지자 나단은 이 정보를 솔로몬의 어머니였던 밧세바에게 알리자야심과 욕망에 차있던 밧세바는 나단과 제사장 사을 앞세우다시피 하여 지지 기반을 굳히고 다윗에게 자기와 약속했던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욕심에 찬 야심을 묵살하고 있었지만 솔로몬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세울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을 지지하던 제사장 사독은 왕의 명령을 따라 {기혼샘가}- 예루살렘 동문밖 <기드론>골짜기에 있는 성천(거룩한 샘이라 불리워짐)-에서기름을 붓게되자 백성들이 솔로몬 만세를 부르며 왕위계승을 기뻐하여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왕하1:38-39)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조상의 가는 길로 가기전까지는 정적들을 제거하지 않다가 아버지가 하나님 품으로 가게되자 하나둘씩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는데 이에따라 제사장 아비아달은 숙청되고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은 솔로몬을 지지하던 브나야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 후 솔로몬은 정치를 반대하는 자 없이 왕국을 잘 치리해 나감으로 정치적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하여 나라를 눈부시게 발전시켜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평화와 번영의 통치를 하였고 속국시대에서 벗어나 아람,암몬, 모압, 블레셋, 에돔 등지를 통치하여 조공을 받아내는 지배국으로 등장시켜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국제적인 도시로 격상시켰고 그 자신은 세상적인 명예와 성공보다는 지혜의 대왕으로 불리우는 평판을 얻어냈으며 문학적 소질과 자연의 탐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3천 잠언과 1천5개의 노래를짓는 훌륭한 시인과 같았으며 예루살렘에 성전과 왕궁을 화려하게 지어놓으므로 이스라엘의 위용을 만방에 알리는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본론>
특별히 그가 아버지 왕도 해내지 못했던(거룩한 성전을 짓는 손이 전쟁으로 인하여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나님께로 부터 허락을 받아 최선을 다하여 지었다는 일은 대단히 놀라운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성전을 지을 때에 속국으로부터 바쳐진 조공과 두로와 시돈 그리고 레바논에서 온 건축자재와 기술자를 동원하여 사람의 입술과 글의 현으로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그리고 형용할 수도 없는 웅장하고 엄한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성전 안의 식한 내용물을 설명한다고 하는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할 정도였습니다.
성전의 마루와 벽 그리고 왠만한 내용물은 순금으로 씌워 장식하였고 제사장들이 사역하는 외소와 1년에 한번씩 그것도 정해진 날에 대제사장만이 어가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지성소와 복도,제사드리는 장소 또는 마당은 으로 놀라운 식양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은 역대 열왕 가운데서도 더 아가서 솔로몬 이후에도 이렇게 위대한 성전은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광야교회처럼 하나님께서 식양의 모든 내용을 일일이 하나씩 모세에게 명령하여 성막을 짓게 했던 것처럼 모든 것 전부를 성령께서 친히 다윗에게 양을 허락하셨는데 다윗은 이 식양을 아들 솔로몬에게 넘겨주어 그대로 축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역대상28:11-19참조) 이 일은 솔로몬이 행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역시 오늘날 현대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이요, 그 다음으로 교회가 할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은 성전 건축이라고 말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전 짓는 일은 어느 시대이든 위대한 일이지만 아무때나 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아무에게나 허락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전의 용도와 목적과 전 성격에 따라 하나님은 달리 역사하고 계시며, 성전건축을 하고 싶은 가 있다고 또 건축하고 싶은 주의 종과 성도들이 있다고 아무렇게나 허용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어질 수 있는 일이라면 삯군목자를 통해서 그리고 개인의 영리를 위한 불신자들을 통해서 교회는 아무때나 어떤 자들을 통해서라도 지어질 수 있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우리는 성경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또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배드리는 일만을 전용으로 하는 본당과 교육관, 사명을 감당하는 교육관과 신앙수련과 기도하는 일들을 감당케하는 기도원과(교회에 따라서 수양관으로 명명되기도 함) 약간은 성격이 다른 용도로 쓰여질 도있는 수양관을 들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부흥에 따라 규모가 커지면 선교관 사명을 완수키 위한 선교관도 지을 수 있으며 기념관과 지관도(병원,학교,고아원,양로원등) 짓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교회의 사업 중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꼽힐 수 있는 나님의 일 중에서 본당과 교육관을 이미 지었고 이젠 수양관을 건립하려는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이에 라 우리의 가진 것을 아낌없이 드리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도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중심으로 당회원 장로님들과 모든 제직 그리고 온 성도들이 더 나아가서는 교회학교 어린이들도 돼지 저금통을 털어서 하나님께 리는 지혜를 발휘하여 성전을 짓게 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과 영혼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므로 우리의 가진 재물을 아낌없이 바쳤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세상의 어지러움과 복잡함 속에서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기적들과 축복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역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과 은혜의 축복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기 위하여 지금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관심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가진 재물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싯점에 이르러 있는 단계에서 우리가 말씀 안에서 무엇을 깊게 깨달아야 하는지 함께 생각하면서 영적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이 땅위에 자신이 거할 처소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세상에 흩어져 살게 하시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가장 거룩한 곳을 지시하시고 그곳에 가장 거룩한 건물을 지어 우리로 그곳에 거하게 하시사 하나님을 위한 가장 거룩한 신앙적 행위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적인 본성을 지니셔서 인간의 눈에 보이실 수 없는 자존자시요 지존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이 땅의 장막과 같은 성전에 거하시기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성적 판단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단히 쉬운 말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요 이말 을 더 쉽게 하자면 하나님의 가정이라는 말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가옥이라는 의미도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처럼 눈. 비바람이나 또는 일기상황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할 육체가 있는 분도 아니신 하나님께서 왜 자신이 거하실 집을 원하시는가? 성경적 인면에서 엄격하게 구분하여 본다면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장소는 예배자 자신이 있는 곳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예배드리는 장소는 예루살렘 만이 아니라 어떤 곳일지래도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경외하고자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한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곳,그곳이 바로 예배 장소일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예배할 장소는 아브라함이 예배드리다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난 모리아산도 아니고 불로 응답받아 이방인 선지를 모조리 시냇가에서 쳐죽인 불의 종 엘리야가 예배드린 갈멜산도 아니요 사마리아인들이 자주 예배드리던 그리심산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산에서도, 야곱처럼 돌베개하고 자다가 꿈속에 하나님을 만나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다"라고 외친 광야에서도, 시시때때로 옮겨다니며 장막을 쳐 예배드린 성막교회에서도, 때로는 태양빛 하나 스며들어 오지 않는 습하고 어둡고 곰팡이 핀 <카타콤>이라고 불리우는토굴 속에서도, 창문도없이 출입문만 있는 오두막 집에서도, 또는 아방궁 같은 궁궐에서도 하나님을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곳들이 예배장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극히 고무적인 영적인 자세와 세상의 어떤 장소나 어떤 건물과는 달리 성별되어진 그리하여 그곳을 함부로 대하거나 그곳에 들어온 자가 안일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요구하시는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거룩한 어떤 건물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소음이 있고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만나 주시지만 하나님이 직접 피조물로부터 영광받으시기로 정하신 때에는 거룩한 장소에 세워진 거룩한 전에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은 한적한 곳일 수도 있어야 하며 세상의 잡다하고 시끄러운 소음으로부터 차단되어진 그리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예배하며 그 성전에 들어가면 어지럽혀진 우리의 마음이 한데 모아질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날 수있는 특별한 장소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도하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살아계심을 바로의 왕궁안에서도 보이시고 황량한 광야에서도 나타내 보이셨지만 신앙적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서는 아무데서나 행하여도 된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광야에 세워둔 성막교회에서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어느 곳에 가면 산란하고 흐트러진 마음이 생겨나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어느 곳에 가면 정서가 불안해 지고 어느곳에 가면 숙연해지며 어느 곳에 가면 마음이 흥분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즉 건물의
성격에 따라 또는 모임의 성격에 따라 영혼의 자세와 마음의 태도에 따라 달리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동안 호텔에 있을 때, 다방 안에 있을 때, 극장 안에 있을 때, 레스토랑에 있을 때, 그러나 우리가 성전 안에 있을 때와 수양관 안에 있을 때 어떤 느낌을 갖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되어지고 생기가 있는 마음의 상태로 예배드릴 수 있는 처소를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거룩한 힘을 갖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그러한 건물을 가지므로서 더욱 큰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론이란? 신학적 깊이로 들어가서 성경의 많은 말씀들을인용하여 교리적으로도 말할 수 있어야 하지만 또한 매우 평범하게 나타나고 있는 성경의 흐름을 위와같은 견지에서도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특별히 하나님께서이 땅위에 세워둔 여러가지 교회모범과 여러가지 형태들의 교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광야에 세우신 성막교회, 다윗의 피흘린 손보다 평화를 만들어 낸 솔로몬의 손을 통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 인간의 마음 내킴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성령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세워진 초대교회, 그리고 이제는 어느 시대나어느 곳에든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진 수많은 지상 교회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일중 가장 가치있고 가장 소망된 일이 무엇인가?
본문은 아니지만 본문이 기록된 배경,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전을 짓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의 모습을 살펴보면 6장1-17까지 말씀 속에서 반영해주는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서 가장 가치있고 소망된 일이 있다면 그 일이 어떤 일인가 하는 문제을 제시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6:8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내게 있는 것이 좋도다." 하나님의 전을 짓기 위하여 수많은 값진 보물들이 드려지고 수많은 시간들이 드려지고 수많은 인간의 지혜와 땀과 노력과 기술들이 한 분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쓰여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전은 민족 정신의 핵이 되는 산실이 되었으며 가장 영광스러운 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솜씨가 아무리 정교하고 값이 비싼 내용물로 꾸며 졌을지래도 솔로몬 자신의 이름을 빛내기 위한 성전 이었다면 그 진정한 가치는 한낱 건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나 하나님을 위하여 지은 전이기 때문에 값
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장 가치있는 성전이 되었으며 훗날에 가장 큰 소망의 터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포로생활 속의 이스라엘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가 차면 우리는 소망의 성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져 버린 성전과 성전을 중수하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뵈옵게 될 것이라고 희망적 대선언을 선지자들이 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선지자들의 예언 멧세지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70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성 그리고 소망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리라고 확신하면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에는 살아서 70년 후에 돌아올 수 있는 연령은 많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되면 돌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있는 곳이 예루살렘이요 그 곳이 바로 성전이었기에 70년의 포로생활을 지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포로기간이 지나면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은 얼마나 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2세들이나돌아올 수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소망삼고 고통의 70년을 견디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짓는 일이 가치있는 일이요 가장 소망된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그러한 생각만 품어도 좋다고 칭찬하신 하나님, 이러한 성전을 짓기위해 기도를 드리고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깨우치시는가를 배우기 위해 예배를 드리며 그 일을 위해 우리의 가진 소유물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적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는 일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성전의 벽돌을 하나둘씩 쌓아올라 가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얼마나 소망이 넘치는 일입니까? 그 성전이 지어져갈 때 분명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성전도 지어져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성전은 무너질 수도 있으나 그들 영혼 속에 남아있는 성전은 무너질 수 없으며 영이신 하나님이 항상 영혼의 성전에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내 이름을 두리라 하신 곳이 어디인가?
우리 한국교회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지만 부흥과 발전에 역행되는 일들 또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운데 하나가 정통교회를 이단교회가 여러모로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과 정통교리를 이단교리가 침투해 들어와서 혼잡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처음부터 이단자로 출발하는 경우의 이단도 있지만(이런 상태는 대부분이 기독교 밖의 이단) 대부분이 정통한 교회에서 말씀의 떡을 떼어먹고 자라다가 신비주인 신앙체험이나 개인적인 욕구충족을 위하여 이단적인 요소를 안고 뛰쳐 나간다고 하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이러한 맥락이 정통 기독교회를 무섭게 뒤흔들고 있는 요소의 하나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기도원 운동인 것입니다. 물론 기도원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영적인 힘을 공급 받았었고 무릎으로 걷는 신앙인들이 되게 했다고 하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교회 이름의 배경이 없이 즉 교회를 근거로 하지 않고 기도원만 하나 덜렁 세워서 운영해 나가는데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어느 정통 교파인 교단에 소속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신학적 제약이나 교리적 규제도 받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과 기도원의 가르침이 달라 한국교회를 이원화시키는 장본인 역활을 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론>
교회는 모든 것을 성경에 기록한 말씀을 근거로 가르치며 그 말씀만이 유일한 신앙인의 최고의 법이라고 선포해 왔으나 기도원에서는 신앙 체험을 중심으로 하다보니 신앙 체험이 말씀의 법 위에 올라서 버리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나타난 방법이 아닐지래도 성경에 기록한 말씀에 근거하지 않더래도 역사만 일어나면 괜찮다는 위험한 신앙 발상을 성도들에게 은연 중에 심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40일 금식기도로 무장한 사람이라면 엉터리 설교를 해도 그대로 믿어버리는 신앙적 기현상이 일어났으며 그런 사람들에게 영계의 거성이니 불의 종이니 신유의 종이니 능력의 사자니 하는 또 하나의 다른 이름들을 붙여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과 체험은 항상 일직선상에 있어야 하는데 체험의 가치를 말씀의 가치보다 더 높여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도원 운동뿐만 아니라 부흥운동도 마찬가지로 상호보완 작용을 했던 맥락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치만 우리는 지금 이러한 위험부담을 덜어버릴 수 있는 그리고 그러한 배경적 요소를 없앨 수 있는 정통한 교회에서 정통신학을 하신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한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세워서 우리가 운영해 나갈 매우 건전하고 말씀의 바탕위에 세워진 기도원과 같은 수양관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전한 기도원운동을 전개해 나가며 식어져 버린 영적 가슴을 뜨겁게 달구며 무릎으로 걷는 참된 능력있는 신앙인을 만들기 위한 아름다운 전으로 가꾸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수양관에 이름 두시기를 거절치 않으실 것이며 부르짖을 때마다 우리를 만나주시므로 응답의 동산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얼마나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일인지요? 또한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요? 특히 육체가 이단교리나 영에 붙들리면 질병이 생기고 정신이 붙들리면 정신질환자가 되고 영이 붙들리면 이단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 중대한 신앙적인 문제가 우리 앞 길에 놓여 있는데 이러한 일이어찌 감사의 조건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이 일을 솔로몬에게 허락하시고 그 일을 위임받은 솔로몬이 그 큰 성업을 이루고 난 후 하나님께 봉헌 하면서 정말로 은혜로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날이 머지않아 우리의 현실 앞에 나타날 때가 가까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히브리시대에는 성막 안에 거하시던 하나님, 후에는 성전 안에 거하시던 하나님, 이제는 모든 육체가운데 성전을 삼으시고 계시는 하나님의이름을 우리의 수양관에 두고 그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앞장 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출처 한서노회(http://cafe.daum.net/har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