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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전통상례와 그 사회·문화적 함의 (- 인암 박효수 선생의 유림장 사례) |
박성용(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차 례
1. 서 언 2. 유림장과 유월장 3. 문중조직과 학통 4. 유림장의 절차 5. 죽음의 표상 6. 유림장에 나타난 영혼관 7. 슬픔의 의례적 표현 8. 묘소의 사회공간화 9. 결언
1. 서 언
지역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나타내주는 상례에 관한 연구는 망자와 관련된 이들이 행하는 전반적인 의례과정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내재적 의미를 규명할 수 없다. 지역민이 상례 수행과정에서 그들이 행하는 의례와 의례적 행동, 영혼관, 묘소공간 등은 지역과 문중, 학통, 계층 등에 따라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한 양반계층의 상례라도 가문가례가 하여 상이한 것이다. 이러한 상례에 관해서는 이미 인류학과 민속학, 고고학, 문학 등의 분야에서 다양하게 논의한 바 있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구석기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묘제와 매장법을, 문학분야에서는 작품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를, 인류학에서는 죽음의 상징성을, 민속학에서는 죽음과 관련한 민속관행과 그 의례절차 등을 연구해온 바 있다. 특히 민속학과 인류학 분야에서는 익명의 민과 사대부 집안에서 행한 상례관행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죽음을 인식하는 민의 시각과 주검 처리법에 관한 연구작업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진행과정으로서 죽음이 갖는 특징과 지역성, 그리고 계층별 상례관행에 나타난 죽음의 표상과 死者에 대한 의례적 실천방식에 등에 관해 풍부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연구가 시도된 바는 그리 많지 않다. 또한 각 계층별 상례와 죽음의 관행에 관한 민족지 자료를 풍부하게 집적된 상태도 아니다. 한 지역민의 상례에 관한 민족지적 조사·연구는 죽음과 관련된 의례와 의례적 행동, 집단의 언설들이 어떻게 상호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지역과 계층마다 행해지는 상이한 관행에 내재하고 있는 지역민의 문화적 범주와 사회적 논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줄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 다룰 儒林葬은 죽음과 관련된 언설과, 집단적 태도, 의례과정에 나타난 사자의 영혼에 대한 산자의 인식, 매장 공간의 사회적 의미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社會·文化的 事象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儒林葬의 사회·문화적 실상에 관한 전적이나 사료, 민족지적 기술 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러한 상례가 지역적으로나 국가적 차원에서 드물게 치르지고 전통적 관행이 크게 변화하여 3년 상을 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초종부터 길제에 이르는 의례절차를 정세하게 관찰·기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청도 지역사회를 지속적으로 조사·연구해오던 중 이서면 신촌리에서 박효수 선생(1906-1996)의 유림장이 거행되어서 이를 대상으로 지역사회의 상례 특징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다음은 유림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를 일부 기술한 것이다.
2. 유림장과 유월장
유림장은 유림에서 학덕이 높은 선비에 대해 숭앙하는 의미에서 발의하여 지내는 장례식이다. 유림에서는 고인의 장례식 하루 전날 전국 유림의 책임자들이 모여서 박효수 선생의 장례식을 유림장으로 치를 것을 결정한 바 있다. 유림장은 장례식을 달을 넘겨서 지낸다는 의미에서 踰月葬의 형태를 띈다. 유월장은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때에 멀리까지 부음을 전하고 문상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임종한 달의 그믐을 넘겨 葬事하는 장례이다. 죽은 달을 넘겨서 치르는 장례의식이다. 유월장은 중국의 韓나라 시대의 禮書에 대부는 3월장을 지내고 하급관리인 士는 유월장을 지내도록 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선비는 신분을 가진 이가 아니지만 전국을 단위로 서로 학문을 논하고 교의하는 이가 많아 유명한 이가 죽으면 제도상 급박하게 상례를 치를 수 없어서 달을 넘겨서 지낸다는 의미에서 유월장이라 하였다. 오늘날 유가에서는 유월장을 지낸 일이 있는데 창녕, 진주, 산청, 합천에서 행해 진 바가 있는데 특히 산청과 합천에서 행해진 김황과 권용현 선생의 장례가 바로 그것이다. 유림장은 본래 석달 만에 장례를 지내게 되어있다. 이 달에 죽음을 맞이하였다면 한 달을 지나가고 그 다음 달에 지내야 한다. 그런데 박효수 선생의 유림장은 유월장 형태로 행하였지만 상례 를 치르는 기간이 축소되었다. 이와 같은 의례기간의 변화는 의례수행자가 새롭게 산업사회의 기술적 시간의 관행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고인의 둘째 상주가 공직에서, 그리고 셋째 상주가 한약방을 하다보니 그 예법을 모두 따르기란 도저히 무리였다. 그리하여 유월장을 지내려면 최소한 15일은 지나야 하는데 공직에 나가지 않고 행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달이 바뀌는 정도로 상례를 치룰 수 밖에 없었다. 즉 휴직을 하지 않고 행하는 방식으로는 이것이 최선일 수 밖에 없었다. 풍수를 통해 장례를 치르는 좋은 날을 택하니 15일 만에 돌아와서 할 수 없이 보름장을 하게 되었다. 상주의 말에 의하면 연초에 3일이 공휴일이었고 또 토요일과 일요일이 있었기 때문에 상례를 치를 수 있었다 한다. 이렇게 기간을 단축하여 지내자 전라도, 충청도, 등지의 유림에서는 유림장이란 3달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데 대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다. 청도 향교에서는 이미 김황 선생의 유림장에서도 3달을 하지 않았던 예가 있어서 그렇게 행한 것으로 성균관에 보고하였다 한다. 유림에서 유림장을 결정하게된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유림장이란 유림에서 장례를 치르는 의례이다. 지역 유림에서 유림장으로 거행할 수 있는 자격을 논한 후에 유림장을 결정한다. 유림에서는 고인의 학문과 공덕, 사상, 덕행이 평소에 유림의 대표가 될만한 이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한 다음에 그 요건에 맞는 이에 한해 유림장으로 葬儀를 거행할 것을 결정한다. 먼저 향원집은 유림장을 할 자격이 있다. 간 혹 본 집에서 요구한 것인지 아니면 유림에서 요구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기도 한다. 유림에서 주관하는 일은 장례절차와 시도기 준비, 손님을 받는 일과 음식제공 등이다. 일단 고을의 유림에서 유림장으로 할 것을 결정하면 유림회의(公司)를 통해 계좌례를 하고 相禮, 司書, 司貨, 司賓, 贊祝, 집사 등의 임원을 선출한다. 相禮는 喪事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다. 이러한 소임을 맡을 수 있는 이는 청도 18문중의 향원집에 속한 사람이다. 사서는 손님들의 부의나 수의의 수를 기록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화는 상사에 쓰이는 물건과 재화를 기록한다. 사빈은 외청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역할을 한다. 찬축은 찬홍이라고도 하는데 의례 때 창하는 사람이고 축은 축문을 읽는 사람이다. 護喪은 상주를 대신하는 친척으로서 상례를 잘 아는 사람이 주로 맡는다. 고인이 관직이 있으면 유림에서 관직을 사용하는데, 이보다 선비의 정신과 학행을 중요하게 여긴다. 관직이 없다면 처사라 쓰고, 그 보다 더 높일 경우에는 선생으로 한다. 이 번 경우에도 가족에서는 일단 처사로 하였으나 유림회의에서 선생으로 상향하여 개명정하였다 한다. 처사보다 선생의 지위가 더 높다. 학생·처사·선생 가운데 어떤 지위로 정할 것인지는 중요한 일인데 선생이란 선비에 대한 가장 높은 존칭이며 享祀를 모실 수 있고, 서당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3. 신촌 밀양 박씨의 문중조직과 노론의 학통
신촌은 행정구역상 청도군 이서면에 속해 있으며, 밀양 박씨들이 세거하는 동성촌이다. 청도주민들은 곰티재를 중심으로 하여 청도군을 山東 지역과 山西 지역으로 구분한다. 이 두 지역은 행정권역이 아니라 주민들의 사회공간적 특징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산동 지역은 매전면, 금천면, 운문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산서 지역에는 청도읍, 화양읍, 각남면, 이서면, 풍각면, 각북면에 속해 있다. 산동과 산서는 지리적 환경이 상이하다. 산동지역은 水深沼와 절벽이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산서 지역에는 평야지대가 넓게 펼쳐있다. 신촌주민들은 산서 지역을 경제적·사회적·정치적·교육적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으로서 행정권역과는 상이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곳의 밀양 박씨들이 청도에 입향한 때는 약 6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현재 살고 있는 밀양 박씨들의 20대 선조가 되는 朴陽茂(호:杜村恭)가 청도에 입거한 이후라 한다, 인근 마을에 거주하는 밀양 박씨의 문중은 5파로 나뉘어진다. 흔히 부계 혈족내 대소 분파가 이루어져 공동 선조에 대한 제사봉행, 묘소관리, 재실운영, 향사봉행, 족보나 문집간행 등의 공동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집단을 일반적으로 종중이라 부르나 이곳에서는 소종중의 의미로 문중이라 한다. 이곳 주민들은 이서면에 산거한 밀양 박씨의 지파를 化龍派, 七谷派, 新村派, 大谷派, 可谷派로 구분한다. 화룡파는 청도에 입향한 고려 말엽의 박양무의 직계장자로 계승되는 집안이다. 그는 선무랑직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榮立은 거창 현감을, 그리고 손자인 發生은 장사랑을 지냈다. 世系가 繼恩->孟文(직제학)->隣(선무랑)->光新(선무랑)으로 이어지면서 장자로 계승된 파를 화룡파라 한다. 화룡이란 신촌(안)입구의 지명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그리고 맹문의 자손으로 앞에서 언급한 장남인 隣의 아우로 鸞이 있다. 난의 후손이 신촌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可谷·大谷으로 분파하여 3파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입향조의 5세손인 孟文의 아우로 仲文이 있는데 그의 아들인 虎(1512∼?)의 자손이 현재 신촌(구 지명: 신안)에 거주하면서 그의 후손 일족을 신안파라 한다. 이들 지파 가운데 신촌에는 화룡파와 신안파로 분파되어 있다. 面域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 밀양 박씨들의 각 파 가구수를 보면 신촌에 약 100호 가량 거주하고, 칠곡·가곡·중리에 거주하는 혈족을 합해 약 500호 가량 된다. 칠곡파는 마곡파라 하기도 하는데 신안파 친족원 가운데 이곳으로 양자로 간 이가 있다. 七谷은 馬谷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馬谷 東派라 하기도 한다. 박효수 선생이 속한 신안파의 世系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9대조인 朴太古 (호:景陽齊)는 진사와 참봉을 지냈고, 11대조인 朴之賢(호:慕孝齊)은 진사와 장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15대 조인 朴虎는 울진군 평해 군수였다. 박태고는 송시열이 거제도에 유배되었을 때 처남과 같이 이 곳에 가서 사사를 한 바 있고, 이를 계기로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노론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들 친족의 사회·문화적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제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제수를 진설할 때 일반적으로 東頭西尾로 하나 이곳에서는 西頭東尾로 한다. 한 주민에 의하면 '인간 세상에서는 동서남북 가운데 동쪽을 우선으로 하지만 신의 세계는 서쪽이 높기 때문에 고기를 제상에 둘 때 서두동미로 해야한다'고 한다. 그리고 제사 때 내외가 앉는 방향도 남편은 서쪽에 부인은 동쪽에 앉는다. 평상시에 절을 할 때 왼 손을 오른 손 위로 올려서 행하며 상가에서 문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료제보자인 박희명씨에 따르면 복인은 오른 손을 왼손 위에 올리는데, 그 이유는 오른 손이 음이고 왼 손은 양이기 때문에 음을 숭상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는 만물이 생성하는 것은 음양의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양은 움직이는 성질이 있으며, 남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왼손은 음을 나타내며, 고요한 성질과 여성을 의미한다. 남성은 양을 숭상하고 여성을 음을 숭상한다. 그래서 남자는 양으로 음을 누르며, 여자는 음으로 양을 누른다고 한다(박희명 씨담). 이 곳 주민들은 집에서 앉을 때 동쪽은 양, 서쪽은 음이기 때문에 男左女右의 방향을 취한다. 제사에서는 음을 숭상하기 때문에 紙榜을 중심으로 配位는 왼쪽에 쓰며, 밥그릇은 음의 자리에, 국은 양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 즉 음양의 원리로 제수를 사용한다. 그래서 노론의 집안에서는 제사때 考位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배위의 방향으로 꼬리를 두는 西頭東尾의 방식을 취한다. 제수 진설에서는 左胞右醯를 한다. 그밖에 신촌이 일반 각성촌과 다른 점은 서원·재실·정각·사우 등과 같은 문화적 경관이 이 마을 주민들의 양반의 家格과 위세를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신촌에 있는 지산서원은 1846년에 청도군 이서면 신촌 紫陽山하에 사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逸淸齊 朴虎, 慕孝齊 朴之賢, 景陽齊 朴太古, 竹翁 朴重采을 봉안 향사를 하고있다. 고종 1866년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고 강당을 마을 안으로 이건하여 신안제라 칭하였다. 이 서원이 훼철된 후 100여년 동안 복설하지 못하다가 사림과 본 손들이 중건하였다. 서원에 배향하고 있는 신촌파의 선조들은 우암 문하에서 사사하였고, 성리학을 두루 득문하고 자양산하에서 후학을 위해 강학을 하였다. 인암 박효수 선생은 노론의 송시열 선생 이후 艮齊(田愚1841~1922)선생, 悳泉(成機運1877~1956)선생으로 이어지는 기호 학맥의 계승자로서 근래 유학자 극제 송병관 선생과 추연(권용현1899~1988)선생에게 사사를 한 바 있다. 그는 2백여명의 문하생을 양성했고, 인암문집을 비롯하여 시·수필·비문·서간문 등이 담긴 21권의 문집을 집필하였다. 청도 지역사회에 있어서 박효수 선생은 효행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을 닦고 실천한 이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손들에게도 효행을 모든 행동의 근본으로 삼고 행동하도록 가르쳤다.
4. 유림장의 절차(初終에서 脫喪까지)
일반적으로 상례는 초종, 습, 소렴, 대렴, 성복, 조상, 문상, 치장, 遷柩, 발인, 급묘, 반곡, 우제, 졸곡, 부제, 소상, 대상, 담제, 길제의 단계로 행해진다. 이러한 절차는 유림장을 행하는 의례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시행되었다. 예법을 잘 아는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四禮便覽을 四禮類抄라 하여 간략하게 의례절차를 요약·정리한 책에 따라서 상례를 시행하였다. 다음 내용은 필자가 이 책의 내용과 상주 및 주민들과 면접하는 과정에서 각 의례과정의 의미와 관행을 조사한 것과 문애리 양의 논문에서 채록한 내용을 함께 하여 기술한 것이다.
1) 初終
① 臨終 박효수 선생이 노환으로 돌아가실 때쯤 되자 후손들이 학산에서 1주일 전에 신촌으로 모셨다. 자식들은 편찮으시자 언제쯤 돌아가실 지 자손들이 짐작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상한 징후가 보여 얼마간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음식을 가져다 드리니 자꾸 먹어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며칠이 아니면 갈 것이라고 하였다. 상주들은 오래 편찮은 분은 운명 직전에 턱이 쳐지거나 눈이 쑥 들어가며, 계속 아프다가 턱이 내려오면 몇 일 내에 돌아가시게 된다고 한다. 또한 돌아가실 임시에는 숨을 쉴 때 가래 끓는 소리가 들리면 곧 돌아가신다고 한다. 담은 건강한 사람인 경우에는 생기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돌아가실 지경이 되면 담이 생기게 된다. 상주들은 솜을 코밑에 놔두어 움직이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보고 돌아가셨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판단한다. 운명 할 때에 노잣돈이라 하여 돈을 손에 쥐어 드리는데 멀리 갈 때 그 돈을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관에는 넣지 않는다. 가족은 환자의 옆에서 기다리며 '언제 돌아가시는가? 유언이 있는가?' 등을 확인한다. 자손은 모두 환자와 이별이기 때문에 마지막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손들이 시간이 있는 대로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 한다. 돌아가신 시간을 알 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운명하신 분에게 평소에 입던 옷 대신에 새 옷으로 갈아 입힌다. 돌아가실 때에는 평소에 입던 옷 상태와 같이 완전하게 다 입고 난 위에 가셔야 된다고 생각한다. 소렴하면 옷을 새로 갈아 입힌다. 평소에 입고 있던 옷은 장례식 하는 날 상여가 나가고 나서 태운다. 한 상주에 의하면 부모가 돌아가실 지경이면 정침에서 돌아가시게 하여야 하며 안방이 아니라 사랑방으로 모서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부모를 병원으로 모시는 것은 병을 낳게 하면서 통증을 없애려고 하는 것일 뿐'이라 한다. 의사가 진찰을 해보고 고칠 수 없는 병이면 가족이 집으로 모시는 일이 예의라고 한다. 병원에 있는 환자라도 운명하시기 전에 집으로 모셔 와야 한다고 하였다. 객사는 자기 집이 아닌 객지에서의 죽음을 말한다. 객사는 곧 손이 되어서 죽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러한 죽음을 꺼림칙하게 생각하여 시신을 집으로 운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네의 이웃에서 부모가 돌아가시면 집으로 모시고 와서 상례를 치렀다 한다. 주민중 어떠한 이는 객사한 부모의 주검을 집으로 모시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이도 있다. 왜냐하면 귀신이 주검을 따라 다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믿음에서 그렇게 한다. 喪事때 자식들은 대개 정성을 다해 고인을 모시는데 이러한 의례적 행동은 그들의 神觀과 관련되어 있다. 정성이 있으면 神이 있고, 정성이 없으면 신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박희명 씨담). 마을 사람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더라도 상주가 정성으로 생각하고 모시면 신이 있는 것 같이 여겨진다고 한다. 즉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꿈에 부모님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도 정성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병원에서 돌아가시더라도 棺은 꼭 집에 한 번 들렀다가 가는 것이 예의이며 자기 집에 한 번 가지도 않고 장사를 치를 수 없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죽음에도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경우나 임산부의 죽음, 익사, 벼락사, 자살 등은 좋은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나이에 복을 누리다가 죽은 사람의 喪事를 好喪이라 한다. ② 屬 屬 이란 부모가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기 위해 햇솜을 코 위에다 놓아 숨이 거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③ 皐復 고복을 흔히 초혼이라고도 한다. 전통적으로 고복을 할 때에는 皐 學生某公 복!복!복! 皐 儒人貫某氏복!복!복!이라 한다. 상주들은 박효수 선생이 돌아가신 것을 확인한 뒤에 사자의 윗저고리를 들고 사다리로 지붕에 올라가서 옷자락을 잡고 흔들면서 사자의 망령을 세 번 불렀다. 보통 택호를 부르거나 ∼아저씨('아제'), ∼할아버지, 큰아버지 등으로 부른다. 세 번 부르는 것은 혼을 불러서 다시 살아나라는 뜻에서 그렇게 한다. 마을사람들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바로 이렇게 해야 빨리 회생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고복을 한 뒤에 정침에 안치된 시신 위에다 이 옷을 놓는데 혼을 불러서 다시 살아나라고 그렇게 한다. 일반적으로 상례때 지붕 위에 올라가서 고복을 하는 것은 혼이 위에 있으므로 올라가서 부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자에게도 陰陽이 있다. 양인 魂은 정신을 관장하고 음인 魄은 육체를 관장한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은 땅밑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지붕에 올라가 망인이 입었던 저고리를 흔들며 招魂을 한다. ④ 收屍 수시란 사람이 운명하였음을 확인한 뒤에 시체의 머리와 손발을 바로 놓는 과정을 말한다. 시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손발을 창호지나 종이로 묶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시신이 틀어져서 대렴할 때 힘들기 때문이다. 이때 귀와 눈을 솜으로 막고, 두 손을 배위에 얻는다. 남자는 왼손이, 여자는 오른손이 위로 가도록 한다. 고인의 머리는 남쪽으로 하고 병풍을 친다. 운명하자마자 팥죽과 숟가락을 올린다, ⑤ 治棺 이 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장의사가 만든 소나무로 된 관을 사용한다. 소나무는 완전히 마른 것 보다 반쯤 마른 것으로 두껍게 만든다. 널의 두께는 한치 오푼으로 한다. 생목을 가지고 널을 만들면 빨리 썩지 않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100년까지 지탱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오동나무 관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매장지에서는 석곽을 하여 몰관을 한다. 나무관은 빼버리고 석곽만을 사용한다. 사망한 이를 염습하기 위해 놓는 판을 칠성판이라 하는데 소나무로 만들고 위에 북두칠성을 그린다. 옛날에는 본인이 관을 짜서 모셔두었다가 보관하는 경우가 있었다. 평소에 자신이 준비해둔 곽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관은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대렴할 때를 위해 미리 준비하기도 한다. 망자는 생전에 관을 만들만한 나무를 보관해두었다가 임종 후에 그것을 베어서 관을 만들게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관을 만들 때 쇠붙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따뜻하게 해야하는데 쇠붙이는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體魄이 썩은 후 못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에는 옻칠을 하는데 이것은 벌레가 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또한 한 달을 넘기는 유월장인 경우에 옻칠한 관을 사용하면 흘러나오는 시신의 물을 방지할 수가 있다. 입관할 때에는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도복까지 다 입힌 다음에 요를 깔고 이불로 싼다.
2) 襲
① 堀坎 굴감이란 사자를 목욕을 시킬 때 사용한 수건이나 빗 등을 묻기 위해 땅을 파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상주들의 얘기를 빌면 박효수 선생의 유림장 때에는 특별히 굴감을 하지 않았다 한다. 깨끗한 곳에 사용한 향물을 버렸으며, 사용한 도구는 불에 태웠다 한다. ② 沐浴 목욕물은 향나무를 잘라서 물에 넣어 끓여서 만든 것으로 사용한다.
③ 小殮
운명하고 난 이튿날, 아침과 저녁에 고인에게 상식을 올린다. 평상시의 상차림과 같으며, 병풍으로 가려둔 시신 앞에 상을 올린다. 이날 소렴을 하는데 먼저 병풍과 이불을 걷고 운명할 때 입고 있던 옷을 벗기고 평상시에 입었던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힌다. 흰 솜으로 귀와 코를 막고, 양손을 앞쪽으로 곧게 모은 뒤 창호지로 묶는다. 그리고 허벅지와 정강이를 묶는다. 다음에 발목을 창호지로 묶는다. 이불을 덮고 병풍을 가린다. 소렴은 대렴을 위한 과정이다. 대렴을 3일 뒤에 행하는 이유는 임종하고 나서 3일 뒤에 다시 살아날 수도 있기 때문에 최종 삶과 죽음을 경계짓기 위한 의례를 행하는 것이다.
④ 大殮
상주들은 고인이 운명하고 난 3일 뒤에 대렴을 한다. 이 때 대렴을 하는 이유는 혹시나 망자가 다시 살아 날 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다. 대렴을 수행할 집사는 대렴제구(수의, 주의, 심의, 대대, 과, 말, 과두, 단과, 이, 두루막, 호오, 한삼, 행전, 복건, 층이, 명목, 악수, 엄구, 식건, 절, 소낭오, 지욕, 천금, 백면, 염포)를 준비하고 상위에 향물과 가위, 불린 쌀, 나무숟가락, 분, 수건을 얹어서 방으로 들어간다. 고인을 덮었던 병풍과 이불을 걷고, 방의 중앙에 골자리를 깐다. 요(염포)를 깔고, 베개를 놓아 시신이 베도록 한다. 가위로 입고 있는 옷을 잘라 벗긴다. 집사는 향물에 적신 솜으로 얼굴과 손, 발, 몸을 닦고, 명주 솜으로 물기를 완전히 닦아낸다. 이것은 사자를 정화하는 의례라 할 수 있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나서 飯含을 한다. 반함이란 본래 목욕을 시킨 후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을 말하나 나무 숟가락으로 불린 쌀을 입에 세 번 떠 넣는 의례를 말한다. 쌀은 고인이 사후에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의미한다. 쌀을 불려서 사자의 입에 넣는 것은 돌아가신 이에게 부드러운 음식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사용하는 숟가락도 버드나무로 만든다. 버드나무는 본래 柔해서 망자를 위해 사용한다. 버드나무를 칼로 빚어서 납작하게 만든다. 숟가락 대신에 버드나무 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례가 끝난 다음에 코를 막고 입과 눈을 가린다. 명목으로 낯을 가리고 충이로 귀를 막는다. 손톱과 발톱을 깎아서 오낭에 넣는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기고, 손과 발톱을 깎아 둔다. 이것은 '身體髮膚受之父母'이기 때문에 '不敢毁傷'이라는 유교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돌아가실 임시에 깎는데 부모님께서 받은 것을 다시 가져간다는 것이다. 왼손과 오른손은 악수로 가린다. 수의를 입힌다. 버선을 신기고, 대님을 맨다. 행전을 치고, 주의와 도포를 포개 입히고 큰 띠로 가슴 아래 매어 아래로 드리우며 머리카락을 빗기어 복건을 씌운다. 신을 신기고 솜을 종이에 싸서 목이 앞으로 구부러지지 않도록 턱밑에 넣는다. 천금(이불)으로 시신을 덮는다. 다음에 관을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관의 뚜껑을 열고, 얇은 소나무 판에 북두칠성 모양이 그려진 칠성판을 관바닥에 놓는다. 요위에 놓인 시신을 그대로 들어 관에 넣는다. 손톱과 발톱을 넣은 오낭을 좌·우에 각각 넣는다. 시신이 관안에서 움직이지 않도록 나무토막을 넣는다. 관뚜껑을 덮고 시신이 원래 있던 자리에 관을 다시 두고 병풍을 친다. 아침과 저녁에 상식을 올린다. 상주가 사용하는 喪杖(지팡이)은 망자가 아버지인 경우에 대나무를 사용하고, 어머니인 경우에는 버드나무를 사용한다. 대나무는 강한 것이어서 陽을, 버드나무는 유한 것이어서 陰을 의미한다.
⑤ 成服
운명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상주와 복을 입은 친척들은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 다음에 상복을 갈아입는다. 복인은 검은 갓을 쓰지 않는다. 지금은 백립이 없어서 흰색 갓끈을 사용한다. 喪事때 검은 갓을 쓰고 가죽 신발을 신거나 비단 옷을 입고서는 문상을 가지 못한다. 이러한 의상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여 문상갈 때에 금지하는 것이다. 상주는 방립을 사용한다. 상복의 경우, 內艱喪과 外艱喪에 따라 복식의 燕尾 부분이 다르다. 외간상 때에는 상복의 연미를 깁지 않으나, 내간상 때 입는 상복은 음의 성질, 즉 오므라들고 쪼그라지는 것을 의미하여 깁는 복제를 따른다. 내간상의 상복은 깁는 복제양식을 따른다. 양의 성질을 나타내는 외간상 때의 상복은 활활 피는 양상을 표상하여 연미 부분을 깁지 않는다. 두건에는 차이가 없으나 굴건에는 차이가 있다. 남자의 상일 때는 굴건을 삼으로 꼬고, 여자의 상일 때는 이 부분을 베로 만든다. 상복 안에는 본래 험한 옷을 입어야 하지만 요즈음 이런 옷이 없어서 흰옷이라도 입는다. 탈상후 복은 집에 놔두거나 태운다. 수의는 베옷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시신이 썩으면서 옷도 함께 썩어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무명속과 명주옷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3일 만에 대렴을 하기 때문에 상복을 마련할 수 있는 기간이 있지만 요즈음에는 돌아가시고 난 뒤에 3일 만에 장사를 지내야하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상주들이 모두 상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성복제를 지낸다. 자료 제보자인 박희명씨에 의하면 옛날 신촌에서는 성복이라고 하였지 성복제라 하지 않았다 한다. 고인에게 성복제라 하여 특별히 잔을 드리고 음식을 드리는 관행이 없었다고 한다. 성복이란 본래 옷을 갈아입는 상례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성복제를 지내는 관행이 일반화되어 가는 추세여서 그냥 상복만을 갈아입으려고 하니 섭섭해서 그렇게 한다고 한다. 성복제의 제수로 떡과 고기산적, 상어고기('돔배기'), 포, 건탕, 조기, 과일, 감, 배, 사과, 귤을 사용한다. 성복제를 지낸 다음에 靈座를 마련하고 혼백상자에 영좌를 올려놓는다. 영좌는 영이 앉는 의자이다. 상주가 영을 땅에 놓지 않고 의자에 모시는 것은 영을 신성한 존재로 간주하여 숭배하는 의례적 행위이다. 일반적으로 장의사들이 오색실로 고를 내어 맞 죄어서 만든 매듭 모양의 同心結을 하얀 종이상자에 넣어서 魂帛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박효수 선생의 혼백은 명주의 양쪽을 돌돌 말라 열 십자로 묶어 놓은 束帛을 사용하였다. 혼백을 모시고 난 뒤에 상주들은 술잔과 삼색 과일(감·배·사과), 脯를 젯상에 올려놓고 조문객을 받기 시작한다. 황혼이 지면 夕奠을 올린다. 먼저, 방안의 휘장을 걷고 혼백상자의 뚜껑을 약간 열어 둔다. 죽과 면, 과일(감, 배, 사과), 포, 술을 올린다. 석전을 올리고 난 뒤에 저녁상을 차리는데 평상시에 고인이 먹던 음식을 올린다. 이렇게 성복을 한 날로부터 저녁으로 상식을 올린다. 상식을 올린 뒤에 상주들은 친척들이 쑤어온 죽을 먹는다. 저녁에 조문객이 가져온 음식을 빈소에 차려놓고 예를 표한다. 성복은 빈소를 차린 뒤에 한다. 성복이 끝난 뒤에 부고를 보낸다.
⑥ 訃告
성복제를 지내고 나서 護喪과 司書가 상의하여 친척에게는 사람이 가서 喪事를 알리지만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 知人 등에게는 전화나 부고장으로 이를 알린다.
⑦ 內殯과 外殯
성복제가 끝나면 영구를 빈소 밖의 정결한 곳으로 옮긴다. 8명의 백관들이 영구를 뒷마당의 헛간으로 옮겨 놓은 뒤 짚으로 덮어둔다. 영구를 草殯하고 난 뒤에 빈소를 설치한다. 내빈은 사랑채의 북쪽에 있는 방으로 이 방에는 선조들의 신주도 다락에 함께 모셔져 있는 곳이다. 殯所란 발인 때까지 시신을 두는 곳을 말한다. 성복이 끝나고 백관들이 시신을 모시는데 內殯과 外殯으로 구분한다. 관을 담안에 묻으면 내빈, 담밖에 묻으면 외빈이라 한다. 내빈이란 시신을 방안에 모시는 것이고 외빈은 이것을 집밖에 임시로 묻어 두는 것이다. 옛날에는 담밖에다 土坎이라 하여 구덩이를 파고 관을 흙으로 덮었지만 담안에서 초빈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땅을 파지 못하고 헛간 깨끗한 곳에다 짚을 엮어서 관을 덮어놓았다. 시신을 방 바깥에다 몇 주를 넘길 정도로 안치하는 의례과정은 시신이 부패할 것을 고려하여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례관행은 '위생에 관한 편견이나 부패한 냄새를 피하려는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라는 에르츠의 주장과 일치한다. 상주들은 장례식 전날 아침에 조전을 올린 뒤 명정을 가지고 빈소를 차려둔 곳에 간다. 명정을 들고 내일 장례식이 행해 질 것임을 조상에 고하기 위해 빈소로 간다. 빈소가 있는 방의 다락에는 선조들의 신주가 있다. 신촌에는 윗대 선조를 모신 별도의 사당은 없다. 다음날 아침 자양산 고사곡에서는 일군들이 산역을 하기 시작한다. 땅을 파기 전에 開土祭를 지낸 뒤 묘소의 위치를 정하고 땅을 판다. 개토제는 땅을 다스리는 지신을 위한 제의이다. 땅을 판 뒤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백관 두명이 이 곳을 지킨다. 허수아비를 세워둔 것은 산소의 자리가 좋으면 偸葬을 하여 남이 몰래 葬事를 지내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막기 위해서 친척 중에 한 사람이 이 곳을 지키고 허수아비도 세웠다. 상가 뒷마당에서는 유림의 상례 담당자가 고인의 후학들이 보내온 輓章을 옮겨 적는다. 만장이란 고인의 덕행, 행실, 학문을 기리는 이들이 돌아가시게 되어서 갖는 슬픈 마음을 표현한 시와 글이다. 司書가 만장을 비단 대신에 한지에 기록한 뒤에 이것을 기로 만들어서 상여 뒤를 따르게 한다. 마을 가운데 있는 송지거리에서는 장의사와 마을 사람들이 방틀과 상여를 만든다. 고인이 35년전에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생전에 제자를 가르치던 陟瞻堂에는 전국에서 온 유림의 대표들이 모여 장의절차와 고인에 대해 어떠한 禮遇를 할 것인 지에 관해 회의를 개최한다. 이 유림회의에서 고인을 '선생'으로 추대하고, 葬儀는 유림장으로 '인암 박공 장례식'으로 명한다는 사항이 결정된다. 이날 처음으로 상주들이 집밖 출입을 하여 이곳 척첨당에 있는 유림들을 찾아와 고인을 '先生'으로 추대한 결정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저녁이 되어 夕奠을 올린다. 장례식 전날 상주들이 명정만을 가지고 빈소에 가서 고유를 한다. 이 때의 제사는 정식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단잔을 올리고 고유를 한다. 장례식날 오전 7시, 고인에게 朝奠을 올린다. 조문객들이 빈소에 예를 올리고 오전 10시 쯤 되어서 방틀을 마을 가운데로 옮긴다. 內殯 곁에 있는 靈車 앞에 친척들이 지키고 서있다. 안 상주들은 殯所의 앞마당에서, 밖상주들은 빈소의 몇 마루에서 곡을 한다. 백관이 빈소의 영좌에 있던 혼함(혼백)을 작은 상위에 받쳐들고 나와 뒷마당의 내빈으로 간다. 내빈 앞에서 곡을 한다. 이어 혼함이 든 혼거와 상여를 방틀이 있는 곳으로 옮긴 뒤 상여를 싣고서 발인제를 준비한다. 선생의 학행을 길이는 의미로 후손들이 상여를 꾸미는데 화려한 색을 사용하지 않고 노란 종이와 흰색 종이로 꽃을 만들어서 장식한다.
⑧ 發靷
상주들은 병풍과 상을 펴고 제수를 차려 발인제를 준비한다. 그들은 먼저 분향하고 축관이 잔을 올린 뒤 절을 두 번하고 얼마동안 기다린다. 밖상주들은 再拜를 하며, 안상주들은 四拜를 한다. 철상을 하고 난 뒤에, 상두꾼(상여꾼)들은 제수로 차렸던 음식으로 음복을 하고 나서 출상을 준비한다. 안 상주들이 상여를 붙들고 곡을 하고 선소리꾼들이 북을 치며 소리를 한다. 壙中의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두 方相氏가 行喪에 앞서 가며, 100여개의 만장이 그 뒤를 따른다. 방상시는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 귀신이 침범해서 못 가게 하는 것을 막고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주자가례의 도면을 가지고 만들려고 하였으나 만들 사람이 없어서 청도문화원에 제작하도록 부탁하고 안동박물관에 부탁을 하여 만들었다. 영남지방에 방상시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인의 문하생 부부가 험상궂은 탈을 한 개씩 머리에 쓰고 그 역할을 하였다. 32명의 상두꾼이 상여를 들고 加麻服 차림의 200여 문하생들은 꽃상여의 긴 끈을 상여의 앞쪽과 뒤쪽에서 잡는다. 상여가 출발해 1∼2km 쯤 지나 지산서원 앞에 이르러서 발인할 때 지내는 路祭를 지낸다. 이곳은 선조들이 공부하신 곳이고 선생이 평소에 드나들면서 정이 들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노제를 지낸 뒤 다시 장지인 고사곡으로 향한다.
⑨ 下官
상여가 도착해 묘지의 네 귀퉁이를 방상시들이 창으로 찌른다. 다음에 파 놓은 땅안에 석곽을 넣고 집사가 고인목을 놓은 머리를 북쪽으로 가게 하고 널을 놓는다. '古 忍庵 處士 密成朴公之柩' 라고 가족들이 쓴 명정과 '古 忍庵 先生 密成朴公之柩'라고 유림에서 쓴 명정을 관 위에 다시 깐다. 명정은 입관하고 나서 그 위에다 깐다. 다시 석곽의 뚜껑을 덮는다. 석곽에다 관을 넣은 다음에 雲 을 넣는다. 상주들은 옷자락에 흙을 한 줌씩 담아 세 번 관위에 뿌린다. 상주가 실토를 하는 것은 부모가 땅에 묻히는데 정성을 다해 흙 한줌이라도 부어 가지고 상주가 봉축을 해야하지만 그렇게 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준다. 지관이 봉분을 만들 때 조개가루인 회를 덮어 봉분을 한다. 천을 묶은 삽으로 가래질을 한다. 선소리꾼들이 成墳을 하면서 선소리를 한다. 봉분을 다지는 사람은 소리꾼가지 합해서 10명이며 봉분에 올라가 소리꾼이 덜구소리를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뒤를 따라서 한다.
⑩ 개토제, 題主祭, 산신제
개토제란 땅을 처음으로 열기 전에 지신이 망자를 어질게 보살펴 주기를 고유하는 제의이다. 선소리꾼의 소리가 들리고 묘지아래에서는 유림의 대표가 지방과 같은 양식으로 신주에 글을 써넣는 題主가 이루어진 다음에 제사를 지낸다. 혼령을 신주로 옮길 때 題主祭를 행한다. 제주제때 玄 이라 하여 매장할 때 산신에게 폐백을 드리는데, 검은 색과 붉은 색의 천을 함께 넣는다. 玄은 상의를, 은 하의를 나타낸다. 이 때 조문을 하는 문상객들도 있다. 제주가 이루어지고 봉분이 완성되면 상여와 유품들을 모두 태운다. 제주제를 지내고 나면 산신제를 지낸다. 마을 주민 가운데 청결하고 상복을 입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 산신에게 산신제를 드리는데 망자를 매장하게 되었으니 놀라지 말고 앞으로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로 지낸다. 산신제를 지낼 때에는 지방이 없고 축만 한다.
⑪ 返魂
장지에서는 산역이 계속되나 상주들은 혼백을 실은 혼거와 신주를 모시고 반혼해 돌아온다. 반혼해 돌아와서 혼거는 집에서 태워버린다. 상주들은 세수를 하고 초우제를 지낼 준비를 한다.
⑫ 虞祭(初虞, 再虞, 三虞)
상주들은 입관을 한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고 처음으로 혼령에게 정식 제사인 초우를 올림으로써 장례 당일의 의식을 마치게 된다. 초우를 지내고 다음날 재우를 지낸다. 그리고 3일 째 되는 날 삼우를 지낸다. 삼우를 지낸 뒤 혼백은 산소 옆에 매혼을 하며, 안 상주와 밖상주 모두 산소에 가서 성묘한다. 우제를 지내고 나면 초하루, 보름으로 아침에 삭망제를 지낸다. 초우제는 장례를 모신 그날 지내는데 혼령이 처음으로 돌아오는 날이다. 반혼을 하고 난 뒤 집에 와서 초우, 재우, 삼우를 지낸다. 우제는 신주를 위안하는 제사이다. 석달만에 졸곡을 지내고 나면 소상을 지내고 이것을 마치면 대상, 그 다음에 담제, 길제 순으로 지낸다. 초하루 보름은 삭망전을 지내는데 제사처럼 다 갖추어 지내지 못한다. 이 때까지 전을 드리는 이유는 상주가 부모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황급하여 격식을 갖춘 제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제는 제사를 지낼 때처럼 지내는데 처음으로 낯을 씻고 격식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⑬ 卒哭祭
장례를 하고 난 석달 뒤에 졸곡제를 지내며, 이 때 부터 無時哭이 없어진다.
⑭ 부제
졸곡 다음 달에 부제를 지내는데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부제란 망자의 신위를 할아버지 곁에 모실 때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즉 손자 위를 조부 位에 붙이는 것인데 만약 조부가 생존하고 있으면 고조부 위에 부하게 된다. 부제는 길제이기 때문에 곡을 하지 않는다. 사당이 좁으면 대청에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위패를 가운데 진설하되 남쪽을 향하게 한다.
⑮ 小祥
사람이 죽고 한 돐만에 지내는 제사가 소상이다. 윤월은 계산하지 않고 거행한다. 순서는 進饌, 陣設, 降神, 初獻, 讀祝, 亞獻, 終獻, 侑食, 闔門, 啓門, 辭神 순으로 행한다. 소상이 갖는 의미는 이 때부터 비로소 흉사에서 길사로 이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상주가 차츰 고인의 죽음으로 인해 야기된 위기를 완화해 가는 과정이다. 여자는 腰 을, 남자는 수질을 벗어 정결한 곳에서 태운다. 한 자료제보자는 여성이 요질을 벗는 것은 이것을 맨 부위가 아기를 잉태하는 중요한 부분이고, 남자의 경우에는 머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首 을 제일 먼저 벗는다고 한다.
16)大祥
사람이 죽은 뒤 두 돌만에 지내는 제사가 대상이다. 대상 때에는 옷을 갈아입고 제사를 재낸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손님들이 미리 와서 잔을 드린다. 전날 석전에 제문을 지어서 고유하고, 이튿날 아침에 옷을 벗고 축을 읽는다. 산소에 다녀온 뒤에 상복을 모두 소각한다. 이미 體魄이 땅에 묻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방하다.
17) 潭祭
담제는 대상을 지내고 난 한 달 뒤에 행하는데 상복을 완전히 벗는 의례이다. 사당에 고유를 한다. 담제가 끝나고 나면 탈상을 하는데 이때부터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축문을 읽는다, 평소에 망자에게 은혜를 입었다던가 친분이 있는 이들이 고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를 제문으로 지어서 고유한다. 인암의 경우에는 문인들이 글을 지어서 고유를 하였다.
18) 吉祭
길제는 담제를 지낸 다음 달 정일 이나 해일을 卜日하여 지낸다. 이때부터 망령을 제사에 모시는데 조상에게 미리 고유한다. 인암 선생의 담제를 보면 신주는 사당에 4대 밖에 모시지 않는다. 그리하여 돌아가신 이를 모시게 되면 5대가 되니 5대 祖考 는 제사를 마치고 신주를 메주한 뒤에 위패를 바꾸며 5대조는 묘사로 옮겨지는 절차를 행한다. 조상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는 차례를 昭穆이라 한다. 왼쪽 줄을 소, 오른 쪽 줄을 목이라 하는데 1世를 가운데 모시고 2세, 4세, 6세는 昭에, 3세, 5세, 7세는 穆에 모신다. 배열하는 방법을 흔히 "左昭右穆"이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배열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소의 신주 위차는 소의 자리에, 목의 신주는 목의 자리에 갈 수 있으나 소에서 목으로 갈 수 없다. 이러한 관행은 사당이 있을 경우에 그렇게 하지만 사당이 없는 경우에는 벽감에 모신다. 이와 같은 과정이 행해지는 이유는 신주를 통해 이승의 산자의 세계 속에 다시 존치되며 이승의 선조 위계 속에 재구성·합치된다. 망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사자와 산자의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상례를 행함으로써 마을 내에서 그리고 집속에 다시 들어옴으로써 신과 인간이 함께 더불어 있는 상태로 이르게 한다. 즉 사자가 지상에서 그의 생명을 연장하도록 꾸며진 문화적 장치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촌리의 장례 관행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5대 조고비의 位를 대청에 모실 때의 상례관행을 보면 북쪽에서 남향하도록 排設하고, 考 의 위는 동편에서 서향하도록 排設하되 考北 南으로 한다. 이때 만일 4대가 못되면 신주의 위도 역시 一體로 남향하여 排設하며, 또 次房으로서 선대를 봉사하지 않는 가정이면 考 의 위를 직접 북편에 남향하여 排設한다.
5. 죽음의 표상
아시아인에게 치르지는 여러 가지 장례의식에서는 서구인들처럼 죽음을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처리하지 않고,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불유쾌한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의식은 통과의례인 동시에 대변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심리적 표현은 신촌리 주민들의 상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죽음은 현시적 존재에서 비가시적 초자연적 존재로, 그리고 구체적 삶에서 추상화된 상태로 이행하는 상태인데 그것은 사물의 근원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생명과의 관계없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죽음과 연접되어 있다. 세포와 기관조직이 중지하여 생명을 잃어버리거나 인간조건과 관련된 인간활동이 종결되어서 생물학적 기능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정지된 생물학적 죽음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는 느린 한 죽음의 과정이다. 박효수 선생의 상주나 일반인들의 얘기 속에서 죽음이라는 말은 생명이 끊어진 것이며 기세, 기운이 사라진 상태이다. 이 점은 사전적 정의와 유사하다. 죽음이란 사람과 동물이 코나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끊어진 상태이다. 이러한 정의 외에 삶을 그만둔 것이라든가 생명을 잃어버린 것, 인간의 활동이나 생명이 정확하게 중지된 상태이다. 즉 생물학적 죽음이란 세포와 조직이 정지하여 그 기능을 되돌릴 킬 수 없는 정도로 완전하게 정지된 상태이기도 하다. 이러한 죽음의 역사 속에 개입되는 요소는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죽음에 대한 경험(experience of death), 죽음의 언설(discourse of death)이다. 육체적 죽음이란 갑작스러운 생물학적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경험이란 집에서 죽음을 맞고, 묘지에서 저승의 세계로 이르는 과정이 수반되는 의례와 행동의 전체이다. 죽음을 맞이하여 장례식을 거행하고, 시신을 매장하며 애도를 하는 통과의례를 거침으로써 상이한 체계로 얽혀져 있는 죽음의 구조에 익숙하게 하고, 죽음의 실재를 매장과 주술, 종교, 일반인의 관행의 틀을 재정립한다. 죽음의 경험에 관한 역사는 대부분 이러한 경험의 역사를 나타내주고 그것은 직접 죽음에 대한 집단적 언설의 역사로 이끈다. 장례식에서 죽음에 관한 어떠한 감정을 갖는 순간에 벌써 집단적 언설로 표현된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표현의 이면에는 죽음을 조직화한 언설이 역사 속에 구체화된다. 그리하여 죽음의 언설과 의례적 행동의 간접적 분석을 통해 우리는 저승세계가 갖는 표상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죽음과 관련된 문화적 함의에서 죽음은 생명의 진행단계에서 한 존재가 육체적 개체로서의 인간적 삶과 관련된 활동이 종결됨에 따라 힘의 전체가 완전하게 정지하는 현상에 이르게 되고 이에 대해 산자는 경험한 바 없는 깊은 고뇌·혼란· 두려움을 느낀다. 산자는 죽어 가는 이를 통해 죽음을 이해하고자 한다. 죽음은 산자의 가시적이고 육체적 존재의 종말로서만 인식되지 않는다. 죽음으로 인해 망자와 상호작용하면서 맺어졌던 사람과 집단과의 관계는 단절되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적 인물로서 존재하며, 장례식은 고인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과도 관련을 맺게 한다. 여기에서 집합의식의 중요함과 다소 존엄성을 부여한다. 주위의 사회는 사자의 사회적 가치에 걸맞은 힘을 부여하는 성스러운 참다운 의례로 이루어진다. 죽음을 사자와 산자 사이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관행화 되고 정형화된 의례를 통해 산자들은 지상에서 사자의 생명을 연장하도록 계획하고 구체화하며, 상징적이고도 실천적인 의례적 행동을 행한다. 사자는 상례과정을 통해 저승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새롭게 탄생한다. 산자는 사자의 보호아래 삶을 유지한다. 따라서 산자와 사자는 그 존재의 입장에서 의례를 필요로 한다. 이를 상례라 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집단적 관행으로서 상례에는 정교한 죽음의 의례, 일련의 규칙, 집단적인 죽음에 관한 사회적 언설과 메타포르, 죽음에 대한 집단적 경험과 추억 등이 복합되어 나타난다.
6. 유림장에 나타난 영혼관
인간은 가까이 있던 사람의 삶이 종결되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의례를 행함으로써 생명의 유한성을 나타내주는 물리적 시간을 사회적 시간으로 대체·전환하여 인식하고자 한다. 사자를 초자연적 존재로 역할을 하도록 재생시켜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회적 실재로 표상되도록 하기 위해 영원하고도 무한한 시간을 문화적 구성물로 전환·변형시킨다. 뒤르깸은 사회생활의 주기는 시간범주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하였다. 이러한 점은 비인간적이고 양적으로 배열된 물리적 시간이 사회·문화적 시간으로 전환됨을 의미하며 시간이 갖는 표상은 주기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인간에 있어서 시간은 모호한 척도로 여겨지는데 경험된 시간에 관한 측정은 척도 자체와는 별개의 현상으로 준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조작적인 시간과 관련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간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며, 어떠한 인위적 척도 속에 존재한다. 시간의 순환은 인간의 인식과 실천에 의해 구조화된 결과이고 사회집단에 의해 인식된 특징적인 事象을 설명한다. 상례의 제의수행절차는 이러한 사회적 시간을 구조화하는 의례가 정교하게 시행되고 있다. 죽음과 관련된 의례에서 이중성을 주기화하는 의례를 통과의례라 한다. 반제넵은 상례에도 분리의례(rites de s paration), 이행의례(rites de marge), 통합의례(rites d'agr gation)가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례는 유림장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초종의례부터 최종 吉祭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산자와 사자가 각각 분리의례, 이행의례, 통합의례를 거친다. 분리의례는 초종, 습, 소렴, 대렴 때까지로서 삶과 죽음을 확인하는 의례이다. 이 과정에서 招魂의 경우, 후손들이 망자의 혼을 불러서 다시 살아나라는 염원을 구체화하는 의례이다. 이러한 의례가 행해지는 것은 상주들이 상례 때 (부정이) 전염되는 것을 고려하여 나머지 사람들과는 구분되는데 그들은 일상적으로 음식을 먹는데 참여해서도 안되며 개인들이 편리하게 옷을 입는 방식에서도, 장식에서도, 그리고 모발에서도 마찬가지로 구분된다고 한 에르츠(Hertz)의 주장과 일치한다. 상례를 통해 사자들이 망자의 죽음을 인식하는 과정에는 그들의 영혼관이 긴밀하게 관련되어있다. 초종에서부터 제주제에 이르기까지 혼백을 어떻게 안치하느냐가 상주에게 아주 중요한 과제로 여겨진다. 혼백에 대한 사고는 인간의 생명 자체가 음양의 교호과정을 거치면서 형성·사멸되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음양으로 분리된다는 유교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도전은 佛氏雜辯에서 "천지음양의 氣가 交合하여 곧 人物이 되고 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體魄은 땅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變이다. 魂과 魄이 서로 떨어져 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體魄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각각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조사지 주민의 혼백관념에서도 마찬가지로 유교적인 상례에 준해 의례를 수행하다보니 앞에서 말한 혼백과 유사한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魂魄에 관한 주민들의 관념을 보면 사람이 죽으면 魂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體魄은 땅에 묻힌다고 생각한다. 음양설에서는 사람의 넋에는 음양이 있는데 양인 魂은 정신을 관장하고, 陰인 魄은 육체를 관장한다고 한 점과 일치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魂은 하늘로 날아가고, 體魄은 땅 밑으로 들어간다고 인식한다. 즉 고인의 상주들은 사람이 죽으면 體魄은 땅에 묻히고 영혼은 하늘로 떠난다고 믿고 있다. 체백은 땅에 묻혀서 썩어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박희명씨 담). 그리하여 사람이 죽으면 망인이 입었던 저고리를 흔들면서 초혼을 한다. 成服을 하고 나면 魂帛을 모신다. 혼백은 신주를 만들기 전에 모시는 生明紬 조각을 접어서 만든 임시 신위이다. 혼백을 계속 모시지 않고 장례 때 삼우까지만 모시고 신주가 완성이 된 다음에 산소 옆에 혼백을 매복한다. 산소 옆에 신주를 묻는 것은 체백이 곁에 묻혀 있으니까 그렇게 한다. 그리고 神 대신에 모셨던 것이어서 아무 곳이나 내버릴 수 가 없어서 산소 옆에 깨끗한 곳에 모신다. 신주가 없으면 대상 때까지 혼백이 있어야 한다. 혼백은 오색실을 동심결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靑, 紅, 白, 紫, 藍의 5색실로 표시하기도 하도 청, 홍, 백의 세 가지로 표현하기도 한다. 세 가지는 天地人을 의미하고 오색은 5행을 상징하기도 한다. 신촌에서는 박쇼수 선생의 혼백을 3색실로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명주로 만든 것을 주로 사용하며 魂含에다 이것을 넣는 것은 혼이 이주한다고 해서 그렇게 한다. 혼함이란 혼이 들은 함을 말하고, 혼이 신주로 이주하기 전까지 임시로 신체가 거주하는 곳을 나타낸다. 운상해서 산소로 갈 때 맨 앞에 가는 것이 혼백을 넣은 혼함이며 복인이 들고가는데 이를 혼거 또는 영거라 하기도 한다. 그 다음에 諱를 쓰지 않은 백신주가 따라가고 이 다음에 고인이 입던 두루마기와 갓을 담은 功布가 따른다. 이러한 사례에서 박효수 선생의 유림장에서는 사후의 초자연적 존재인 영혼에 관해 얘기를 할 때 다른 상례에서 보이는 '넋'이란 용어를 상주들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장철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넋을 죽음이라는 육체적 현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면에 무속이나 그 의례를 통해서 보면, 죽은 사람의 넋은 그의 사후에도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말하자면 넋과 육체는 각각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나, 넋은 살아 있을 때의 육체적 상태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넋의 관념에 대해 이곳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넋을 魂魄이라 한다. 넋은 몸과 함께 있으면서 마음과 목숨을 주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혼백은 육체와 구별되어 육체에 머물면서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재이다. 한국 촌락사회의 주민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영혼을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사후에 하나는 무덤으로, 다른 하나는 후손들이 제공하는 제사를 받아먹기 위해, 마지막으로 하나는 집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구분은 영혼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사후의 세계에 관한 믿음이 다양하고 불확실함을 나타내 준 것이다. 분리의례 다음에 행해지는 의례는 이행의례라 할 수 있다. 반제넵(Van Gennep)에 의하면 산자의 이행기간은 사자의 이행기간과 대립적이라 한다. 그리고 이 이행기간은 아주 중요해서 어떠한 자율성을 가진다. 그리고 장례에서 이행기간은 다소 긴 기간 동안 시신을 안치하거나 매장전의 임시 시체 안치소에 관을 둔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을 통해 우리는 유림장의 의례 이행맥락을 단락지워 볼 수 있다. 즉 상주는 혼백을 마련하고 여기에 아침 저녁으로 奠을 드린다. 인간으로서 대접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승에서 신으로 모시기 전의 초자연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에르츠(Hertz)는 영혼이 사후에 즉시 확정된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다고 하며 어떠한 종류의 단계를 밟아야하고 그러는 동안 영혼은 대지나 사자의 이웃에 남아 있으며, 영혼이 살았던 산자의 장소나 숲속에 떠돌기도 하는데 특별한 의례과정에 의해 사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한다고 한 의미에서 행하는 의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成服에서 反哭까지는 사자의 혼백이 사자의 세계로 옮아가도록 도와주는 이행의례가 행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상주들은 성복을 한 이후에 靈座를 마련하고 혼백을 모신다. 그리고 弔喪, 聞喪, 治葬, 遷柩, 發靷, 及墓, 反哭의 순으로 의례가 지속된다. 특히 이곳에서는 外殯과 內殯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 특징이다. 보름장을 하기 때문에 외빈과 내빈이 있다. 시체를 보관하려면 보름 동안 방안에 놓아두지 못하기 때문에 내빈은 방안에, 외빈은 집밖에 임시로 묻어 둔다. 이곳에서는 외빈을 토감한 상태로 시신이 있는 헛간에 임시로 설치하였으며, 조객은 내빈에서 혼백을 보는 것이 문상하는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발인 때 出棺을 위해 토감한 빈소를 여는 의례를 啓殯이라 한다. 이 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을 드리는 것은 완전히 신주로 모신 상태가 아니고 상주가 황망하여 제수를 갖추어서 진설하여 격식을 차린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아직 완전한 신으로서 인정된 상태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제의가 행해진 후에 통합의례의 과정으로서 題主祭, 返魂, 虞祭, 卒哭, 부제, 小祥, 大祥, 祭, 吉祭, 脫喪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제의는 망자의 혼백이 신주로 옮겨져서 저승의 세계에 안치됨과 동시에 사당이나 집의 벽감 속에 안치되어 인간과 신이 통합되는 과정이다. 혼백을 신주로 옮길 때에는 봉분이 이루어질 즈음에 행하는 題主祭(이 곳에서는 평토제라 하지 않고 제주제라 함)를 지낸다. 이 때 신주에다 本貫과 諱를 쓰고 이것을 상위에 얹어놓고 제사를 지낸다. 이 제주전을 지내고 나면 혼함에서 혼백을 이주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 이후부터 혼백보다 신주가 더 중한 신체가 된다. 신주로 모실 때 신이 이주하라는 축을 한다. 반혼할 때 신주를 앞에 놓고 혼백이 뒤에 따라 온다. 영거는 장례를 치르고 산에서 내려올 때 혼백을 싣고 오지만 삼우제를 지내고 성묘한 뒤에 깨끗한 보자기에 싸서 埋魂한다. 신주는 밤나무로 만든다. 밤나무는 단단하고 그 열매를 제사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깨끗한 나무로 여겨 사용한다. 그러나 집 근처에 있는 밤나무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닭소리,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산골짜기의 나무를 벌목해서 사용한다. 밤나무 대신에 오동나무로 신주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신위를 모시는 방향은 보는 방향에서 북쪽이다. 상주들이 焚香한다는 것은 陽의 성질을 가진 魂이 공중으로 날아갔으니 분향을 해서 공중의 신을 모시는 의례로 간주하는 것이다. 降神은 땅에 술을 붓는 것인데 그것은 체백이 땅에 묻혀 있으니 救神하기 위해 땅에다 술을 붓는 의례적 행위이다. 상주들은 강신만 해서 救神을 하는 것은 안되며, 혼과 체백을 동시에 부르는 의미에서 분향강신을 해야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그들은 사람에게 음양이 있고 우주에 하늘과 땅, 그리고 해와 달이 있듯이 神도 공중에 있는 신과 땅에 있는 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와같은 의례의 진행과정에 비해 제수의 진설은 엄격하게 분리의례, 이행의례, 통합의례에 따라 구분되지는 않으나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상주들은 奠과 祭로 구분하여 제수를 진설한다. 전은 대개 성복 전까지 올리는데 設奠, 上食, 成服奠, 朝祖告辭奠 으로 이루어진다. 설전에는 脯, 果, 酒를 올리고 상식은 대상 때부터 생시와 같이 음식을 올린다. 이때 국, 숭늉, 등을 올린다. 성복전에는 炙, 魚, 脯, 果, 건탕, 떡, 술을 올린다. 조조고사전에는 주, 포, 대추, 밤, 배, 사과, 귤, 술을 놓고 사당에 고한다. 이때까지의 전의 특징은 돼지고기나 소고기와 같은 고기(肉)를 진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서 개토제, 발인제, 노제, 제주제, 우제를 지낸다. 개토제 때에는 炙, 胞, 魚, 건탕, 배, 사과를 진설한다. 발인제의 제수는 脯, 肉, 魚, 밤, 대추, 사과, 배, 귤, 적, 떡, 건탕 등이다. 路祭 때에는 炙, 脯, 전, 떡, 대추, 밤, 배, 사과, 귤을 사용한다. 제주제에서는 肉, 魚, 脯, 炙, 전, 떡, 건탕, 밤, 대추, 배, 사과, 귤을 놓는다. 虞祭에서는 밥, 국, 나물, 肉, 魚, 炙, 脯, 전, 떡, 건탕, 배추, 밤, 배, 사과를 놓는다.
7. 슬픔의 의례적 표현
사랑과 고뇌, 비애가 복합된 감정을 나타내는 방식은 상주가 사자에 행하는 의무적 행동과 관련된다. 초종에서 부터 길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의례절차와 행위는 그들의 정감을 표현하는 문화적 과정이기도 하다. 죽음에는 일반적으로 상주들의 강한 감정 반응이 나타나며, 교묘한 사회과정에 의해 강화된다. 그리고 제도적 배열을 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보편적 양식으로서 인간의 감정적 반응에 대해 문화적 상이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특징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상여가 등에 잘 나타난다. 장례식 때 우는 것은 관습에 의해 요구되어지는 것이고, 어느 정해진 순간에 조객의 전체가 크게 울고, 귀가 울릴 정도로 우는 것이다. 이러한 울음은 '의례적 울음'이라 할 수 있다. 고인의 상주들은 상례를 진행하는 과정에 無時哭이라 하여 곡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곡을 할 때 '애고애고'라 한다. 백관들은 '허희허희'한다. 喪輿歌는 고인이 집을 떠날 때 대개 가까운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이 부른다. 내용도 반복과 전통적인 곡조를 판에 박은 듯한 내용, 즉 회심곡, 백발가, 등을 상황에 맞추어서 부른다. 그러나 박효수 선생의 장례식에서는 제자가 직접 가사를 작성하고 노래를 불렀다. 상여가는 죽음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표현하고 집단의 추억을 상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 내용은 고인의 생애과정에 맺었던, 학연, 지연, 혈연관계에 대한 추억, 이승에 대한 향수와 저승 가는 길에 대한 위무와 사자의 편안함을 읊조리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상주들이 울음을 통해 슬픔을 표현하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상여를 맨 이가 곡에 맞춰 망자를 매장지까지 고이 잘 모시도록 하기 위해서도 상여가를 부른다. 이를 부르는 이는 슬픈 곡조와 흥이 나는 곡조를 상황에 봐가면서 읊조린다. 동일한 운율 구조를 재생해서 복합된 문장을 사용하기도 한다. 상여가를 부를 때 장단을 맞추기 위해 북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북소리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북과 죽음, 진동과 전이과정, 큰 소리와 초자연적 힘 등을 나타내 준다. 일반적으로 큰 북은 죽음을 알릴 때 사용한다. 장례식은 고인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과도 관련을 맺도록 해준다, 장례식은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의 사건을, 사회구조 안에서 생기는 하나의 事故처럼 보지 않고 ㅏ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사이에 연속성을 갖도록 해준다. 다시 말해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初喪이라는 느리지만 매끄럽게 진행되는 과정 속에 통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8. 묘소의 사회공간화
물리적 공간은 인간이 부여하는 상징과 사회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즉 공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조건화되고 재창출된다. 즉 공간은 그 곳을 점유하는 성원들이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고 상호작용 함으로써 형성된 文化的 事象일 뿐만 아니라 주민의 사회관계와 내면세계를 나타내 준다. 이 점은 신촌의 묘소공간과 인암의 묘소를 선정하는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자료제보자의 말에 의하면 고인의 묘소는 평소에 가족들이 생각해 놓은 곳이라 한다. 묘소의 위치는 윗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산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온다. 역장을 하는 것이 이곳의 풍속이니 그렇게 한다. 산소는 척첨당의 재실의 재산으로 되어 있다. 고인의 산소의 形局은 舞術形이기 때문에 상석을 하지 않았다. 이런 형국에 상석을 하면 좋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풍수의 말에 그렇게 하였다. 산은 종중산, 동네산, 개인산으로 구분한다. 宗中山은 종인들이 150만원씩 출자하여 구입한 산으로서 종중 성원들에게는 묘소를 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묘소가 있는 산은 솔덩산, 문수골, 왕성산, 구서당골, 제공산, 아암산, 감동골, 상달, 사월산, 마고란, 널랭이 등이다, 이 지역 외에 부야, 금촌, 각남, 풍각, 등지이다. 동네산은 자양산인데 주민들이 퇴비를 하기 위해 공동으로 풀을 베던 '풀산'으로 불려진 산이다. 동네산에는 묘소가 거의 없다. 동산엔 동인이면 누구나 묘를 쓸 수 있다. 묘를 쓰는 비용은 누구나 따로 내어야 한다. 신안 뒤의 자양산은 종중별로 영역이 구분되어 있어서 이에 따라 묘소를 쓴다. 그밖에 동민들은 자양산에 묘를 쓸 수 있으나 타지에 사는 이들이 이 곳에 묘를 쓸 때에는 소정의 금액을 내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산소를 정할 때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정한다. 상하의 구분은 상이하다. 산소는 동일 가계 내에 지파별로 후손을 결합시키고 있다. 동일 묘지권에 고조부모, 징조부모, 조부모, 부모 순으로 역장식으로 배열되어있다, 간혹 묘소의 형국이 좋지 못할 경우에 후손이 윗대 조상의 묘소와 같은 位次에 쓴 경우도 있다. 부부는 합장이나 쌍분을 해서 쓴다. 부인이 둘일 경우에 남편 묘소를 중심으로 양옆에 부인 묘소를 안치시킨다. 어떠한 종중에서는 묘지가 부족하여 종손이 아니면 이 곳에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한다. 훈령제 뒷산에는 실묘한 선조 묘 대신에 단을 모시고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후손들의 묘소가 배열되어있다. 이러한 묘소의 위치도 위계적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산 아래에서 위로 선조 윗대부터 후대로 배열되어 있다. 묘소를 잡을 때에는 인근 학산의 지관이 와서 터와 석물위치, 입관하는 날 까지 잡아준다. 이 지관은 고인의 제자이기도 하다. 묘비에 자식의 이름, 묘갈명, 선생, 처사 등의 지위를 彫琢하는 것은 양반임을 나타내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이것은 친족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을에 화장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풍질이나 악질이 있던 이가 죽으면 매장을 하지 않고 화장을 한 적이 있다. 어린이가 죽으면 특별한 상례를 행하지 않고 그냥 묻었다 한다. '애장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어린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묘를 쓸 때에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그러나 지세가 좋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오른 쪽이 上席이 되어서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왼쪽 편에다 쓴다. 산세가 문제이다. 앞에서 보면 왼편이 서쪽이고, 오른편이 동쪽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동쪽이 上座이다. 앞이 남이고 뒤가 북이다. 지방을 쓸 때에도 집의 좌향과 관계없이 북에서 남으로 보도록 한다. 죽으면 음양이 바뀐다. 평소에는 왼쪽이 위이다. 흉사에는 반대이다. 빈소에 갈 때 오른 쪽 손이 위로 올라간다. 제사 때에는 평소와 같이 한다. 이러한 왼편과 오른편의 구분의식은 노론이 갖는 문화적 취향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지 모든 관행에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방식의 구분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노론의 상례 관행에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왼편과 오른편을 고려하는 집합의식의 상이한 방식은 인도유럽어에 나타난다. 오른편은 지적인 정당성, 양심, 정의, 도덕적 통합성, 미, 법적 규범 등을 나타내는 반면에 왼쪽은 모순된 생각을 나타내 주는데 사악한 성질을 축소시켜서 나타내 준다. 또한 오른손은 명예와 기분의 좋음, 그리고 특권을 상징하며, 움직이고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반대로 왼손은 부차적인 천하고, 보완적이며, 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른손이 귀족의 전형이자 상징이라면 왼손은 하층민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유럽식의 구분방식과는 다르게 신촌 주민들은 상례때 왼손이 더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여 절을 할 때에도 왼손이 오른 손 위에 올라가도록 행하는 방식을 보면 비록 이원구조가 범 인간 정신구조에 존재하더라도 그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각 나라별로 지역별로 문중별로 상이함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촌의 묘소를 세대별로 보면 역장이 관행화되어 있다. 선조의 묘가 산의 아랫부분에 위치한다, 이것은 '박씨의 박은 박바가지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뿌리로부터 올라가면서 열매가 열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윗대 선조 묘일수록 산의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이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묘소의 방향은 산세를 따라서 결정한다. 묘를 지파별로 묘소를 종중산 구역 내에 쓴다. 일반적으로 묘자리를 잡을 때 몇 가지 측면을 고려해서 잡는다. 穴과 脈을 먼저 구분한다. 혈은 기가 뭉쳐진 곳이고 맥은 구불구불한 능선이 흘러내린 곳이다. 물결처럼 솟아 오른 곳은 힘이 맺 힌 곳으로 간주한다. 묘소 주변에 암석이 있다든지 절개되어 있으면 砂라 하여 별로 좋은 형국으 로 간주하지 않는다. 산 형국이 주산에서 갈라져 나와서 얼싸 앉는 것과 같은 형국이 좋은 산이 다. 기울기가 심하거나 삐뚤어져 있으면 좋은 형국이 아니다. 물이 흐르는 모양에 따라 좋은 형국 과 나쁜 형국으로 나눈다. 그러나 특별히 명당을 찾아 묘를 쓰기란 무척 힘들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요즈음의 명당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며 높지 않는 곳이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벌초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현재는 많이 변화하여 여자들도 참여하고 있고, 묘를 마을 근처에 쓰면 옛날에는 귀신이 내려오지 못한다 하여 묘자리를 쓰지 않았으나 요즈음에는 복숭아밭에도 묘를 쓰기도 한다. 과거에 잘살면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좋다고 여겨지는 곳에 묘자리를 썼으나 현재는 될수록 후손들이 산소를 찾기 쉬운 가까운 곳을 좋은 곳으로 생각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되도록 마을과 가까운 곳에 묘터를 쓰려고 하는 것이 현재의 추세이다. 지관의 역할은 유명무실해져 상주가 묘터를 정하여 지관에게 좋은 곳인지 나쁜 곳인지를 판단하게 하여 좌향만을 보도록 한다. '여긴 내 밭이고 내 산이니까 좋은 곳으로 봐달라는 식'으로 말한다.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산소위치를 보면 거의다가 마을 내 종산에 위치하고 있고, 면내, 타도, 군내에 약간 산재해 있다. 이러한 묘소공간을 마련함으로써 묘소권이 산자와 사자의 사회적·상징적 공간으로 전환되어 있다. 마을 공간이 씨족 성원들 간의 분파와 정체성을 나타내어 주는 공간이라면 산소가 있는 종산은 조상의 음택으로 성스러운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묘소는 친족간의 사회적 거리에 따라 쓰는 장소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보냉(Bonnain)이 공동묘소는 산자의 사회적 공간을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한 점과 일치한다. 주민들은 산소와 마을을 신이 거주하는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신성공간과 인간이 거주하는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서 마을로 구분한다. 항렬의 위계에 따라 지파가 배열되어있는 마을의 입지처럼 묘소공간도 세대와 지파에 따라서 구획되고 그 순서도 구조화되어있다. 이것은 산의 형상과 각 지파의 친소성, 촌수, 각 파를 구분하는 의식, 묘소를 쓰는 산의 입지공간 등과 같은 사회적 범주·정치적 위세 등에 영향을 받는다.
9. 결언 지금까지 필자는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에서 거행된 박효수 선생의 유림장의 의례절차와 영혼관, 묘소공간, 슬픔을 나타내는 의례적 표현 등에 관해 기술·분석하였다. 유림장에 나타난 주민의 죽음에 관한 사고, 감정, 그리고 영혼관과 묘소공간은 그들이 행하는 의례와 의례적 행동, 집단의 언설 등과 포괄적 관련성을 맺고 있었다. 사자의 혼백과 신의 관념은 인간세계의 상례와 교묘하고도 정세하게 접합되어있었고, 상주들은 의례를 통해 죽음이 가져다 준 심리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된 상황을 점진적으로 통합하였다. 특히 주민의 혼백관념에는 음양사상이 명확하게 내재하고 있었다. 또한 제수진설에서 좌우의 구분은 범 인간세계의 정신구조에 나타나는 이분법적 구조와 일치하고 있으면서도 지역에 따라서 변형되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묘소공간은 사회적 거리와 항렬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어서 친족관계는 묘소배열에 영향을 주었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문화적 표현은 지역사회 성원들 간의 연대로 나타기도 하였다. 신촌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를 통해 죽음을 인간생활에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이행단계로서 인간의 삶속에 깃들어 있음을 인식하면서 신과 인간이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자의 공간 속에 神人合一이 이루어짐을 보여주었다. 현대산업사회의 죽음관행에 대한 재발견과 상품화되어 가는 죽음의 의례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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