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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옌 중단편선
■ 영아유기
해바라기 가득한 들판에서 여자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내 심장에 끈끈한 검붉은 피가 가득 차올랐다.
아이가 계속 울었다. 마치 엄청나게 억울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그 여자아이가 버려진 아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이를 향한 내 싸구려 연민은, 아이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큰 은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얼굴이 참새 알처럼 작은 차장 아가씨.
차는 10미터 정도의 길이에 유리창 스무 장 가운데 열일곱 장은 이미 깨져 있었고, 시커먼 가죽으로 뒤덮은 좌석은 마치 잔뜩 물에 불은 빵처럼 뒤틀려 있었다.
운전기사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군 생활은 어디서 하셨우?”
남동생이야, 남동생이야, 아빠가 남동생을 주워왔어!
여자 아기였다. 아기는 피딱지가 잔뜩 묻어 있고 쪼글쪼글한 다리를 바동거리며 악을 쓰며 울었다.
해방이후 경제생활이 나아지고 위생 환경도 개선되면서 영아 유기도 대폭 줄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들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양상이 훨씬 더 복잡해졌다.
벌금을 내게 되어 있잖아요? 그렇기야 하지! 둘째를 낳으면 2000위안, 셋째는 4000위안, 넷째는 8000위안이오.
아이를 위해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는 일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아기를 맡길 집을 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럼……. 그냥 그 아이 내게 줘…….
애초에 주워 오지 말았어야지!
그래,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이미 주워 온 걸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나는 해바라기 들판에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꽃 판에 박힌 수많은 까만색 씨앗은 마치 수없이 많은 검은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해바라기는 안절부절 슬픈 모습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도시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름답고 온화한 젊은 처녀가 젊은 남자를 살해해 먹어 버린 사건이었다.
고향의 아득한 역사 속에 역아라는 요리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아들을 삶아 제환공에게 바쳤는데, 역아의 아들의 고기 맛이 양고기보다 훨씬 맛있었다고 한다. 나는 인성이란 얇은 종이 한 장만도 못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친 해바라기 잎이 마치 사포처럼 걷잡을 수 없는 내 마음을 자꾸만 문질렀다. 처음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바람이 멈췄다. 소리를 낼 수 있는 곤충이란 곤충이 모두 가장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등에 작은 메뚜기를 업은 큰 메뚜기가 해바라기 줄기에 붙어 있었다. 교배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인류와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인간에 비해 전혀 비천하지 않은 존재이며, 인류 역시 그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 없다.
이곳 해바라기 들판은 어쨌거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고개를 숙인 무수한 해바라기 꽃 판이 무수히 많은 아기들의 얼굴처럼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에게 위안을 주고, 세상의 에너지를 느끼고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슬픔을 기탁할 만한, 그래서 내 글을 끝낼 상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해바라기? 메뚜기? 개미? 귀뚜라미? 지렁이? 모두 그저 황당한 것들이었다. 아무것도 삶의 본모습은 아니었다.
의사와 향 정부가 손을 잡고 가임 연령대의 남녀를 수술대 위로 끌고 가 강제로 정관을 묶고 있지만 과연 고향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소 열 마리가 끌어도 절대 돌아서지 않을 사상을 잡아매 버릴 묘책은 누가 갖고 있단 말인가?
■ 철의 아이
대대적인 철강 제련이 시행되던 그해, 정부는 민공 20만 명을 동원해 두 달 반 동안 80리에 달하는 철로를 깔았다.
철길 노반이 매우 가팔랐다. 나는 마치 커다란 뱀 같은 철로 레일을 봤다. 분명히 아주아주 먼 곳에서 기어 왔을 것이다. 내가 밟으면 꿈틀거리며 끝없이 긴 나무 꼬리로 나를 휘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근을 반 근 먹고 나니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우리가 자꾸만 걷다 보니 갑자기 철로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모두 우리보다 훨씬 키가 큰 잡초들이었고, 잡초들 속에 무더기로 붉은 녹이 슨 폐철들이 보였다. 여러 대의 기차가 잡초 속에 쓰러져 있었다.
앞으로 조금 나아가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철강 더미에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화롯불에 사람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뭘 먹고 있을까? 커다란 고기만두, 고구마. 그들은 정말 맛있게, 달게 먹느라 두 볼이 불룩했다.
그 애가 총 등을 베어 물어 맛을 음미하더니 말했다. “정말 맛도 되게 없네. 저 사람에게 줘 버리자.”
■ 첫사랑
아홉 살 되던 해, 나는 벌써 소학교 3학년이었다.
더구나 그의 집은 명성도 드높은 위풍당당 극빈 농으로, 위로 3대가 거지였다. 그의 엄마는 호소문 작성을 위해 걸핏하면 학교에 불려 왔다. 그럴 때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엄동설한에 동냥을 다니던 일, 비바람 치던 날 밤 두평위를 지주 집 연자맷간에서 낳았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 집은 부유한 중농이라 배경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근홍묘정(根紅苗正)※<마오찌둥 시대의 정치적 용어. 극좌 노선이 성행 했을 때 노동자와 빈농, 열사의 자제 같은 출신 배경을 뿌리가 빨갛다고 하여 근홍 이라 했고, 신 중국에 태어나 홍기 아래 성장하여 구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를 씨앗이 반듯하다고 하여 묘정이라 했다.>으로 여드름 가득한 얼굴에 눈을 부라리는 무산 계급 후손의 말 같지도 않은 만행에도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우리 교실은 원래 마을에서 양을 기르는데 쓰던 두 칸짜리 곁채로 비가 오는 축축한 날에는 양 비린내가 진동했다.
반에는 여학생이 두 명밖에 없었다. 하나는 우리 삼촌 딸이고, 또 한 사람은 성이 ‘두’인데, 이름은 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애는 두 발 모두 발가락이 여섯 개였다. 발이 평평하고 넓어 마치 작은 부들부채 같았다. 우리는 그 애를 류즈라 불렀다.
류즈와 한 걸상에 앉는다는 사실에 내가 느꼈던 수치스러움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담임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교실로 들어섰다. ~~~여러분, 우리 반에 새로운 학생이 왔다. 이름은 장뤄란! 장뤄란 학생은 혁명 간부의 자녀로 고귀한 자질을 듬뿍 지닌 학생이니 여러분 모두 열심히 배우기 바란다.
장뤼란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학교 근처에 쌓아 둔 관목 더미 뒤편에서 뛰어나가 숨을 헐떡이며 장뤼란을 가로막았다. 장뤼란이 어!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마음을 진정시킨 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얘, 너 뭐하는 거야?
나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선홍빛 사과를 책가방에서 꺼내야 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장뤼란은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를 향해 침을 뱉더니 고개를 들고 가슴을 내민 채 도도하게 스쳐 지나가 버렸다.
■사랑 이야기
그해 가을 대장이 열다섯 샤오디와 예순다섯의 노인 궈싼에게 수차를 돌리도록 했다. ~~~배추에 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수로 관리자는 허리핑이라는 여성 지식 청년으로 나이가 스물다섯 정도였다.
허리핑은 몸집이 컸다. 궈싼 아저씨보다도 더 컸다. 우슈에도 능해서 듣자 하니 중국소년무술팀에 참가해 유럽 공연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늘, 문화 대혁명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분명히 한 가닥 했을 거라고 아쉬워했다. 출신 배경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본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주자파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허리핑은 말수가 적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성실하다고 말했다. 그녀랑 같이 내려온 지식 청년들은 학교에 가는 사람도 잇고, 일자리를 잡은 사람도 있고, 도시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허리핑은 이 모든 것에서 제외되었다.
대장은 더 이상 그녀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않았다. ~~~~마을의 젊은 청년들은 아마도 그녀의 대단한 창술을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아무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
궈찬은 아내 없이 혼자 지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가 리가오파의 마누라와 놀아난다고 말했다.
허리핑이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샤오디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문득 허리핑이 한껏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ㅇ었다.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샤오디의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치고 이도 닥닥 떨리기 시작했다.
나이를 묻는 허리핑에게 그는 열다섯이라고 말했다. 허리핑은 그에게 왜 공부를 하지 않는지 물었고, 그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날부터 귀싼은 매일 리가오파 집에 검둥개를 치료하러 갔고, 허리핑 역시 사오디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느 날 정오, 샤오디는 생산대 들판에서 빨간 무 하나를 훔쳐 물에 깨끗이 씻은 다음 풀더미 안에 숨겨 놓고 허리핑이 오기를 기다렸다.
허리핑이 빨간무를 받아들더니 샤오디를 빤히 바라봤다. ~~~허리핑이 물었다. 이 빨간 무 왜 주는거야? 샤오디가 말했다. 누나가 좋아서요. 허리핑이 한숨을 내쉬더니 손으로 빨간 무의 매끄러운 껍질을 매만지며 말했다. 넌 아직 어린애야...
이듬해 허리핑은 쌍둥이 둘을 낳았다. 이 일은 가오미 현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다.
■ 메뚜기 괴담
1927년 4월 어느 날 우리 할아버지가 괭이를 걸치고 밀밭에 김을 매러 갔다.
바로 그날 할아버지는 엄청난 메뚜기 떼가 땅에서 올라오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순간 갑자기 서북 방향 하늘에서 두터운 암홍색 구름이 마을까지 날아오더니 다시 순식간에 들판 상공을 향해 움직였다. 붉은 구름에서 척척 굉음이 들렸다. 마치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붉은 구름이 마치 지상을 정찰하듯 잠시 뱅그르르 돌더니 갑자기 쩍 갈라지며 하늘에서 누런 비가, 수없이 많은 황금별이, 화살처럼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들판을 가득 메우고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던 농작물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만물의 영장이라 호령하던 인류는 그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으니 여기에 깊이 새겨 봐야 할 이치가 숨겨져 있다. 메뚜기, 그 더러운 곤충은 늘 부패한 정치와 전란의 수단으로 어수선해진 세월과 연결된다. 마치 난세를 상징하는 분명한 부호 같은 것이다. 여기에 바로 심오한 이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해 철로를 가득 덮은 메뚜기 떼가 산을 이루어 기차 진로를 막는 바람에 자오지선 철도 교통이 일흔 두 시간 중단되었다고 한다.
■ 한밤의 게 잡이
한참을 보챈 후에야 아홉째 삼촌은 드디어 날 데리고 게를 잡으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1960년 중반의 일이었다.
오늘밤 서북풍이 살짝 불어. 서풍이 불면, 게 다리가 근질근질, 움푹한 습지의 게들이 서둘러 오수이허 강으로 가서 회의를 하지. 여기 하구는 그 게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이야. 날이 밝을 때까지 잡으면 이 두 마대로 부족할지도 몰라.
축축한 안개가 바닥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달이 제법 높은 하늘까지 올라갔다.
이상해, 이상해, 장말 이상해. 오늘 밤 분명히 게가 엄청나게 몰려올 날인데. ~~~그런데 게 모습은 보이지 않다니.
삼촌이 강가 관목 더미에서 반짝이는 나뭇잎 하나를 떼 내 두 입술 사이에 끼우고 삐리리 이상한 소리를 냈다.
삼촌 불지 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밤에 휘파람 불면 귀신이 나온대.
이때 갑자기 은은한 향기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하구에서 전해지는 향기였다. 향기를 따라가 보니 수면에 순백의 연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커다란 손 하나가 우악스럽게 내 목덜미를 잡더니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분명히 아홉째 삼촌이 나를 물속에서 잡아끌어 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 삼촌은 방죽에 앉아 여전히 멍하니 나뭇잎을 불고 있었다.
바람막이 등잔의 어두침침한 누런 불빛에, 우리가 게를 잡으러 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리자 게들이 떼를 지어 수숫대 울타리로 기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부드러운 손길 하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뜻밖에도 얼굴이 은으로 만든 대야같이 생긴 젊은 여자가 보였다. 머리가 길고 숱이 많았다.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물었다. 꼬마야 여기서 뭐하니? 내가 대답했다. 여기서 게 잡고 있어요. 그녀가 킥킥 웃었다.
그녀가 뒤로 손을 돌려 이삭이 달려 있는 수숫대를 끌어당기더니 하구 양쪽 울타리 사이에 획 내던지자 커다란 청색 게들이 수숫대를 타고 재빨리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수숫대 아랫부분을 마대에 꽃자 게들은 하나씩 줄지어 마대 속으로 들어갔다. 홀쭉했던 마대가 금세 불록 해졌다.
어때?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내게 물었다. 내가 말했다. 당신 분명히 선인이죠? 그녀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난 선인이 아니야. 그럼 여우가 분명하네요. 내가 확신하듯 말했다. 그녀가 큰 소리로 웃었다. 여우는 더더욱 아니지.
그녀가 말했다. 꼬마야, 넌 말해 주도 몰라. 이십오 년 후에 동남 방향에 있는 커다란 섬에서 너랑나랑 다시 만나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 내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붉은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삼촌이 나를 잡아채 씩씩거리며 물었다. 어디 있었어?
삼촌 말에 의하면 나를 데리고 마을을 나와 수수밭에 들어갔는데, 잠깐 넘어졌다 일어나는 사이, 나도 보이지 않고 바람막이 등잔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여기 마대 두 개에 뭐 있어? 형이 물었다. 내가 말했다. 게야. 내가 말했다. 삼촌이 주둥이를 동여맸던 풀 줄기를 풀자 거대한 게들이 후다닥 기어 나왔다. 이걸 네가 잡은 거야? 삼촌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올해 여름 싱가포르의 한 상가에서 친구를 따라 딸아이의 옷을 사러 이곳저곳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탈의실 커튼을 열며 한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가을 달 같은 얼굴. 초승달 같은 눈썹. 밝은 별 같은 두 눈을 가진 아가씨가 어느 순간 사뿐히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손을 꼽아보니 꼭 이십오 년 전 일이었고, 그러고 보니 싱가포르가 바로 동남 방향의 커다란 섬이었다.
여우도 아니고 선인도 아니면 대체 정체가 뭐예요?
■ 창안대로 위의 나귀 타는 여인
4월 1일 오후 시단 지하철역을 빠져나온 허우치는 고개를 들었다. 태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자전거는 무척 낡았는데, 온종일 지하철역에 내팽개쳐 둔 자전거들은 거의 성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막 자전거 물결에 합류하여 창안대로를 따라 집으로 가고 잇을 때 서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허우치는 서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그 순간 갑자기 빨간 치마를 입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나귀를 탄 젊은 여자가 보였다. ~~~나귀를 탄 그녀 뒤로 말을 탄 한 남자가 바짝 따라가고 있었다.
경찰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정지! 안 들리나? 정지하라고 하잖아!
■ 후미족
아빠가 나가 버리자 엄마가 바닥에서 나를 잡아 일으키더니 내 귀를 잡아당기며 따지고 들었다.
착하지? 엄마에게 말해 봐. 어젯밤에 대체 어딜 간 거지? 어딜 가서 그렇게 좋은 음식을 먹은 거야?
진바오를 따라 걔네 집 뒤뜰의 우물에 들어갔어요. 나는 되도록 상세하게 그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제 오후. 진바오네 집에 놀러 갔었어요. 잠깐 놀다보니 목이 너무 말랐는데, 진바오 집에 물이 없다는 거예요. 진바오가 날 데리고 자기 집 뒤뜰로 마실 물을 구하러 갔어요. 뒤뜰에 보니 꽤나 깊은 우물이 있더라고요....
엄마가 내 말을 끊고 이렇게 물었는데, 마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고 이 잡놈의 새끼. 밤새 돌아오지도 않고! 도대체 어디서 잤단 말이야?
그 사람들은 코가 약간 길어요. 그렇다고 아주 긴 건 아니고요. 우리 코보다 약간 길어요.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콧구멍이 하나뿐인 데다 그것도 콧대 끝에 달려 있다는 거예요. 밥은 안 먹어요. 냄새를 마는데, 그냥 그렇게 냄새만 맡아도 배가 불러요. 그렇지만 밤을 할 줄 알아요. 그 사람들이 지은 밥은 밥맛이 기가 막혀요. 닭이랑, 오리, 토끼도 완전히 꿀맛이에요...
내가 밤새 겪은 기이한 일을 모두 들려주려 막 서두를 시작했을 때 아빠가 그릇을 내던지며 젓가락으로 식탁을 탕탕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달려와 따귀를 날렸고,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빠가 나가버리자 엄마가 바닥에서 나를 잡아 일으키더니 내 귀를 잡아당기며 따지고 들었다. 잡놈의 새끼, 사실대로 말해! 어젯밤에 어디 갔어? 위진바오를 따라 코가 긴 사람들에게 갔어요...
분명히 사실을 말했는데 그들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욕하고 있었다.
처음 집 문을 들어섰을 때는 사실 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나혼자만 진수성찬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밀을 끝까지 간직하기로 결심했다.
착하지? 엄마에게 말해 봐. 어젯밤에 대체 어딜 간 거지? 어딜 가서 그렇게 좋은 음식을 먹은 거야?
엄마, 잘못했어요... 어젯밤에 건달패를 따라 생산대 송아지 주둥이를 철사로 묶어 죽여서.... 그런 다음에.... 그 애들이 불을 지펴 송아지를 익혀.... 나더러 먹으라기에, 너무 먹고 싶어서, 그만 송아지 고기를 먹었어요....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갑자기 주먹으로 변하더니 북을 내리치듯 내 머리를 두둘겨 팼다. ~~~~빌어먹을 새끼, 나가 죽어. 공안국에서 잡으러 올 거다!
비밀을 말한 건 아니겠지? 네... 이렇게 대답하는 나는 마음이 캥겼다. 반드시 비밀 지켜야 돼. 그러지 않으면 더 이상 좋은 음식은 먹을 수가 없어.
엄마는 항상 우리 형제자매에게 맥이 빠진다는 듯 말했다. 쟤 좀 봐! 어떻게 된 애가 점점 더 동쪽 집 바오 녀석을 닮아가지? 누나 중 하나가 말했다. 너무 닮았어. 한 엄마가 낳은 애도 저렇게까지 닮진 않을거야. 이렇게 말하며 누나는 까만 눈으로 마치 원수라도 대하듯 엄마를 노려봤다. 마치 엄마가 누나에게 해묵은 빚이라도 지고 있는 것처럼. 바오 녀석이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진바오 형이다. 형은 우리 마을에서 악명이 높았지만 형이 도대체 무슨 나쁜 일을 저질렀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물 안에 비친 붕어빵처럼 똑 닮은 두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쳐다본 후 우리는 자기 얼굴에 침을 밷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 침을 밷는 것이 마치 형 얼굴에 밷는 것 같았다.
우리는 우리 얼굴을 향해 침을 밷어 우리 얼굴을 흩어뜨렸다.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났다.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봤다. 주위에 무너진 담과 미친 듯이 헝클어진 잡초, 잡초 더미를 후다닥 뛰어가는 도마뱀~~~~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이 보이지 않으니 누군가 고기를 굽고 잇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맛있는 냄새는... 그 냄새는 바로 우물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짝 긴장하여 코를 벌름거렸다. 꿈에서 볼 수 없었던 황홀한 먹거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벽돌처럼 두터운 고기가 한 점, 한 점, 노르스름하게 구워져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우리는 도르레 밧줄을 잡고 우물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형이 먼저 아래로 내려가고 그 다음으로 내가 내려갔다. 우물은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귓가에 윙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거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눈앞이 밝아지나 싶었는데 아래로 조금 내려가자 천천히 앞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두려웠지만 점점 더 강렬해지는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언제부터일까, 눈앞이 점차 밝아지면서 길도 넓어지기 시작했다.. 여러 갈래의 빛줄기가 동그란 구멍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접시 하나에는 벽돌처럼 두껍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황금색 고기가 한 점 놓여 있고 그 위에 잘게 자른 고수가 뿌려져 있었다. 또한 다른 접시에는 대가리가 배 속에 처박힌 닭 십여 마리에서 모락모락 황금색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접시를 빙 둘러싸고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엉덩이 뒤로 두꺼운 꼬리가 바닥을 받치고 있었다. 그들은 나뭇잎으로 엮어 만든 옷을 입고, 머리에 박 껍질로 만든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두 눈이 작고 귀가 크다는 점에서 우리와 비슷했다. 우리와 다른 점은 코였다. 우리는 코가 납작하지만 그들은 코가 긴 데다 우리보다 콧구멍 하나가 적었다. 그들이 접시 주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목을 길게 빼자 음식물이 거의 코에 닿을 듯 말 듯했다. 그들의 콧구멍은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조금 wjus 우리가 들었던 소리는 그들의 코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들은 한바탕 음식 냄새를 맡은 후 접시 곁을 떠났다. ~~~~지하 동굴에 정적이 감돌았다. ~~~우리는 결국 먹음직스러운 음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살금살금 접시 앞으로 다가갔다. 위험을 불사한 채 우리는 그 멋진 음식들을 집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코쟁이들이 우리를 애워 쌌을 때 도망치고 싶었지만 배가 너무 불러 꼼짝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 둘의 존재를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 둘은 원래 그들 쪽 사람이었는데 흰 털 강풍이 부는 바람에 우리가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몇 년 전부터 우리 둘이 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무척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들은 일찌감치 우리를 청해 한바탕 놀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 기회가 왔으니 집에 온 것처럼, 아니면 친척을 방문한 것처럼 편하게 있다 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냄새를 맏은 음식이 싫지 않으면 언제든지 먹으러 와도 좋다고 말했다. 우리가 먹지 않으면 음식물을 비밀 통로에 버려 푸른 바다로 흘러가게 해서 눈이 넷 달린 물고기가 먹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우리를 우물 입구까지 바래다주며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말하면서, 간절하게 절대로 외부 사람들에게 이곳 이야기를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맹세했다. 만약 우리가 말한다면 까마귀가 우리 머리를 쪼아 먹을 거예요.
■ 백구와 그네
온몸이 하얗고, 앞발 두 개만 새까만 백구가 잔뜩 풀이 죽어 고향의 작은 냇가 위 허름한 돌다리를 지나가고 잇을 때였다. 나는 마침 다리 초입의 돌계단에서 맑은 강물로 얼굴을 씻고 있었다.
나는 열아홉, 놘은 열일곱, 백구는 사 개월이 되었을 때 해방군 부대들, 군용차들이 북쪽에서 끊임없이 다리를 건너왔다.
학생 선전대는 막사 옆에서 징과 북을 두드리며 노래와 춤판을 벌였다.
나와 놘은 학생 선전대의 핵심이었다.
작은 고모……. 나는 난감해하며 말했다. “나 모르겠어요?”
내가 놘을 작은 고모라 부르는 것은 어릴 적부터의 습관이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헤어진 지 십 년, 모두 나이가 들고 보니 그렇게 불러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은지 오래였다.
놘은 진작부터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전히 땀에 절어 있는데다 말라비틀어진 머리카락 한 줌이 뺨에 붙어 있었다. 시커먼 얼굴에 흙빛이 어른거렸다. 좌측 눈에 눈물이 번득였다.
너희 인생이 잘나간다고 우리 인생은 찌그러졌는지 알아? 쌀 먹는 사람도 살지만 쌀겨 먹는 사람도 살고, 고급한 인간도 살아가겠지만 저급한 인간도 살게 되어 있어.
너 어쩌다 이렇게 됐어? 내가 말했다.
고급한 인간은 누구고, 저급한 인간은 또 누군데?
네가 바로 고급한 인간 아야? 대학 강사님!
여덟째 삼촌으로부터 놘 고모의 남편이 벙어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의 실물을 마주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벙어리는 나를 얕잡아 본 것이 확실했다. 그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어 나에 대한 멸시와 증오를 표현하고 있었다.
놘이 두 손을 배 위에 포갠 채 조금 비틀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나는 그녀가 미적거리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를 금세 알아차렸다. 깨끗한 푸른빛 인단트론으로 염색한 상의에 주름이 반듯하게 선 회색 테이크론 바지를 보니 방금 갈아입은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차림을 보는 순간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내 눈길을 의식하고 고개를 숙이더니 벙어리를 빙돌아 내 앞으로 다가와서 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리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벙어리는 술고래였다.
백구가 일어나 수수밭 안으로 걸어가면서 자꾸만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짖었다. 마치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빽빽한 수숫대를 가르며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조그만 보따리가 옆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한쪽 수숫대를 찌그려 뜨려 공간을 만들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보따리에서 노란 천을 꺼내 찌그러진 수수 위에 폈다.
난 운명을 믿어. 영롱한 눈물 한 줄기가 그녀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가 말했다. 백구에게 말했어. 백구야, 백구야, 내 마음을 안다면 다리 어귀에 가서 그를 데려오렴. 그가 온다면 우리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야. 그런데 백구가 널 이리로 데려왔어.
어서 집에가. 나는 가방에서 칼을 꺼내며 말했다. 그 사람이 내게 이 칼을 줬어. 네가 떠난 지 십 년이야. 평생 널 못 볼 줄 알았어. 아직 결혼 안 했지? 아직 결혼……. 너도 그이를 봤지. 항상 그래. 키스를 해도 키스하다 죽을 것 같고, 때리기 시작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어……. 내가 남자랑 말 한 마디만 해도 의심을 해서 밧줄로 꽁꽁 묶어 두지 못해 안달이야. 어찌나 답답한지 난 하루 종일 백구랑 이야기를 해.
백구야, 내가 눈이 먼 뒤로 언제나 나랑 같이 했지. 네가 나보다 빨리 늙어. 그이에게 시집간 지 다음 해에 임신을 했어. 배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서 산달이 가까웠을 때는 걷지도 못했어. 서 있어도 내 발가락 끝이 보이질 않았어.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어.
이듬해 나는 하마터면 기절하는 줄 알았어.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줄곧 마음을 졸였어. 하나님, 제발 아이들이 아빠를 닮지 않게 해 주세요. 모두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아이들이 칠팔 개월 되었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이건 아닌데. 모두 하나같이 멍하니 말을 하지 않고 죽어라 하고 울기만 하는 거야. 나는 기도했어. 하늘이여! 제발 우리 집 모두 벙어리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단 하나만이라도 나랑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런데도 결국 모두 벙어리였어…….
나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고모……. 작은 고모……. 모두 내 탓이야. 그 해에 내가 너랑 그네를 타러 가자고 하지만 않았다면…….
네 탓이라니! 생각해 보면 결국 나 자신이 잘못한 거지. 그해에 네게 말했지. 차이 대장이 내 머리에 입맞춤을 했다고……. 내가 용기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부대로 그를 찾아가 날 거두어 달라고 했을 거야. 그는 진심으로 날 좋아했어. 그 후에 그네를 타다가 일이 생겼지.
넌 학교에 간 후에 내게 편지를 썼지만 난 일부러 답장을 하지 않았어. 이미 얼굴이 망가졌으니 네 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 쓸쓸하지만 혼자 살고 말지. 너까지 힘들게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당시 네게 시집을 간다고 했으면 넌 날 받아들였을까? 나는 거침없이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동했다. 분명히! 분명히 받아들였을 거야. 그래, 너……. 너도 알아야 해……. 네가 싫어할까봐 의안을 만들어 넣었어. 난 지금 배란기야……. 말을 할 줄 아는 아이를 원해……. 네가 내 뜻을 받아주면 그게 날 살리는 거야. 거부하면 그건 날 죽이는 일이고. 천 가지, 만 가지 핑계가 있다 해도 절대 말하면 안 돼.
■ 큰바람
학교가 여름 방학에 들어가자 나는 후다닥 짐을 챙겨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며칠 전 집에서 올해 여든 셋 되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알아주는 농사꾼이었다.
나는 우울한 심정으로 집 문을 들어섰다. 어머니가 집에 계셨다. 어머니 역시 예순이 넘었고, 오랫동안 노심초사하며 사시느라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작은 수레를 밀고 둥베이와를 한 바퀴 돌다가 무슨 풀을 하나 꺽어 오셨다고 했다.
두 손으로 이 풀을 받쳐 들고 오시더니 글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잖니. 상업 엄마야, 이것 좀 봐라 이게 무슨 풀이지? 알 수 없었다만 몹시 좋아하시더라. 한 밤중에 할아버지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기에 일어나 가 봤더니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어... 하지만 임종하실 때까지 전혀 힘들어하시지는 않았단다.
~~~~우리 집 뒤쪽에는 구불구불 자오허 강이 흐른다.
할아버지랑 처음 습지로 풀을 베러 간 것은 내가 일곱 살이 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할아버지 저게 뭐예요? 바람이야! 할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힘껏 수레를 당겨! 이렇게 말하며 할아버지는 허리를 구부렸다.
할아버지 수레를 버리세요! 나는 바닥을 기어가며 소리쳤다.
강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강풍이 지난 후 천지는 다시 잠잠해졌다.
바람은 우리 수레에 싣고 있던 풀을 모두 실어 가 버렸다. 아니, 수레의 사개에 풀 한 줄기가 끼어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풀을 들어 보였다. 평범한 띠 한 줄기였는데 붉은색인지 초록색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풀 한 줄기만 남았어요.
사람이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그 먼 둥 베이와까지 가서 이런 풀 한 포기를 가져오시더니 , 글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니. 상얼 돌아오면 보여 줘. 이게 무슨 풀인지, 그 애는 배운 게 많으니... 그래, 너는 알겠니?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내게 풀을 건넸다.
나는 풀을 받아 소중하게 사ㅑ진첩에 끼워 넣었다. 풀을 끼워놓은 쪽에는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약혼녀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 짚신 토굴
열댓 그루 버드나무와 홰나무 줄기, 굵직한 옥수숫대와 두터운 황토 사이로 섣달 스무날 까마귀처럼 시커먼 밤하늘이 우리 머리 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얼어붙은 눈길을 밟으며 집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하늘은 완전히 암흑으로 변했고, 땅에 쌓인 눈이 위로 1~2미터 정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이곳 이란 짚신장이들의 작업장이다. 우리는 이곳을 짚신 토굴이라 불렀다.
우리 토굴은 제법 커서 한가한 이들 몇몇이 추위를 피해 몸을 덥히러 오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위다선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왕년에 칭다오에서 인력거를 끌었던 경력이 있는지라 발걸음이 어찌나 날 샌지 잽싸게 달아나는 송아지를 따라잡을 정도였다.
선생님은 건달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큰 수탉이라고 불렀다. 나는 선생님 침대 시트 아래에 가시가 잔뜩 난 남가새를 한 움큼 흩뿌려 놓았을 뿐인데, 선생님은 그깟 일로 나를 학교에서 내쫓고 말았다.
나는 귀신불을 본 적이 없지만 샤오구루는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길거리를 헤매다가 늦게 돌아오는 길에 들판을 지날 때면 귀신불들이 그를 에워싸고 빙빙 돌았다고 한다.
그는 화피자(여우나 들 고양이가 요괴로 둔갑한 것)도 본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이 족제비보다 약간 크고, 까만 입에 흰 꼬리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 말을 할 줄 아는데 소리가 작아서 조그만 나팔 정도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해인가 그의 아버지가 시장에 갔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주점에 들러 술에 잔뜩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등불을 켤 때가 되었는데, 멀리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흙 담에 작은 화피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화피자는 작고 붉은 솜옷을 입고 담장 꼭대기에 마치 사람처럼 서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는 시장에 다녀오느라 한기가 들었는지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났다. 할머니가 밀가루와 생각, 대파를 넣고 수제비를 끓여 아버지에게 먹여 땀을 내도록 했다.
가오미 남쪽 마을에 사십대 아낙이 하나 있었는데, 작년 복날 열일곱 된 딸 둘을 데리고 강둑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두 딸은 일란성 쌍둥이로 큰 문에 쌍거풀이 졌고, 입은 또 얼마나 작은지 잘게 썬 파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난 직접 겪은 일도 있어. 어느 해인가, 나무를 하러 갔을 때 가운데 손가락을 다쳐서 피가 흘렀거든. 그래서 몽당 빗자루에 피를 쓱쓱 닦고 나서 그냥 버렸지. 뭐! 몇 달이 지났을까, 한번은 밤에 오줌을 싸러 나갔는데 달이 엄청 밝아 마치 땅에 서리가 내린 것 같더라고. 그런데 갑자기 뭔가 작은 물체 하나가 담벼락 밑에 뛰어다니는 거야. 나는 누런 쥐라고 생각하고 다가가 발로 밟았는데. 그게 뭐였을 것 같아? 바로 내 중지에 난 피를 묻힌 몽당 빗자루더라고! 불을 지펴 그걸 태우는데 지지직 하며 피거품이 솟아 나는 거야.
■ 투명한 빨간 무
습기를 잔뜩 머금은 어느 가을 새벽녘, 잡초 이파리며 기와 곳곳에 투명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대장이 겹저고리를 걸쳐 입고 한 손에 수수로 만든 빵 한 조각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 껍질을 벗긴 대파를 든 채 천천히 종 아래쪽으로 향해 갔다.
그가 줄을 잡아당기자 종의 추가 종벽을 때리며 땅, 땅, 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골목에서 몰려나와 종 아래로 모여 들더니 마치 나무 인형처럼 눈을 빠끔거리며 대장을 바라봤다. 대장이 꿀꺽 음식을 삼키고 소매를 들어 구레나룻에 둘러싸인 입을 닦았다. 사람들이 일제히 대장의 입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입이 열리자마자 욕설이 터져 나왔다.
“왜 이리 느려 터진 거야? 공사(公社), 이 개자식들! 오늘은 기와공 몇 명 빼내 가고 내일은 또 목공 몇 명을 차출하는 식으로 인부들을 찔끔찔끔 다 빼 가고 있잖아!
공사에서 마을 뒤편 홍수 예방 지구 댐을 넓히겠다고 생산대마다 석공 한 명, 잡역부 한 명을 차출하라고 하니 자네가 갈 수밖에 없네!
대장이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한 청년에게 말했다. ~~~~조금 머뭇거리듯 대장에게 잡역부는 누가 가는지 물어봤다.
모서리에 열 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남자아이는 맨발에 등을 다 내놓은 채 흰 바탕에 초록 줄무늬가 쳐진 통 넓은 아랫도리만 입고 있었다.
아이는 뭉그적거리며 젊은 석공 옆으로 다가가 붙더니 석공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젊은 석공이 조롱박처럼 생긴 그의 까까머리를 따듯하게 도닥거렸다. 집에 가서 새엄마에게 쇠매 달라고 해, 다리 어귀에서 기다릴게.
두 사람은 함께 무지개다리로 올라갔다. 아이는 조심조심 걸었다. 되도록 가장 좋은 위치에서 석공이 자기 머리를 칠 수 있도록 위치를 잡고 조심조심 걸었다.
석공이 말했다. 류 부주임님, 우리 마을도 왔습니다.
그만하시죠, 류타이양 부주임님, 사회주의가 훌륭하다는 것이 뭡니까“ 모두 밤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삐쩍 마른 원숭이 새끼! 부주임이 헤하이에게 욕설을 몇 마디 내뱉더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계속 훈화를 하기 시작했다.
고구마 밭 북쪽은 채소밭이다. 인민공사 사원들의 자류지가 모두 국유화되면서 생산대 에서는 채소밭만 가꿀 수 있었다. 헤이하이는 이 채소밭과 고구마 밭이 모두 5리 밖에 위치한 한 마을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마을은 매우 부유했다. 채소밭에는 배추도 있고 무도 잇는 것 같았다. 푸르다 못해 검은빛이 돋는 무청이 왕ㅅ어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채소밭 한가운데 외떨어진 두 칸짜리 집이 있었다. 그곳에 노인네 한 사람이 쓸쓸히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잠은 마을에서 가까운 사람의 경우 집에 돌아가서 자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은 다리 구멍에서 잔다. 여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자는 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리를 잡고 잔다.
젊은 석공이 말했다. 헤이하이, 가자. 집에 가서 밤 먹자.
두 사람이 한 마을이에요? 쥐즈가 젊은 석공에게 물었다. 석공이 흥분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마을을 가리키며 자기랑 헤이하이는 저 마을 사람으로, 다리만 건너면 바로 집이라고 했다. 쥐즈와 석공은 일상적인 내용이지만 매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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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하이는 철물을 녹이는 난로 옆에서 다섯째 날까지 풀무질을 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오전 내내 소란스럽던 현장에 적막이 감돌았다. 헤이하이는 교각 구멍을 나와 댐 앞 모래사장 위를 천천히 걸어갔다.
쥐즈는 헤이하이의 아랫입술에 선홍빛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쥐즈가 소리쳤다. 헤이하이! 그일 하지 말고! 가자, 나랑 돌아가 돌 깨는 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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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예기치 않게 한바탕 소나기가 내렸다.
늙은 철공은 밝은 갑옷 같은 솜저고리를 입었다. 솜저고리는 단추가 다 떨어져 앞자락을 교차해서 여미고 허리를 빨간 고무 전선으로 묶었다. 헤이하이는 그래도 커다란 팬티에 맨발이었지만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요 며칠 동안 미친 듯이 벌써 6~7센티나 자라나 고슴도치처럼 뻣뻣하게 곤두서 있었다.
추워, 안 추워? 늙은 철공이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왼손으로 가볍게 풀무질을 하며, 오른손에 삽을 든 채 불타오르는 짚을 바라봤다.
오늘부터 매일 밤 7시에서 10시까지 잔업을 한다. 각자 식량 반 근에 2마오를 더 지급하겠다.
헤이하이는 젊은 석공의 하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쥐즈의 발그레한 낯빛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쥐즈가 망치를 내려놓고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강변을 향해 걸어갔다. 가로등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모래벌판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 총각에게 업혀 가지 않도록 조심해.
헤이하이는 작은 요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불빛이 벌거벗은 아이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유약을 발라놓은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쥐즈는 교각 구멍에서 나오는 헤이하이를 봤다. 머리에 지푸라기가 달려 있었다. 아이가 두 손으로 풀무질을 하는 동작이 매우 부드럽고 경쾌했다.
쥐즈. 젊은 석공이 반듯하게 쥐즈 뒤에 서 있었다. 당신 사촌 언니가 전해 달라던데. 오늘 저녁에 같이 있자고. 우리 같이 갈까요?
젊은 철공이 외눈으로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뺨이 실룩거렸다. 늙은 철공은 짚 더미에 앉아 두 손으로 담뱃대를 받쳐 들고 있었다.
그는 붉게 물든 쥐즈와 노르무레한 젊은 석공을 훑어보더니 지쳐 보이긴 하지만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 기다려요. 금방 올 거요.
젊은 철공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배고파 뒤지겠네. 헤이하이! 물통 들고 북쪽에 가서 고구마 좀 캐와. 무도 몇 개 뽑아오고! 우리 밤참이나 먹자.
강둑에 서서 쥐즈와 젊은 석공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쇠로 된 통을 한 번 두드리자 쥐즈와 젊은 석공은 더 이상 고함을 치지 않았다. 앞쪽으로 강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어느 나무에서인지 부엉이가 처량하게 울었다. 계모는 번개 그리고 부엉이 울음소리를 무서워했다. 아이는 매일 번개가 치고, 밤마다 부엉이가 계모의 창문 앞에서 울어 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헤이하이 어디 보냈어? 젊은 석공이 초조하게 젊은 철공에게 물었다.
젊은 철공이 화로 주위에 빙 들러 고구마를 쌓아 올리더니 가볍게 풀무질로 불을 댕겼다.
무가 이렇게 크니 다섯 개면 충분할 것 같네.
젊은 석공과 쥐즈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교각 구멍 서쪽 돌 벽 앞에 앉아 있고, 젊은 철공은 헤이하이 뒤편에 앉아 있었다. 늙은 철공은 남쪽을 마주하고 북쪽 자리 위에 앉아 있었다.
(※이 대목은 책 제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해가 안 된다. 송곳은 돌 깨는 “정”으로 번역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헤이하이의 눈이 전깃불처럼 더욱 번쩍였다. 그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의 매끄러운 쇠 송곳이 눈에 들어왔다. 여릿하게 푸른빛을 내는 송곳. 푸른빛이 은근히 퍼지는 송곳에 금색 빨간 무가 있었다. 빨간 무의 형상과 크기가 마치 긴 꼬리를 단 커다란 서양 배 같았다. 꼬리 수염이 마치 금빛 양모 같았다. 투명하고 영롱한, 아름다운 빨간 무였다.
투명한 금빛 껍질에 생생한 은빛 액체를 품었으며 곡선이 매끄럽고 우아했다.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금빛이 번졌다. 긴 빛살도 짧은 빛살도 있었다. 긴 것은 보리 까끄라기 같고, 짧은 것은 눈썹 같았다. 모두 금빛이었다…….
늙은 철공의 노랫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마치 윙윙대는 파리 소리 같았다.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풀무를 지나 송곳 앞에 서서 진흙이 잔뜩 묻은 석탄부스러기와 찔리고 불에 덴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헤이하이의 손이 작은 무를 잡으려 할 때 젊은 철공이 갑자기 뛰어올라 물통을 걷어찼다. 물이 줄줄 흘러내려 늙은 철공의 짚자리를 적셨다. 그는 바로 무를 낚아챘다. 외눈에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늙은 철공이 거친 노랫소리를 멈추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쥐즈와 젊은 석공도 일어났다. 여섯 개의 눈이 일제히 젊은 철공을 바라봤다.
젊은 철공이 다시 무를 들어 입에 밀어 넣고 있는 중이었다. 헤이하이가 부서진 석탄 조각을 잡아 던졌다. 석탄 조각이 젊은 철공의 뺨을 그쳐 수문 위를 맞힌 다음 늙은 철공의 거적 위로 떨어졌다.
젊은 철공이 교각 구멍을 빠져나와 팔을 힘껏 휘두르자 무가 슝 바람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날아가더니 한참 만에 강에서 풍덩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이하이의 눈앞에 긴 금빛 무지개가 나타났다. 아이의 몸이 스르르 눈앞에 긴 금빛 무지개가 나타났다. 아이의 몸이 스르르 젊은 석공과 쥐즈 사이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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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빨간 무가 수면을 치자 물보라가 퍼졌다. 무가 잠시 둥둥 떠가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은 후 서서히 바닥을 굴러가다가 순식간에 층층이 달려드는 누런 모래에 묻혀 버렸다. 무가 빠졌던 수면 위로 농무가 피어올랐다.
노인이 지나간 후 윗옷도 입지 않은 맨발의 헤이하이가 다가왔다. 오리 수컷이 곁에 있는 암컷과 눈빛을 교환했다. 기억해? 그때 그 애야. 물통을 들고 가다 버드나무가지에 부딪쳐 강으로 떨어뜨렸잖아. 그러더니 개처럼 제방을 기어올라 강으로 들어가서 물이 조금 남아 있던 물통을 끌고 갔던 아이. 물통에 하마터면 그 못난이 황오리가 압사할 뻔 했잖아……. 오리 암컷이 황급히 대꾸했다. 맞아, 맞아, 맞아! 황오리 그 밉상! 매일 날 쫓아다니며 상스러운 말을 주절대는 그놈 , 그때 깔려 죽었으면 속이 시원했을 텐데…….
그래, 노인네를 괴롭혀서 내쫓고 나니 어때?
불 피우지, 수양아들! 젊은 철공이 헤이하이에게 명령했다. 오전 내내 헤이하이는 마치 혼이 나간 듯 우왕좌왕 정신이 없고 일도 대충이었다.
화가 난 젊은 철공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일했다. 한껏 자신의 기예를 보여 주고 싶은 생각에 달아오른 흥분이 땀방울을 따라 고스란히 흘러내렸다.
9시가 지나자 햇살이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음침하고 어두운 교각 구멍에 빛줄기 하나가 서쪽 벽을 비추고 그 빛이 반사되어 구멍 전체가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하얀 수면 위에 검은 빛, 자주 빛이 섞여 있었다. 아이는 눈이 뻑뻑하고 쓰렸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수면을 주시한 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치 수면 위를 떠가는 수은 같은 밝은 빛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는 두 손으로 바짓가랑이 단을 접어 올려 물에 슬쩍 담가 보더니 춤을 추듯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무릎까지밖에 차지 않던 강물이 금세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아이는 바지를 한껏 걷어 올렸다. 포도 빛 작은 엉덩이가 드러났다. 이미 강 한가운데까지 와 있었다. 사방의 빛이 일제히 아이의 몸을 향해 쏟아져 아이의 몸을 뒤덮고, 아이의 눈을 뚫고 들어갔으며, 아이의 까만 눈동자를 뚝 위의 퍼런 바나나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물살이 거셌다. 물살이 자꾸만 아이의 다리를 때렸다. 아이는 물속 단단한 모래 바닥에 서 있었지만 잠시 후 발 밑바닥에 있던 모래가 물길에 쓸려가 버리는 바람에 모래 구덩이에 빠져 바지가 홀랑 젖어 버렸다.
바지에 묻었던 석탄재가 씻겨 나오며 강물을 까맣게 물들였다. 호박 빛 물방울이 뺨에 서리자 아이가 힘껏 입가를 실룩거렸다. 물속을 걷기 시작했다. 발로 물길을 이리저리 더듬어 보았다.
헤이하이! 헤이하이! 아이는 젊은 철공이 교각 구멍 앞에서 외치는 고한 소리를 들었다.
어서 가서 불 피워. 이 사부가 담금질한 송곳도 늙은이에 뒤지지 않아.~~~빨리, 빨리 가서 무 몇 개만 뽑아와, 뽑아 오면 고구마 두 개 상으로 주지.~~~~강둑에 올라간 헤이하이는 멀리서 쥐즈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무 이파리 사이사이로 햇살이 빨간 무 꼭대기를 비추고 있었다. ~~~~무밭에서 수없이 많은 빨간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 이파리 역시 그 순간 까만 머리카락 같은 모습으로 변해 마치 날아가는 새처럼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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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과 저녁 때 마다 헤이하이는 황마 밭에서 아름다운 종달새의 노랫소리를 들었고, 그럴 때마다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치 그 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젊은 철공은 헤이하이보다 며칠 뒤에 종달새 울음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젊은 철공은 교각 구멍에 숨어 주의 깊게 관찰을 한 결과 드디어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종달새가 울기만 하면 작업장에서 젊은 석공의 모습이 사라졌고, 쥐즈는 좌불안석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망치를 던지고 작업장을 빠져나갔다. 쥐즈가 빠져나가고 나면 잠시 후 종달새가 울음을 멈췄다. 그때마다 젊은 철공의 얼굴은 더 심하게 일그러졌고, 더욱 난폭해졌다.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헤이하이……. 가서 무 몇 개 뽑아와…….알코올로 위가 잔뜩 덥혀진 젊은 철공은 입에서 마치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헤이하이가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걸어갔다. 달빛 아래 한없이 신비한 황마 밭을 돌아 알록달록한 고구마 들판을 관통해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 흔들거리는 무밭에 이르렀다.
그날 밤 헤이하이는 교각 구멍에 누워 엎치락뒤치락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달빛이 비스듬히 교각 구멍으로 비쳐 들었다. ~~~아무리 자려고 노력을 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무를 생각했다. 그것이 어떤 무였던가? 황금빛의 투명한 무였다. 잠시 물속에 서 있는 것 같다가 또다시 무밭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계속 찾아다녔다.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
젊은 석공은 철공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행복이 넘치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행복한 일들뿐이었다. 헤이하이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젊은 철공이 젊은 석공에게 못된 짓을 하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젊은 석공이 송곳을 들고 사라지자 젊은 철공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헤이하이를 보고 말했다.
잠시 후 젊은 석공이 대장간으로 들어와 송곳 한 자루를 젊은 철공 앞에 내던지며 욕을 했다. “외눈깔, 도대체 담금질을 어떻게 한 거야?” “자식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어디 자신 있으면 덤벼봐! 네까짓 놈이 무서운 줄 알고? 젊은 철공이 허리에 묶고 있던 방수포를 벗어 던지고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마치 갈색 곰처럼 성큼성큼 다가갔다. 젊은 석공이 댐 앞 모래밭에 서서 재킷과 빨간색 작업 셔츠를 벗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에워싸고 고함을 질렀다. 싸우지 마, 싸우지 말라니까.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난 석공이 곧장 철공을 덮쳤다.
석공이 그 틈을 타 철공을 덮쳤다. 그가 철공의 목을 잡아 옴짝달싹 못하게 누른 후 마치 북을 치듯 철공의 머리를 난타했다. 그때 사람들의 다리 틈으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빠져나왔다. 헤이하이였다. 아이는 마치 커다란 새처럼 석공 등 뒤로 날아가 닭발 같은 검은 손으로 석공의 볼을 잡고 힘껏 뒤로 당겼다. 석공이 입이 벌어지며 이를 드러낸 채 아! 하고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 번 육중하게 모래밭에 발라당 넘어졌다. 철공이 가까스레 일어나 앉아 커다란 두 손에 바닥의 돌 부스러기들을 잡아 사방을 향해 던졌다. 짐승 같은 놈! 개 같은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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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사를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을 당한 류 부주임은 울화가 치밀어 대장간 앞에 서서 젊은 철공에게 미친 듯이 쌍욕을 퍼부으며, 외눈이라도 파내 쥐즈의 눈을 대신해 주라고 소리를 높였다.
철공이 두 팔을 벌리고 마치 깃털이 풍성한 날개처럼 위 아래로 흐느적거렸다.
대담한 석공 몇 명이 수문 위로 올라가 젊은 철공을 끌어내렸다. 그가 필사적으로 허둥대며 욕을 퍼부었다.
엄니 괴로워 죽겠어요. 헤이하이! 착한 제자야. 이 사부 좀 구해 줘. 가서 무를 좀 뽑아 와…….
사람들은 돌연 헤이하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상의를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의는 두껍고 무거운 범포로 만든 것이었다. ~~~~헤이하이는 발에도 새 후이리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이 너무 커서 신발 끈을 꼭 묶는 바람에 마치 대가리가 큰 못생긴 메기 두 마리 같았다. 헤이하이 들었어? 네 사부가 너더러 뭘 하라고 했는지 말이야!
헤이하이가 교각 구멍을 빠져나가 강둑으로 올라가 황마 밭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몸을 엎드리더니 무밭 안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비쩍 마른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무릎을 꿇고 무 하나를 뽑았다. ~~~아이는 쥐고 있던 무를 들어 올려 햇살에 비췄다. 그날 저녁 모루에서 봤던 기이한 광경이 다시 보고 싶었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 이 무에서 물에 빠졌던 무처럼 맑고 투명한 금빛 빛살이 퍼지길 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무는 맑지도 투명하지도 않았다. 금빛 광채도 없고 더더욱 금빛 광채 안에 싱싱한 빛 액체도 머금고 있지 않았다. 그는 무 하나를 더 뽑아 다시 햇살 아래 비춰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노인은 안대를 벗고 급히 무밭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그제야 밭 한가득 채 자라지도 않은 무가 잔뜩 뽑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업보야! 노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한 아이가 무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 커다란 무를 들어 올린 채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봤다. 아이의 눈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반짝이는지 쳐다보고 있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노인은 그래도 인정사정없이 그를 붙잡아 원두막으로 끌고 가서 대장을 깨웠다. 대장 큰일 났어. 이 곰 같은 새끼가 무를 거의 반이나 뽑아놨어.
아이가 정신을 채 가다듬기도 전에 대장이 다시 따귀를 날렸다. 이놈의 새끼. 어느 마을 놈이야? ~~누가 이렇게 못된 짓을 시켰어? ~~~헤이하이의 눈동자에 물결이 일렁였다. 아버지 이름이 뭐냐? 헤이하이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놈 벙어리인가 봐.
대장이 헤이하이의 새 저고리, 새 신발, 커다란 팬티를 모두 벗겨 돌돌 말아 모퉁이에 던지며 말했다. 집에 가서 네 애비에게 옷 가지러 오라고 해. 꺼져!
노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아이를 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헤이하이가 황마 밭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로 헤엄쳐 나가는 것 같았다. 쏴아쏴 황마 잎이 나부끼고 밝은 가을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헤이하이! 헤이하이!
[Review]
코로나에 한파까지 계속되는 요즘엔 집안에서 하루를 보내기 일쑤다. 그런 날에는 마음이 불안하다.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려고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나면 조금 편해진다. 생활 속에서 이동거리가 짧으면 불안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읽을 책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앉은 자리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다는 말에 위안을 얻는다.
‘모옌 중단편선’, 이 책에는 열두 개의 단편과 중편 한 개가 수록되어 있다.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읽어 갈수록 누구의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 되고,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바람에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야기의 주제를 현실의 상황으로 되돌리는 작가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2012년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도 이러한 작가만의 특별함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한다.
소설은 1920년대의 중국 공산당 초기로부터 80년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주로 오랜 세월 그들 생활 속에 동화된 민담이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당시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민초들이 겪는 애환과 사랑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했다. 그들이 하던 상스러운 말들이 심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비밀스러운 삶의 이야기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기 때문에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단편이지만 대하소설처럼 얼마든지 상황을 전개할 수 있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성이나 표현이 풍성하다.
<영아유기> 지난날 인구정책으로 우리나라도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있었다. 중국은 80년대부터 아예 1가구 1자녀 정책으로, 초과 시에는 무거운 벌금을 내게 하는 제도가 얼마 전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다. 이야기는 넓은 해바라기 들판에 유기된 영아를 주워 집으로 돌아온 사내는 가족들의 눈총을 받으며 백방으로 도움의 손길을 구해보지만, 누구도 유기된 영아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도 자식은 언제나 든든한 울이 되었는데, 세상이 변하고 생명이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실이 작가의 눈에는 들판에 가득 피어난 해바라기가 꽃 판에 수많은 씨앗을 품고, 안절부절 슬픈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철의 아이> 마을에 철도가 들어오고 세상은 달라지지만, 오히려 지난날의 추억이 그리웠을까? 작가는 철을 먹는 아이들을 등장시켜 먹어 치우게 한다.
<첫사랑> 모택동의 공산당 정권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 가난하게 산 것이 자랑이 되었고, 부유했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살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날 공산당 간부의 딸이 새로 전학을 왔다. 남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순진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는 누명을 쓰고 곤경에 빠진 상황에서 누명을 벗겨준 그녀가 고마워서, 엄마에게 사정사정하여 얻은 사과를 불쑥 내밀었다가 퇴짜를 맞는다.
“그의 집은 명성도 드높은 위풍당당 극빈 농으로, 위로 3대가 거지였다. 그의 엄마는 호소문 작성을 위해 걸핏하면 학교에 불려 왔다. 그럴 때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엄동설한에 동냥을 다니던 일, 비바람 치던 날 밤 두평위를 지주 집 연자맷간에서 낳았던 일들을 늘어놓았다.”(본문)
<메뚜기 괴담> 중국 들판에서 벌어지는 메뚜기 떼 이야기다. 그들의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는 어느 해 철로를 가득 덮은 메뚜기 떼가 산을 이루어 기차를 막는 바람에 철도 교통이 일흔두 시간 중단되었다 고도 한다.
“ 갑자기 서북 방향 하늘에서 두터운 암홍색 구름이 마을까지 날아오더니 다시 순식간에 들판 상공을 향해 움직였다. 붉은 구름에서 척척 굉음이 들렸다. 마치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붉은 구름이 마치 지상을 정찰하듯 잠시 뱅그르르 돌더니 갑자기 쩍 갈라지며 하늘에서 누런 비가, 수없이 많은 황금별이, 화살처럼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본문)
<사랑 이야기> 농촌 마을에 수로 관리자로 내려온 “허리핑” 지식인 여성은 스물다섯 살이다. 예순다섯 살 먹은 ”궈찬“과 함께 수차를 돌리는 일을 맡은 ”샤오디“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지식인 처녀는 출신성분이 좋지 않아서 그곳 노동 현장을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샤오디와 허리핑 사이에 알게 모르게 정분이 생기면서 일어난 소문을 소설 형식으로 엮은 이야기이다. “이듬해 허리핑은 쌍둥이 둘을 낳았다. 이 일은 가오미 현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다.” (본문)
<한밤의 게 잡이> 어린 소년이 삼촌과 함께 밤에 강으로 게 잡이를 나갔다. 게는 서북풍이 부는 밤이면 습지를 지나서 ‘오수허이’ 강으로 회의를 하러 가는데 그 길목을 지키면 게를 잡을 수 있다는 삼촌의 말을 믿고 따라나섰다. 소년이 비몽사몽간에 삼촌과 헤어지고, 꿈속에서 어떤 여인의 도움을 받아 게를 잡았다는 환상적인 이야기이다.
“오늘밤 서북풍이 살짝 불어. 서풍이 불면, 게 다리가 근질근질, 움푹한 습지의 게들이 서둘러 오수이허 강으로 가서 회의를 하지. 여기 하구는 그 게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이야. 날이 밝을 때까지 잡으면 이 두 마대로 부족할지도 몰라.” (본문)
<백구와 그네>에 담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는 첫사랑의 강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십여 년이 지나 고향을 찾은 청년은 지난날 마을에서 청년회 활동을 함께 했던 여인과 만났다.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헤어진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여인은 말을 못 하는 무지막지한 벙어리 남편을 만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 불행은 겹치고, 세쌍둥이를 낳았는데 모두 아버지를 닮아 말을 하지 못했다. 이별의 순간 수수밭에서 남자를 기다리던 여인은 지난날 고백하지 못했던 사랑을 고백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를 얻기를 소망하며, 끝까지 두 사람만의 비밀로 지키기를 약속한다.
중편으로 함께 수록된 <투명한 빨간 무>는 작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작품이지만 너무 환상적으로 이야기의 결말을 이끈 관계로 조금은 어리둥절하다. 가정에서 버림받고 세상에서도 천시받는 어린 소년이, 어른들 틈에 끼어 노력 동원에 참여한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어떤 이는 애정으로 또, 어떤 이는 천대로 그를 대하지만 소년은 나름대로 묵묵히 그 일에 적응한다. 그에게 할당된 일은 돌을 깨는 철 공구를 재생시키는 대장장이 일이었다. 고작 화로 풀무질을 하는 일이었지만 불 속에서 빨갛게 달구어진 쇠가 장인 匠人에 의해 두드려지고 청옥의 빛, 날 선 모습으로 재탄생되는 모습에 감격한다. 그리고 한낮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 남의 밭에서 몰래 훔쳐 온 무가 자신과 동일시되고? 소년은 이제 새로운 삶으로 변모되어 가기를 소망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은 또다시 무밭에 나갔다가 들키게 되고,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 나타내는 무의 의미가 환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아이가 ‘무’에서 찾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굳이 본다면 소년은 풀무 불 속에서 달구어진 쇠가 물속에 잠기어 강한 쇠로 변하는 순간 나타난 푸른빛처럼 자신의 강한 모습을 무 안에서 찾고 있었던 것일까? “여릿하게 푸른빛을 내는 송곳. 푸른빛이 은근히 퍼지는 송곳에 금색 빨간 무가 있었다.”(본문) . 작가는 소년이 작품 속에서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상황을 이끌어가도록 함으로써 그의 인고의 과정을 대변하고 있다.
“아이는 쥐고 있던 무를 들어 올려 햇살에 비췄다. 그날 저녁 모루에서 봤던 기이한 광경이 다시 보고 싶었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 이 무에서 물에 빠졌던 무처럼 맑고 투명한 금빛 빛살이 퍼지길 원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무는 맑지도 투명하지도 않았다. 금빛 광채도 없고 더더욱 금빛 광채 안에 싱싱한 빛 액체도 머금고 있지 않았다. 그는 무 하나를 더 뽑아 다시 햇살 아래 비춰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본문)
“계속해서 무를 생각했다. 그것이 어떤 무였던가? 황금빛의 투명한 무였다. 잠시 물속에 서 있는 것 같다가 또다시 무밭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계속 찾아다녔다.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본문)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음식을 코로 먹는 환상적인 소재로 한 “후미족”,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지난날 함께 겪었던 태풍의 기억을 회상하는 ‘큰바람’, 토굴 방에서 벌어지는 짚신장이들의 이야기 “짚신 토굴” 등 몇 편의 단편이 더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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