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카시트왕국: 주전1530-1150년
-- 코카서스 지방에서 유래한 인종. 바벨론의 함무라비의 후계자들이 약해지고 무능해진 틈을 타서 메소포타미아북서쪽에 왕국을 세움. 간다스, 아굼1세, 카스틸리아1세와 2세, 울람부리아스, 카스틸리아스4세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다 카스틸리아스4세때에 이르러 앗수르의 투굴티니눌타1세에게 패배하여 왕이 죄수로 잡혀 가고 도시와 신전의 보물들이 약탈당함.
-- 앗수르가 연약해진 틈을 타서 일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가 바벨론 왕조를 다시 일으킨 엘람족에 의하여 1155년 엔릴나디나헤를 끝으로 왕조가 종말을 고함.
-- 신들을 사람의 형태로가 아니라 추상적 형태로 표현, 종교의 윤리적인 면을 강조함. 바벨론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신 앞에서 합당한 도덕적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7. 중간 앗수르 왕국: 주전1356-932년
-- 호리족속의 미타니왕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던 앗수르왕국은 주전14세기초에 미타니의 숫타르나2세가 죽고 난 이후에 찾아 온 혼란기를 틈타서 왕국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 최초의 왕으로 앗수르-우발릿1세가 즉위(1356-1331). 힛타이트는 침략하지 않고 아케나톤이 다스리던 애굽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바벨론을 침략하여 바벨론 왕으로 쿠리칼주2세를 세움.
-- 아닷-니라리1세(1297-1266) 때 바벨론 남쪽을 유일하고 서쪽으로 갈그미스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 살만에셀1세(1265-1235) 때에 미타니의 반란을 진압.
-- 투쿨티-니눌타1세(Tukulti-Ninurta)(1235-1198)는 바벨론의 카스틸리아스4세를 몰락시켰고, 마르둑의 입상과 함께 포로로 끌고 옴. 궁중에서 일어난 반역에 의해 살해당함.
(이 사이에 카시트의 왕 아닷-숨-나실이 반란을 일으켜 바벨론을 재건함. 1128년에 토착민이었던 느부갓네살1세가 일어나 카시트왕조를 무너뜨리고 토착 바벨론왕국을 재건함. 그러나 느부갓네살1세가 죽고 나자 바벨론의 세력을 빠른 속도로 쇠약해졌다.)
-- 디글랏빌레셀1세(1116-1078)가 등장하여 앗수르의 군사력을 절정의 단계에까지 끌어 올림. 디글랏빌레세의 군대는 무자비한 군대였다. 살해당한 자들의 피가 계속에서 냇물처럼 흘렀고 적들의 머리들이 곡식더미처럼 성읍들에 굴러 다녔다. 전쟁을 하지 않을 때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에서 사자, 들소, 코끼리 사냥에 시간을 보냈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성벽을 요새화하고 궁전과 신전의 건축에 매진. 디글랏빌레셀 사후에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18. 새 앗수르제국: 주전932-612년
-- 주전932년에 앗수르-단2세가 즉위하면서 앗수르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살아났다.
-- 앗수르-단의 아들 앗수르-니라리에 이르러 앗수르제국은 전성기에 들어섰다. 서쪽으로는 소아시아까지, 동남쪽으로는 바벨론을 침공하여 평화조약을 체결. 앗수르의 왕들은 a. 온 우주의 왕으로서 경배를 받고자 하는 교만을 보여주었으며, b. 무자비하게 적들을 학살했다.
도시를 불태우고, 반항하는 적들은 산 채로 껍질을 벗겼고, 목을 자르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끌고 가거나 불태워 버림. 이런 잔인한 행위는 우레의 신인 앗수르 신에게 드리는 예배로 해석됨. 그러나 앗수르의 왕권이 약화될 기미만 보이면 속국들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앗수르의 군대는 끊임없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전쟁비용으로 국가자원을 다 탕진하여 멸망당함.
-- 앗수르-나실-팔2세(883-859)도 무자비한 살육을 계속했고, 국내적으로는 성읍과 신전건축, 곡물창고건립, 운하건설, 과일나무재배지도 등을 시행했다.
-- 살만에셀3세(858-824)은 생존을 위하여 정복을 계속함. 정복에서 얻은 물자에 의지하여 명맥을 유지하는 정권이었기 때문에 정복물자가 떨어지면 몰락. 살만에셀3세가 다메섹을 침공하였을 때 다메섹은 발하닷(성경-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아합군대와 더불어 열두 연합군을 이끌고 대결하여 혈전을 벌임. 이 전쟁에서 아합이 전사하고, 발하닷은 부하 하사엘에게 암살당함.
-- 살만에셀3세의 아들 앗수르-나딘-아팔과 삼시 아닷5세의 왕위쟁탈전에서 삼시아닷5세가 승리하여 왕권을 잡음(832-10). 바벨론과 전쟁을 벌여서 바벨론 왕인 마르둑-바랏수-이크비를 포로로 잡아오고 그의 부하들을 산 채로 껍질을 벗겨 죽임. 바벨론 왕위에는 바비-아히-잇디안을 세움.
-- 삼시-아닷5세 사후에 아닷-니라리3세(809-782)가 등장하여 수리아와 팔레스틴 지방에 대한 원정을 벌여 두로, 시돈, 이스라엘(오므리왕), 에돔, 블레셋, 다메섹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세금을 받았다.
-- 아닷-니라리3세 이후에 살만에셀4세, 앗수르-단3세, 앗수르-니라리5세(781-746)가 등장했을 때 앗수르는 많이 약화되었다. 특히 앗수르-단3세 때 재앙이 땅을 휩쓸어 힘이 빠진 틈을 타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가 영토를 확장했고 웃시야 치하의 유다가 잠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빼앗은 디글랏빌레셀3세(745-27)에 이르러 앗수르는 반월형 옥토지대에서 다시 지배권을 되찾았다. 바벨론과 병합시켜 버림.
-- 이 당시 가장 강력한 앗수르의 대적은 다메섹의 르신이었다. 르신은 유다의 아하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임(이사야6-7장, 왕하16,17장에 기록된 수리아-에브라임전쟁). 이때 아하스가 디글랏빌레셀에게 호소하여 도움을 요청. 디글랏빌레셀3세는 즉시 진군하여 다메섹을 정복하고, 여로보암2세때 확장했던 영토를 모두 빼앗고 이스라엘을 사마리아 주변의 작은 영토로 위축시킴. 호세아는 앗수르의 묵인하에 베카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름.
-- 살만에셀5세(726-22)는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애굽과 결탁하여 조공바치기를 거부하자 사마리아를 포위공격하여 멸망시킴. 상류층 사람들 2만7천명 가량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성읍들로 추방당하고 타지역사람들이 사마리아에 이주하여 정착하여 혼합됨으로써 사마리아 백성들이 생겨나게 됨. 향후 유대인들은 피와 종교가 혼합된 사마리아 백성들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살만에셀5세 사후에 보수적인 당파의 지도자인 사르곤2세가 왕위에 올랐다(727-705). 사르곤2세 치하에서 앗수르는 전성기를 누렸다. 이스라엘이 종말을 고한 이후에 가자의 한노, 하마스의 반란도 진압되었다.
-- 사르곤2세가 군사원정길에 죽자 그의 아들 산헤립(704-681)이 왕위에 오름. 그러나 산헤립은 오만한 태도 때문에 도처에서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산헤립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페니키아, 블레셋 동맹군을 패퇴시키고 애굽 구원병도 패퇴시켰으며 예루살렘을 제외한 전 유대지역을 점령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산헤립군대가 붕괴되고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이야기가 왕하18-19장, 사36-37장에 기록되어 있다. 고, 자기 아들로부터도 소외당하다가 칼라의 신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살해당했다. 산헤립 통치기간동안 바벨론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노예출신 마르둑-자길-숨미가 왕권을 잡았으나, 산헤립은 그를 폐회시키고 친앗수르파인 벨 이브니를 왕위에 올려 놓았다.
엘람왕 할라수가 바벨론을 정복하여 잠시 지배권을 장악했으나 689년에 산헤립은 할라수를 죽이고 바벨론에 진격하여 잔인하게 응징했다. 마르둑의 입상을 앗수르로 옮겨갔고, 주민들은 살해되고 추방당했으며, 신전들은 파괴되고 신전보화는 탈취당했다. 그러나 산헤립은 아들 엣살하돈에게 죽임을 당했다.
-- 엣살하돈(680-669)은 북쪽에서 위협하던 시메리안족들과는 평화협상을 체결해 놓은 뒤에 애굽정복에 나섰다. 673년의 첫 번째 원정은 이디오피아왕인 타하르코의 군대에 의하여 국경선에서 저지당했고, 둘째 아들인 아수르바니팔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두 번째 원정에 나섰다. 두 번째 원정에서 타하르코가 패배하고 수도 멤피스는 멸망당했다. 국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왕권쟁탈전이 전개되었다. 이 사이에 다시 애굽에서 반란이 일어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세 번째 원정에 나섰다가 길에서 객사.
-- 앗수르바니팔이 왕위를 계승(668-631). 지휘관, 정치가, 사냥꾼, 미술 수집가, 골동품 애호가로서 앗수르의 문화발전에 기여했으나 정복전쟁에서는 앗수르 왕들의 특징이 무자비함이 그대로 나타났다. 엘람족의 왕들을 입술을 잘랐고, 반역한 성읍주민들을 죽이고 시체를 반역한 성읍 주위에 매달았다. / 애굽이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으나 앗수르의 반격을 받아 663년에 테베스스가 정복당하고 수백개의 성문이 파괴당했다(나3:8)
-- 앗수르 내에서는 앗수르바니팔과 형제 사마스-숨-우킨 사이에서 왕권다툼이 계속되다가 사마스-숨-우킨은 궁전화재 중에 타죽고 앗수르바니팔의 힘을 소진되었다. 앗수르바니팔이 죽은 후 앗수르는 엄청난 전비를 충당해낼 수가 없었고, 항복해온 사람들을 먹여살릴만한 힘도 없었다.
-- 이 사이에 바벨론은 칸달라누가 왕위를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갈대아의 나보폴라살이 바벨론의 왕권을 주장했다. 메데(시아사레스)와 갈대아 연합군이 힘을 규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했고, 바벨론의 나보폴라살도 앗수르를 공격했다. 앗수르의 마지막 왕인 신-살-이스군은 애굽, 스키디아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대항했으나 패전했고, 신-살-이스군은 왕궁 폐허지에서 자결함으로써 앗수르는 종말을 고했다(612)
19. 새바벨론제국: 주전625-539년
-- 나보폴라살의 등장으로 바벨론제국이 시작됨. 앗수르보다 힘이 약했던 바벨론 제국은 군사력으로보다는 외교력으로 제국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함. 나보폴라살은 메데의 시아사레스와 조약을 맺어 북부 메소포타미아지배를 허용하고 중부 바벨론과 수리아지방을 통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나보폴라살은 하란을 정복하고 황태자 바롯느고와 느부갓네살을 보내 수리아의 지배권을 강화. 605년에는 갈그미스에서 애굽군대를 격파하여 애굽의 국경까지 이르는 지배권을 확보. 바벨론의 무너진 신전과 성벽을 재건.
--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나부-쿠둘-우술)이 왕권을 계승(605-562). 에사질라의 신전, 운하, 성벽, 도로 등을 건립. 군사적 모험을 신중을 기했다. 주전501년에 바로 아마시스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597년에는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여호야긴 왕과 그의 모친을 인질로 끌어갔다. 왕위에는 시드기야를 세워 놓았다.
9년후에 시드기야가 애굽의 바로 호프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18개월동안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한 끝에 멸망시킴. 주전586년에 유다왕국은 종말을 고하고 시드기야는 아들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본 후에 장님이 되어 하마스에 있던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감. 이후에 유다는 바벨론의 한 지방처럼 되어 버렸다. 애굽의 지지를 받던 두로는 13년간 반항하다가 멸망당함.
-- 아들 아벨 마르둑이 왕위를 계승(561-560). 여호야긴 왕을 특사로 풀어주었다. 무능했던 마르둑은 처남인 네르갈-살-우술에 의하여 쫓겨남. 네르갈-살-우술은 잠시동안 통치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왕이 되었을 때 달신을 섬기던 제사장들이 라바시-마르둑을 죽이고 나보니두스(555-539)를 왕으로 세웠다. 달신 숭배자인 나보니두스는 달신인 신(sin)의 신전건립과 골동품수집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고레스의 영도하에 페르샤의 세력이 점점 증대되고 있었다. 페르샤가 동쪽 통상로를 차단하자 바벨론은 서쪽과 남쪽으로 통상을 확대해야 했다.
-- 나보니두스느 벨-살-우술(벨사살)을 공동섭정으로 세웠다. 바벨론을 떠나 있었던 나보니두스가 신년축제에 참여하기를 소홀히 하자 백성들이 등을 돌렸다. 이 와중에서 티그리스강 동편에 있던 구티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임명한 구바루는 고레스와 합쳐 버렸다. 시팔에서 벌어진 구바루와의 전투에서 나보니두스군이 패전했고, 이틀 후에 페르샤 군대가 싸움도 없이 바벨론에 진주해 들어왔다(539년10월12일). 나보니두스는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됨. 약탈은 없었고 신전도 특별히 보호되었다. 벨사살은 궁에서 죽었을 것. 10월29일에 고레스는 바벨론에 해방자로 환영받으면서 바벨론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