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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고백하는 선민 이스라엘
이사야 59:9~15상
우리는 지난 주일 저녁에 이사야 59장 1절로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선민 유다의 깊은 죄악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깊은 죄악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재판정에도 공의가 없고 진실도 없고 속임수가 가득하고 독사가 알을 품어 그 새끼를 낳는 것처럼 온 선민의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죄를 행하기에 신속하고 피 흘리는 일에 익숙하여 황폐와 파멸이 가득차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9절부터 15절까지에는 그렇게 악에 깊이 물든 하나님 백성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 자기의 추악한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이후의 15절 하반절부터는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 곧 죄악 중에서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의 열심을 품고 거룩한 싸움을 싸워서 그들을 구속하시는 언약을 선포하시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죄악이 점점 깊어지는 이 시대 속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가 어떠한 신앙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점검하는 귀한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먼저 9절로부터 10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우리가 맹인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여기서 선민 유다가 주체가 되어 고백하는 ‘우리’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고난당하시는 메시야를 소개한 대목에서 ‘우리’ 단락이 나왔는데, 다시 이렇게 ‘우리’라는 대목의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9장 1절에서 하나님의 추상같은 고발장을 접한 선민 유다는 감사하게도 여기서 자기의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9절과 10절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눈어 어두운 영적 장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덕목인 ‘정의’와 ‘공의’가 자기들에게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 결과 자기들은 맹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 없는 자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장님이 빛을 간절히 바라지만 어둠 뿐이고 손으로 더듬으면서 살아가며 발에 채여 넘어지나 무엇 때문에 넘어지는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자기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 백성들에게 선포하기를,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그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고 하였던 것처럼 그들은 아예 다 눈이 다 멀었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영적 장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 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멀쩡히 잘 보고 잘 듣고 잘 판단하고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죄를 지적하면 도리어 화를 내고 거칠게 거부하면서 선지자를 잡아죽이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그들은 자기들이 소경이요 장님이요 자기가 깊이 병들었으며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자기가 보지 못하는 장님이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고 깨닫지 못하는 바보요 살았다 하지만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다시 사는 맥점입니다. 여전히 자기는 세상을 잘 보고 있고 세상에서 들려오는 정보와 말들을 가장 잘 듣고 판단하고 있고 자기의 인생 길을 가장 현명하게 걸어가는 자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심을 인정하지 않고 공의와 공법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한 채 세상적인 이익과 자기의 성공과 명예와 육신적인 쾌락만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은 여전히 죽은 자요 눈먼 자요 귀가 막힌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당시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소경 거지를 고쳐주셨을 때의 일입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른 후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보냈더니 그가 가서 실로암 물로 눈을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그 소경이 눈을 떠서 밝히 보는 기적을 눈앞에 보고서도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일 때문에 예수님을 강하게 비난하며 그 사람과 그 부모를 여러번 괴롭게 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난 후에 자기가 그리스도이심을 알린 후에 여러 사람들 있는 데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들은 자 중에 바리새인들이 서로에게 이르기를
“우리도 맹인인가?”
라는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한복음 9:41)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일들이 스스로 자기는 밝히 잘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고 스스로 자기를 소경이라고 깨달은 자는 밝히 보게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지금도 진정 눈이 열리는 은혜는 자기가 보지 못하는 자요 어리석은 자요 교만한 자요 무능한 자요 하나님을 반역하는 타락한 본성의 종임을 깊이 자각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서 깨달은 남은 자들처럼 우리도 자기에게 정의가 멀고 공의에 이르지 못하고 빛을 바라지만 자기 안에는 온통 어둠 뿐임을 자각하고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내 어두운 눈을 고쳐주옵소서. 내 귀를 열어 듣게 하여 주옵소서. 내 안에 어둠뿐이오니 주님의 마음을 주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간구하는 가난한 심령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1절로부터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곰이 한번씩 배가 고프거나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부르짖는 소리는 처절합니다. 비둘기가 구구구 하면서 우는 소리는 슬픈 소리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선민 된 자로서 고난 가운데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아니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처지에 떨어진 이유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허물이 하나님 앞에 심히 많고 그 죄악들이 자기들을 치면서 증언하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들은 “나는 죄가 없는데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납니까?”라고 뻔뻔하게 하나님께 따졌던 자들과 달리 그러한 고난이 자기에게 닥친 것은 당연한 일이요 그 모든 것이 나의 죄악들 때문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점을 비통하게 여깁니다. 그 죄악이 시퍼렇게 자기를 고발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내리신 심판이 옳으시고 당연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참회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시편 51:3 이하의 다윗의 참회 시에 바로 이러한 그의 죄의 자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3~5)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날카로운 책망의 말씀을 듣고서 비로소 그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자 그는 비로서 자기가 얼마나 후안무치한 죄악을 범했는지, 얼마나 간덩어리가 배밖에 나온 자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캄캄하고 붉은 죄악을 저질렀는지 놀랍니다.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죄악이 자기의 눈앞에 너무나 생생해서 자기를 고발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기가 당하는 모든 시련과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자기의 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대로 의로운 자인 줄 이전에는 믿고 자만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뱃속에서부터 깊이 죄악에 잡혀 있는 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뼈속까지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죄인 중에 괴수임을 자각하는 자가 됩시다. 우리가 그런 대로 깨끗하고 의롭고 정직하고 순결한 자라는 착각을 버립시다. 자기 자신이 태생적으로 누추함과 거짓됨과 탐욕스러움과 교만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심히 부패한 죄인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십자가에 대신 날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사 심판을 당하시고 내 속에 새 생명의 소망을 주시고 새 성품의 씨앗을 심어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말 간절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꼭 붙들고 놓치 않는 주님의 제자들이 됩시다.
13절로부터 15절 전반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악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잉태하여 낳으니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기서 선민 사회가 도덕적인 황폐화가 이루어져 있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사라졌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포악과 패역과 거짓이 선민 사회 전반에 널리 깊이 퍼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세우고자 했던 선민 사회의 도덕적 덕목의 기둥들이 다 부러지고 넘어뜨려짐으로써 그 사회가 황폐화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정 국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서 이루고자 했던 덕목 네 가지가 여기 나옵니다. 히브리어 미쉬파트, ‘정의’는 사법적 옳음입니다. 재판 자리에서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려서 바르게 심판하는 일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무너집니다.
또 히브리어 쯔다카, ‘공의’는 약한 자를 돌보아주고 세워주는 사랑이 담긴 옳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본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전체가 자유로운 가운데 약하고 뒤처진 자들을 보듬어주고 함께 세워져가는 사랑이 있는 세상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에는 안식년과 희년에 종들이 돌아오고 그 기업의 땅을 돌려주는 제도가 있으며, 이웃과 친척들이 빚을 져서 기업을 팔아넘긴 경우에 가까운 이웃이 도와서 그 기업을 다시 친척에게 돌려주도록 물러주는 제도가 있으며, 포도원이나 밭에서 이삭이나 과일을 다 따거나 이삭까지 다 거두지 말고 밭 모퉁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남겨두고 이삭도 버려두라고 명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고리대금업을 금하는 규정들도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의 따뜻함입니다.
또한 히브리어 에메트, ‘성실’은 진실함과 충성됨을 가리킵니다. 그 마음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거짓없고 꾸밈없이 진실되게 하나님과 이웃을 대하고 성실하게 자기의 직무를 감당하는 자세가 곧 성실입니다. 이러한 성실은 개인의 삶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나 나라의 직무에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이익을 좇아 꾀와 술수를 부려 남을 속이는 것은 성실치 못한 일입니다. 성실이 사람을 사람답게 믿게 해줍니다. 성실이 사라지면 더 이상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실한 사람이 사라지면 세상이 불안정해집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나코아흐, ‘정직’이라는 덕목이 나옵니다. 이 단어는 ‘곧음, 똑바름’을 가리킵니다. 어느 영어 성경에서는 ‘정당성’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합법적인 명분이 분명히 서는 길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옳다고 인정받고 사람들 앞에서도 올곧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가리킨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정직하다 올곧다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바른 길을 걸어가는 자로 인정받는 자 됩시다. 온 세상이 더 비틀비틀 거리며 좌로 우로 흔들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직하게 믿음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자가 됩시다.
욥기 17:9 말씀에 보면 고난 중에 욥이 친구들과 변론 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욥 자신이 그 거칠고 모질었던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를 믿는 믿음을 끝까지 견지했던 것을 우리도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하나님께서 꿈꾸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선민 이스라엘과 유다 사회의 현실 속에서 처참하게 무너져내렸습니다. 재판정의 정의의 기둥, 행정부의 공의의 실천, 가정과 시장과 성전에서의 성실함과 진실성의 기둥, 신앙과 삶에서의 정통성과 합법성의 기준들이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그 결과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는 자들이 불이익을 받습니다. 어리석다고 조롱을 받습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과 양심을 저버린 포악한 자들에 의하여 탈취를 당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소망이 없는 주의 백성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하며 속이 상하고 슬프겠습니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시어 그의 백성 공동체에 친히 구원의 역사를 행하십니다. 이것이 15절 하반절붜 2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귀한 희망적인 고백을 보았습니다. 그토록 깊이 죄악에 빠져들어갔던 선민 이스라엘이 극한 도덕적, 영적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고자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여명이 비추게 된 계기는 그들이 자기들의 소경 됨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소경이요 귀머거리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죄가 자기를 시퍼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허물과 죄가 자기를 에워싸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사회의 건전한 기둥들이 다 무너지고 쓰러져서 의인과 선인과 성실한 자들이 탈취를 당하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의 죄를 온전히 고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기회인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도 사회의 근간들이 흔들리고 도덕과 신앙의 기초가 금이 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백성들이 곰같이 부르짖고 비둘기처럼 슬피 울면서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현실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눈 먼 것과 귀 먹은 것과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자각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를 위하여 나 자신부터 죄를 자각하고 긍휼을 구하며 이 나라를 위하여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