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7월부터 시작해 2년여를 끌며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던 휴전협상이 급물살을
탄 것은 한편으로 스탈린의 죽음과, 다른 한편 미국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대통령의
등장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겉으로는 휴전협상에 찬성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전쟁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중공의 힘을 빼고 미군을 한반도에 잡아두는 것만큼 그에게 매력적인 상황은 없었다.
반면 6·25전쟁을 빨리, 그리고 명예롭게 종결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군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해결에 무게를 두고 휴전협상을 밀고 나갔다.
한국의 입장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만일 중공군이 압록강 이남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휴전한다면 우리는 국군을 유엔군에서 빼내어 단독으로 싸울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클라(Mark Wayne Clark) 유엔군사령관을 보내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수락 조건으로 몇 가지를 내세웠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소련의 침략 시 미국의 즉각적인 지원,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 미 해군과 공군의
지원 계속 국군의 증강 등이 그것이었다. 미국은 무엇보다 휴전이 성립되기 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딱잘라 거절한다. 이승만 대통령과 워싱턴의 시각이
좁혀질 가능성은 없었다.
휴전 협상의 가장 큰 난제는 포로 송환 문제였다. 유엔군은 포로 각자의 의지에 따른
'자유송환'을 내세운 반면, 공산군 측은 의지를 무시한 무조건적 '강제송환'을 주장했다.
유엔군의 조사 결과 17만 명의 공산 포로 중 10만 명이 자유송환을 원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있던 공산군 측은 결코 자유송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휴전협상을 하네 마네 실랑이가 벌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방법론을 놓고
충돌하는 동안,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덜컥
반공포로를 석방해 버린 것이다. 포로 송환을 놓고 협상 중인데 그 포로들을 석방해 버린,
이전 역사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이 사건에 전 세계는 경악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에게도 이
'작전'을 비밀로 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대통령인 내 명령에 의한 것이며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반공 포로 석방 다음날, 극도로 분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대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전달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다면 미국은 한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과 우리나라가 각자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면, 우리 모든 분야에서 친구로서 헤어집시다."
결국 미국은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하게 된다.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
전술로 대한민국은 미래의 보장책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것이
앞으로 우리 민족을 편하고 잘살게 해 줄 것"이라는 예언 같은 말을 남겼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다. 북쪽에 잡혀 있던 국군 포로는 한 사람도 남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역사는 항상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이었는가를 묻는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망설이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이 답을 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 강규형, 김용삼, 남정욱, 정경희, 주익종 공저, ‘6ㆍ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