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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의 근거
34: 1-7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2.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대로 시내산에 올라가니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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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이 기도회 전반기의 마지막 날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이 바쁜 시대에 밤마다 나와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자기의 일 만이 아니라 나라와 국가와 가정을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와서 기도에 힘쓴 것을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큰일을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더 힘써 기도했습니다.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정말 수고했습니다.
찬양팀, 주차팀, 반주자들 수고했습니다. 내가 식사 한번 낼 것입니다.
인도하신 교역자들도 참 수고했습니다. 누가 식사한번 대접해 주세요.
설교 한번 한다는 게, 기도회 두 시간 인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금요일만 다가오면 긴장되고, 한 주일에 설교 네 편 준비하는 것이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주일 낮, 오후, 수요일, 금요일, 새벽예배도 인도하면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전도사님은 코피도 쏟았답니다.
그럼,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했다고 응답 될까요?
기도를 크게 했고 열정적으로 했다고 응답을 주실까요?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아무리 오래 기도해도, 기도의 열정이나 수고 때문에 응답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고해도, 일생을 기도만 하다가 죽어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감동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보시기에 우리의 기도는 정말 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은 어여삐 받으시고 응답을 해주십니다. 분명히 우리의 기도는 응답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오늘 말씀드려 확신을 갖고자 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식으로 여기고 사랑하기기 때문입니다.
마7:10에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줄자가 있겠느냐. 너희도 자식한테는 최고로 좋은 것만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도를 응답하시면서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뿌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죄인을 불쌍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긍휼’이라고 하는데 그 긍휼이 죄인인 우리를 자녀삼아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했고,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자격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 이십니다.
주일 밤에, 최 은진 목사님에게서 요나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요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실력 있는? 가슴이 따스한?
사명감 넘치는? 말씀의 능력이 있는 선지자? 아닙니다. 결코 없었습니다. 다만, 민족적인 오만과 오기만 가득한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고,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안 죽으려고 니느웨로 가기는 가서 말씀을 전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이놈들 빨리 망해라’ 하는 마음을 품고 독이 차서 전했습니다.
성의가 있을 리 없습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려고 애쓸 리도 없습니다.
열심히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흘을 다녀야 하는 도시에 겨우 하루 동안 건성건성 전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요나의 말을 들은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저놈은 우리의 원수인 유대 놈이야’ 하고 반발을 하거나 외면한 것이 아니라, 요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도시 전체를 돌아다니며 요나의 말을 되풀이하여 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마다 똑같은 반응이 일어났는데, 모두들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시작했고, 결국 온 도시가 완전 발칵 뒤집혔습니다.
요나에게 직접 들은 사람은 몇도 안 될 텐데, 전해서 듣고 들은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전했고, 전체 도시가 회개했고, 모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이런 결과가 요나의 뜨거운 가슴 때문이거나, 요나의 감동적인 설교의 능력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니느웨에서 요나의 말을 듣고 일어난 그 놀라운 반응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마음을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망하지 않게 하려고 마음을 열어 심각하게 받게 하셨고, 믿게 하셨고 회개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사역자의 수고나, 사역자의 실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은 어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대단히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못된 아들들 하나 단속하지 못하여 거룩한 성전을 범죄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으며, 한나가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것을 보고는 술 취한 여자라고 책망이나 해대는 눈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죽했어야 하나님이 사무엘과만 말씀하시고 엘리와는 대화도 안하셨을까요?
그런데 그런 엘리가 한나에게 “술취한 여자가 왜 성전에와서 횡설수설이냐, 당장에 술을 끊어라.” 라고 말하자, 한나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제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한 것 뿐입니다. 저를 악한 여자로 보지 마소서.” 그제야 염치없는 엘리는 “그러냐, 그렇다면 하나님이 네 간구를 응답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력 없는 엘리의 건성건성하는 축복의 말을 들은 한나의 반응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감지덕지 받아들이고 돌아가서 그날 이후로 근심 다 잊어버리고 살았고, 1년 뒤에 세상에 귀한 아들을 얻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사장 엘리의 영력이 쎈 것입니까? 아닙니다. 엘리의 축복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였고, 하나님은 엘리의 인격이나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이와는 반대의 예로, 모세가 애굽왕 바로에게 가서 했던 선포가 있습니다.
모세같이 훌륭한 사람이,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고 바로가 하나님의 진심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창하고 세련된 말로 열 번이나 말했는데 반응은 어땠습니까? 모세가 말 할수록 반응은 강퍅하기만 했고 끝내 듣지 않다가 망했습니다. 모세가 실력이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써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누구에게 향하느냐, 누구를 불쌍히 봐주시느냐는 것이 핵심입니다. 구원은 여호와의 자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목사님의 설교가 좋아서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가슴이 뜨거워서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지요? 그렇다면 저는 이제 설교를 까이껏 대충 슬슬 하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설교 한편 준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대학 교수는 일 년에 연구 논문 10편만 내도 대단합니다. 대부분의 강의는 전에 했던 노트를 가지고 또 합니다. 해마다 신입생이 들어오니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는 오직 성경 한권가지고 매번 다른 설교를 일 년에 수백 번을 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 설교로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라니 이제 설교는 슬렁슬렁 해도 되겠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누군가가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전하기는 전해야 합니다. 비록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의 하룻길 선포, 마음에 없는 선포나마 그 선포가 필요했습니다. 선포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역사하시고 자비를 베푸는 분은 하나님이니 우리는 최선 다해서 선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여기서 여러분이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영력이야 있건 없건, 말씀을 잘하건 못하건,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들을 사용하여 일하시는데, 그 사자의 실력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직분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목사’ 라는 직분, 설교자라는 직분, 주의 종이라는 직분을 사용하여 당신의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의 직분을 존경하셔야 합니다. 영력이 있건 없건, 말씀을 잘하건 못하건, 주의 종은 주의 종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은 그 사자의 실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라는 직책을 존중해야 합니다. 함부로 하지 말고, 걸림돌이 되지 말고, 전해주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고 축복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하게 봐주십니다.
우리의 구원과 기도응답이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 가지 사실을 더 확인하겠습니다.
출 34:6에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언제 하신 말씀인지 아십니까?
모세가 하나님이 써 주신 십계명 돌 판을 가지고 내려와 보니까 아래서 기다리던 백성들이 아론을 압박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너무 화가 나고, 저런 저질 백성들에게 이런 고상한 하나님의 법이 해당이나 되냐 하는 생각으로 그것을 그들에게 던져서 깨뜨려버렸다.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불러 돌 판에 십계명과 율법을 새겨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좀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씀 같아요. 율법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나는 철저하게 법대로 너희를 처리하겠다.” 고 선언하셔야 상황에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한군데 더 보면 분명해집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서 시내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오는 내용이 출 19장에서 시작되어 32장까지 율법의 내용과 그것을 받을 때의 상황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중간쯤 되는 24장 초반에서 전체 사실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24장 3절에 보면,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응답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소의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서, 다시 언약서를 백성들에게 낭독했고, 백성들이 조금 전과 같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응답하자, 그 양푼에 담아두었던 피를 백성들에게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말씀대로 다 순종하겠다는데 왜 짐승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까? 율법을 주시면서 왜 ‘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진실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 이미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믿고 이 율법을 지키려고 몸부림치겠지만, 결국은 나는 죄인이라고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때 너희는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이 법을 너희에게 준 나 여호와가 법대로만 처리하는 무자비한 신이 아니라, 도리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는 여호와라는 것을 알고 내게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 대신에 죽은 이의 피로 너희를 구원해주마, 내가 약속을 하마” 하시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겠다고 약속할 때 그들에게 피를 뿌리게 한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의 마음을 자비의 하나님께로 돌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서, 세게 해서, 오래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을 단 일초도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한순간일 뿐이고, 우리가 공로를 세워도 가치 없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많이 기도하지 못했어도 주님의 언약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으니 자비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 약속대로 응답을 주실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확신입니다.
애굽과 니느웨는 둘 다 이방 나라입니다. 둘 다 이스라엘의 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고,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한 사람은 긍휼을 입었고 한 사람은 긍휼의 대상이 되지 못하여 심판을 받았습니다.
롬 9:15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라고 하셨고,
롬 9:18에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고 하셨으며,
롬 9:16에서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나 본인도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에 그렇게 고백을 했었습니다. 욘 2:9,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엉터리 요나도 진리를 말했습니다.
요나의 설교는 구원받기를 바라지 않은 설교, 그들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설교, 회개하기를 바라지 않는 설교,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설교를 시시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요나의 설교로 니느웨 도시 전체가 회개하고 전부 구원을 받다니? 이 사실을 뭘로 설명하시렵니까?
그 어리버리한 제사장 엘리의 축복으로 그 위대한 사무엘을 낳다니,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이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다니
일평생 강도짓해먹다가 잡혀 죽은 십자가의 오른편 강도가 천국에 가다니,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 답은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불쌍히 여기느냐,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기도응답을 받고, 영생을 받고, 천국을 상속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 밖에 없습니다.
히 8:12에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셨고,
이사야 54:8에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습니다.
왜요? 우리가 주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7:11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공로 없지만, 큰 힘 들인것 없지만 우리가 자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고 구한 것을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가시기 바랍니다. 한나처럼 다시는 수색이 없어야 합니다. 응답주실 하나님께 감사만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면서 자기의 문제와 부끄러움을 내놓고 울며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애통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방법입니다.
한나의 애통, 나인성 과부의 애통, 수로보니게 여인의 애통이 주님의 마음을 얻었고 응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 기도에 응답을 주십니다.
오늘 밤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나는 죄와 문제가 많은 연약한 사람이고 대책이 없으니 제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세리처럼 기도합시다.
찬송가 337장(통합)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들으사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찬송가188장(통합)
빈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그럼 누가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습니까?
기도를 열심히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래 기도했다고 응답을 받는 것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제는 기도 할 필요 없지 않으냐, 어짜피 기도를 열심히 해서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기도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 고 얕은 생각을 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어 구원과 기도응답을 받게 될까요?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한 구원을 약속하셨고,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여 이루어 주셨습니다.
사 49:15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마 9:36에『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죄짓고 병들고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입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고백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마 5:4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사 55:7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눅 18:13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주님은 세리의 기도를 듣고 칭찬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죄 때문에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당신에게 매어달리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이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표현이 있는데 민망히 여김이 바로 긍휼입니다.
막 1:41에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문둥병자가 나았습니다. 문둥병자가 주님께 호소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나사로라는 남동생을 잃고 우는 마르다 마리아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불쌍한 처지를 유발하는 문제를 안고 주님께 달려와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매달려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주님을 끝까지 쫓아왔고, 마르다는 자기 동생 죽은 소식을 주님께 전하며 와서 도와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마20:30에『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20:34엔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소경들이 감은 눈으로 길 가시는 주님을 따라오며 우리를 불쌍히 여겨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못들은 체 하고 계속 길을 가셨지만 그들은 주님을 끝까지 따라왔습니다. 주님은 멈추어 서서 그들을 불러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고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기본적으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지만, 주님을 믿고 나아오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오지 않고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그 많은 사람을 헤집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옷 가를 만졌습니다.
중풍병 든 친구를 둔 네 사람은 예수님계신 집 지붕을 뚫고 그 사람을 달아내렸습니다. 나의 문제 해결이 오직 주님께만 있고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만 보아주신다면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렘 29:12-13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간절한 갈망을 요청하셨습니다.
시 62:5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잠잠히’ 란 그냥 힘없이, 주면 받고 안주면 말고의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애쓰고 힘써 기도하다가 지쳐서,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고 오직 하나님만을 잠잠히 응시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원과 응답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원인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하게 보셔야 구원을 받고 응답을 받지,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 공로나,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한 업적이 쌓여서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누구를 불쌍하게 보시느냐? 그것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의 마음에 간절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응답을 하십니다.
요나의 외침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온 성이 일치하게 회개하며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갈망하였습니다. 긍휼을 입으려면 갈망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회가 오늘로 마칠지라도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밖에는 나의 문제 해결자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승리자가 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늘 당당하고 온유한 삶을 사기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