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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정에서 가르칠 일
박조준 목사
오늘은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의 꽃 어린이 날입니다.
본래 이 어린이날은 185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첼시에 있는 제일 유니버설 교회의 G. H. 레오날드 목사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레오날드 목사는 어린이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그 부모가 어린이를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을 특별히 정해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6월 둘째 주일을 꽃주일로 정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하고 5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 5월 둘째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5월 첫 주일인 지난 한 주간을 가정주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어린 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가정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며 키워야 할까하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 서는 1957년에 어린이를 위한 헌장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시간이 없어서 다 말씀드릴 수 는 없고 몇 가지만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모든 어린이는 가정과 그 권리를 누려야 한다.
어린이는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 시켜야 한다.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아홉개 조로 된 어린이 헌장이 있는데 사실 이 헌장의 원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왔습니다. 지난주일 생각했습니다만 가버나움에 가셔서 좀 쉬시려 했는데 예수님이 거기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용신할 틈도 없게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 온 사람들중에는 나이 많은 사람만 온 것도 아니고 젊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자연히 애들이 따라왔을 것 아닙니까? 애들은 예나 지금이나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는 요사이 자라나는 손자 애들이 떠들면 요새 애들은 별스레 떠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자라실 때 지금 애들과 같이 시끄러웠습니다.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개구리가 올챙이 때 일을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하여간 예수님때 어린애들도 부모들과 함께 와서 부모님은 열심히 말씀을 듣노라고 하는데 애 들은 마구 떠드니까 어른들이 도저히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시중들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짜증을 부렸습니다. 이 애들 좀 잘 보세요. 이거 도무지 시끄러워서 어떻게 주 님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저 애 좀 보세요. 저 애 어머니 여기 안 계세요? 빨리 좀 돌보세요. 하면서 야단쳤습니다.
제가 듣는 대로 어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애가 왔다갔다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안내하시는 분들이 애 엄마에게 좀 안고 있으라고 해서 안았더니 부자유스러우니까 찌드럭거리기 시작하더니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시는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애 엄마는 애 엄마대로 미안해서 안절부절하며 애기를 달래도 보고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입을 막았더니 오히려 목소리가 커지니까 목사님이 소리를 지르면서 그 애기 엄마 빨리 애기하고 밖으로 나가시오.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얼마나 섭섭했던지 그 다음 주일부터 그 애기도, 엄마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애기는 시끄러운게 정상입니다. 어른처럼 점잖게 앉아만 있으면 그게 큰 일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때 어린애들도 떠들었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도 어릴 때는 떠들었습 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해도 자신들이 어릴 때 일을 잊어버리고 어린애들 시끄러운 것만 생각해서 애들을 몰아내려고 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가 내게 오는 것 을 금하지 말라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와 같으니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드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으로 어린이의 권리를 옹호해 주셨습니까?
그러므로 어린이 주일은 엄격히 말하면 어린이의 명절도 되지만 사실 어른된 사람들이 경고를 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인생의 진리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수많은 어린이를 상대해 온 교육자나 어린이를 키워 온 부모님들에 의해서 확증이 된 실제적인 지혜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번역에서는 조금 다른 말로 표현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train up 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말하자면 가르치라 는 말보다는 길들이라 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길들이라” 는 뜻입니다.
사실 길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짐승도 길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길들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길들인다는 말은 본래 길이 없는데 한번 가고 두번 가고 열번 가고 백번, 천번 가는 동안에 길이 없었던 곳에 길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길들이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은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습관이란 제 2의 천성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어린이를 어떻게 키우나 하는 것은 모든 부모의 당면한 문제입니다.
내려오는 말에 <세 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릴 때 바른 길을 닦는 것은 인생을 성공적으 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꽃과 같이 아름다운 어린이들을 어떻게 하면 꽃과 같이 그 마음도 아름답고 깨끗하게 키울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사람을 생각할 때 육신과 정신과 영혼으로 봅니다. 자녀를 건강하게 자라 게 하고 정신을 건전하게 양육시키고 영혼을 바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 믿는 부모님이 당면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건강한 몸으로 자라나고 지혜가 있어서 학생이면 학교에서 좋은 성적 받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부모님들은 그것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물론 몸도 건강해야겠고, 좋은 성적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후원해야 하겠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몸의 주인이 되시는 영혼이 바로 자라나게 하기 위하여 여간 힘쓰지 아니하면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이가 이 세상에 나기 전부터 여러 가지로 조심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면 신명기 6장 4절 이하에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건전한 부모에게서라야 건전한 자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전한 자녀를 가지려면 그 부모가 먼저 경건한 아버지, 경건한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부모에게 있어야 자녀가 그 부모의 믿음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모범적인 어머니 한 분을 발견하게 되는 데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한나는 그 아들 사무엘을 성막에 데리고 와서 제사장 엘리에게 맡기면서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는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나가 기도해서 받은 아이는 그 평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려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성모 마리아도 결레의 날이 다할 때에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친 기록이 누가복음 2장에 있습니다. 모든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인데, 더구나 다른 모든 기업 가운데도 가장 귀한 기업이요 우리 부모된 사람은 그 청지기이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하게 주신 자녀를 온전히 하나님께 다시 바쳐서 내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아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키우는 것은 모든 믿음 있는 부모님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가령, 여기 어떤 아버지가 사업을 잘해서 좋은 집을 짓고 어린아이에게 모든 편의를 보아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어린아이에게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책임이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아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길러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게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가 집안 살림을 잘하고 어린이에게 깨끗한 옷을 입히고 영양가를 생각해서 골고루 음식을 먹이고, 이와 같은 것을 다 잘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러나 어머니의 책임이 거기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귀한 어린이를 믿음의 소유자로 만들어 장차 주님의 교회를 메고 나아가며 그 가정에서 믿음의 유산을 이을 만한 경건한 자녀를 기르는 것이 믿음 있는 어머니의 책임입니다.
아무리 부모된 사람이 다른 것 잘했다고 하지만 믿음으로 키우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면 사실 믿는 부모로서는 제일 큰 실패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 자녀가 아무리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해도 믿음이 없으면 믿는 부모로서는 자녀 양육에서 가장 큰 부분을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녀를 믿음으로 길들일 수 있습니까?
우선 믿음으로 자랄 수 있게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줄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분위기란 좋은 집, 좋은 가구,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에 믿음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야겠다는 말씀입니다. 꽃이 자라서 아름답게 피려고 하면 환경이 좋아야 합니다.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고 땅이 비옥하고 적당한 수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영과 육이 바로 자라 아름다운 영혼의 꽃을 피우려면 우리 가정의 믿음의 분위기가 좋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가정의 믿음의 분위기가 어떠한가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우리 가정의 믿음의 분위기가 겨울날씨같이 싸늘한 가정은 없습니까?
얼어붙은 땅에 새싹이 날 수 없고 아름다운 꽃이 필 수가 없습니다.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빛이 우리 가정에 비춰져야 우리 자녀의 심령이 자라고 믿음의 꽃이 피고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가정에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가득하고 화평스러운 분위기가 감돌 때 이런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는 그 영혼이 아름답게 바로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대개 소위 문제아들의 가정배경을 알아보면 부모의 가정불화에서 온다고 합니다. 분위기가 좋은 가운데서 자라나는 꽃이라야 잘 자라서 빨갛게 혹은 노랗게 아름다운 꽃이 필 것입니다.
가정의 신앙적인 분위기가 자녀를 믿음으로 키우는 데 얼마나 필요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키우는 데 원하는 액수 이상의 용돈만 주면 잘 자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그 가산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예수님께 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미국에 이민가신 분들의 90퍼센트 이상은 자녀들 교육문제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에 가서 집 사고, 차 사고 매달 월부금 내려니까 혼자 벌어서는 감당하기 어렵고 그래서 내외가 같이 나가 일하다 보니 아침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게 되어 자녀들하고는 이야기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저 애들 학비 대주고, 옷 사주고, 자동차 사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내다 보니 문제가 심각해져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가정이 한두 가정이 아닙니다.
자녀교육을 위해 이민 갔다가 실패하고 허무해 하는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가정의 분위기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가정뿐만 아닙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좋은 분위기는 어린 심령들을 바로 아름답게 자랄 수 있게 합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한 가지 부러운 것은 그들의 돈이 아니라 친절과 예의, 이해와 동정 그리고 협조의 생활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입니다.
이 얼마나 다정한 말입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귀하고 사랑이 깃든 말을 들어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40, 50년 전만 하더라도 서로를 부 를 때 형님! 아우님! 이렇게 서로 성도사이에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가정적인 인정이 통하는 말로 불렀는데, 요사이는 그런 분위기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자녀들에게 우리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가르쳐 주어야겠습니다.그래서 서로가 악의없이 동정과 이해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자녀를 길들여야겠습니다.
이렇게 길들여진 친절과 예의, 이해와 동정 그리고 협조의 생활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의 앞날의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리고 자녀를 바로 키우기 위해서 자녀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데 매우 민감합니다. 부모의 언어와 행동은 우리 자녀들이 심령의 거울에 깊이 새겨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부모가 좋지 않은 말을 쓰면서 자녀들이 좋은 말쓰기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부모가 자녀 앞에서 싸우면서 자녀에게는 형제간에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쓸데없이 외출을 자주하는 어머니가 아이더러는 나가 놀지 말고 집에 서 공부하라고 말한대서 그 말에 권위가 설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하는 일, 하는 말 모두가 자녀들의 도덕생활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 출발 신호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 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의와 불의, 선과 악을 말로 가르치려 해도 자녀들은 그 부모의 언 행과 일상생활에 영향을 받고, 부모가 하는 행동은 모두가 옳은 것이라는 어린 시절부터의 생각 때문에 부모는 어린 자녀의 장래 인격의 표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디모데 같은 사람은 본래 그 어머니 유니게와 외고모 로이스의 진실한 믿음을 본받아서 어렸을 때부터 성 경을 배웠고, 그 인격을 본받아 교회와 사회를 위해 요긴하게 일하는 인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의미 깊은 말씀을 한 마디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애쓰는 이것을 너희도 좀 닮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스스로 생각할 때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부모된 우리의 인격과 생활을 그대로 본받아도 아무런 손상이 없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서 노력합니까?
우리 가정의 자녀 중에 나는 부모가 믿는 그런 예수라면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자녀는 없습니까?
우리가 어딘가 잘못된 본을 보여 주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부모된 나는 제대로 살지 못하지만 자녀된 너희는 바로 살아라하는 부모는 없습니까?
어느 부모나 자녀가 잘되고 좋은 사람되기를 원하는 것은 똑같은 줄 압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부모 의 모범입니다.
이런 풍자적인 이야기를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여러 새끼를 거느리고 있는 어미 게가 그 새끼 들이 나와 노는 것을 가만히 보니 다른 짐승들은 눈이 앞에 붙었으니까 앞으로 걸어가는데 자기 새끼들만은 옆으로 기어다닌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 어미 게가 한 번은 새끼 게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감동되리만큼 일장의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연설이 다 끝난 다음 호령을 쳐서 앞으로 가! 했더니 한 마리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옆으로 벌렁벌렁 기어갔습니다.
하도 속이 상한 이 어미게는 옆으로만 기어가는 새끼 게를 책망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마리의 새끼 게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어미 게에게 대들었습니다.
우리더러만 그러지 말고 어머니가 한번 본을 보이며 가르쳐 보세요. 하고 볼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미 게는 새끼 게의 말대로 앞으로 두어 발자국 걸어갔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나니까 어미게는 어느샌가 날 쌔게 옆으로 기어 구멍으로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새끼 게들은 깔깔대며 웃었고 어미 게도 그 후에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지 못하면서 남더러 하라는 어리석음이 어떠한가를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좋은 자녀 되기 원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떤 부모는 교회학교에 나가면 좋은 말 듣고 좋다고 생각하여 애를 차에 태우고 와서 교회 문 앞에서 내려주고 집에 갔다가 끝날 때쯤 와서 데려갑니다.
어릴 때는 그래도 되는 것 같아도 나이가 좀 들어보세요. 아버지도 안 나가시는데 나도 안 나갈 거야. 하면 할 말이 없어지고 맙니다.
자녀가 잘되기 원하면 내가 바로 걸어야 됩니다.
우리 교인 중에도 어떤 부모님은 중학교 다니고 대학교 다니는 자녀까지 꼭 같이 와서 앞자리에 앉아서 같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자녀들에게 바른 본을 보여야 합니다.
끝으로 자녀를 강하게 키워야 합니다.
독립성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워야 합니다.
우리 한국이 유명한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과외수업, 가정 교사가 많은 게 유명합니다.
세계적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한국을 따를 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먼 데, 다른 나라 가서도 이 버릇을 못 고칩니다. 초등학교 가기 전이나 유치원 가기 전에도 듣기 좋게 영재교육이라고 해서 아이를 보냅니다.
어제 혹 TV를 통해서 보셨겠습니다만 아이들한테 물었습니다.
너 무엇을 하니? 하니까 전 태권도 하고 미술 하고 수영도 하고 영어학원 다니고 . 아이가 학원에 하루종일 쫓아다니는게 어려울 정도입니다.
왜, 너 그렇게 하니?
엄마가 안하면 때리는 걸요.
어릴 때부터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벌써 중학교 것을 다 배웁니다.그러므로 중학교에 가면 배울 것이 없습니다. 다 시시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못합니다. 또 이렇게 이런 아이들은 가정교사나 개인 교수가 없으면 공부를 못합 니다. 자기 혼자는 못합니다. 그런 습관이 안 들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아이들 대학교 가도 가정교사를 둡니다. 취직하려면 또 가정교사 두어야지요. 결혼해도 또 가정교사를 둡니다. 가정 생활하는데 또 가르쳐야지 해서 평생 가정교사로 망합니다.
여러분, 정신 차리세요.
가령 우리나라 사업하는 것 보십시오 큰 기업을 하는 것은 나라에서 국가정책으로 큰 기업을 얼마나 키워 주었습니까? 넓은 땅을 싼 값에 사게 하고, 모든 시설을 후원한다고 해서 다 시설해 주고, 공장만 지으라고 해서 세금도 안 받고, 또 보통사람은 천만 원 내기가 그렇게 어려운데 그 사람들은 몇 천억도 이자를 싸게 해서 줍니다.
그래서 얼마나 자라났습니까? 그런데 정상적으로 자란게 못됩니다. 그저 키워 주어서 의타적으로 자랐기 때문에 지금 부딪치는 문제가 뭡니까? 약질의 기업으로 키워났기 때문에 세계 경쟁에 나서니까 경쟁력 이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50억불의 적자가 자꾸 생깁니다. 50억불 벌어도 신통치 않은데 적자가 생기는 것, 이것 무엇으로 감당합니까? 큰 문제입니다. 이게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벌써부터 오랫동안 누적되어 가지고 약질로 자라났기 때문에 세계 경쟁을 못 따라갑니다.
가정의 자녀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힘있게, 강하게, 독립성 있게 키우지 않고 그저 내내 부 추겨 줘서 키우고 달라는 대로 다 주어보십시오.
천원 달라는데 만원 주어 보십시오.
좋아하는 것 같지요. 하지만 약질 자녀를 만듭니다. 의타성 있게 만듭니다. 의욕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만 자꾸 합니다.
강하게 키웁시다.
말씀으로 키웁시다.
사람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 의지하게 합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려운 일 당하는데 믿음으로 키우면, 하나님 의지하면 사방으로 우겨 싸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아무리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림받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납니다.
왜요?
자기에게 자립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를 강하게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경쟁 사회에서, 세계 경쟁에서 이겨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다 실패하고 맙니다.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된 여러분이 자녀를 강하게 키워야 합니다.
자녀를 기르는 데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키우는 일은 일 중에 큰 일입니다. 이것이 사실 부모의 힘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과 자녀, 자녀와 부모, 부모와 교회 그리고 나라가 힘을 모아야만 합니다.
우리 부모된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 생활을 바로 해서 자녀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며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맡은 청지기의 사명을 다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아이에게 가르치라
잠언 2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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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른들은 “세살 버릇이 여든살까지 간다”고 하였습니다. 또 “나무 될 것은 떡잎 때 알아보고 사람 될 놈은 아이 때 알아본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이 말씀이 주는 신령한 교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어린이에 대한 성경적 교훈
유대인 사회에서는 여자와 어린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를 어른들의 부속물로 여기거나 사람의 숫자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예찬하셨습니다(마 19:14). 솔로몬은 어린이를 가정의 희망(기업)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상급이라고 하였습니다(시 127:3).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였습니다. 마 18:3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여 어린이를 천국시민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어린이처럼 겸손하고 진실하고 단순한 마음과 행동을 가져야 합니다.
2.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본문 말씀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땅히 행할 길은 평생 동안 붙들고 살아야 될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의미합니다.
1)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0:31).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그 말씀대로 믿어 인격의 기초로 삼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삶의 습관으로 삼아야 됩니다.
2) 올바른 가치관의 기준입니다.
1절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고 은이나 금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귀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또 겸손한 성품과 자기의 영혼을 잘 관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4-5절).
3) 예수님의 삶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맑고 밝고 건강하게 그리고 지혜롭고 은혜롭게 자라면서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어린이가 되게 해야 됩니다(눅 2:52).
3. 어린이에 대한 책임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실족케 하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8:6). 깨끗하고 올바르게 자라야 될 어린이를 정신적으로 오염시키고 탈선하게 하는 어른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가정과 사회와 정부가 다음세대의 주역이 될 어린이가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어야만 됩니다. 성경은 부모를 통한 가정교육을 강조하였습니다. 신앙적인 부모들은 성경적 교훈에 따라 태교에서부터 젖 먹일 때, 말과 글을 배울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신 6:4-9). 그 가르친 바를 실제 생활에서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만 됩니다. 모세를 양육한 요게벳이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같이 기도의 모범을 보여야 됩니다.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으로 디모데가 훌륭한 인물이 된 것처럼 경건한 부모에게서 위대한 인물이 배출되는 것입니다(딤후 1:5).
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