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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9
한 마음으로 이룬 축복
지난 금요일 호주 시드니에서 올림픽이 개회되었습니다. 개회식 때, 남북한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함께 입장하던 그 모습을 보고 온 나라가 금새 통일이 된 양 흥분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온 세계는 그 동안 흘린 땀의 결실을 금메달로 거두어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승리자에게는 축하를 패배자에게는 격려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운동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운동 중에서도 혼자 하는 운동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대신 많은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하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어울러 하는 경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마음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특별히 제가 좋아하는 운동인 축구는 열 한 명이 한 팀을 이루어 하는 경기입니다. 열 한 사람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잘 하는 선수가 있어도 그 경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복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자식 따로 따로 국밥이 되면 그 가정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가정 제도를 창설하신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교회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목사를 비롯한 온 성도가 한 마음이 되어 섬길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의 질서도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지켜 나갈 때,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분배가 종결된 후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은 대신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서겠다고 한 약속을 성실히 수행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노고를 치하한 후 많은 전리품과 함께 그들의 기업이 있는 요단 동편 길르앗 땅으로 돌려보내었습니다. 민수기 32장 20-32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를 찾아와 풍요로운 요단 동편에서 살게 해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난감한 반응을 보이던 모세는 그들의 거듭되는 요구(요단 동편의 기업을 달라는)를 들어주는 대신 가나안 전투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즉 그들의 가축과 부녀자들과 최소한의 수비대를 남겨두고, 나머지 장정들은 무장을 하고 요단 서편으로 건너가는 다른 지파와 함께 동행하여 가나안 정복 전투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민32:20-22).
모세의 명령대로 이들 지파는 요단 강을 도하할 때 완전 무장을 하고 선봉에 서서 건너갔습니다(수 4:12). 이때,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여한 이들 지파의 수효는 사만 여명에 달하는데 이 숫자는 그들 지파의 전체 장정 수효의 약 3분의 1가량이었습니다. 이들은 약 7년간이나 계속된 가나안 정복 전쟁의 최선봉에 서서 그들의 동족들이 그 땅을 기업으로 누리도록 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요단 동편의 기름진 땅을 차지하는 조건이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들 세 지파가 보여준 생명을 건 헌신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아주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축복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한 마음으로 이룬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서로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사실 민수기 32장에 나오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의 행동은 극도의 이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행동이 공동체에 악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그들의 요구에 심하게 책망하면서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요단을 건너 가나안의 일곱 부족과 처절한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들만 요단 동편의 풍요로운 땅에 안주하려는 생각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악한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긴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그들은 돌이키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지파들과 함께 가나안에서 싸우고 다시 요단 동편에서 살겠다는 타협안을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7년간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임하기까지는 그들대로의 계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임하여 지금까지 행한 그들의 모습은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전쟁에 함께 가기로 작정한 이후, 그들은 전쟁의 최선봉에 서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4장 12-13절을 보겠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 갔으니 사만 명 가량이라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서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
이들 지파의 3분의 1가량이 되는 정예화 된 장정 4만 명이 가나안 정복 전쟁의 최선봉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과 함께 싸웠던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에 전쟁에 임했을 때, 몇 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전쟁의 가장 큰 위험인 죽음이라고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죽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단 동편의 풍요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남겨진 가족들과 영영히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면 그들이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래도록" 약 7년간이나,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하여 가나안 정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게 된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욕심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으면서도 자기 집 대문 곁에서 병들어 구걸하는 나사로를 못 본체 했던 부자처럼, 강도를 만나 피 흘리던 상인을 피해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자기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철저히 무관심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익을 놓고서 의리를 생각하고, 위급한 시기에 목숨을 내 놓고, 오랜 결속을 평생토록 잊지 아니하고 지킨다면 완성된 사람이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1798년에 '제너'라는 의사는 천연두로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젖소에서 천연두의 면역성을 가진 우두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주사하면 천연두 면역성이 생긴다는 것을 학회에 보고했습니다. 학회에서 마지막 실험 단계에 들어갔을 때 당시에 제일 유명했던 영국의 학계의 권위 있는 의사들을 위시해서 많은 동료 의사들은 질투와 시기심으로 그를 시기하며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시골뜨기 의사가 의학의 ABC도 모르고 하나님과 의학을 모독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 줄도 모르느냐고, 동물에게 실험한 것이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가 있겠느냐고 조롱을 하면서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만일 그 학회에서 그것이 부결이 되면 당시는 인체 실험이 매우 어려운 때이고 권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다시 빛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몇 달 전에 어느 사람에게 주사를 해서 듣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한 사람의 임상 실험을 가지고 되느냐며 또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제너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는 23명을 실험했고, 낳은 지 열 하루밖에 되지 않은 제 아들에게도 실험을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그것은 결사적인 실험이었습니다. 인류에게서 천연두를 없애버리기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에이즈 백신 개발을 위한 생체 실험에 35세의 영국 국회의원이 팔을 걷고 자원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17명의 숭고한 정신을 가진 그들의 실험이 성공하여 매일 수 천명이 에이즈로 죽어 가는 죽음의 땅 아프리카에 생명의 노래가 울려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십자가의 복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지는 못할지라도 남을 배려하는 작은 마음으로 하나되어 이 세상을 살맛 나는 세상을 가꾸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2.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들 세 지파가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여키로 한 것은 아주 오래 전 모세가 살아 있을 때, 한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는 이미 모세가 죽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된 이후였습니다. 그들과 약속을 한 모세는 이제 없습니다. 모세와 맺은 약속을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도 있고, 또는 모세가 죽었으니 그 때의 약속은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니면 그 약속을 이행하되 형식적으로 흉내만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와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아주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가족들과 작별한 채, 그들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이행하였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함께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게 된 비밀인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무언의 약속들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고 잡혀가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하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살아갈 때, 그 신앙이 복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말씀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다른 신들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이름을 욕되게 해서도 안됩니다. 안식일(주일)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간음하면 안됩니다. 살인해서도 안됩니다. 도적질이나 남의 물건을 탐내거나해서는 안됩니다. 거짓말을 해서도 안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면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은 우리가 흔히 축복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축복을 열거하면서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는 원리를 약속으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속회 예배를 드리기로 작정한 시간에는 함께 모여야 합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속회가 아름답게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이 자리에 모여서 정해진 시간(저녁예배, 새벽예배, 속회예배 등)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시간은 하나님께 우리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로 약속한 시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신앙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드리기로 약속된 예배시간에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우리가 순종을 통해 그 약속을 지킬 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신실하게 응답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잘 지키는 백성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한 마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가 정한 신앙의 약속들을 잘 지킴으로 우리 교회가 더욱 부흥하고 성숙해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잘한 일에 대해서는 서로 칭찬과 격려 그리고 축복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어 가는 또 하나의 비밀은 잘한 일에 대해서 서로 칭찬과 격려 그리고 축복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책임 있게 그 형제들을 위해 싸워준 것에 대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얻은 많은 전리품들을 나누어주었습니다(8절). 쉽게 말하면 "당신들 덕분에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이 축복을 함께 누립시다"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수아가 이들 지파들을 향해 진정한 마음으로 칭찬을 하고 전리품을 나누어주는 모습이 새삼스러운 이유는 우리들이 칭찬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일에 너무 인색한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잘한 일에 칭찬은 아끼고 못한 일에는 책망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어 떨어뜨리는 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된 왜곡된 의식들입니다. 물론 타락한 인간의 눈은 오염되어 칭찬거리보다는 비난거리를 더 쉽게 찾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이라면 눈에 할례를 받아서 좀 더 밝게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한 가르침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1-5)."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한 인간의 속성을 지적하시면서,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이해와 관용, 사랑과 칭찬을 할 수 있는 자가 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를 한마디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비난하고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해하고 관용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 구원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눈에 자꾸만 비난거리가 보이십니까? 정죄거리가 보이십니까? 내가 이 시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그 눈에서 더러운 기운이 떨어져 나가고 성령의 인치심으로 거룩하게 되어 칭찬거리, 사랑거리, 격려거리, 축복거리만 보일지어다. 할렐루야!"
모 방송국에서 진행한 "칭찬합시다"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온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때가 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이 삭막하게 된 데에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마음을 아니 가질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칭찬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은 함께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삭막한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넉넉하게 합시다. 하나님의 축복은 한 마음으로 이루고 누릴 때 더 가치 있고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369장)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