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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로 옷 입자(롬 13:11-14)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의식주, 이 세 가지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 중에서 옷은 색깔, 질감, 모양 등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능과 동시에 사람의 신분, 개성, 예의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입은 옷을 통해서 그 사람의 직업이나 역할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옷의 신분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또 옷은 개성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몸을 아름답게 꾸미고, 개성을 나타내어 남다르게 보이고 싶어 하는데 이 때 옷이 그런 역할을 하는데 큰 구실을 합니다.그리고 옷은 예의를 표현합니다. 사람은 때와 장소·목적에 맞는 옷차림을 통해 자신의 교양과 품위를 나타내고, 또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원만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교회 올 때도 마찬가지인데,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교회에 올 때 하나님을 만날 예의를 갖추어야 하고, 예의를 갖추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것이 바로 옷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유럽에 가면 자연주의를 표방하면서 나체촌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나체촌에 교회가 있는데 어떤 유럽의 목사님이 그 나체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초청을 받고서 난감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었는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나체촌이면 설교 듣는 모든 사람이 벌거벗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에게 설교할 때 옷을 입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고민하다 특수한 상황이라서 옷을 모두 벗고서 설교하시기로 하고 그날 다 벗고 설교하러 강단에 섰는데, 아 글쎄, 앉아있는 모든 분들이 외부에서 강사 목사님이 오는 특별한 날이어서 목사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마음으로 모두 옷을 입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교회 올 때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하는데 옷을 입고 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이렇게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로 교회에 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옷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람이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집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 한 번은 버스를 탔는데, 조금 후에 예비군 훈련을 마친 젊은 사람들이 예비군복을 입고 무리를 지어 버스에 탔습니다. 제가 옆에서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사람들은 어느 모 대기업에 다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난리가 났습니다. 버스 밖에 여자들이 지나가자 그 젊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희롱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조용하라고 해도 통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 대학을 나왔고, 대기업에 다는 지성인들인데 예비군복을 입혀 놓으니까 사람들이 바뀌어서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말끔한 양복을 입었던 지성인들을 예비군복을 입혀놓으니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무슨 옷을 입느냐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옷이 날개다. 옷은 좋은 소개장이다."라는 영국 속담이 있고, "사람은 옷에 따라 환영 받는다."는 러시아의 속담도 있습니다. 이런 속담들은 옷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근황을 보여주는 메시지가 될 수 있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자신을 소개하는 소개장이 될 수도 있기에 중요하다는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옷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고, 사람이 주체이며 옷은 그에 종속된 객체일 뿐인데 어떤 경우에는 거꾸로 옷이 사람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캐주얼한 옷을 입으면 가볍게 행동할 확률이 많고, 정장을 잘 차려 입으면 그 사람의 행동이 엄숙해질 확률이 큽니다. 야한 옷을 입으면 야하게 행동하고 깔끔한 옷을 입으면 거룩하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예비군복을 입혀놓으면 지성인도 엉망진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옷이 그 사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람이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행동과 말투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옷 입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그러면 신자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우리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격식을 갖출 수 있을까요? 성경은 신자가 입어야 할 옷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로마서 13장 12절에서는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또 14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러면 빛의 갑옷을 입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의 신앙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경에 나온 옷의 기원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게 되자, 그들은 벌거벗은 것이 창피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창세기 3장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무화과 나뭇잎으로 엉성하게 옷을 해 입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무화과 나뭇잎 옷 대신에 그들을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런데 이 가죽 옷을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죄와 수치는 사람이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가릴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좋은 해석이며 동의가 됩니다.
이런 해석과 동시에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로마서 13장 14절 말씀을 다시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 말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과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먼저 알 때 더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우리는 다 정욕과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정욕과 욕심이 우리 안에 존재해 있다가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영적으로 벌거벗었다고 표현합니다.
안데르센의 벌거숭이 임금님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허영심이 많은 왕이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이웃나라의 사기꾼들이 허영심 많은 왕을 찾아와서 원하신다면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신비한 옷감을 짜줄 수 있는데 그 옷감은 바보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귀가 솔깃한 왕은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빨리 옷감을 짜서 가져오라고 하자, 두 명의 사기꾼은 왕에게서 많은 돈을 받고 실도 없고 천도 없는 베틀을 마련해서 옷감을 짜는 시늉을 합니다. 얼마 후 왕이 신하를 보내 얼마나 짰는지 보고오라고 하였더니 그 신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옷감이라고 보고 하게 되고 끝내는 왕이 옷감을 보러 가게 됩니다. 그러나 왕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보에게는 옷감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기꾼들의 말에 왕은 ‘수고 했네 좋은 옷감이야’ 하고는 어서 옷을 지어오라 하였고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옷은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사기꾼들은 옷을 입히는 척하고 왕은 거드름을 떨며 옷을 입는 척하며 그렇게 벌거벗은 왕은 그 자태를 한껏 뽐내려 거리로 나가게 됩니다. 백성들은 임금님이 신비한 옷을 입고 나서는 행차를 구경하러 벌떼처럼 모여들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눈에 옷은 보이지 않고 벌거벗은 왕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분명히 옷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보 소리가 듣기 싫어 멋있는 옷이라고 칭찬을 하는데 갑자기 군중 속에서 한 꼬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야 임금님은 벌거숭이다. 벌거숭이” 그때서야 사람들은 임금님은 벌거숭이라며 웅성거렸습니다. 왕은 그때서야 속았다는 걸 알았지만 체면 때문에 점잖게 걸으며 도망쳤고 신하들도 보이지 않은 옷을 붙들고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 동화는 영적으로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 동화에 나오는 어리석은 임금님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임금처럼 우리가 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25년 전에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의 성도 중에 음치인 분이 있었습니다. 음치의 네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치는 박자 무시, 악보 무시, 반드시 2절까지 부르고 끝나면 앵콜을 기대합니다. 25년 전에 제가 만난 분은 이런 음치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어떤 노래를 불러도 음이 같고, 음의 높낮이도 없고 랩송하듯이 노래를 부릅니다. 거기다가 이분은 목소리가 컸습니다.
교회는 은혜로운 것을 좋아해서 그렇게 실력이 없어도 교회 와서 그 분이 노래를 하면 사람들이 “노래를 참 잘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잘한다. 잘한다.”하니까 이 분이 정말로 자신이 노래를 잘하는 줄 알고 어느 날 성가대를 지원했습니다. 성가대 지휘자는 그날부터 거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참을 만 했는데, 하루는 이 분이 저에게 자기 노래를 테잎에 녹음해서 팔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지나가는 소리로 들었는데 정말로 어느 날 녹음한 테잎을 들고 와서 저에게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제가 듣는 데 도저히 들을 수 없었습니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분이 음치라는 사실을 다 아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이 가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태를 영적으로 벌거벗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전혀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올림픽에서 여자 펜싱에서 한국의 김지연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런데 김지연 선수와 준결승에 만나서 패한 선수가 있는데, 미국 출신의 자구니스라는 선수였습니다. 이 선수가 준결승에서 김지연 선수에게 지고 난 후 다음 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내가 패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 진 것이 분명한데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졌다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영적으로 벌거벗은 것을 하나님도 알고 다른 사람도 다 아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며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남에게 내놓지 못할 부끄럽고 창피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창피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끄러운 모습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이 말씀은 아무것도 되지 않았는데 된 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속인다고 표현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자기를 속이는 일은 우리 생활을 조금만 유심히 보면 자주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상상임신이 있습니다. 상상임신은 임신을 하지 않았음에도 임신을 한 것처럼 입덧을 하는 등 똑같은 반응을 합니다. 바로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에 이것을 적용해보면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데도 본인은 믿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 정도 믿음이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믿음은 0(zero)인데 정작 본인은 성자인 척합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지막 날에 주여, 주여 하며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또한 주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합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보다 더 능력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23절에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과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수치를 깨닫지 못한 상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향해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한없는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영적인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영적인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인간이 육의 옷을 입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옷을 입는 것입니다.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도 의상철학(Philosophy of clothes)이라는 책에서 같은 맥락의 말을 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입어야 하는 옷은, 쾌락과 정욕과 시기와 질투를 가려주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옷으로, 바로 로마서에서 말하는 빛의 갑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은 곧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것이고 또한 욕심과 편견에서 사랑과 나눔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정욕과 욕심에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대표적인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사람을 소개하려면 로마서 13장 12-14절 말씀이 기독교에 끼친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성경 구절 중에서도 로마서 13장 12-14절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이 구절이 한 사람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어거스틴(아우구스투스)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느 정도 중요한 사람이냐 하면 이 사람의 신학이 곧 기독교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사람의 신학을 지금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거스틴이 처음부터 믿음 좋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 분이 거듭나기 전에는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고 심지어는 18살에 아데오다투스라는 사생아까지 낳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들이 너무 방탕한 생활을 하자,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데 그 당시 교회 감독(담임목사)이었던 암브로시우스에게 기도를 부탁했는데 암브로시우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를 둔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때가 되면 돌아온다는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말처럼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거스틴이 집에 있는데,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부끄럽고 창피했으며, 그런 생활도 지쳐있는 상황에서 집밖에서 아이들 노래 소리가 들리는데, “Tole, lege, tole, lege”(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라는 소리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처음에 이 음성을 어린 아이의 음성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친구 알리피우스가 있는 곳으로 즉시 달려가서 성경을 서둘러 폈습니다. 눈이 처음 닿은 말씀이 로마서 13장 12-14절 말씀입니다.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거스틴은 성경을 더 읽고 싶지 않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보며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않는 것이 곧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기스틴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방탕한 삶을 회개했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사람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덮을 수 없습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듯이 하늘로부터 은혜가 내려와야 우리의 수치, 부끄러움이 덮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영적으로 벌거숭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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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날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소서!
주님의 보혈을 덧입어 살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