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바레시는 76년 14세의 나이에 AC밀란에 입단해 18세가 된 78년 리그 데뷔전을 치른 이래로 20시즌동안 다른 어떤 구단을 위해서도 아닌, 밀란을 위해 플레이했다. 그는 176cm에 71kg이라는, 상대 공격수와 경합을 자주 벌이는 중앙수비수로서 그다지 칭찬받을만한 체격을 가지진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을 만회하고도 남을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경기를 읽어내는 눈'이었다. 세리아에서는 다른 리그와 달리 유독 상대의 공격진로를 예측해서 앞길을 막아서는 플레이가 강조되는데, 바레시의 이런 재능은 그야말로 세리아에서 뛰기 위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상대의 의중을 알아채는 그 놀라운 감각을 이용해서 상대의 앞길을 막아섰고, 또한 상대의 행동에 대해 필요한 행동을 한 수 앞서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스타일은 그의 앞에 서있는 상대의 공을 여지없이 탈취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는데, 이 모습은 마치 공이 의지를 가지고 바레시에게 오는 것이 아니냐는 찬사를 듣게 만들었다.
바레시는 또한 오프사이드 트랩에도 능했는데 이는 상대팀에게 골치거리를 하나 더 안겨주는 셈이었다. 바레시를 따돌리는 것도 어려운데 바레시와 마주치지 않고 곧바로 패스를 이어받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되니 말이다. 당시 바레시는 지역방어의 교과서라고 불리기에 충분했고, 이것은 그를 이탈리아 최고의 수비수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바레시의 후계자를 네스타로 보기도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섬세함의 대명사인 네스타는 작고한 가에타노 시레아의 계보에 가깝다. 그리고 더하자면 우아함의 대명사인 말디니의 스타일도 섞여들어갔다. 바레시보다 섬세할지는 몰라도 균형감각이라는 바레시의 최대특징을 잇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허나 시레아가 유벤투스 소속이었기 때문에 바레시의 계보를 네스타에게 주고 싶은 것이 밀라니스타의 심정일 것이다. 밀란 소속의 선수가 유벤투스 소속 선수의 뒤를 잇는다고 말하기에는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치 않을 것이다.
프랑코 바레시의 첫 월드컵은 82년 스페인 월드컵이었다. 당시 프랑코 바레시는 엔초 베아르조트에 의해 23인 엔트리에 선정되었으며, 첫 월드컵에 우승의 영광을 맛보게 되었다. 바레시가 마리아 아주라(푸른 셔츠)를 입고 플레이하게 된 건 82년이었지만 이는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주는 의미가 컸다. 실제로 82년 스페인에 건너간 후에는 비안코네리의 유니폼을 입고 있던 안토니오 카브리니와 클라우디오 젠틸레, 가에타노 시레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었고, 특히 끈질긴 대인마크를 강점으로 삼던 젠틸레가 마라도나를 완벽하게 묶어내면서 그들에 대한 신뢰를 번복할 이유는 없어졌다. 그러나 풀비오 콜로바티가 조별예선부터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 시점 뿐만이 아니라 축구 인생 전반에 걸쳐 라이벌로 자리매김할 쥬세페 베르고미까지 부상당해 피치에서 나간 콜로바티를 대신해 출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레시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이에 대한 항명으로 이후 대표팀에서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베아르조트의 팀이 실패를 겪고 감독이 교체되기 전까지 그가 푸른 셔츠를 입은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베아르조트가 퇴진한 이후에 바레시는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복귀하며 자신의 실력을 한껏 뽐내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3-4위전을 제외한 준결승전까지 6경기 1실점이라는 놀라운 수비력을 보여주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을 때의 그는 스스로 이탈리아 수비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유로 92 지역 예선에서 경기 종료 1분전에 투입되어 자존심이 상해 질이 나쁜 태클을 하고 퇴장당한 베르고미를 대신해 이후에는 주장의 역할을 맡기도 했으니, 이 시점에서 그는 82년 당시에는 자신보다 앞서가던 베르고미를 제치게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후 94년이 되어 그에게 마지막 월드컵 기회가 주어졌다. 조별예선 노르웨이전에서의 부상 이후, 그리고 두고 두고 후세에 기억될 경기인 결승전 브라질전에 다시 출장한 그는 자신의 운명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했다. 이후 후세에 회자될 승부차기에서 그는 허공으로 공을 차버렸고, 이 승부차기는 로베르토 바죠가 영웅의 자리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끝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레시도 또한 승부차기를 실축했음에도 바죠에게 향한 비난여론에 비해 바레시의 그것은 미약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94년의 브라질전이 바레시가 푸른 셔츠를 입고 나선 마지막 경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가 커리어를 마감할 때에 이르러 AC밀란의 프론트진은 바레시의 등번호인 6번을 영구결번시키기에 이른다. 이는 그가 20시즌간 변함없이, 심지어는 밀란이 강등당한 80-81과 82-83시즌에도 팀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리아에서 몇 안되는 영구결번의 수혜자인데 같은 팀의 파올로 말디니와 칼리아리의 '지지' 지안루이지 리바, 나폴리의 마라도나, AS로마의 아우다이르, 이 다섯에 불과한 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으니 바레시의 클럽에서의 비중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AC밀란의 유소년팀 코치를 맡으면서 선수생활 이후에도 밀란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
좋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팀의 대부분은 강한 수비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강력한 공격력은 강력한 수비력을 기반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내에서 말할 것 같으면 그롯소의 '고개 흔드는' 세레머니의 원조로 유명한 마르코 타르델리. 그가 홀딩임무를 띄고 있던 수비형 미드필더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침없는 공격을 선보였던 것은 수비라인에 있던 시레아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듯이. 그렇게 팀의 근간이 되는 수비였기에, 그곳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바레시의 존재가 오늘날에도 커다랗게 남아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약 당신의 팀에 바레시와 같은 선수가 있다면 팀은 완벽한 지역방어를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는 오직 한명이고 다만 밀란을 위해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를로스 빌라르도(Carlos Bilardo, 86 멕시코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가 바레시를 평가하면서 남긴 말.-
<후세에 길이 길이 회자될만한 승부차기. 이 경기에서 바레시는 패널티킥을 실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