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 : 딸을 기숙사로 보내고 오면서 생각했는데요.. 엊그제 까지 어린애였는 데.. 어느새 저리 커서 기숙사에 들어가다니.. 남자 친구가 있니 없니 하고 있으니.. 흐뭇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합니다. 내가 힘들 때 많은 힘이 되어 주었지요..
흐뭇함이나 서운은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 집착은 딸이 태어나 자라는 순간순간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있던 사연에 의해 생긴 것이고요.. 그것은 딸은 시간 속에 변해가고 있지만 변치 않으면서 나에게 주는 게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것이 딸이든 뭐든.. 그리 보면 씨알없이 변하는 게 아니라 씨알이 있으면서 변한다는 게 맞는 걸로 보이더라고요..
효진 : 예쁨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효리와 효정이가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차이가 있지요.. 그런데 그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여기서는 왜 씨알이 없이 변한다는 무상을 이해해야 하는지..
그걸 일단 알아보죠.^^
석가모니가 도망치듯 출가한 이유는
씨알[본체]인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멸하기 위해서였다.
하여 그 고통을 멸하고자 마음[의식] 명상 수행을 했는데.. 그것으로 완전히 고통을 멸할 수 없음을 알고..
몸을 괴롭히는 고행을 시작한다.
고행 수행은 명상 수행과 달리 삼십 분, 한 시간 수행이 십 년 백 년처럼 길게 느껴지는 고통의 시간이다.
그런 고행을 일 년 정도 했다면 그것은 일 겁 동안 수행하는 시간으로 정말 지루하고 긴 시간으로 느꼈을 터인데..
몸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옆에서 보면 송장으로 보였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더욱더 용맹으로 고행을 했으니..
고행을 멈추면 저 깊은 곳에서 욕탐이 고통의 실마리기 안개처럼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는 것.
고행의 목적은 고행이 아니라 고행이란 수단을 통해 목적지에 이르러 더 이상 욕탐이 일어나지 않아 완전한 고멸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힘들고 고통이고 지루하기만 고행을 일 년을 했음에도 여전히 완전한 고멸[해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 년.. 삼 년.. 사 년.. 오 년.. 육 년을 하고 있으니..
서연 : 선상님.. 지금 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 맞죠?^^.
효진 : 아.. 지금 석가모니 고행 수행 장면이 생각이 나 눈물이 나오려 했는 데.. 고맙습니다.^^
일 년 아닌 욕년.. 욕이 나오네요^^..
육 년이나 했음에도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수자타 처녀의 유미 죽을 받으면서 찰나적으로 떠오른 것이죠.
그때 석가 수행자는 무엇이 잘못된 만남이라고 보는 걸까요?..
서연 : (손사래를 지으며) 나에게 묻지 말고 그냥 말씀하세요..
효진 : 지금까지 나는 열불 나도록 [내]가 열반에 이르려 명상 수행을 하고, 고행을 했다.
그런데 열반에 이르려는 [나]는 정말 있는 것인지.. 관찰하지 않고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고행을 통해 순수한 아트만 상태[열반]에 이르려했다.
자이나교의 마하비라 선생은 몸이 죽어야 순수한 지나[열반] 상태가 된다고 했으나..
난 살아서 순수한 지나를 성취하고, 지나 상태로 살아가려 했다.
그러나 내가 살아서 순수한 나[지나, 열반]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오늘 분명히 깨쳤다.
그런데 지나라 불리는 나.. 아트만이라 불리는 나..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씨알인가?..
서연 : 당연하죠. 나라는 씨알은 분명 있는 거지요.
그러니 평소에는 지긋지긋하지만 어떤 때는 정말 니가 좋네^^ 하는 남편이 있고, 무얼 줘도 아깝지 않은 딸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내가 없으면 딸이 어떻게 있고.. 없으면 하는 X 인간이 어떻게 있겠어요!
효진 : 그런데 말입니다..^^
석가 수행자는 씨알[아트만]이 없다 [안 아트만]는 것을 살아서 확연히 통찰하니.. 부처님이라 불리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부처님이 되신 석가모니께서는 본래 나가 없음에도 나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시간 속에서 맺어지는 인연에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이 바로 나[아트만]라는 걸 의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임을 알았다.
서연 : (한동안 조용히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무아가 분명하다 해도..
나는 참 지긋지긋한 삶으로 보여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을 하니.. 무아임을 깨달으면 참 좋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남편이 있고, 아이가 분명히 있는 상태로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선생님도 분명히 있고요..^^..
효진 : 나 지금 어디로 가는 비행기를 태우고 있는 거죠?..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ㅎㅎㅎ^^.
석가 부처님이 명철하신 거 다아 아시죠?..
그러기에 부처님은 불자를.. 수행하는 출가자와 믿는 재가자로 분명히 나눈 겁니다.
출가자는 무아를 배우고 닦아 깨치려는 자입니다.
재가자는 무아를 믿지만 생활에서는 내가 주인이 되어 선 good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왜 선을 행해야 할까요?.. 서연님..
서연 : 왜 자꾸 질문을 하시죠?.. 나 졸거나 딴생각하지 않고 있다고요! 다 듣고 있잖아요..
효진 : 혼자만 말하다 보면 심심하거든요.^^..
스스로의 씨알이 무아임을 이해하는 걸 방해하는 첫 번째 바이러스가 탐욕이다.
아주 옛날 김용만이란 민요 가수가 부른 노래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임~자지" 하는 가삿말이 나온다.
그 말처럼 본래 아무도 없는 자리인데.. 그 자리에 탐욕이 슬쩍 앉아서 지가 주인인 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탐욕을 떠나보내는 일등 작업이 바로 선행이다.
서연 : 선생님은 꼰대가 아닌 줄 알았는데..
효진 : (흠칫하며 화재를 돌린다) '나'라는 작자와 탐욕은 어떤 관계인지 살펴보면..
"일체란 곧 12처(處)에 의해 생기는 것이니, (12처는)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이다. <잡. 13. 319경>
일체는 안과 색 그리고 안식의 결합으로 새로운 안식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일체는 2 법 6 쌍인 12처에 의해 생긴다는 거
기억하시죠?.
서연 : 네~에^^.
효진 :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을 보면서.. 난 신민아를 유심히 보는 데 서연님은 김선호를 본다는 말이죠.^^.
서연 : 나도 신민아인데요?.. 어떤 옷을 입는지..
효진 : 오 케, 오케이.. 말하고픈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같은 것을 보면서도 인상깊게 보는 부분이 다르다는 겁니다.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유심히 보는 게 다르고.. 기억하는 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만날 때 중매쟁이가 있는 데.. 어떤 중매쟁이는 얼굴을 강조하고, 또 어떤 중매쟁이는 옷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매쟁이는 공짜가 아니고.. 중매쟁이 본심을 우리는 탐욕이라 부른다.
239. 결경(結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비사리의 미후지 곁에 있는 2층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결박되는 법과 결박하는 법에 대하여 설명하리라.
어떤 것이 결박되는 법인가? 안과 색·이와 성·비와 향·설과 미·신과 촉·의와 법이니, 이것을 결박되는 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결박하는 법인가? 욕망과 탐욕을 말하는 것이니 , 이것을 결박하는 법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239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안과 색 2법이 만나는 데 멋대로 만나는 게 아니라 누구는 얼굴을, 누구는 옷을 만나도록 하는 쟁이가 있으니..
그 쟁이가 바로 욕망과 탐욕이라는 것..
서연 : 저 말을 들으니 석가 선생이란 분이 대단란 분이라는 생각과 어찌 보면 참 쫀쫀한 고등학교 심리학 선생님 같아요..
종교 창시자라면.. '내가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니 나를 따르라' 해야 멋있는데..
효진 : ㅇㅎㅎㅎ^^..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그렇게 보입니다. <잡아함경>을 보면
전반부 내용은 국어 시간이나 물리 화학 시간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리저리 논리적으로 따지고 무슨 물리 공식이나 화학 방정식 외우듯 끙끙하며 이해하고 외워야 하는 공부 같습니다.^^.
그럼 다음 경을 보시죠..
색.수.상.행.식은
모여있는 물방울 물 위의 포말
봄날 아지랑이, 파초와 같아
모두는 덧없는 허깨비라네..
태양 종족 존자는 그러히 말하노라.
모두는
알맹이 없어 단단하지도 않아
거기에는 나[我]도 내 것[我所]도 없네. <잡. 265. 포말경>
부처님 당시는 인쇄술은커녕 문자로 기록될 귀족어인 산스(크리트)어와 일반인 언어인 팔리어도 아직 정리가 덜 된 시대였다.
그러기에 설법이라 해도 전하는 산문이 아닌 외우기 쉬운 운문 형태로 정리해 전해오고 있었다.
차차 언어가 정리되면서 문법도 생겨 문자로 정리할 수 있는 기틀은 부처님 돌아가신 이후에 마련되었다고..
지금 전해지고 있는 오리지널 <잡아함경>은 상좌부 한 부파인 설일체유부에서 산스어로 수집 정리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다시 한문으로 수집정리하면서 뜻 중심 문자로 번역하다 보니 산문식으로 많이 편집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만일 석가모니께서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다면..
부처님 설법은 마치 노래하는 것으로 들릴 것이고..
질문에 답하는 제자들 역시 노래하듯 화답하고 있을 것이다.
서연 : 초등학교 음악시간처럼요?^^.
효진 : 그것보다는 나이 먹은 중학생 음악시간 같은 풍경이었을 것 같은데요..ㅎㅎㅎ^^
5,6 백 명이 가득 한 공간에..
조용하지만 스승님의 한 말씀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제자들의 긴장감이 흐르는 동안..
부처님은 부드럽지만 자신에 넘치고 분명한 어조로 당신의 깨침을 암기하기 쉬운 운문식으로 설하고 계시리라..
서연 : 고승이 설법하시는 풍경처럼요..
그런데 그 내용은 화학 시간이나 국어시간처럼 논리적이요 분석적이요 종합적이었으니..
에휴.. 듣는 학생들은 얼마나 피곤했을까!..
효진 : 왠 삼천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