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에게 두려움, 슬픔, 분노, 즐거움, 사랑 같은 감정은 항상 자신의 안녕과 관련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 감정은 단순히 갑작스런 충동이나 욕구가 아니라 고도로 선별적인 유형의 비전과 해석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느낄 때 나는 단순히 몸을 떨지만 않는다. 나는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안녕과 관련해 세상의 상황을 평가하며, 나의 안녕이 상황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는 스토아학파의 견해 중 소중한 통찰로 간주되는 것을 통합해 들이며, 감정의 인지적 내용과 지향성을 강조한다.
- <감정의 격동 3권(사랑의 등정)>에서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위의 글을 옮기고 보니, 경향신문 ‘내 인생의 책’(최진성 편, <커뮤니케이션-인간, 동물, 인공지능> 소개)에 나온 글 가운데 “대표적 ‘인지’ 대상인 언어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의도는 애매하게 숨기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이율배반적 과정이 매우 복잡한 형태로 발달됨을 알 수 있다”를 보고 오랫동안 멍했던 기억이 난다. 이 문장에서 나는 왜 사람들이(물론 나를 포함) 그토록 바른 문장을 쓰기 어려운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솔직히 토로하면 신상(<감정의 격동>에서는 안녕)에 위험이 올 수 있기에, 우선적으로 내가 잘 살려는 차원에서 말도 하고 글도 쓰려니 그 과정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고, 훈련이 덜 된 사람일수록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말이다.
말과 표현과 행동의 1차적 전달 도구는 감정이다. 물론 수용자도 발화자의 감정을 찰나적이면서도 연속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때 서로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려면 위의 글 “감정은 단순히 갑작스런 충동이나 욕구가 아니라 고도로 선별적인 유형의 비전과 해석이다”를 ‘소중하게 통찰’하는 게 필요할 듯하다. 감정은 욱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내력, 상황에 대한 해석 등 모든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은 역시 나의 안녕이다. 그래서 글쓰기에서 주어(나)에 대한 성찰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