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골 2:20∼3:4
제목: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라
●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성도들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며 믿는 신앙입니다.
골3: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골3:1을 시작하는 접속사는 ‘그러므로’입니다. 골3:1을 말씀하는 이유는 골2:20~23에 나오는 세상의 것에 사로잡힌 모습을 비판하고 계도함입니다.
골2:20.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
골3:1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고 골2:20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하는데요(새번역: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 기독교 신자들도 사회와 국가에 소속하여 살아가는데, 세속정부의 합법적인 질서에는 협력하고 준수해야 합니다(예: 납세, 국방 등). 그러나 세상이 기독교 신앙을 교란하고 오염시키는 풍속들(예: 할로윈)과 반(反)기독교적인 종교 강요(예: 신사참배)나 유대교의 종교법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골3:1~3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아래 로마서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롬6: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를 믿고 칭의(롬6:7)를 받은 사람은 ‘죄책’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었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성’마저도 완전히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이를 두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고 기막힌 표현을 했습니다. 죄책은 칭의에 의해 해결되었고 죄성은 성화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해결되어 가다가 영화(glorification)의 때에 완전한 해결을 받습니다. 칭의의 결과는 성화로 나타나는데, 죄책에서 자유하게 된=칭의된 의인은 죄에 대하여 죽고 죄를 죽이며 죄와 투쟁을 해 나아갑니다.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성도들은 남아있는 죄성 때문에 죄에게 유혹받고 공격을 받지만 넘어져도 일어나고 회개하며 전진해 나아갑니다.
히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
죄책은 없지만 죄성은 남아있는 성도들이 성화를 해도 죄의 유혹을 받는데 하물며 세상과 벗한다면 어떻게 죄의 유혹에서 빠져 나가겠습니까? “그러므로”(골3:1)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고 강조하는 것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 내가 성화를 하고 있고 성령께 붙잡힌 사람인지? 금방 분별하는 방법이 아래 말씀에 나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문단의 핵심입니다.
골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나에게 위의 것(하늘나라,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 생각나는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까? 이 땅의 것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고민하고 있는지? 그 정도와 분량을 비교하여 헤아리면 대강은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것과 땅의 것이 대비되는 대조는 아래 예수님 말씀에도 나옵니다.
마6: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위 말씀을 빙자하여 내일 취직 시험을 보는 사람이나 내일 힘든 직장에 출근해야 할 사람이 종교적 명분을 그럴듯하게 내세우며 육체적 무능과 나태함을 합리화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런 것은 안 됩니다. 그러나 이방인과 성도가 막다른 골목길과 같은 중요한 판단과 결정의 기로에서는, 위 마태복은 6장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위 말씀은 이방인과 성도의 다른 모습을 부각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은 성도에게도 있지만, 이 땅에서 어떻게 먹고 살지?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이 세상과 재물이 주인이고 성도에게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마6:24). 마태복음 6장의 이방인은 칭의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골로새서 3장의 ‘위의 것을’ 생각하는 믿음과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이방인이 보이는 기도의 모습과 사고방식은 골로새서 2장의 초등학문∙자의적 숭배와 겸손∙몸을 괴롭게 하는 지혜에 불과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면’(골3:2) 조물주의 은혜와 공급으로, 공중의 새가 먹고사는 것이 보이고 백합화가 옷을 잘 입은 것이 보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보이게 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한 믿음의 결과는 성도의 인생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고, 이런 진실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의 먹고 살 것도 어느 정도는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와 기복종교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큰 부자가 된다고 거짓말을 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공중의 새나 백합화가 먹고 입고 사는 것 정도를 예시하셨습니다.
● 우리는 사도신경에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우리의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부르심을 따라 중생하고 칭의(稱義)되었듯이 미래의 부활도 확실하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래 말씀을 보면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지만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골3:3.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
우리 성도들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죽음과 부활 모두에 해당됩니다. 성도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은 죄책과 죄성 모두가 무죄이신 구원자로서 죽으신 것이었고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책에서는 완전히 죽어 있지만 죄성에서는 죄를 죽여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성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서 미래에 부활할 것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서 부활할 것입니다(골3:4). 이러한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이것을 실제로 믿는 것이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것입니다(골3:1, 2).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천상의 것(=천국)을 ‘추구’하는 것입니다(골3:1).
공동번역)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새번역)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
추구(追求)하는 것은 사람이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좇아 구하는 것입니다(Daum 국어사전). 구원의 서정이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느 한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와 ‘아직’이며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아래 번역을 보면 조금 더 쉽습니다. ‘마음에 둔다’는 표현이 좋습니다.
골3:2 (공동번역)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두는 것이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며 성도의 생각이고, 마음에 지상에 있는 것들을 둔 것이 이방인의 생각 방식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점검하고 교정하는 것입니다.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더 많이 두었다고 분별되면 회개하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면 됩니다. 그러한 회개와 교정의 축복이 이 묵상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성도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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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聖徒(골1:2, 12, 26)
바울은 에베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서에서도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성도'(하기오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2,12,26절). 여기서는 특별히 본장에서 바울이 어떠한 자를 성도라고 부르고 있는가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① 하나님과 화해한 자 : 바울은 먼저 하나님과 화해한 자를 성도라고 부르고 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된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의 결과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거룩하고 의로우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를 뜻한다.
②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자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으로 이미 도래했으며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중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어두움의 지배로부터 건져내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미 옮기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주권과 권위의 무장을 해제시키셨으므로(골2:15) 하나님의 지배가 시작된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지배가 완성될 것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자를 가리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고전 15장).
③ 말씀의 비밀을 아는 자 : 성도는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世代)에 감추어진 말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이다(골1:26절).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그것을 계시하셨다. 말씀의 비밀은 곧 성도 안에 내주佳)하시는 그리스도이시며, 성도는 비밀의 영광스러움을 안고 희망 가운데 살아간다(H. F. Hamilton, The People of God, 1912;R. N. Flew, The Idea of Perfection Christiain Theology, 1934)
<톰슨3 성경주석>, “골로새서 1장”.
@장코뱅 좋은 설명입니다.
성도란 표현을 집사 직분 못 받은 분들에게 그냥 붙여주는 관행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위에 나온 설명과 같이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베 네 알겠습니다. 공감합니다.
성도, 거룩한 자들
히브리어의 '하시딤' (신실하며 헌신된 자들)이나 또 '케도쉼' (거룩한 자들, 하나님께로 구별된 자들[것들])이 영역본 구약에서는 성도들(Saints)로 많이 번역되었다. 비록 다양하고도 개별적인 여러 번역이 있지만, 이 단어로 번역된 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난다(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주로 거룩한 자들로 나타난다).
영역본 KJV은 '케도쉼'을 Saints (거룩한 무리들)로 번역하면서 천상의 존재들이나 천사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였다(욥 5:1 , 15:15, 시 89:5,7, 단 8:13, 단수로, '카도쉬 ',슥 14:5, RSV'holy ones').
단 7:18-27에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아람. '캇디쉐 엘리요닌')이라는 말로써 천상의 존재들이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바울은 헬라어 '하기오이'그 대부분의 경우를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의 기록들 가운데서 여섯 개의 서신들의 인사말에서(롬 1:7, 고전 1:2, 고후 1:1, 엡 1:1, 빌 1:1, 골 1:2), 또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언급으로
(행 26:10, 롬 15:25-26,31, 고전 16:1, 고후 8:4, 9:11, 12), 문안 인사 가운데서(롬 16:15, 고후 13:13, 빌 4:21. 단수로 22절), 그 외 다른 본문들에서 이 단어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하고 있다(참조. 롬 8:27 ,12:13, 16:2, 고전6:1-2, 14:33, 16:15, 엡 1:15, 18, 3:8 살전 3:13).
또한 이 단어는 바울이 사용했듯이다른 성경 기자들에 의해서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참조. 행 9:13, 32, 41, 히 13:24, 유3절, 계 5:8, 13:7, 10, 19:8, 20:9).
그 외에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났던 자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마 27:52, 참조. 행 3:14).
(-거룩)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성도".
@장코뱅 성도에 대한 성경 원어와 근거 구절이 많이 나와서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을 통한 구속 사역의 적용은 이스라엘과 같이 부르심을 받아 거룩하게 된(벧전 1 : 16 ; 참조. 레 11 : 44)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을 창조한다(벧전 2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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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Ⅰ. 용어
'거룩'을 표현하는 광범위한 일련의 영어 단어들은 튜튼어(holy, holiness, hallow) 나 라틴어(sacred, sacerdotal, consecrate ; sanctify, sanctuary, saint)에서 유래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기본적인 두 단어, 즉 히브리어 '카도쉬'와 헬라어 '하기오스'가 이러한 단어들로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의 어근(명사 '코데쉬' ; 형용사 '카도쉬' ; 동사 '카다쉬')는 잘라냄 또는 분리함을 의미하고 있다. 즉, 종교적 용법에서 이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구별함을 뜻한다. 후기의 용법에서는 일차적으로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 하나님 자신이 “완전히 다르게'(wholly otherness) 구별되심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여러 다른 히브리 용어들이 '카도쉬'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헤렘'은
특히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거나 구별된 물건들을 가리키며(예. 레 27 : 28), '나자르'“성별하다, 분리하다”라는 뜻으로(15 : 31 ; 겔 14 : 7) 이로부터 나실인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민 6 : 8).
'토하르'는 “정결”을, 그리고 '타하르'의 피엘형은 “정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제사 의식에서 '코데쉬'와 상호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자”라는 뜻의 “하씨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과 자비를 의미하는 '헤쎄드'와 연관되어 있다. 70인역과 신약은 '카도쉬'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헬라어 '하기오스'와 그 파생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히에로스'라는 헬라어가 더 보편적으로 선호되고 있으나 70인역과 신약은 이 단어가 이방 종교와 관련해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이를 피하고 있다(그러나 '히에로스'의 다음과 같은 형태의 단어들도 참조하라 ; 딤후 3 : 15, '히에라 그람마타' – “성경” ; '히에론' – “성전” ; 히에라튜마' – “제사장직”).
'하기오스'의 의미와 관련된 다른 헬라어 단어들 가운데에는 가끔 '하씨드'와 동일어로 사용되고 있는 '호시오스'
(시 16 : 10을 인용한 행 2 : 27 ; 13 : 35 ; 사 55 : 3을 인용한 행 13 : 34 ; 딤전 2 : 8 ; 딛 1 : 8 ; 히 7 : 26)와 “정결”을 의미하는 '셈노스'(예. 빌 4 : 8), 그리고 도덕적인 정결을 암시하는 '하그노스'(고후 7 : 11 ; 딤전 5 : 22)가 포함되어 있다.
Ⅱ. 성경의 가르침
거룩은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에 위치해 있다. 즉 거룩은 성경의 다른 모든 큰 주제들을 결합시키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거룩은 하나님의 존재의 뿌리이자 중심으로 다른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을 포괄하며, 그 때문에 하나님 백성의 삶에 중심이 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모든 이해는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명령에 집약되어 있다(레 19 : 2 ; 참조. 벧전 1 : 15).
A. 구약 : 거룩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은 종교적 뿌리에서 자랐다. 성소(시 28 : 2) 및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거룩은 성전의 방들(겔 42 : 13 ; 46 : 19)과
뜰(사 62 : 9)뿐만 아니라 성전 지역(대상 29 : 3 ; 사 11 : 9 ; 56 : 7 ; 64 : 10)과 또한 예루살렘 성(느 11 : 1, 18 ; 사 48 : 1-2 ; 52 : 1)의 특징이 되었다. 시내 산의 거룩한 땅(출 3 : 5)과 여리고 근처의 한 장소(수 5 : 15)를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현현하시고 임재하신 장소들도 역시 거룩하였다. 이스라엘의 진중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써 그 곳이 거룩하게 되었다(신 23 : 14).
제사 의식과 관련된 모든 물건들, 곧 모든 제사와 제물(예. 레 7 : 1), 십일조(신 26 : 13), 그리고 제사장의 예복(레 16 : 4)이 거룩하였다. 그러한 제의적 거룩에는 성막 내의 성물들과 번제단을 비롯한 여러 물건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거룩하게 구별된 이러한 물건에 접촉하는 것 또한 거룩하게 되었다(출 29 : 37 ; 30 : 26-29 ; 참조. 학 2 : 12).
나아가 예배를 위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시간들(창 2 : 3 ; 출 20 : 8 ; 느 9 : 14 ; 10 : 31 ; 사 58 : 13)과 희년(레 25 : 12)도 거룩하였다.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 그 자체는
그것의 확립을 가능케 한 언약이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을 통해 한 거룩한 백성을 지으셨고,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거룩을 전달하셨다(신 7 : 6 ; 26 : 19 ; 렘 2 : 3).
이 백성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되어 거룩하였다. 백성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특별한 직임때문에 특별한 수준의 거룩이 부여되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출 29 : 1 이하; 레 8 : 12, 30 ; 21 : 8), 나실인(민 6 : 5 이하), 성전에 참여한 군인(삼상 21 : 5-6 ; 참조. 13 : 3), 그리고 선지자들(왕하 4 : 9 ; 렘 1 : 5)이 이에 속하였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예에서 거룩되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의 임재하심이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표현하였고,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들에게 임재하심을 나타내었던 하나님의 “성호”(holy name)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레20 : 3 ; 22 : 2 ; 대상 16 : 10, 35 ; 시 33 : 21 ; 103 : 1).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속된 것과 반대되지만,
하나님의 거룩성은 이 세상적인 거룩과 속됨의 이중성조차도 초월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은 모든 피조물의 그것 보다 우위에 있다(사 40 : 25).
때문에 사람에게 있는 거룩조차도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항상 주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은 당연히 하나님 자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일반적으로 사람과 사물을 거룩하게 하는 성결 의식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어떤 것이 거룩하게 되어질 때에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을 갖게 되며, 말 그대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기 위해 그 자체를 초월하였다. 따라서 천사들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자들”로 불리우고 있다(욥 5 : 1 ; 시 89 : 6-7 ;참조. 막 8 : 38 ; 행 10 : 22 ; 계 14 : 10).
산지자들의 시대까지 하나님의 거룩은 그의 인격에 속한다는 개념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거룩은 사실상 하나님의 신성과 같은 의미였다(예. 사 6 : 3 ; 참조. 5 : 16 ; 호 11 : 9).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할 수 있으며, “스스로 거룩함을 나타낸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니크다쉬'는 오직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 레 10 : 3 ; 민 20 : 13 ; 사 5 : 16 ; 겔 20 : 41).
초월적인 신비인 하나님의 거룩 가운데 섰던 사람에게 이것은 때때로 공포에 가까운 경외심과 동시에 거의 불가항력적인 황홀감을 불러일으키는 “두려우면서도 좋은” 어떤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참조. 시 99 : 3 ; 111 : 9).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거룩은 성별을 통해 하나님이 부여하신 한 상태였다. 그러나 거룩은 역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특히 정결을 요구하였다(신 7 : 6).
이러한 요구의 범위는 성결 법전(Holiness Code ; 레 17-26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규례는 -종교 의식적이든 개인적이든 모두-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는 기본적인 명령(레 19 : 2)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거룩은 의식적인 정결('토하르')에 관한 언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거룩하고 속된 것의 초자연적인 범주는 어느 정도 정하고 부정한 것 사이의 자연적인 구별과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단지 의식적인 정결뿐 아니라 내적인 거룩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하나님 인격의 본질로서의 거룩의 개념 발전과
평행을 이루었다. 하나님의 거룩의 인격적인 특성은 선지자들이 그 내용을 매우 풍성하게 했던 거룩의 두 측면, 곧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합 1 : 13)과 단지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로서가 아니라 심판과 구속에서의 하나님의 의지와 행위를 통해 표현된 본질로서의 거룩에서 볼 수 있다. 이사야가 사용한 독특한 하나님의 명칭인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예. 사 12 : 6 ; 17 : 7)는 거룩의 이원적인 지향, 곧 거룩하신 자로서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외하는 현실 아래에 있으며, 그 때문에 거룩이 그들에게는 규범적인 한 특징이 되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로의 지향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거룩하지 못한 끊임없는 행위로 인해 하나님은 이 부정한 자들에게 심판의 불이 되고 있다(10 : 16-17), 그러나 신실하게 남은 자들에게 그는 진리와 생 명이며(사 10 : 20-21) , 거룩의 불은 정결케 하는 불이된다(참조. 6 : 6-7).
남은 자는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보호와 빛 아래 살면서 거룩이 승리할 때를 기다릴 것이다(4 : 3-6).
매문에 선지자들의 마지막 말은 거룩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신실하심
('헤쎄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파괴적이 아니라 구속적이며, 거룩의 목적에 합당한 구속은 인간적이 아니라 온전히 신적이라는 것이다(호 11 : 9).
B. 신약 :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거룩 개념에 굳게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의 종교 의식에 대한 암시와 그로부터 유래된 표상은 의식적인 거룩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차 있다(예. 성소, 마 24 : 15 ; 예루살렘, 27 : 53 ; 계 11 : 2 ; 성경, 롬 1 : 2 ; 율법, 7 : 12 ; 선지자, 행 3 : 21).
신구약 사이의 연속성은 크지만 신약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새 언약의 새로운 백성들의 상황으로 바꾸어 놓고, 더 나아가 영적이고 윤리적인 거룩과 또한 하나님의 인격과 특성에 그 거룩이 기초해야 한다는 선지자적인 강조를 발전시키고 있다. 상대적으로 신약에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기초는 기독교 거룩 개념의 중심에 남아 있다.
1. 하나님 아버지 - 주기도문은 아버지의 거룩하심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언급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 ; 9 ; 눅 11 : 2)라는 구절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히브리적 전통 안에 있다. 그런데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만이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심을 그가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그의 이름 사이의 관계를 한층 더 강화시키고 있다(요 17 : 11).
이 아버지는 또한 그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에게도 거룩을 요구하셨음이 벧전 1 : 15-17에서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이사야의 거룩 삼창(trisagion ; 사 6 :3)을 반복하고(계 4 : 8)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찬양을 창조해서 드러난 그의 영광과 존귀와 능력에 대한 찬양과 연결짓고 있는(참조. 11절)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거룩의 의미가 가득차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예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언급들은 비록 적지만 매우 중요하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신비적인 탄생에 기초하고, 수세 시에 외적인 표적을 받으며(이로써 예수님은 성령의 전달자[bearer]가 된 것으로 보인다), 악한 영들에 대한 승리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베드로가 그의 신앙 고백에서 그러했듯이
(요 6 : 69 ; 참조. 요일 2 : 20) 귀신들도 스스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눅 4 : 34)로 인정하고 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에 있어 특히 비의식적인(unceremonial) 성격은 그가 당시에 “부정하게” 여겨진 사람들이나 사물들(예. 문둥병자, 창녀, 비율법적인 음식)과 끊임없이 접촉했던 사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사랑과 능력과 강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또한 성전 정화(막 11 : 15-17)의 예에서 보이듯이 심판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거룩하심은 단지 선지자들의 하나님의 그것과는 같지 않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심이요, 그리스도의 신성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기 전에 아버지에 의해 거룩하게 된(요 10 : 36) 예수님은 또한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계시다(17 : 19 ; 헬. '하기아조' - 재귀대명사와 함께 사용).
그런데 이 행위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행위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은 “거룩하고 진실한 자”(계 3 : 7)로 불리우고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여러 속성들을 공유하고 있다. 나아가 마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구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듯이 또한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그의 대속적인 자기 희생(히 2 : 11, 14 ; 10 : 10, 14)과 새 언약의 피(10 : 29 ; 13 : 12)로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심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거룩한 제사장이자 동시에 거룩하고 흠없는 제물, 곧 유월절 양이시다(고전 5 : 7 ; 히 9 : 25-26).
자신의 신적인 거룩하심으로 그는 또한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실 수 있다(엡 5 : 26 ; 히 9 : 13-14).
3. 성령-신약에서 성령이라는 명칭이 점점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이 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교통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체와 교통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성령은 거룩하게 하는 사역에 있어 신적임을 보여주고 있다(롬 15 :16).
이로써 그리스도와 성령(때때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리운다 ; 예 8 : 9)은 거룩과 외적 사역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연결 때문에 성령은 거룩을 교회에 나누어줄 수 있다
(살후 2 : 13).
(→성령)
4. 교회-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을 통한 구속 사역의 적용은 이스라엘과 같이 부르심을 받아 거룩하게 된(벧전 1 : 16 ; 참조. 레 11 : 44)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을 창조한다(벧전 2 : 9).
그리스도에 의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고전 1 : 2 ; 6 : 11 ; 엡 5 : 26) 교회의 회원들은 성도들과의 교제로 연합되며, 성령께서 개인적이며 또한 공동적으로 거하시는 “주 안에서의 성전”이 되어 간다(2 : 12-22).
때문에 교회의 거룩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이요, 또한 거룩하게 하는 현존이다. 비록 “성도”라는 단어가 가끔 위대한 신앙인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서”(빌 1 : 1) “성도로 부르심을 입고”(롬 1 : 7 ; 고전 1 : 2)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들”(골 3 : 12) 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종말론적인 한 주제가 있는데 이는 계시록에서와 같이 거룩을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인 하나님의 영광에의 참여와 관련시키고 있다. 거룩의 영광의 완전한 계시는
미래에 있겠지만 거룩 그 자체(헬. '하기아스모스')는 이미 현존하는 한 상태이며, 동시에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가는 한 과정이다(롬 6 : 19, 22 ; 살전 4 : 3, 4, 7).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거룩은 거룩한 행동과 거룩한 인내에서 드러나며(참조. “거룩하고 흠이 없게" ; 엡 1 : 4 ; 골 1 : 22), 종종 신약은-산상 수훈으로부터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르기까지-이 거룩한 삶의 영적이고 윤리적인 성격들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힘쓰고 있다. 윤리적 차원에서 거룩은 마음의 청결(마 5 : 8 ; 참조. 딤전 1 : 5 ; 딤후 2 : 22 ; 약 1 : 27)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성도들 사이에서의 상호적인 사랑의 섬김(엡 4 : 12-16)이 그 특징이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며(롬 12 : 1 ; 참조. 빌 2 : 17 ; 3 : 10), 그 때문에 이 세상을 좇아가는 깨끗지 못한 삶과는 반대된다(롬 12 : 2).
사도 바울은 거룩한 교제는 가족들 사이에서와 같이 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신자와 한 불신자 사이의 자녀들은 깨끗지 못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7 : 14).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곧 교회는 성령의 교통 안에서 함께 결속된 “성도들의 교통”으로 불리우고 있다(고후 13 : 13).
성도들은 이러한 교통을 확인하는 표시로 상호 간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예. 롬 12 : 13), 거룩한 입맞춤을 하며(고전 16 : 20, 고후 13 : 11 ; 살전 5 : 26), 또한 거룩하게 하는 교제인 세례(고전 6 : 11)와 성만찬(참조. 고전 10 : 16-17)에 참여하고, 공동적으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유 1 : 20)을 가지고 있다.
※ 참고 문헌R. Otto, The Idea of the Holy, 2nd, ed,(London ; 1950) ; S. Neil, Christian Holiness(New York ; 1960).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거룩".
@장코뱅 자세히는 못 보고 쭈욱 한번 훑어 보았습니다. 참 성도는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좋은 묵상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나의 내면의 성찰과 회개를 합니다.
아멘!
아멘22
골 2:20~3:4을 같은 맥락으로 보니 메시지가 더 선명해지네요.
바울의 눈에 복음을 받은 유대 기독교인들이 세상 철학과 학문, 그리고 유대교 전통과 관습, 율법과 규례에 묶여서 다시 그것들을 지키고 따르려고 하니 무척이나 실망하고 화가 났을만 합니다.
이방인들은 모시는 하나님이 없고 위로부터의 거듭남도 없으니 땅의 것이 전부겠지만, 그리스도인은 상황이 확연히 다른데도, 너무나 고귀한 신분이며 최고의 주인을 모시고, 차원이 다른 천상의 가치관과 말씀, 철학이 있으니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이 우리들에게도 생생하게 들려오네요. 아멘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이 땅의 부질 없는 것들에 마음을 쓰지 말고, 우리의 날 수가 줄어들수록 더욱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가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댓글과 분별에 공감합니다.
네, 성경에도 문단 나누기가 2:20-3:4이 한 문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좋은 내용의 댓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