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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조선 왕을 말하다. - 효종.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29 14.02.17 16: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조선 왕을 말하다. - 효종.

국란을 겪은 임금. - 효종.
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 봉림 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 三宗의 혈맥.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대권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대운(大運)이  따라 준 것이다.  그러나  대운은 여기까지다.  대운을 천명(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죽이면서 생각지도 않게 대권을 잡은 효종은 굴러온 대운을 천명으로 전환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것이 북벌이었다.
효종은  현종 ? 숙종을 잇는  삼종(三宗)의  혈맥 시대를 열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산해관까지 가서 명군이 청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뿐 아니라 봉림대군(효종)도 인질로 끌려가는 것이 강화조건 중 하나였다.  강화도에서 나온  봉림대군은  남한산성 아래서 인조를 잠깐 뵙고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 길에 올라야 했다. 19세의 봉림대군은 압록강 건너 만주 땅 청석령(靑石嶺)에 올랐다.
숙종 때 사신으로 이 고개에 올랐던 이의현(李宜顯)은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에서 “길이 좁고 험한데 돌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고 적고 있다. 청석령 고개에서 봉림대군은 시조를 토해 냈다. “청석령 지나거다 초하구(草河衢) 어디메뇨. 호풍(胡風)도 차도찰샤 궂은비는 무슨 일고. 뉘라서 내 행색(行色) 그려내어 임 계신데 들이리.”(『가곡원류(歌曲源流)』)

이 재를 넘어 심양(瀋陽)으로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가 불투명했다.
인질 생활 동안 봉림대군은 소현세자 못지않게 고생했다. ‘효종대왕 묘지문’은 그가 청나라 군사들과 “서쪽 몽고 경계에 갔고, 남쪽 산해관에 갔으며, 더 남쪽 금주위(錦州衛)의 송산보(松山堡)에 이르러 (명나라) 제장(諸將)들이 패배해 항복하는 것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소현세자와 함께 명나라의 몰락 장면을 목도하면서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달랐던 게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소현세자가 여진족(만주족)이 중원의 새로운 패자가 되는 현실을 인정했다면, 봉림대군은 그들을 꺾는 설치(雪恥)를 꿈꿨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소현세자를 꺾고 임금이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효종의 5녀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쓴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는 효종이 훗날 아들(현종)에게 “내가 형님과 심양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신민(臣民)들이 내게 어진 덕이 있다고 오인하여 마음으로 따랐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발언이 심양관 내에 소현세자의 노선을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뜻인지, 인조가 소현세자를 제거하려 함을 안 심양관의 일부 세력이 봉림대군에게 미리 선을 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봉림대군이 스스로 만든 세력은 아니었다. 소현세자가 제거된다 해도 원손(元孫)으로 불리던 장남 석철이 있었다. 장남이 부친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경우 차남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이 조선의 종법이었다.

하지만 9년간의 인질 생활 끝에 인조 23년(1645) 귀국한 소현세자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 상황에서 인조가 원손 석철 대신 봉림대군을 후사로 점찍으면서 운명은 달라졌다. 소현세자가 급서한 날은 인조 23년 4월 26일,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기로 작정한 날은 윤6월 2일이었다. 이때 인조는 원손을 세워야 한다는 많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국본(國本:세자)을 물을 것이므로 급급하게 의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청 세조와 섭정왕 다이곤은 공부상서(工部尙書) 흥능(興能) 등을 소현세자 장례의 조제(弔祭)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들의 도착 예정 날짜가 윤6월 4일이었다. 이들이 소현세자의 뒤를 원손 석철로 하여금 잇게 할 것을 요구하기 전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결정하려는 것이 인조의 생각이었다.

인조는 원손을 세워야 한다는 많은 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결정했다.
드디어 사신들이 도착한 윤6월 4일 조정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 사양 상소를 낸 것이다. 봉림대군은 “선세자(先世子:소현세자)가 오랫동안 동궁으로 있다가 이제 막 졸서(卒逝)했는데, 원손(석철)의 칭호는 온 나라 사람이 우러르는 바입니다.”라면서 소현세자의 후사는 자신이 아니라 석철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같은 상소에서 봉림대군은 “가슴에서 나오는 말을 이길 수 없어 성상의 위엄을 범하였으니 두려움이 이르는 것을 더욱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며 혹여 인조가 이 상소에 화를 내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도 드러냈다. 인조는 이렇게 비답 했다.




심양시 아동도서관.
소현세자와 조선 인질 일행이 거처하던 심양관 구지(舊址)로 알려져 있다.

“상소를 살펴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너는 총명하고 효성과 우애가 있으며 국량도 좁지 않다. 그래서 특별히 ‘형이 죽으면 다음 아우가 뒤를 잇는 예절(兄亡弟及之禮)’을 썼으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닦아 형의 자식을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거라.(視兄子猶己出).”(『인조실록』 23년 윤6월 4일 )

인조가 손자들에게는 일말의 애정이 남아 ‘형의 자식을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라’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국왕 즉위 예정자가 즉위하지 못한 뒤 목숨을 보전하는 예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조가 아니었다. 문제는 청나라 사신들의 태도였다. 같은 날 청나라 사신들은 청 세조의 조제문(弔祭文)을 전달했다.

“세자가 갑자기 서세(逝世)했다는 말을 듣고 깊이 놀라고 애도하였다.
세자가 북경에 있을 때 언동이 완연했던 것을 추상(追想)해 보니 더욱 통석(痛惜)을 느낀다. … 하루아침에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헤아렸겠는가? 오호라, 가슴 아프다.”(『인조실록』 23년 윤6월 4일)

청 세조의 숙부인 섭정왕 다이곤도 치제문에서 “어찌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도움 없이 하루아침에 꺾어 버린다는 말입니까?”라고 애도했다. 그러나 청 사신들은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에는 공개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인조실록』은 같은 날 통역관 정명수(鄭命壽)가 다른 신하들을 모두 나가게 한 후 인조와 사신 3명, 그리고 환관 두 명만 있는 자리에서 밀담을 나누었다고 전하고 있다. 사신이 나간 후 인조는 도승지 김광욱(金光煜)을 앞으로 가까이 나오게 한 후 “사신이 섭정왕의 뜻이라면서 ‘동방의 인심이 좋지 않은데, 이런 때 만일 어린 원손이 후사가 된다면 위태롭고 불안할까 염려됩니다.’고 말하기에 내가 사실대로 고했더니 사신이 다 기뻐하면서 ‘국왕께서 이미 정한 계책이 있으니 동방의 다행입니다.’고 기뻐했다.”고 설명했다. 청나라 사신들이 봉림대군을 세운 것을 ‘동방의 행복’이라고 했다는 것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신들은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봉림대군으로서는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한 셈이었다.

그래서 봉림대군은 사흘 후인 윤6월 7일 “신이 어찌 감히 재주도 덕도 없는 몸으로 갑자기 세자의 자리를 담당하여…”라는 사양 상소를 다시 올렸으나 이번에는 원손 운운하는 구절조차 빠진 완전히 형식적인 사양 상소였다.

이렇게 봉림대군은 인조의 후사가 되었으나 문제는 원손 석철이었다.
‘형의 자식을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라.’고 말했던 인조는 재위 25년(1647) 5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그러자 병조 참지 정언황(丁彦璜)이 상소를 올려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라.’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이 세 아이를 동궁에게 맡게 시키시고 빈궁(嬪宮: 세자빈)의 아들로 삼아서… 어린아이들의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하소서.”(『인조실록』 25년 5월 14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인조 19년(1641)에 부인 장씨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는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을 수는 없었다. 후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소현세자一家에 쏠린 동정론, 효종의 逆鱗 건드리다. / 강빈 신원 논란

정치는 이상만 추구할 수 없다.
현재 시비(是非)가 분명한 일도 때로는 훗날 가리는 것이 지혜일 수 있다. 강빈(姜嬪:소현세자 부인)의 옥사가 그런 일이었다. 강빈의 억울함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빈 일가의 비극 위에서 효종은 즉위할 수 있었다. 효종의 왕위를 인정한다면 강빈의 신원은 훗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산림은 즉각적인 신원을 요구했고 효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의 후손인 이개윤의 딸 의순공주의 묘.
의순공주는 청나라 섭정왕 다이곤에게 시집갔다가 다이곤이 죽은 후 귀국했다.
묘는 의정부에 있다.

효종은 원손(元孫)의 자리를 대신한 정당성을 북벌에서 찾았다.
그러나 강화조약에 군비 증강 금지 조항이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시선을 속이면서 군비를 강화해야 했다. 그러자면 표면적으로 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했다. 효종 원년(1650) 3월 청나라 사신 파흘내(巴訖乃)가 가져온 국서가 일종의 전기를 마련했다. 상처(喪妻)한 섭정왕 다이곤(多爾袞:1612~1650)이 “예부터 황제국은 번국(藩國)의 정숙한 여인을 가려 비(妃)로 삼는 전례가 있었다.”면서 “국왕의 누이나 딸, 혹은 왕의 가까운 친족이나 대신의 딸 중에 정숙하고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를 뽑아 보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명나라 때도 많은 조선 여인이 북경으로 갔다.
태종은 재위 8년(1408) 명의 성조(成祖) 영락제의 요구에 따라 5명의 반가(班家) 여인들을 북경으로 보냈는데, 고 전서(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은 명나라 현비(賢妃)가 되고, 전 전서(典書) 임첨년(任添年)의 딸은 순비(順妃)가 되었으며, 나머지도 모두 후궁이 되었다. 태종 17년에도 명 성조는 내관 황엄(黃儼)을 보내 다시 요구했고 한확(韓確)의 누이동생 한씨와 황씨를 북경으로 데려 갔다. 그때는 내심으로도 상국으로 인정하던 명나라 때였으나 황엄이 황씨 집을 방문했을 때 황씨가 화장도 하지 않고 눈물 자국이 있다는 이유로 화를 낸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외국으로 가기를 꺼렸다. 하물며 속으로 오랑캐라 업신여기는 청나라에 가기를 원하는 반가 여인은 없었다.

그때 성종의 8남 익양군(益陽君) 이회(李懷)의 후손인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이 자신의 딸을 보내겠다고 나섰다. 효종은 그 딸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높이고 오빠 이준(李浚) 등에게 벼슬을 주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청 태종의 동생인 다이곤의 초상화. 다이곤은 성년의 장조카 대신 어린 조카를 황제로 만들어 정권을 장악했는데, 조선 여인을 부인으로 삼았다.
『청사고(淸史稿)』 예충친왕(睿忠親王) 다이곤 열전에는 순치(順治) 7년(1650) 5월 “다이곤이 직접 연산(連山)까지 가 성혼(成婚)했다”고 전하는데, 연산은 현 요녕(遙寧)성 요양(遼陽)이니 북경에서 천리 밖까지 마중 나온 것이다. 의순공주가 다이곤의 왕비가 된 것은 효종에게 좋은 기회였다. 청 태조의 아들이자 태종의 동생인 다이곤은 태종 사후(1642) 태종의 장자인 35세의 호격(豪格:1609~1648)을 제치고 아홉째 아들인 여섯 살의 세조 순치제(順治帝)를 즉위시켰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다이곤은 의순공주가 청 조정에서 자리도 잡기 전인 순치 7년(1650) 12월 수렵 도중 말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로 사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듬해 정치 보복이 자행되어 다이곤은 봉호(封號)가 박탈되고 시신의 머리가 잘렸다. 그러자 이개윤은 효종 6년(1655) 동지사로 갔다가 딸의 귀환을 요청했고 청 세조는 효종 7년(1656) 4월 “과부로 저택에 살면서 부모형제와 멀리 이별하였으니 내가 측은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며 귀국을 허락했다. 효종은 “귀국한 의순공주에게 평생 쌀을 지급하라.”고 명했는데, 대간에서는 이개윤이 조정의 명령도 없이 딸의 귀환을 요청했다고 탄핵했다. 효종은 몇 차례 거부했으나 끝내 삭탈관작 할 수밖에 없었다. 비운의 의순공주는 현종 3년(1662) 8월 사망했다.

이건창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반정 초에 공신들이 회맹하면서 두 가지 밀약(密約)을 했는데 ‘국혼(國婚)을 잃지 말자.’는 것과 ‘산림을 높여 임용하자.’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국혼은 세자의 혼인을 뜻하는 것으로서 왕비는 서인 집안에서만 내겠다는 뜻이었다. 산림은 재야에서 독서하는 유학자들을 뜻하는 말인데, 쿠데타 명분이 부족했던 서인으로서는 이들의 지지가 절실했다. 효종 또한 산림의 지지가 중요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산림이 소현세자 부인 강씨의 신원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은 ‘감사 김홍욱(金弘郁) 비문[金監司弘郁碣]’을 인용해 “효종이 즉위하자 민정중(閔鼎重)이 상소를 올려 강빈의 원통함을 호소했는데 임금이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여 그 전말을 조용히 말해 주면서 “‘강(姜)의 사악한 음모는 의심할 것이 없으니 이후에 감히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의논[不道論]으로 다스리겠다.’면서 마침내 금지령을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효종은 재위 3년(1652) 5월 조강(朝講)을 마치고 신하들에게 “지난번 민정중이 역강(逆姜:강빈)의 일을 진소(陳疏)하였다. 민정중은 후진(後進)인데 어떻게 그때의 곡절을 알겠는가? … 사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민정중은 강빈 사형(1646) 때 열네 살에 불과했다.

효종은 “역강이 많은 금백(金帛)을 뿌려 두루 당원(黨援)을 맺었으므로 이에 연연하여 잊지 못하는 자가 이런 말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효종실록』 3년 5월 21일)고 공격하면서 “지금 역강을 구하려 하는 자들이 어찌 역적과 다르겠는가?”라고 퍼부었다. 『효종실록』은 이때 “여러 신하가 다 겁을 먹고 대답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심양에서 9년간 함께 고생했던 형수를 역적으로 몰아야 하는 것이 효종의 처지였다. 그 역시 강빈과 아들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덕분에 자신이 즉위할 수 있었다. 강빈을 신원하면 그 아들도 신원시켜야 했고, 효종의 왕위에 대한 정당성 시비가 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시비(是非)나 논리의 문제는 아니었다.

산림도 사육신처럼 효종의 왕위를 거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을 추대하든지, 효종의 즉위를 인정하고 먼 후왕(後王)의 신원을 기다리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산림은 효종의 즉위는 인정하면서 강빈의 옥사는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조씨의 소행으로 돌리는 절충안을 택했다. 그러나 『효종실록』의 사관(史官)이 이 기사 뒤에 “대개 임금의 뜻은 강씨의 옥사가 아무 내용이 없는 것으로 돌아가 선왕에게 누가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고 덧붙인 것처럼 ‘강빈 비극’의 원흉이 인조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효종이 강빈 옥사 언급을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이 문제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 5년(1654) 재변이 잇따르자 내외에 구언(求言)했는데 황해도 감사 김홍욱이 응지상소(應旨上疏: 임금의 구언에 응하는 상소)를 올려 이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김홍욱은 효종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을 듣고 가장 크게 의심스러운 옥사(獄事)를 풀어야 재변이 그칠 것.”이라고 간언하면서 “역적 조(趙: 후궁 조씨)는 안에서 날조하고, 역적 김자점은 밖에서 조작해 서로 모여 옥사를 일으켜 끝내는 (강빈이) 사사(賜死)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온 가문의 노소가 남김없이 주륙 당했으니 아, 참혹합니다.”(『효종실록』 5년 7월 7일)고 호소했다. 게다가 김홍욱은 “설령 그 어미가 죄가 있어도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은 원래 몰랐을 것인데, 하물며 그 어미의 죄가 그리 명백하지 않은데도 갑자기 유배시켜 끝내 애매하게 죽여 영원히 구천(九泉)에서 한을 품도록 만들었다.”면서 아들들의 문제까지 거론했다.

분개한 효종은 “상소를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면서 김홍욱을 압송해 친국했다.
영의정 김육(金堉),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등이 “성상의 덕에 손상이 될까 염려스럽다.”고 말리자 효종은 “후세에 악명이 있더라도 내가 감당할 것인데 경들이 무슨 상관인가?”라면서 형신(刑訊)을 감행했다. 김홍욱은 대신과 삼사(三司)를 부르며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옛날부터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국가가 망해 가는 것을 보겠습니다.”(『효종실록』 5년 7월 13일)”고 울부짖었다.

김홍욱은 효종 5년(1654) 7월 장사(杖死)했는데 구언에 따른 응지상소는 처벌하지 않는 관례를 깬 것이므로 큰 반발이 일었다. 전 판서 조경(趙絅)은 “대신은 광보(匡輔:보필)하는 도리를 상실했고, 대간은 입을 다무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며, 언로는 막히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고 비판했고, 부사직(副司直) 정두경(鄭斗卿)도 “김홍욱에 대한 처분이 지나쳤다.”고 비판했다. 이런 항의에 대해 효종은 “국사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憂愛之誠)을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산림을 전부 적으로 돌리면 국정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효종과 산림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국왕은 제1사대부에 불과할 뿐 임금은 명나라 황제’라고 생각하는 서인에게 언로를 막고 사대부를 죽인 효종에 대한 거부감은 커져 갔다.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정권교체보다 몇 배는 어렵다. 조선은 개국 이래 문신 우대 풍조가 뚜렷했다. 사대부는 임진·병자 양란으로 전국이 유린되고도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천한 무신은 고귀한 문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효종이 북벌 단행을 위해 무신을 양성하려 하자 문신은 갖은 방법으로 제동을 걸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청 태종과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의 심양 북릉.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효종은 북벌을 꿈꾸며 군비를 증강했으나 문신의 반발에 부닥쳤다.

말로는 북벌 외치며, 武臣 우대 발목 잡은 文臣들. / 사대부들의 저항.

‘삼전도의 치욕’ 이후 모두 북벌을 주창했지만 속내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효종과 병조판서 박서(朴筮) ? 원두표(元斗杓), 훈련대장 이완(李浣)처럼 실제 북벌을 단행하자는 쪽이었다. 다른 하나는 입으로는 북벌을 주창하지만 실제로는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반대하는 쪽이었다. 대다수 문신이 여기에 속했다. 효종은 재위 1년(1650) 6월 도승지 박서가 “근래 날마다 세 번씩이나 경연을 개최하셔서 옥체가 피곤하실까 염려되오니 하루에 한 번씩만 열도록 하소서.”라고 건의할 정도로 학문에도 뜻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즉위를 천명(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북벌이지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북벌에 매진했다.

효종은 재위 2년(1651) 8월 박서를 병조판서로 임명했다.
박서는 문관이었지만 도승지를 역임한 데다 효종의 군비 확장 계획에 대다수 문신이 반대할 때 홀로 ‘수륙군환정사목(水陸軍換定事目)’이란 군정 개혁 5개조를 내놓고 찬성했던 인물이다. 박서에게 지경연(知經筵)을 겸하게 한 이유는 경연을 북벌 논의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벌 대의에 동조하던 박서는 효종 4년(1653) 6월 급서하고 말았다. 효종실록이 “연일 과음하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적은 대로 과음에 의한 쇼크사였다. 사관은 “박서가 병조판서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몸가짐이 검소했고 군국(軍國)의 계책이 임금의 뜻에 부합했으므로 임금이 총애하고 신임했었다”고 적고 있다.

효종은 박서의 뒤를 원두표에게 맡겼다. 원두표 역시 군비 증강을 지지하는 소수 문신 중 한 명이었다. 효종은 또 이완을 어영대장에 임명해 문무를 조화시켰다. 문신 원두표에게는 북벌 기획을, 무신 이완에게는 실행을 맡기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 대의 앞에는 수많은 암초가 가로막고 있었다. 가장 큰 암초는 사대부의 숭문천무 사상이었다. 임진·병자 양란을 겪고도 이런 사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효종은 이런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 후기에 많이 배치된 화포류,
효종은 북벌을 위해 소총수 부대를 양성하고 훈련도감에 무기를 개량하도록 지시했다.

“우리나라 장수들은 이웃 나라에 견주어 부끄럽다.
문관은 문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무관은 무를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국가에서 취하는 것도 이것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문관이 무변(武弁)처럼 생기면 경시당하지만 무관이 서생(書生)처럼 생기면 용납된다.”(『효종대왕 행장』)

온 국토가 외적의 말발굽에 유린되는 참화를 겪고도 무를 경시하는 풍조는 여전했다.
효종은 “무관이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광패(狂悖)스럽다고 지목하니 풍조가 괴이하기 그지없다… 지금 세상에 서생 같은 무관이 어떻게 전진(戰陣) 사이에서 힘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문신이 아니라 무신이 군사를 지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효종은 “전시에 일개 서생들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큰 폐단이다.”고 비판했다. 무신 사령관을 문신 도체찰사가 지휘하는 군사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효종은 군사는 무장에게 맡기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밭갈이는 마땅히 남자 종에게 묻고 길쌈 일은 마땅히 여자 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문이라 이름 하였으면 독서와 강학(講學)에 힘써야 하고 무라 이름 하였으면 무예와 병법을 익히면 될 뿐이다. 무인의 길은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데 지나칠지언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 되는데, 오늘날 비국의 낭청이 슬기롭고 힘 있는 자를 뽑지 않고 단지 글자나 아는 영리한 자를 뽑다 보니 모두 서생뿐이다. 긴급하게 적을 상대할 때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풍습이 추구하는 하나의 커다란 병폐이다.”(『효종실록』 3년 5월 15일)

군사 전문가에게 군사를 맡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효종은 숭문사상에 젖은 사대부와 싸우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무장을 양성하려 했다. 특별 무과시험인 관무재(觀武才)를 실시한 게 그중 하나였다. 효종은 재위 4년(1653) 9월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를 실시하고 성적 우수자에게 지방 수령을 제수해 사기를 높이려 했다. 그러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수령은 상으로 줄 수 있는 벼슬이 아니니 다른 상을 주소서”라고 반대했다. 그래서 효종은 첨사(僉使:병마절제사)를 제수할 수밖에 없었다. 무장 양성에 좋은 제도는 영장(營將) 제도였다. 임란 때 류성룡의 주도로 양반과 노비들을 함께 배속시켜 조직했던 부대가 속오군(束伍軍)인데 지방의 몇 개 속오군을 통합 지휘하는 직책이 영장이었다. 처음에는 무장이 임명되었다가 임란이 끝난 후 지방 수령이 겸직했는데 정묘호란 때 문신 수령들이 지휘법을 몰라 기껏 기른 군사들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병조판서 박서는 효종 3년(1652) 2월 “만약 군정을 다시 밝히려 한다면 무엇보다 다시 영장을 설치해야 합니다”며 부활을 건의했다. 효종은 “경의 말이 옳다”면서 의정부에 논의시켰으나 논의만 분분할 뿐 박서가 죽을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효종 5년(1654) 2월 병조판서 원두표가 “사변은 항상 뜻하지 않은 데서 발생하니 남방의 16영(營)에 영장을 차출해 보내 군무(軍務)를 전적으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고 다시 건의했다. 이번에는 효종도 의정부에 맡기지 않고 “삼남에 먼저 차출해 보내라.”고 동의했다. 원두표가 이때 “여러 고을의 군사를 통제하는 영장이 품계가 낮고 미천하면 누가 기꺼이 명령을 따르겠습니까?”라며 높은 직급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문신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효종은 “많은 말 할 것 없다. 나이는 어리지만 기예가 있는 자들을 우선 시험적으로 써 보다가 효과가 없으면 자급(資級)을 빼앗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효종실록』5년 4월 13일)라며 고위 직급을 주라고 명령했다.

효종이 같은 해 12월 무신 유혁연(柳赫然)을 승지로 임명한 것도 무신을 우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효종실록』은 “유혁연은 무인 유형(柳珩)의 손자이고 유효걸(柳孝傑)의 아들인데, 수원부사로 있을 때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수리했는데 임금이 유능하다고 여겨 특별히 승지를 제수한 것이다.”고 적고 있다. 유혁연의 조부 유형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무반(武班) 가문이었고, 유혁연도 인조 22년(1644) 무과에 급제한 무관이었다. 또다시 사헌부에서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사헌부는 “무신으로서 승지가 된 경우는 국조(國朝) 이래 없었습니다.… 유혁연을 특별히 승지에 제수하자 여론이 모두 놀라고 해괴하게 여깁니다.”면서 명을 거둬 달라고 말했다. 여론이란 승지는 문신만이 할 수 있다는 문신의 의견일 뿐이었다.

효종은 문신의 반대를 묵살하고 유혁연의 승지 임명을 강행했다.
효종이 유혁연을 승지로 임명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유혁연은 병방(兵房)승지로서 병조에 관한 일을 전담하는 자리였다. 효종은 지방관을 파견할 때 특별히 군사관계 일은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조판서는 무신 승지 유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외교안보비서관인 셈이었다. 효종은 또 문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위군인 금군(禁軍)을 늘리고 창덕궁 후원(後苑)의 담장을 헐어 기사장(騎射場)을 만들어 주었다. 지형이 험준한 조선보다 광활한 만주와 중원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기마병을 양성하려 한 것이다.

이처럼 갖은 방법으로 무장을 양성하고 군비를 증강한 결과 재위 6년(1655) 무렵에는 상당한 병력을 갖게 되었다. 효종은 이해 9월 28일 장릉(章陵)에 참배하는 날을 조선군의 위용을 과시하는 날로 삼았다. 장릉으로 떠나면서 노량진에서 배 위에 올라 군사들이 진 친 모습을 보면서 시신(侍臣)들에게 “이런 군사와 말이 있어도 제대로 통솔을 못 하면 쓸모없는 군졸이 될 것이니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김포의 장릉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노량진에서 군사들의 훈련을 직접 참관했다.
『효종실록』은 “임금이 서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면서 시신들에게는 곧바로 남문을 따라 들어갈 것을 명했다”고 전하면서 “오랫동안 훈련을 하니 서울의 사대부가 여자들까지 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동원된 군사는 모두 1만3000여 명이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지 20여 년 만이었다. 효종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북벌에 나서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북벌 추진에 대한 문신의 반발은 작지 않았다.

‘설욕보다 기득권’ 사대부들 安民 내세워 양병론을 꺾다. / 스러진 ‘북벌의 꿈’

인조반정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었다.
국왕은 사대부 가운데 제1 사대부에 불과할 뿐 초월적 존재가 아니었다. 국왕이 아니라 사대부가 나라의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효종은 북벌을 가능한 목표로 여겼으나 사대부는 불가능한 꿈으로 여겼다. 사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였다. 북벌 추진으로 위협받던 사대부의 기득권은 효종의 급서로 계속 유지되었다.




요동벌판
효종은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경험을 통해 북벌을 가능한 목표라고 여겼으나
사대부들은 불가능한 꿈으로 여기고 반대했다.

윤휴(尹휴)의 일대기인 『백호(白湖)행장』에 따르면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윤휴는 병자호란 직후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좋은 때를 만나 벼슬을 하더라도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치욕을 북벌로 갚자는 북벌설치(北伐雪恥)의 뜻이었다. 하지만 문신들은 효종이 막상 군비를 증강하려고 하면 “백성의 생활이 피폐해진다.”며 반대했다.

효종이 재위 7년(1656) 만일에 대비해 산성 수축을 지시하자 전라감사는 상소를 올려 “험한 곳에 성을 쌓는 것은 국가를 튼튼히 하고자 하는 것인데 백성이 먼저 피폐해진다면 국가가 튼튼해질 수 없으니 산성이 국가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효종실록』7년 11월 26일)라고 반대했다. 군사를 기르는 양병(養兵)보다 백성 생활을 안정시키는 양민(養民)과 안민(安民)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이때 가장 강하게 북벌을 주창한 세력이 숭명(崇明) 의리를 당론으로 삼던 산림(山林), 즉 산당(山黨)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효종의 군비 증강 계획에 안민을 내세워 반대했다.

효종 즉위년 우의정 김육(金堉)이 양호(兩湖: 전라·충청)에 대동법 확대 실시를 주장했을 때 산당 영수 이조판서 김집(金集)과 송시열·송준길 등 양송(兩宋)이 일제히 반대했다. 대동법은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내자는 안민책인데 양반 지주의 입장에 서서 반대한 것이었다. 이때 효종은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부자)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 가난뱅이)이 원망한다는데 그 원망의 대소(大小)가 어떠한가?”(『효종실록』즉위년 11월 5일)라고 물었다. “소민의 원망이 더 큽니다.”고 대답하자 효종은 “그 대소를 참작해 시행하라.”고 사실상 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양반 사대부의 반발 때문에 효종 2년(1651)에야 겨우 충청도만 확대 실시될 수 있었다. 안민은 결국 일부 사대부의 북벌 반대 명분이자 기득권 수호 논리에 불과했다.



충북 괴산군에 있는 만동묘비.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의종을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
문신들은  명 황제의  복수를 외쳤으나  정작 북벌에는 반대했다.
그래도 효종이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재위 8년(1657) 무렵부터는 사대부의 집단 저항이 노골화되었다. 전 헌납(獻納) 윤겸(윤겸)은 “재변에 대비하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니 군사를 기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영장(營將)을 설치하는 것은 그 폐단이 만 가지나 됩니다.”(『효종실록』8년 2월 8일)고 무장 양성책을 비판했다. 사간(司諫) 이정기(李廷夔)는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수선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일로서 하지 않을 수 없으나 여러 신하는 전하께서 무예를 좋아하신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효종실록』8년 8월 23일)라고 효종의 상무(尙武)정책을 비판했다. 같은 해 송시열은 밀봉 상소인 ‘봉사(封事)’를 올려 효종에게 전면전을 선포했다.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 세월만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해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朝夕)에 다다랐습니다.”(‘정유봉사(丁酉封事)’)

‘정유봉사’는 효종의 통치 행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19개 조에 달하는 ‘정유봉사’의 핵심 역시 양병보다 양민에 힘쓰라는 것과 사대부를 우대하는 왕도(王道)를 기르라는 것이었다. 19번째 항목에서 송시열은 “주자가 처음에는 효종(남송의 효종)에게 금나라를 쳐 북벌하는 의리에 대해 극진히 말하였으나 20년 뒤에는 다시 북벌에 관해 말하지 않고…”라면서 주희(朱熹)의 사례를 들어 북벌에 반대하는 속내를 보였다. 국왕에게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수신(修身)’이라는 것이다.

효종은 “오늘날 씻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는데,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매번 내게는 수신만 권하고 있으니 이런 치욕을 씻지 않고 수신만 하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효종실록』9년 9월 1일)”고 반발했으나 산당의 협조 없이 북벌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효종은 산당과 대연정을 구성하기로 결심했다.
효종 9년(1658) 9월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인사권과 탄핵권을 쥐었으니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셈이었다. 효종 10년 1월에는 인조의 시호에 ‘조(祖)’자를 쓰는 데 반대하고 ‘종(宗)’자 사용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던 유계(兪棨)가 복귀하고 이유태(李惟泰)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는 등 산당이 대거 조정에 들어왔다.

반면 원두표·이완 등 북벌 인사들은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효종의 정치적 양보에는 조건이 있었다. 산당이 책임지고 북벌을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실제 북벌 추진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 11일 송시열과 담판을 지었다. 이른바 기해독대(己亥獨對)였다. 이 날짜 『효종실록』은 효종이 승지와 사관(史官)에게도 물러가라고 분부한 다음 “송시열 혼자 입시했는데, 바깥에 있는 신하들은 송시열이 어떤 일을 진달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 사관이 배석하지 않고 내관도 내보냈으나 독대 내용을 송시열이 ‘악대설화(幄對說話)’란 기록으로 남겼고, ‘독대설화(獨對說話)’라는 필사본도 전해져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효종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大事)를 논의하기 위함이다.”고 말했는데 현재의 대사란 물론 북벌이었다. 효종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악대설화’)

효종은 자신의 볼모 생활에 대해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 뜻이 우연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회상했다. 효종은 또 “대사를 위해 내전(內殿:왕비의 침실)에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주색을 끊은 결과 정신과 몸이 좋아져 앞으로 10년은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할 정도로 북벌에 집착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생각은 달랐다. 효종은 “신하가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듯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서 놀라니 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다.”고 한탄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자고로 제왕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修己刑家)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습니다. 여러 신하가 제 집안 살찌우는 데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면전에서 비판했다.

효종의 북벌 주장에 대한 송시열의 대안은 오직 ‘자신의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수기형가’였다. 군왕의 수신(修身)이 북벌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효종은 송시열을 버릴 수가 없었다. 효종은 “조만간 경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양전(兩銓:이조판서와 병조판서)을 겸직하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 송시열의 ‘악대설화’는 “내가 밖으로 물러나오자 임금께서 직접 중관(中官)을 다시 오라고 불렀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이날의 독대는 송시열에게 ‘더 큰 권력을 주겠지만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산당에게 준 정권을 회수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기도 했다.

송시열이 입장 정리를 위해 상황을 모색하는 동안 급변이 발생했다.
‘앞으로 10년은 보장한다.’던 효종이 독대한 지 두 달이 채 못 된 재위 10년 5월 4일 급서하고 만 것이다. 효종의 병은 귀 밑에 난 종기였는데 송시열이 5월 15일 정안숙(鄭晏叔)에게 보낸 편지에서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자 처음에는 고름이 조금 나오다가 이어서 피가 두어 말이나 나왔다.’면서 ‘아침에 침을 놓았는데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승하했다.’고 쓴 것처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급서였다.

북벌 군주의 급서에 민심이 흉흉해진 것은 이런 의외성 때문이었다.
살아서 이루지 못한 북벌의 꿈 때문인지 효종은 승하 후에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했다. 시신에 부기가 있었으며, 관이 시신보다 짧아서 널판을 덧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드디어 현종 즉위 직후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예송논쟁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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