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뻗어있다. 벚나무 밑 오르막이 시작되는 왼쪽은 저수지, 맞은편은 변산 국립공원이다. 느슨하게 걸으며 이리저리 둘러보니 소랫길 옆 밭, 대파의 고개가 수굿이 꺾여있다. 봄의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왜 그런가 싶어 가보니 땅속 알을 키우느라 후줄근히 힘이 빠진 양파다. 피와 살, 마지막 물기까지 모두 땅속으로 내려보낸 줄기가 텅 비어 구부정하다.
커다란 장작더미를 거느린 죽염 공장이 보인다. 너른 마당에 수백여 개 단지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죽염 만드는 곳에 웬 단지일까? 구운 소금으로 담근 된장, 간장, 고추장 들이다. 앞엣것들은 삐뚤삐뚤 거즈 망을 쓴 걸 보니 두어 달 전에 담은 햇간장이겠다. 중간부터는 해를 묵혀가며 익은 장이 점잖게 뚜껑을 덮은 채 정렬이 반듯하다. 귀한 죽염으로 간을 맞춘 장은 맛이 얼마나 있을까. 가까이 가니 달콤한 냄새가 나서 입안에 침이 고인다.
단지 뚜껑 위에 구멍 난 벽돌이 하나, 둘, 셋 얹혀 장 익은 햇수를 알려 준다. 먹을 수 있을 만큼 익었지만, 더 맛난 장이 되려고 햇빛과 공기를 받아 숙성 중이다. 벽돌 수를 세며 가다 보니 가끔 엎어져 있는 독들이 있다. 오랫동안 장을 담았던 단지들이라 가벼워진 몸이 바람에 넘어질까 봐 밑둥에 자갈을 한 바가지씩 얹고 있다. 그 너머 맨몸으로 엎드린 것은 주름투성이의 모양까지 찌그러졌다. 수십 년 매주와 소금물로 단 장을 익혀내 이곳저곳의 가정으로 보내느라 망가진 몸이다.
찌그러진 독 앞에 섰다. 평생 몸 바쳐 제 일을 열심히 한 단지들이다. 이제 편히 쉬어도 되련만, 옆 단지의 장이 잘 익어가나 혹시 빗물이라도 들어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이곳을 뜨지 못한다. 자식을 사회에 내보내고도 온갖 걱정으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정이 생각난다. 아들딸을 낳고 키우며 집안일을 건사하느라 자신을 챙길 겨를 없이 폭삭 늙어버린 내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신작로를 올라왔다. 벚나무를 줄 세운 길이 금방 대 빗자루로 쓸어낸 듯 깨끗하다. 쫙 뻗은 도로와 빈 들판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다. 발끝에 힘을 주고 팔을 양쪽으로 벌려 상큼한 공기를 훅 들이마셔 기분을 전환 시킨다. 아름드리 벚나무를 안아 보다가 나무 밑에 소복한 암갈색 띠 줄에 눈이 멈췄다.
한 웅큼 집어 보니 흙이나 모래 부스러기가 아닌 바싹 마른 벚꽃 잎이다. 보름 전 화사하게 피어나 연분홍 터널을 만들었다가 하늘거리는 꽃비로 내려 길바닥을 온통 하얗게 덮었던 것이다. 햇볕에 바짝 마르자 썩어 흙이 되려고 쏠려가 모였다. 마른 뭉텅이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검붉은 알이 빛난다. 손가락 길이의 대롱 끝에 맺힌 빨간 보석, 버찌다. 수백 송이의 꽃이 만들어 낸 열매까지도 마른 꽃 무더기 속에 끼어 흙으로 돌아가려 한다. 탄성이 나온다.
흙이 무엇인가. 어느 것도, 편애하지 않고 순리대로 받아드린다. 여인처럼 어머니처럼 만물을 낳고 품 안에서 키워낸다. 그러면서 기대거나 군림하거나 좌지우지하려 들지 않는다.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며 공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일이 잘되면 전부 제 덕인 줄 알아도 흙은 섭섭해하지 않는다. 생물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니 모두를 떠안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올바른 인성과 지식을 갖추려 노력한다. 꿈이 생기고 청년이 되면 그것의 달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성공을 위한 고난은 계속된다. 간혹 삶의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으리라. 세상을 다 주무를 것처럼 용맹도 내고 욕심도 부리지만 결국 돌고 돌아 한 줌의 흙이 된다는 게 허망한 듯하다. 하지만 그곳이 우리가 돌아가 쉴 수 있는 안식의 자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평화롭다.
내려오다 죽염 공장 마당의 이지러진 단지 앞에 섰다. 그렇다. 꼭 다른 단지의 장에 신경 쓰느라 여기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가는 중이겠다. 세월이 흐르면 단단하던 몸도 가루같이 바스러져 흙이 되리라. 숙성 중인 옆 단지에 비와 외풍을 막는 것은 덤이라 한다. 단지의 넉넉한 품을 공손하게 어루만져 준다.
양파 줄기와 장 단지, 벚꽃과 버찌도 시간이 지나면 부스러져 땅속으로 들어가리라. 인간도 세월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사 다그치지 말고 느긋하게 살 일이다.
첫댓글
강 작가 님은 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흙이 여인인 것처럼, 어머니 처럼 만물을 낳고 품 안에서 키워낸다.//
참으로 좋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