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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2)—[별첨]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9구간 (삼강→상주보) ① * [삼강 ←내성천]
2021년 4월 16일 (금) / 11월 18일(목)[백파 별도 답사]▶ 종친 장기덕 / 장성덕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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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화기리 ― 명문 인동 장씨 종택(仁同張氏宗宅)
낙동강 내성천, 삼강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
낙동강[三江]의 지천인 내성천(乃城川)은 길이 109.5㎞. 낙동강의 제1지류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백두대간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다가, 부석사의 낙화암천(落花巖川), 풍기-영주의 서천(西川), 예천의 한천(漢川), 문경 산양의 금천(錦川) 등 크고 작은 지류들을 받아들여, 낙동강 본류의 삼강으로 유입되는 긴 하천이다. 내성천 본류가 지나는 지역은 봉화군 봉화읍, 영주시 평은면·문수면 일대이며, 예천군 지보면과 문경시 영순면 경계에서 예천군 풍양면 삼강에 흘러든다.
내성천(乃城川) 주변의 산세과 지천
내성천 지류의 하나인 옥계천(玉溪川)은 백두대간 묘적봉(죽령의 남쪽)에서 동남으로 분기해서 내려온 '주마산 산줄기'의 동쪽에서 흐르는 지천이다. 이 산줄기는 묘적봉(1149.1m)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흰봉산 고향치(안부)를 지나 옥녀봉(890.6m) 천부산(852m), (931번 도로)을 경유, 용암산(635.5m)에서 남쪽의 주마산(550m)으로 이어져 예천군 감천면에서 내성천을 만나 그 맥을 다한다.
한편, 천부산에서 바로 남쪽으로 뻗어내려간 '자구산(757m) 산줄기'가 문토산, 매봉산(341m)을 경유, 예천읍의 동쪽에 위치한 냉정산(191m)을 지나 보문면과 호명면에 이르러 내성천을 만나 그 맥을 다한다. '주마산 줄기'의 동쪽에 ‘옥계천’이 있고, '주마산 줄기'와 '자구산(757m) 산줄기' 사이에 ‘석관천’이 흘러 내성천으로 유입되고, 자구산 산줄기'의 서쪽에서는 예천읍 한복판을 관류하는 ‘한천’이 흘러내린다. 한천은 개포면 동송리와 호명면 담암리 사이에서 내성천에 합류한다.
인동 장씨 종택, 옥계천 상류의 ‘꽃계’[花溪]
☆… 내성천(乃城川) 유역의 곳곳에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명문 세가(世家)나 유서 깊은 종택(宗宅)이 많다. 그 중에서 조선 초기에 공신(功臣)으로 책봉되어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예우를 받은 연복군 장말손(張末孫)의 인동 장씨 종택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 인동 장씨 종택은 내성천의 지류인 옥계천으로 이어지는 화계(花溪, 꽃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종택의 사랑채를 ‘화계정사(花溪精舍)’라고 한다.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花岐里)에 있다. 종택은 중앙고속도로 영주I.C 톨게이트 부근의.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다.
화기리 인동장씨 마을은, 장수면 소재지 반구(盤邱 : 일명 반두둘)에서 서남쪽으로 약 1km 남짓 되는 거리에 있다. 용암산(龍岩山)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엎드렸다 일어서기를 거듭한 산세는 동남으로 수 십리를 뻗어내려 곱게 일으킨 기산(岐山)으로 이어진다. 기산 앞자락에 자리 잡은 화기리는 동쪽으로 연화산(蓮花山), 서쪽으로 주마산(走馬山)·황구산(黃龜山)을 안대(案對)로 하며, 남쪽으로 멀찍이 학가산(鶴駕山)의 연이은 봉우리들을 늘어세우고 있다. 고택과 들녘의 논밭이 있는 마을을 둘러싼 산들은 한결같이 나지막한 야산 구릉들이다.
마을 앞으로 동서로 길게 펼쳐진 들판은 용암산에서 근원한 옥계천(玉溪川)이 들 복판을 누비며 기름진 농토를 이루고 있다.
화기리는 원래는 화계(花溪), 즉 꽃이 자라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는 조화로운 이름을 가졌었다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에 물을 뜻하는 ‘溪(계)’를 ‘岐(기)’로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문전옥답이 소담하게 펼쳐져 있고, 얼마 안 되는 거리에 고속국도가 지나가는 마을치고는 번다한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도록 야산에 둘러싸인 아늑한 종택의 터를 보면, 다시 한번 조상의 뜻을 지켜 면면히 이어온 지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 인동 장씨 종택은, 조선 중종에서 명종 연간, 1522∼1566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어진 지 400년이 넘었다. 세조 때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의 현손(玄孫)인 장언상(張彦祥, 1529∼1609년)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이후, 화기리는 후손이 번창하여 장씨(張氏)의 집성촌이 되었고 이 집이 종가(宗家)가 되었다. 1992년 11월 26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었다.
인동장씨가 영주지역에 정착한 것은 조선 중종 때 장응신(張應臣) 형제에서 비롯되었는데, 장응신은 연복군 장말손의 손자이다.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慨功臣) 2등에 책록,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퇴임 후 경기도 창동(倉洞)에 살다가, 다시 미리 보아 두었던 예천(醴泉) 화장(花莊 :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에 낙남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장말손은 당시 대학자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청백리로 유명한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등과 교류한 바 있는데, 김종직과는 사마양시 및 문과에 함께 급제하였으며, 홍귀달과는 이시애의 난을 함께 평정한 바 있다. 그래서 장말손이 예천, 즉 당시 문경 땅을 은거지로 택하여 정착하게 된 것은 문경 사람인 홍귀달과의 우의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선생이 은둔생활을 하다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임금께서는 슬퍼하시며 조시(朝市)를 폐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와 지사(地師)로 묘소 자리를 잡게 하고 안양(安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기덕 안내] * 인동 장씨 종택을 찾아 —
☆… 2021년 4월 16일 금요일, 영주 화기리의 인동 장씨 종택(宗宅)을 찾았다. 문우인 송계 장기덕(張奇德) 공의 안내를 받아 종택을 방문한 것이다. 인동 장씨 연복군 16세 장기덕은 필자와 고교 3년을 함께 지낸 벗으로, 일찍이 (주)쌍룡에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정년퇴임했다. 퇴임 후에는 ‘중국어문학’과 동양의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또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부인 아녜스와 사이에 1남 4녀, 5남매를 두었는데, 그 맏아들이 장경수 변호사이다. 장경수 변호사는 일찍이 서울 동성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사법고시(32기)에 합격하여 지금은 법무법인 ‘세종’의 변호사로 활약 중이다. 사법연수원 동기인 법무법인 ‘다산’의 김춘희 변호사와 결혼하여 아들, 딸 남매를 두었다. 나머지 딸들도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여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 맏딸 장경희는 삼성의 과장, 둘째 장경미는 공학박사이고, 셋째 장종희는 국문학 석사이며, 막내딸 장경현은 서울특별시 관리공단 부장이다. 모두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어 산다.
장기덕(張奇德)은 필자의 ‘[2020]-낙동강(洛東江) 1300리 종주’를 뜨겁게 성원하면서 낙동강의 지천인 내성천 상류에 있는 자신의 종가(宗家)를 소개했다. ‘인동 장씨 종택’이다. —
4월 16일, 봄 햇살이 맑은 날, 우리는 영동고속도로 덕평휴게소에서 만나, 영주시 장수군 화기리 종택으로 향했다. 우리는 중앙고속도로 타고 백두대간 죽령터널을 지나 영주 I.C에서 내렸다. 종택은 영주 I.C 출구를 나와 갈림길에서 예천방향으로 200m 가량 나아가면 ‘장말손유물각’ 안내판이 있다. 거기에서 좌회전하여 600여m 내려가니. 고풍스럽고도 위엄 있어 보이는 인동 장씨 종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주(장수) I.C 앞의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면 장수(면소재지)를 지나 영주(榮州) 시내로 들어간다.
☆… 화기리 종택으로 들어가는 ‘화계로(花溪路)’ 길목에 산뜻하게 단청한 열부각(烈婦閣)이 있다. 비각 속에는 ‘張烈婦孺人咸昌金氏貞烈碑’(장열부 유인 함창김씨 정렬비)가 세워져 있다. 인동 장씨 집안 선대 열부인 함창 김씨를 기리는 비석이다. 종손 장덕필 공이 가전(家傳)되어 온 「장열부유인함창김씨실기(張烈婦孺人咸昌金氏實記)」에 근거하여 이렇게 ‘열녀비’를 세우고 비각을 세운 것이다. 마을의 들머리에 세운 장씨 가문의 자랑이다. 다음은 열녀비 비문의 내용이다.
‘張烈婦孺人咸昌金氏貞烈碑’ ― 원문
求忠臣於孝門하고 見烈夫於法家라. 근세 장수면 화계에 閨行이 卓異한 열부가 있었으니 仁同張氏 延福君 後裔인 張彛德의 妻요 咸昌 金氏 西峴公의 後孫인 成洛의 따님이다. 孺人은 어려서부터 法家에서 생장하여 閨行凡節이 뛰어났는데, 나이 十四歲에 花溪에 出家하여 媤父母를 孝道로 섬기고 남편을 禮儀로서 받들어 온 가문이 칭찬했는데, 불행하게도 5년만에 우연히 얻은 男便이 病이 危篤하여 백방으로 구료했으나 마침내 回蘇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治喪凡節을 모두 손수 챙겨서 남편의 장례가 끝나던 날, 決然히 뒤를 따르고자 했으나 시부모의 측은한 깨우침으로 그럭저럭 연명하면서 시부모 봉양에 힘쓰고 남편의 상기가 끝남을 기다렸으나 烈婦의 기색은 숨기기 어려워서 한 가문의 檢防이 엄하여서 침실에서 殉從하기가 어려웠는데 때마침 그때 시부모는 친정에 보내면 烈婦의 마음을 溫柔하게 될까 생각하고 근친을 시키니 열부는 三年喪의 세월이 지리함이 진실로 괴로웠으나 차마 시부모님의 目前에서 慘酷한 변을 다시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親堂父母의 슬하에서 自盡함이 도리라 여기고 하루는 주찬을 갖추어서 시부모님께 보내어 마지막 婦道를 다하고는 夫와 合窆하라 유서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從容히 取義했으니 곧 己未年 三月 二十二日이었다. 아아! 애통하도다! 순절의 소식이 들리던 날 영천고을 士林에서는 紹修書院에 모여서 綱常을 扶植한 이 節行은 세상에 闡行해야 한다 하여 도내의 각 고을에 通文을 보내니 사방에서 감동했고 伊山書院, 陶山書院 및 三溪書院에서도 동성으로 表揚해야 한다고 거론했으나 宗廟社稷이 없는 세상에서 호소할 길이 없었다. 시댁으로 返柩하던 날에는 원근에 사람들이 沿道에 나와 落淚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醴泉郡 甘泉面 甫洞의 先塋 階下에 夫君과 合葬했고 後嗣는 없었다. 그 懿行卓節은 세상 人口에 膾炙되다가 倫綱이 衰微해진 세상에 오래 전하지 못하고 다만 《張烈婦孺人咸昌金氏實記》 한 권이 士林에 애송되어 있었는데 烈婦가 殉節한지 九十一年만에 仁同張氏 延福君 宗孫인 德必甫가 그 節行을 세상에 湮滅하게 할 수 없다고 없다 생각하고 關係 要路에 건의하여 市 예산 지원을 받고 私財의 땅을 喜捨하여 張烈婦貞節碑를 세우게 되었다. (中略) … 살아서 婦道를 다하고 죽어선 貞節을 다했으니 倫理가 衰微해진 세상에 綱常을 扶植했다.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汾江의 언덕 위에는 烈婦가 고이 잠든 四尺封墳이로다. 학가산 영봉을 바라보는 岐山 花溪에 烈婦의 아름다운 行義을 돌에 새겨서 길이 무궁토록 後世에 전하니 이 비석이 風雨磨滅되지 않는 한 아름다운 향기 千秋萬歲에 빛나리라. 庚寅年 六月 宋鴻俊 짓고 張德必 쓰다.
인동 장씨 종택(仁洞張氏宗宅)
☆… 낮 12시 54분, 종택의 ‘솟을대문’ 앞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종손(宗孫) 장덕필(張德必) 공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고절하신 선친(先親) 송운(松雲) 장사식(張師植) 공에 이어 종손이 된 덕필 공은, 인동 장씨 종중을 대표하여 고명하신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전통제례와 종가 안팎의 대소사를 꾸려가는 것은 물론, 세전(世傳)의 귀한 유물들을 성심으로 지켜나가고 있다. 일찍이 별정우체국장으로 공직을 수행하면서 평소 서도(書道)에 정진하는 서예가(書藝家)이기도 하다. 특히 공(公)은 중시조인 적개공신인 연복군 장말손(張末孫) 공과 그 후손이 남기신 문화재 유물을 보존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수많은 유물 중에는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한 5종 25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유물은 가문의 보물이기도 하지만 국가적인 중요문화재이다. 공(公)은 10여 년 전 종택 안에 별도로 ‘유물관’을 지어 유물과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
인동 장씨 종택의 솟을대문은 기와를 얹은 토석(土石) 담장의 한 가운데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본채로 들어가는 긴 문간채가 있는데, 거기에 안채로 들어가는 2개의 문이 보인다. 중문과 우문이다. 그 좌측으로 다락 형태의 사랑채가 이어져 있다. 그리고 사랑채-본채의 좌측 뒤쪽 산록에 안양공 장말손의 신주(神主)를 모신 ‘불천위(不遷位) 사당(祠堂)’이 있고, 우측 뒤쪽의 산록에는 안양공 장말손의 영정(影幀)을 모신 ‘영정각(影幀)’이 있다. 종택(宗宅)의 전체 구조는 사랑채와 문간채가 안채와 함께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어진 듯 각각 독립된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랑채’는 안채와 이어져 있는 듯하나 구조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다락집이다.
▶ 여기 화기리 인동 장씨 종택은 처음 지어질 때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그 구조가 독특하다는 점에서 조선 고가(古家) 연구에 귀중한 민속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은 지 400여 년이 넘은 지금에도 원형이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으며, 실제 종손(宗孫)의 가족이 거처하는 살아있는 가옥이다.
화계정사(花溪精舍), 종택의 사랑채
☆… 종손(宗孫)인 연복군 16세 장덕필(張德必) 공의 영접을 받아 누정(다락집) 형태의 사랑채에 올랐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6칸 중 방이 2칸이고, 나머지는 마루이다. 다락의 마루에 오르면 오른 쪽 위에 고서체의 ‘花溪精舍’(화계정사) 현판이 걸려있고, ‘追遠齋’(추원재)와 ‘追遠齋記’(추원재기) 현판도 나란히 걸려 있다. 그리고 지금의 장덕필(張德必) 공이 거쳐하는 사랑채 우측의 방문 위에도 굵은 초서로 쓴 ‘花溪精舍’(화계정사) 현판이 걸려 있다. 필체가 장중하고 유연하여 거침이 없다.
화계정사에 걸린 시판(詩板)
☆… 그리고 마루 정면 위에 세 점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는데, 세조-성종 연간에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사림(士林)의 종사가 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 성종 때 좌참찬을 지낸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의 시, 중종(中宗) 때 사림을 대표하여 국정을 개혁하고자 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7언 율시이다. —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른 이후 최대의 변란인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된 장말손(張末孫)에게 평소 친교를 나눈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 보낸 시편들이다. 김종직(1431~1492)은 장말손(1431~1486년)과 나이도 같고 과거도 같이 치렀다. 김종직, 홍귀달(1438~1504년)은 장말손과 친밀한 사이이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각각 당시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김종직(金宗直)과 홍귀달(洪貴達)의 시(詩)가 그렇게 하여 화계정사에 전해져 온 것이다. 정암(靜庵) 조광조의 시는 날렵한 흘림체 글씨어서 필자가 단번에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가 있었다. 먼저 김종직의 시를 본다. (필자 졸역)
金甲貂裘遊子情 금갑초구유자정 황금 갑옷과 담비 갖옷을 입은 나그네의 정(情)이
蕭蕭落木響邊城 소소낙목향변성 쓸쓸히 낙엽 지는 날, 변방의 성(城)에 울리누나
詩書從事詩書將 시서종사시서장 시서(詩書)에 종사한 선비가 장수(將帥)가 되니
喜見妖氛塞外淸 희견요분색외청 요기(妖氣)가 변방에서 일소(一掃)됨을 기쁘게 보노라
▶ 김종직이 장말손에게 보낸 시(詩)이다. 장말손은 이시애의 난(亂)을 평정하기 위해 갑옷을 갖추어 입었지만, 본래 시문(詩文)에 능한 선비이다. 때는 낙엽이 지는 가을날, 시인이 장수(將帥)가 되어 변방의 성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 후, 선비 장수 장말손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종직은 ‘장말손의 시정(詩情)이 적(반란군)의 요기(妖氣)를 일소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조선 세조 때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계온, 효관,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며 세종 28년 과거에 응시, 「백룡부」를 지어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하였지만, 단종 1년 태학에 들어가 『주역』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해 동료들의 경복을 받고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상관에 임명됐으며 이후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466년(세조 11년) 경상도병영 막부에 있으면서 병마평사로서 절도사 진례군을 수행하여 다인현에 다녀왔고, 7월에‘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의 공문을 가지고 병력을 모집, 선발하기 위해 영해부에 다녀왔다. 1467년 이시애의 난 진압 병력 모병 일을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제자들과 함께 사림파를 형성해 훈구파와 대립했다.
당대 정여창, 최부(崔溥),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楚) 회왕(懷王)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다.
유자광은 종 출신의 서자로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이후 예종, 성종, 연산군 때까지 요직을 지냈다. 유자광은 남이(南怡)가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죽인 일이 있는데(남이의 옥사) 그로 인해 김종직은 유자광을 혐오하고 경멸하였다. 함양 학사루 사건과 그의 제자에게 무안당한 유자광은 이후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유자광은 선비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당하자, 이극돈, 임사홍 등과 손잡고 선비들을 몰살 시켰던 것이다. 무오사화이다.
연산군 4년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수록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돼 부관참시 당했다. 이 사건이 무오사화로 이어져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사림파의 학문은 무오사화·갑자사화로 한때 침체했다가, 김굉필에게서 배운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에 이르러서 크게 융성했다. 밀양 예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함양 백연서원, 김천 경렴서원, 개령 덕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 화계정사 걸린 또 하나의 시판은 홍귀달(洪貴達)의 절구이다. 홍귀달은 장말손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함께 평정했다.
聞君笑談能却賊 문군소담능각적 듣건대, 소담 잘하는 임[君]이 능히 적을 물리치고
轅門一夜無傳檄 원문일야무전격 영문(營門)의 하룻밤, 전해지는 격문도 없었다.
漁樵不敢近城地 어초불감근성지 민초는 감히 성지(城地)에 가까이 갈 수 없는데
醉草靑天問月詩 취초청천문월시 초야에 취하여 청천에 달을 묻는 시를 읊조린다
(필자 졸역)
▶ 장말손보다 일곱 살 아래인 허백당 홍귀달(1438년~1504년)이 변란을 평정한 장말손을 칭송하여 쓴 시(詩)이다. 평소 선비들이 모인 자리에서 농담을 잘하여 좌중을 즐겁게 하는 장말손이 그 소담과 격문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보통 사람이야 살벌한 전장에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데, 강말손이 크게 공을 이루었으니 소식을 들은 홍귀달은 기쁘기 한이 없다. 그래서 ‘청천에 달을 노래하는 시’를 쓴다고 표현한 것이다. ‘靑天問月詩’는 시선 이태백의 시를 말한다. * (시판에는 ‘魚樵’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 그런데 화계정사에 걸린 허백당 홍귀달의 시편 외에 허백당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는, 장말손에게 보내는 또 다른 칠언시가 있다고 했다. 허백당 가문으로부터 정중히 시(詩)를 구하여 읽어보았다.
細柳營門又一年 세류영문우일년 영문(營門) 앞 가는 버들 또 한 해를 맞았는데
長安日暮樹連天 장안일모수연천 장안에 지는 해, 나무는 하늘에 닿았네
箇中無限相思意 개중무한상사의 그 가운데 무한한 것은 그리운 마음인데
一尺溪藤不盡傳 일척계등부진전 한 자의 계등(溪藤)은 전해지지 않는구나
계등(溪藤)은 ‘등나무 속껍질로 만든 종이’인데 여기서는 ‘홍귀달이 장말손에게 보내는 그리움의 편지’이다. 변란이 일어난 지 한 해가 지나고 있는 세모(歲暮), 멀리 변란을 평정하러간 장말손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이다. 시의 내용으로 보면, 화계정사에 걸린 시의 전편(前篇)에 해당한다.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홍귀달(洪貴達, 1438년(세종 20)~1504년(연산군 10))은 본관은 부림(缶林).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이다. 1460년(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에 등용, 예문관봉교로 승직하였다. 1466년 설서가 되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조정랑에 승직하면서 예문관응교를 겸하였다. 1469년(예종 1) 교리가 되었다가 장령이 되니 조정의 글이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사예가 되었을 때 외직인 영천군수로 전출하게 되자, 그의 글재주를 아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홍문관전한과 예문관전한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직제학·동부승지를 거쳐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도승지로 복직했으나,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왕비에서 일반인으로 폐하고 쫓아내는 모의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1483년『국조오례의주(國朝五禮儀註)』를 개정하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대제학·대사헌·우참찬·이조판서·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따라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역대명감(歷代名鑑)』을 편찬하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杖刑)을 받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강직해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모두들 몸을 조심하라 했으나, 태연히 말하기를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 억울함을 풀어버림)되었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의흥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 화계정사 대청마루에 조광조의 시판이 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시는 칠언절구(七言絶句) 2수로 구성된 아주 활달하고 기찬 흘림체이다. 시서(詩書)엔 능한 명사의 도움을 받아 글자를 판독하고,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다.
蕭灑衡門洛水頭 소쇄형문낙수두 낙동강 상류의 깨끗한 은자(隱者)의 집
天敎佳士抱窮愁 천교가사포궁수 하늘이 훌륭한 선비로 나라 근심을 안게 하였네
十年蘊櫝須高價 십년온독수고가 십년의 온독(蘊櫝)이 반드시 (이름) 값을 높이니
何日方膺側席求 하일방응측석구 어느 날에야 반듯한 마음, 어진님이 구하리요
平生伎倆路歧頭 평생기량로기두 평생의 기량(技倆)이 갈림길 머리에 있는데
白首窮途謾抱愁 백수궁도만포수 늘그막 궁벽한 길, 말도 많은 (나라)근심 안았네
上帝聦明元自我 상제총명원자아 하느님이 총명하시어 나[自我]를 으뜸으로 하셨지
向來名利不曾求 향래명리불증구 이때까지 일찍이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으셨네
趙光祖 조광조 (필자 졸역)
▶ 장말손(1431~1486년)보다 50여 년 아래인 중종 때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연복군의 장자인 교리 맹우(孟羽)에게 보낸 시이다. 장말손의 높은 학문과 청절하고 고매한 인품을 칭송하면서, 스스로 나라를 근심하여 변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자신의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고 추모하고 있다. 정암이 연복군의 후손에게 전한 시이다.
인동 장씨 안양공파 종손 장덕필(張德必)
☆… ‘花溪精舍’ 초서 현판 아래의 낮은 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가서, 연복군 16세 같은 항렬인 송계(松溪) 장기덕, 종손 장덕필 공 그리고 필자 등 세 사람이 다담상(茶啖床)을 마주하여 좌정했다. 방안의 문 위에는 ‘百世淸風’(백세청풍) 액자가 걸려 있다. 액자의 우측 상단에 ‘讚松雪軒先生 遺蔭積德’(찬송설헌선생 유음적덕), 좌측 하단에 ‘己巳處暑 丹陽人禹相洪’(기사처서 단양인우상홍)이라 썼다. ‘松雪軒’(송설헌)은 연복군 장말손 공의 아호이다. ‘百世淸風’은 송설헌 공이 끼치신 음덕을 기리며 공(公)으로부터 시작된 화기리 종택의 청절한 가풍이 만고에 이어지기를 찬(讚)하는 내용이다. 기사년 처서 단양인 우상홍(禹相洪)이 쓴 것이다.
그리고 방안 출입문 가장 자리 벽면에 날렵한 흘림체의 ‘功到及泉無棄井’(공도급천무기정)이라고 쓴 세로 액자가 걸려 있다, 우측 상단에서 ‘退溪先生詩一則書爲’이라고 쓰고 좌측 하단에 ‘張德必世友法家正 辛未春三餘齋主人’이라 썼다. 삼여재(三餘齋)는 이름난 서예가 의성인 김태균 선생으로, 종가(宗家)를 올바르게 경영하는 화계종택의 장덕필 공의 공력(功力)을 칭송하여, 퇴계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덕담을 한 작품이다. ‘공력이 땅 속으로 스며, 버린 우물이 없다,(功到及泉無棄井)’고 한 것이다.
▶ 액자에서 인용한 시구의 원시(原詩)를 구하였더니 삼여재(三餘齋) 선생이 친절하게 밝혀 주었다. 「贈韓上舍士炯」이다.
常愧吾行米透關 상괴오행미투관 내 걸음 관문을 못나가 부끄러워하였더니
指南欣得子相扳 지남흔득자상반 기뻐라 그대 만나 지남침을 얻었노라
望中巇險聊宜戒 망중희험료의계 눈앞의 험한 곳은 애오라지 경계하고
俗裏韜藏詎是孱 속리도장거시잔 티끌 속에 몸 숨김이 이 어찌 작은 일인가
功到及泉無棄井 공도급천무기정 공덕이 땅에 스며 버린 우물이 없거니와
事同攻玉籍他山 사동공옥적타산 옥(玉)을 가는 공부는 타산의 돌을 써야 하네
會須黙契環中意 회수묵계환중의 한 둘레 그 속뜻을 말없이 맞추어서
長占人間分外閒 장점인간분외한 세속 밖의 한가함을 길이 지녀 보려 하네
이 시는 퇴계(退溪)가 ‘한사형(韓士炯)’의 학문과 인품을 칭송하여 쓴 시(贈韓上舍士炯)이다. 시제(詩題)에 나오는 ‘韓上舍士炯’은 조선 명종(明宗) 때의 문신 한윤명(韓胤明) (1526~1567)을 말한다. 한윤명은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자가 사형(士炯)이며 호가 형암(炯菴)이다.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이이(李珥)ㆍ박광전(朴光前)과 교유하였다. 타고난 자질(資質)이 아름답고 조예(造詣)가 고명(高明)하였으므로 추천을 받아 왕손(王孫, 선조의 세자 시절) 사부(師傅)가 되었다. 명종(明宗) 22년(1567)에 세상(世上)을 떠났는데 율곡(栗谷)이 글을 지어 제사(祭祀)를 지냈다.
▶ 이항(李恒, 1499~1576년)은 한윤명의 스승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호남성리학의 문을 연 대학자이다. 본관은 성주.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이다. 박영(朴英)의 문인으로, 30세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도봉산 망월암에서 수년 간 독학한 뒤 태인(泰仁)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봉양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선조 초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1574년 사헌부장령, 장악원정을 지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1576년(선조 9년) 졸하였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사후 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태인 남고서원(南皐書院)에 제향되었다. 기대승(奇大升)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5학(五學)의 한 사람으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일재집〉이 있다.
▶ [일재 이항의 학문세계] ― 1558년(명종 13) 당시 대학자인 김인후(金麟厚), 노수신(盧守愼), 기대승(奇大升) 등과 서한을 통하여 ≪태극도설(太極圖說)≫ 학문을 논하며, 이(理)와 기(氣),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은 일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기이원(理氣二元) 그대로가 곧 일물(一物)이라 하면서 이기(理氣)는 비록 이물(二物)이나 그 체(體)는 하나라고 했다. 즉 양의(兩儀)는 본래 태극 안에 있고 태극이 양의를 낳은 후에는 태극의 이가 역시 양의 안에 있다고 했다. 천인(天人)이 일리(一理)이니 사람의 지각운동(知覺運動)·강약청탁(强弱淸濁)의 기(氣)가 일신(一身)에 충만한 것은 음양의 기이고,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기 안에 갖추어진 것이 태극의 이(理)인 것과 같이 이와 기는 마땅히 일신 안에 있으므로 이물(二物)이 아니라고 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이에 대해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 하였다. 1559년(명종 14) 이항이 도기지분(道器之分)인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한 글을 고봉을 통해 보내자, 김인후는 기군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은 아니나,『대개 이와 기는 혼합하여,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다 그 속으로부터 나와서 각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을 떠났다고 일러서는 아니 되겠지만, 그러나 도기의 나눠짐이 한계가 없지 못할진대 태극과 음양은 아무래도 일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며, 주자는 말하되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이 사람이 말을 탄 것과 같은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이와 기의 관계를 하나로 본다면 도(道)와 기(器)의 한계가 없어 결국 '도즉기'(道則器), '기즉도'(器則道)라고 보는 편견에 빠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덕필 공과의 대화 그리고 본채 둘러보기
종손인 장덕필(張德必, 1948년생) 공은 나의 친구 장기덕과 같은 항렬(行列)의 동갑으로 생일로 아래이지만 집안의 종손으로서 예우를 받고, 덕필 공(公) 또한 장기덕을 집안의 형님으로 공경한다. 덕필 공은 종택의 유래, 인동 장씨 종가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가풍, 그리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에 관한 이야기, 종가를 지키면서 겪은 갖가지 우여곡절 등 저간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장장 400여 년 동안 이어져온 종택과 수많은 유산을 온전히 보존하고 가문의 위상과 법도를 지켜나가는 일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늘 겸허하면서도 가문의 정통성을 엄정하게 지키기 위해 남다른 정성을 기울여 왔다. 특히 인동 장씨 종택에는 유난히 귀한 유물과 문화재가 많다. 이 유물들을 보존해 나가는 일은 한 가문의 문제만이 아닌 것이다.
종택의 본채 ― 안채 둘러보기
☆… 화계정사 사랑방에서 환담(歡談)을 나누고 나서 덕필 공은, 종택의 본채를 비롯한 집안을 안내하여 두루 살펴보게 해 주었다. 종택의 안채는 사랑채 우측의 중문(中門)을 통해서 들어간다. 중문을 통하여 안채로 들어가니 본채의 가운데는 전체가 하나의 대청마루이고 마루의 좌측에 방 2칸, 우측은 안방과 부엌칸이 있는데 문간채와 이어져 ㅁ자 안마당을 이루었다. 대청은 3칸으로, 그 좌측에 큰방과 부엌이 있고 우측에는 상방, 부엌, 고방 등의 기능으로 분할되어 있다. 대청에는 두 개의 큰 문(門)이 있어 뒤란과 그대로 통한다. 대청의 상단 실강에는 여러 점의 소반들이 정렬되어 있고 대청의 구석 가장자리에는 정갈한 나무장이 있는데, 제사(祭祀) 때 쓰는 유기(鍮器)를 보관하고 있다.
대청의 좌측 방 옆에 세로 족자가 걸려 있다. “偉大한 祖上을 모셔야 子孫이 빛나고 훌륭한 子孫을 길러야 祖上을 나타낸다” — 연복군 장말손 선생 유물각 개관을 기념하여 후학 ‘權五杰’(권오걸)이 ‘謹書’(근서)한 것이다. 그리고 ‘麒麟呈祥’(기린정상)이라는 가로 액자도 걸려 있다. ‘己酉新春 權昌倫’(기해신춘 권창륜)이 쓴 것이다. 사랑채의 안쪽 벽면에는 세로 액자 ‘松鶴圖’(송학도)가 걸려 있는데 우측상단의 제발에 ‘松心鶴性淸如水’(송심학성청여수), 좌측 하단에 ‘己丑夏 文町’(기축하 문정)이라 썼다. ‘문정(文町)’은 장덕필 공의 부인, 종부 박후자(朴後子) 여사의 아호이다. 부인이 그린 방문 앞 봉당에 기왓장에 난초도, 화초도 등 여러 점을 세워놓았다. 부군 덕필(德必) 공은 서예가이고 부인은 한국화를 그리시니, 두 분이 모두 명문(名門) 종택의 주인답게 고절한 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별채 둘러보기
☆… 사랑채와 문간채 사이에 바깥마당으로 나가는 중문(中門)이 있고 본채의 부엌칸과 문간채 사이에는 협문(夾門)이 있어 별채로 통한다. ‘별채’는 연장된 문간채에 두 칸의 방이 ㄱ자 형태로 이루고 있다. 사랑채 ‘화계정사’가 외빈(外賓)을 맞거나 종중의 회합 장소로 쓰이는 곳이라면, 본채의 안쪽에 있는 별채의 두 방은 미헌 공이 독서하고 수양하며, 글씨를 쓰는 서실(書室)이면서 종사(宗事)를 보는 곳이다.
두 칸의 방문 중 좌측방 상단에 ‘見賢思齋’(견현사재)라 쓴 가로액자[堂號]가 걸려 있는데 ‘壬午初春 張德必書’라 썼다. 그 옆방 위에도 ‘三省吾身’(삼성오신)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미헌 장덕필 공이 쓴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증자의 말씀이다. ‘未軒’(미헌)은 장덕필 공의 아호이다. 반듯하고 기운이 힘찬 해서(楷書)가 석봉(石蜂)의 글씨를 연상하게 한다. 미헌 공은 별채 ‘遺物閣’(유물각)의 현판도 손수 썼고 2019년에 제막한 ‘延福君松雪軒張先生遺墟碑’(연복군 송설헌 장선생 유허비) 비문도 썼다고 했다. 별채(문간채)에도 바깥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데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사당(祠堂)과 영정각(影幀閣)
☆… 종택의 뒤쪽 언덕배기에 안양공 장말손(張末孫) 공의 * 불천위(不遷位) 위패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있다. 직선의 계단으로 올라간다. 담장이 둘러쳐진 사당은 3칸 맞배지붕인데 전면에 퇴칸을 두고 내부는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오른쪽 언덕에는 1984년에 건립한 영정각(影幀閣)이 있는데,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 [불천위(不遷位)] ☞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준말이다. 불천위란 국가에 큰 공이 있거나 학덕이 높은 학자를 나라에서 정하여 4대 봉사 후 신주를 조매(祧埋, 땅에 묻음)하지 않고 계속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천위(不遷位)를 두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고도 부른다.
인동 장씨(仁洞張氏)
화기리 인동 장씨의 1세조 — 직제학(直提學) 장계(張桂)
인동 장씨(仁洞張氏)는 고려조 집현전 직제학(集賢殿)을 지낸 장계(張桂)를 시조로 한다, 충렬왕 31년(1305년) 국자진사(國子進士)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에 등과하여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장말손의 6대조이다. 인동현(仁同縣) 발영전(拔英田)에 전거(奠居)하였다. 인동(仁同)은 지금 경상북도 구미시 낙동강 동편에 있다. 그런데 장계(張桂) 이후 그의 가계(家系)는 문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 초에 동정공, 주부공, 안양공, 부사공, 판관공 등 5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임지(任地)에 따라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榮州) 화기리 안양공(安襄公), 예천(醴泉), 문경(聞慶)과 충청북도(忠淸北道) 단양 지역(丹陽地域)으로 옮겨 살았다.
후손들이 편찬한 『송설헌실기(松雪軒實記)』에 의하면, 장말손의 5대조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낸 장비(張備)이며, 고조는 행수별장(行守別將)을 지낸 장원우(張元祐), 증조는 삼사우윤(三司右尹) 및 지가주군사(知嘉州郡事)를 지낸 장전(張戩)이었는데, 이들의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부 장천서(張天叙)는 고려 말 문하부(門下府)의 급사중(給事中)을 지낸 분으로, 장말손의 공적에 힘입어 사후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홍산 현감(鴻山縣監)을 지낸 아버지 장안량(張安良) 역시 장말손으로 인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고 옥산군(玉山郡)에 봉해졌다. 어머니 단양 지씨는 부사(府使) 지을성(池乙成)의 딸이다.
6세 옥산군 장안량(張安良)은 세 분의 아들을 두었다. 장자가 동정공(同正公) 선손(善孫)이며, 차자가 주부공(主簿公) 경손(敬孫)이고, 제3자가 안양공(安襄公) 장말손(張末孫)이다..
중시조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
▶ 장말손(張末孫, 1431~1486) 공은 1431년(세종13) 칠곡군 석적면 발영전에서 출생했다. 자는 경윤(景胤)이며 호는 송설헌(松雪軒)이다. 1431년(세종 13) 태어난 장말손(張末孫)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안색과 풍모로 인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6세 무렵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11세에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에 능통하였다.
15세인 1445년(세종 27) 군학(郡學)에 입학한 뒤로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배웠는데, 이때에도 문장의 암송에 치중하던 다른 학생들과 달리, 글의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그곳의 선생들로부터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1447년(세종 29) 17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 지씨(池氏)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장성한 사람처럼 정성을 당해 상을 치러 효자라는 소문이 인근에 널리 퍼졌다.
22세가 되던 1452년(문종 2)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453년(단종 1)에는 생원·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그리고 1459년(세조 5) 또다시 김종직과 함께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관료로 활동하게 되었다. 35세(1465) 함길도병마도사·북평사, 36세에는 야인의 침노를 격문(檄文)과 담소(談笑)로 물리쳤다. 11월 조정으로 돌아오니 임금께서 공(公)에게 패도(佩刀, 보물 881호)를 하사했다.
37세 예조좌랑 겸 예문관응교에 오르고 세조 13년(1467)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이 일어나자 3개월간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을 따라 난(亂)을 평정하였다. 그 공(功)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봉되었고, 내섬시첨정에 승진되었다. 39세 ‘공신회맹록’과 ‘교서’가 내려졌다. 성종 원년(1470) 장악원부정(掌樂院副正)을 거쳐 41세 장악원정·절충위부사직에, 43세 첨지중추부사, 46세 공조참의와 예조참의를 거쳐 6월 예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에 올랐다. 그해 가을 왕명으로 장말손 영정(보물 502호)을 그리게 하였다.
1482년(52세) 봄에 벼슬을 사임하고 예천 화장으로 낙남(落南)하여 송설헌(松雪軒)을 짓고 유유자적했다. 성종13년(1482) 53세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졌다. 1486년 향년 56세로 서거(逝去)했다.
왕(王)이 부음을 듣고 예관을 보내고 국사(國師)로 하여금 예천 호명에 산소를 정하여 예장했다. 그해 가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춘추관성균관사, 세자시강원찬선에 증직되면서 안양(安襄)이란 시호를 받았다. 1489년 성종임금이 영정(影幀)을 내리고 불천위(不遷位)를 명했다.
장말손의 부인은 영남의 거성(巨姓)인 안동 권씨 출신으로,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중화(權仲和)의 증손녀이자 권영신(權永愼)의 딸이다. 자식으로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홍문관 교리를 지낸 장맹우(張孟羽)이며, 2남은 선략장군(宣畧將軍) 장중우(張仲羽)이며, 두 딸은 호군(護軍) 박인량(朴寅亮) 및 진사 이정수(李廷樹)와 혼인하였다.
연복군 장말손 가계(家系)와 그 후손(요약)
· 7세 장말손(張末孫, 1431~1486년) (安襄公 丙坐 무기)— 8세 ①孟羽 ②仲羽(선락장군)
· 8세 장맹우(張孟羽, 1470~1511년) 장말손의 아들, 사마시 문과 급제, 교리·황해도 도사
9세 張應臣(생원)- 10세 胤禧 順禧 壽禧
9세 張應弼(부위)- 10세 永禧 世禧 錫禧
· 9세 장응신(張應臣, 1490~1554년) 교리 장맹우 아들, 생원시 입격
10 ① 張胤禧(부사직)- 11세 彦祥(충좌위대호군) 彦禎(호군) 彦祺(부사용)
10 ② 張順禧------ 11세 彦補(호군) 彦裕
10 ③ 張壽禧(어해장군)- 11세 汝興(딸) 汝埴 汝弘 汝起 汝會(양자) 汝華(진사 性品剛直)
* 10세 장수희(張壽禧, 1516~1586년) 생원 장응신(張應臣) 아들, 퇴계(退溪)의 문인(門人)
10세 ① 張永禧------ 11세 繼漢
10세 ② 張世禧(장사랑남부참봉무기)--
11세 張汝翰(양자) 汝翎(무후) 汝翮 汝業 汝宏 汝原 汝宣
10세 ③ 錫禧(부위)--- 11세 汝翊 汝翔
· 11세 ① 張彦祥(충좌위대호군) : 화기리 인동 장씨 ‘종택(宗宅)’ 건립, 12세 繼勳, 世勳
② 張彦禎(호군) --- 12세 慶勳
③ 張彦祺(부사용) - 12세 繼先
☆… 요컨대, 화기리 인동 장씨의 시조(始祖)는 직제학 장계(張桂) 공이다. — ‘안양공파(安襄公派)’는 7세 연복군 장말손을 중시조(中始祖)로 한다. 그리고 안양공파의 후예(後裔)는 8세 맹우(孟羽, 교리)— 9세 응신(應臣, 생원)— 10세 윤희(胤禧, 부사직)로 이어지고, 11세 충자위대호군을 지낸 장언상(張彦祥)인데, 지금의 인동 장씨 화기리 종택(宗澤)은 지은 장본인이다. 종택은 12세 소정공(素貞公) 계훈(繼勳)이 승계하여, ‘소정공 계훈지파'가 되었다. 이후 13세 주남(柱南)— 14세 전윤(典允)— 15세 이룡(以龍)— 16세 태연(泰延)— 17세 지옥(之玉)— 18세 종구(宗矩)— 19세 천진(天鎭, 高祖)— 20세 복안(復顔, 曾祖)— 21세 석문(奭文)— 22세 송운(松雲) 장사식(張師植)으로 대를 이어왔다. 그렇게 인동 장씨 안양공파 종손(宗孫)이 400여 년 간 이 종택에서 세거하고 있는 것이다.
▶ 연복군의 장자 장맹우(張孟羽) 교리공(校理公)은 23세 진사에 합격하고 40세에 문과에 급제 1509년 형조정랑과 황해도사를 지냈고, 차자 장중우(張仲羽)는 선략장군을 지냈다. 교리공의 장자 장응신(張應臣)은 생원, 차자 장응필(張應弼)은 적순부위를 지냈다. 장응신은 인동 장씨 영주 이곳 화기리 입향조로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문하에 있다가 사위가 되었고 퇴계 선생의 처 이모부가 되었다.
장응신(張應臣)은 30세에 돌아가시며 유언하기를, 당시 13세인 맏아들 윤희(胤禧)에게 ‘큰조상을 모셔야 하니, 벼슬하지 말고 벼슬 높은 집안과 혼인하지 말며, 부잣집하고 혼인하지 말라’는 고 하시며 ‘조용히 조상을 극진히 모시고 자손을 보존할 수 있는 터를 찾아서 살아라’ 말씀을 하셔서, 이후 장윤희의 종갓집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지 아니하였고 조상의 유지를 받들고 후손의 번창을 위하여 이곳 화계(花溪)에 입향하셨다.
장응신의 장자 장윤희(張胤禧)는 부사직, 차자 장순희(張順禧)는 주부이고, 3자 장수희(張壽禧)는 퇴계의 제자이면서 처이종(妻姨從)이기도하다. 장수희가 이산서원(伊山書院)에서 학문을 닦을 때 서원의 사액을 퇴계 선생에게 청하여 ‘이산서원’ 사액(1550년)이 내리도록 하는데 밀알이 되었고, 1554년 이산서원 건립 당시 수장으로 창건과 운영의 주역이 됐다.
현손 장언상(張彦祥,1522~1566)은 대호군으로 경성에서 꽃계[花溪]로 이주하여 연복군 종택을 건립했고, 장언정은 호군, 장언기는 부사용을 지냈다. 장계훈은 진사이고, 장여격(張汝翮)은 군자감정이다. 장여화(汝華1566-1621, 장수희의 아들)는 호가 사계(沙溪)이고 성균관 진사로 평은 금강에 터를 잡아 많은 인재 배출했다. 6대손 장주남은 진사, 장준남(張俊南)은 문과에 올라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장신(號 錦江)은 학행으로 개령현감을 지냈고, 장응필의 후손으로 장원경의 6대손 장진(張瑱)은 문과에 올라 강계도호부사, 장후상(張后相)은 문과급제로 사예와 양산군수를, 장위긍(張湋恆)은 문과급제로 자인현감, 장화식은 고종 때 한성판윤, 장용환은 용궁현감, 장봉환은 미국공관 서기관, 장기연(張記淵)은 문과로 군수에 올랐다.
화기리 종택의 오늘
☆… 점심식사를 한 후에도, 사랑채에서 덕필 공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현재의 화기리 인동 장씨 종손(宗孫)은 연복군 16세 장덕필(張德必, 1948년) 공이다. 선대의 사당(祠堂)과 고택(古宅)과 연복군 영정(影幀)을 비롯한 세전의 귀중한 유물들을 지키며 때마다 제향을 올리는 등 헌신적으로 종사를 돌보고 있다. 덕필 공은 종부(宗婦) 반남인(潘南人) 박후자(朴後子) 여사를 맞아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바로 24세 기석(起碩, 炳卓, 1968년), 순향(順香, 1969년), 미향(美香, 1972년), 영석(永錫, 1980년)이다. 맏아들 장병탁(張炳卓, 관명 기석)은 순천인(順天人) 김미연(金美淵)과 혼인하여, 슬하에 25세 영수(瑛洙 1997년)를 낳았다. 맏딸 순향(順香)은 반남인 박찬수와 혼인하였고, 딸 미향(美香)은 야성인 송상훈과 혼인하였다.
그런데 지금, 종택에는 종손 덕필 공 내외와 둘째 아들 영석(永錫)이 함께 살고 있다. 영석은 단양인 우선혜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영주 시내에서 살고 있었는데, 6년전 어느 날 ‘선뜻’ 종택으로 들어와 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다고 하면서, 종택에 들어왔다. 이후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자유롭고 편리한 소가족 단위의 생활을 추구하는 요즘 젊은이들과는 달리, 아들 내외는 여러 가지 지켜야 할 법도(法度)가 많은 종가에 들어온 것이다. 아들이 들어와 함께 살게 되니 덕필 공으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오래된 고택(古宅)에는 아이들 웃음소리와 함께 집안에 생기가 가득하니, 400년 고택에 새로운 생동감이 넘친다. 덕필 공은 ‘이 모두가 훌륭하신 선조의 음덕(蔭德)’이라고 했다. ― 그런데 이제 손자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2022년에는 학교가 있는 영주 시내로 들어가 살 게 될 것이라고 했다.
화기리 종택의 내일
☆… 그리고 장덕필 공은 맏손자인 장영수(張瑛洙) 군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 장영수 군은 차종손 기석[炳卓]의 아들이니, 관례대로 하면 명실공히 인동 장씨 안양공파 차차종손이다. … 1997년생인 영수(瑛洙) 군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인 덕필 공 곁에서 자랐다. 자연스럽게 공(公)이 장손(長孫)을 맡아서 기른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손자를, 할머니는 따뜻하게 품어주고 할아버지는 사랑채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자상하게 훈육했다. 덕필 공은 자신의 언행으로 인동 장씨 종가의 절도를 솔선하여 보여주면서 자상하고 따뜻하게 손자를 훈육했다. 늘 올바르게 말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법을 몸에 익히도록 했다. 특히 덕필 공은 『소학』에서 가르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고 집안을 깨끗이 하여 예를 갖추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기본생활 태도를 보여주었다. 특히 마음을 바르게 갖도록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인동 장씨 종택의 가풍을 보고 듣게 하여 늘 자부심을 갖도록 가르쳤다. 어린 나이에도 영수 군는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하고 잘 따랐다.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어린 손자에게 그대로 감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수(瑛洙) 군은 건강하고 반듯하게 아주 잘 자랐다. 아빠·엄마 곁으로 가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자주 드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첫 말이 “연복군 18대손 장영수입니다!”로 시작하여,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문안을 올린다고 했다. 미래의 종손다운 자부심과 조상에 대한 경모심이 몸에 배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방학이 되면 예의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할아버지·할머니의 사랑과 종가의 가풍을 몸에 익혔다. 영수 군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영육 간에 건강하게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장영수 군은 인동 장씨 종가(宗家)의 대들보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훌륭한 간성(干城)이 될 것이다.
인동 장씨 종택의 유물
현재 인동 장씨 종택 내에 있는 ‘유물각(遺物閣)’이 있다. 보물급 문화재와 수많은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영주시의 지원을 받아 별도의 유물관을 건립한 것이다. 유물관 현판은 서예가인 미헌 장덕필 공이 직접 썼다. 이 유물각에는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의 유서 깊은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 유물로는 과거급제의 교지인 ‘선세 홍패·백패’(보물 제501호), 장말손이 세조 12년에 야인을 물리쳐 왕께 받은 ‘패도’(佩刀, 보물 제881호),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공신도인 ‘장말손 영정’(보물 제 502호),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공신으로 선정되어 받은 적개공신 장말손 상훈교서(보물 제604호)와 적개공신이 되어 내린 ‘적개공신회맹록’, 장말손 ‘종가 소장문서’(보물 제1005호)인 일종의 소장, 청원서, 진정서인 소지와 재산을 분배한 문서인 분재기 등이 있다.
* 장말손 초상(張末孫 肖像) (보물 502호)
장말손 초상(張末孫 肖像) 크기는 가로 107㎝, 세로 171㎝이다. 장말손(1431∼1486)은 세조∼성종 때의 문신으로, 세조 13년(1467) *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 적개공신 2등이 되고, 성종 13년(1482)에 연복군에 봉해졌다. 그 때 그려진 이 영정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으로서 적개공신 책록을 기념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모무문감색단령(紗帽無紋紺色團領)’에 ‘쌍학흉배(雙鶴胸背)’를 단 ‘관복의좌상(官服倚坐像)’이다.
* [참고자료] (1) 이시애(李施愛)의 난(亂) ☞
세조(世祖)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함길도의 특혜가 없어지자 불만과 위기감이 누적된 토호층이 난을 일으킨다. 세조 13년인 1467년 5월, 이시애의 선동으로 일어난 이 반란은 조선 초기 최대의 반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반란군 2만여 명은 정부의 토벌군 5만여 명을 상대로 저항하다가 그해 8월 진압됐다. 세조가 병으로 타계하기 한 해 전의 일이다.
* [참고자료] (2) 적개공신(敵愾功臣) ☞
1467년(세조 13) 8월,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 45명을 3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하였다. 1등은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으로 구성군 준(龜城君浚)·조석문(曺錫文)·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박중선(朴仲善)·허종(許琮)·윤필상(尹弼商)·김교(金嶠)·남이(南怡)·이숙기(李叔琦) 등 10명이 이에 속하였다. 2등은 정충포의적개공신(精忠布義敵愾功臣)으로김국광(金國光)·허유례(許惟禮)·이운로(李雲露)·이덕량(李德良)·배맹달(裵孟達)·이형손(李亨孫)·이종생(李從生)·이서장(李恕長)·김순명(金順命)·김관(金瓘)·구겸(具謙)·박식(朴植)·김백겸(金伯謙)·어세공(魚世恭)·오자치(吳自治)·정숭로(鄭崇魯)·장말손(張末孫)·손소(孫昭)·오순손(吳順孫)·심응(沈膺)·윤말손(尹末孫)·김면(金沔)·맹석흠(孟碩欽) 등 23명이 이에 속하였다. 3등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영순군 보(永順君溥)·율원부윤종(栗元副尹徖)·한계미(韓繼美)·선형(宣炯)·민발(閔發)·오자경(吳子慶)·최유림(崔有臨)·우공(禹貢)·정종(鄭種)·정준(鄭俊)·이양생(李陽生)·차운혁(車云革) 등 12명이 책록되었다.
이들에게는 등급에 따라 노비와 토지 등의 은전을 달리 주었는데, 1등 공신에게는 노비 13구(口), 전(田) 150결, 은 50냥, 의복 1∼2습, 안구(鞍具)를 갖춘 내구마(內廄馬) 1∼2필 등을 지급하고, 2등 공신에게는 노비 10구, 전 100결, 은 25냥, 의복 1습, 내구마 1필 등을 지급하고, 3등 공신에게는 노비 8구, 전 80결, 은 10냥, 의복 1습, 내구마 1필 등을 지급하였다. — 적개공신 가운데에는 강순(康純)·남이(南怡) 등과 같이 반역음모에 가담한 혐의(한명회, 유자광 고변)로 이러한 은전이 박탈된 경우도 있다.
▶ 영정(影幀)의 형식은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으로서 화폭은 연폭으로 되어 있다. 안면은 얼굴색을 토황 및 살색으로 채색한 후 갈색선으로 윤곽을 잡았으나 선염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고식을 보이며, 의습처리는 아청색 단령의 외곽선이 상당히 각이 있어 보인다.
화상에 나타난 흉배는 중·후기의 자수흉배와는 다른 직금흉배인데, 호표무늬로 미루어 이 화상의 제작시기는 장말손이 무관 1품의 직위에 있었던 시기로 생각되며, 성종 13년 연복군(延福君)으로 봉해진 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은 3폭으로 연결되었는데, 얼굴부위가 들어있는 가운데 폭과 양어깨를 표현한 2개의 폭이 이어져 있다.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 얼굴을 살색으로 칠한 후 갈색으로 윤곽을 잡았으나 선의 짙음과 흐림이 없는 옛 기법을 사용하였다. 입술은 붉은 기가 돌고 눈매의 표정이 살아있으며,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을 준다.
목 위로 바짝 올라간 관복, 팔뚝 아래에 있는 의자의 손잡이, 가지런한 두 발, 각진 옷의 윤곽선, 금실로 공작을 수 놓은 흉배에서는 조선 전기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머리에 쓴 사모의 꼬리가 잠자리 날개 모양에 수평으로 퍼져 있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몸의 풍채가 과장되지 않고 옷자락이 벌려져 있는 점은 조선 중기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 초상화는 흉배의 공작모양에서 장말손(張末孫)이 연복군으로 봉해진 성종 13년(1482)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몇 점 전하지 않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초상화 연구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공신도(功臣圖)라 할 수 있다.
* 인동장씨 선세 홍·백패(仁同張氏先世紅·白牌) (보물 제501호)
인동 장씨의 선세인 장계(張桂)와 그의 후손 장말손에게 내린 과거급제의 교지[白牌와 紅牌]로 모두 3장이다. 고려 ‘홍패(紅牌)’는 고려 충렬왕 31년(1305)의 것으로 장계에게 내려진 문과 급제 홍패로 행서체이다. 조선의 제도와는 서식도 다르고, 동지공거, 지공거의 직함과 성명이 표시되어 있다.
‘백패(紅牌)’는 조선 단종 원년(1453) 장말손(張末孫)에게 내려준 백패로서 진사시에 2등 7인으로 합격한 증서이다. 조선 홍패 세조 5년(1459)의 것은 장말손에게 내려준 홍패로서 문과에 병과 제3인으로 급제하였음을 알리는 증서이다. 특히 1305년 장계에게 내려진 교지는 고려조의 진사합격증서로 당시의 과거제도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적개공신 장말손 상훈교서(敵愾功臣張末孫賞勳敎書) (보물 제604호)
조선 세조 13년(1467)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수훈을 세운 공신 45인에 대하여 1등 공신 10인, 2등 공신 23인, 3등 공신 12인을 각각 선정하여 그 공훈을 보상하였다. 인정전에서 공신회맹연석에서 상훈교서를 내렸는데, 그 중 장말손(張末孫)은 적개공신 2등으로 책봉됨과 동시에, 영정을 내리고 비를 세워 기념하며 그 부모의 처자의 벼슬을 두 계급 높여주고 후손들을 우대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교서를 받았다.
이 교서는 제목의 상단과 사급 연월인 “성화삼년십일월”의 상단에 각각 “시명지보”가 찍혀 있다. 적개공신 45인의 교서 중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것 중에 확인되는 것은 이것뿐이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 [장말손 유품] — 공신회맹록(敵愾功臣會盟錄) (보물 제881-1호)
장말손 유품은, 세조 12년(1466) 함경도 회령에서 야인을 물리친 공로로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패도(佩刀)’와 세조 13년(1467)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어 예종 원년(1449) 3월에 작성한 ‘적개공신회맹록(敵愾功臣會盟錄)’이다. 회맹록은 비단 4폭을 이어서 5단으로 하였다. 위의 첫 단은 왕의 교서(敎書)이고, 아래 4단에는 1등 10명, 2등 23명, 3등 12명 공신들의 군호, 관작, 성명이 적혀 있다. 여기서 장말손은 2등 공신에 봉해졌다. 또한 3등 이하의 공로자 208명의 명단과 훈호가 기록되어 있어, 이는『조선왕조실록-세조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음 명단이다. 이 문서가 이시애의 난에 참가한 인물들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장말손 종손가 소장 패도(佩刀) (보물 제881호)
패도(佩刀)는 1466년 세조 12년 연복군 장말손 공이 북방의 야인 이지발을 물리친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다. 길이 13.8cm, 너비 1.4cm의 패도이지만, 칼집과 칼자루의 세공의 수준이 절묘하여 국보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이었다.
* 장말손 종손가 소장 고문서 (보물 제1005호)
조선 세조부터 성종 때까지의 문신인 장말손(1431∼1486)의 종손가에 보관되어 전해오는 고문서이다. 이 문서는 고려말, 조선 초기에 작성된 소지, 분재기, 입안, 교지, 녹패, 등 5종 18점이다.
이들 고문서에는 고려 우왕 11년(1385) 장말손의 증조(曾祖)인 장전(張戩)의 소지(所志)를 비롯하여 장전의 논밭·노비소유관계 문서와 도망간 노비를 잡아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문서가 있다. 「장전처 신씨자매 화회문기」는 조선 태종 4년(1404) 장전의 처 신씨의 세 자매가 상의하여 재산을 나눈 문서이며, 「장안량별급기」는 장말손에게 가사를 내린 문서(文書)이다. 이들 9건의 문서를 묶어 1첩의 문서로 펴냈으며, 이외에도 명종 16년(1561) 장말손에게 발급된 교지와 효종 12년(1655)에 예조의 허가 문서인 예조입안 등이 있다. 고문서들의 크기는 모두가 각기 다르다.
이들 고문서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전답과 노비의 소유 및 상속, 분배, 그리고 가사의 허급, 외거노비의 도망과 추쇄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 경제, 제도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며, 또한 고려 말 조선 초 소지, 분재기의 문서양식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장말손 종가의 고문서 (유물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위탁, 2021년 수장고(守藏庫) 신축
☆… 인동 장씨 종택이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유물들은 그 동안 종택의 ‘유물각’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물각은 건축 당시 완벽한 습도나 온도의 자동조절 장치가 제대로 갖추지 않아 없어 유물의 보존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 귀중한 유물들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장고를 따로 건설하고 있다. 그에 앞서 2017년 8월 31일에 종택의 유물들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차용증을 받고 일정 기간 동안 연구 자료로 제공 중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는 우리나라의 고전 자료를 영구적 보존하는 작업과 그 자료들을 분류·분석하여 연구를 하는 국가연구기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에서는, 화기리 인동 장씨 종택에서 임대해 간 유물들을 기초적인 보존처리를 하고, 분류하고, 목록 작성하여 촬영의 공정을 거쳐, 촬영된 이미지는 연구 및 출간 등을 위해 활용한다.
☆… 2021년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임대해 간 「인동 장씨 연복군 종가 유물」은 고문서 70종 1,207점, 성책류 31종 56점, 고서 378종 593종, 유물 6종 6종 등 총 1,862점이다. 그리고 추가로 고문서 7점, 장종구 상서 등 48점이다. 이 중에서 중요한 고문서, 고서 그리고 중요 유물의 목록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 [고문서(수량, 점)] — 교지(3), 교첩(6), 백패, 소지(6), 명문(23), 상량문(5), 장택기(5), 통문(36), 시문(193), 집사기(3), 묘갈명(7), 간찰(319), 계안(3), 시권(9). 만사(86), 시화(26), 과문(97), 실록초(1), 언간(29), 망기(37), 탁본(46), 가사(7, 언문), 제문(118), 축문(25), 홀기(6) 등 1,207점
* [고서(수량, 권)] — 대동문헌록(5), 미암문고, 대산선생문집(4), 도산급문제현록(2), 사여취선(10), 퇴계선생문집, 열부경주김씨실기, 열부김씨실기, 열부김씨실록, 여지승람, 고문진보(6), 심경부주, 고금역대표제주석십구사략통고, 석봉초격, 고문백선, 주자서절요, 주역대문, 소학제가집주(2), 송하유고, 현토명심보감, 동몽선습, 논어해석, 논어집주대전, 맹자집주대전, 대학혹문, 논어, 맹자, 서전대전, 효경대의, 대학장구대전, 춘추집전, 장열부김씨실기, 인동장씨세보, 추원록, 제현필전, 장열부유인함창김씨실기, 송설헌유고, 송설헌선생실기, 정암선생문집, 묵재집, 여헌선생연보, 백사선생북천일록, 선조행적기록집, 단양우씨세계변정록, 북애시집, 용담실기, 경현록, 간재선생문집 등등 378종 593권
* [유물] — 영정각 현판, 홍패실 현판, 유물각 / 화계서당 현판, 영정(영정함), 어사화등 6종 6점
* [종택의 일화] — 보물 881호 패도(佩刀) 분실사건
장덕필 공의 선친(松雲 張師植) 대에 일어난 보물 881호 패도 분실사건은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다. 장씨 종택의 패도(佩刀)는 1466년 세조 12년 연복군 장말손 공이 북방의 야인(野人) 아지발(阿只拔)을 물리친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하사(下賜) 받은 것이다. 길이 13.8cm, 너비 1.4cm의 가보(家寶)이다. 패도의 칼집과 칼자루의 금세공의 수준이 아주 절묘하여 국가 보물(寶物)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이었다. 그런데, 6·25전쟁 때, 이 지역이 적중(敵中)에 들어간 상태에서 인동 장씨 종택은 이 지역에 주둔한 인민군의 지휘본부로 이용되었다. 종가(宗家)의 가솔들은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민군이 철수 하고 난 뒤, 살펴보니 다른 유물은 그대로 있는데 그 보물 패도(佩刀)가 없어진 것이었다.
집 안팎을 아무리 뒤져도 패도는 나오지 않았다. 끝내 패도가 나오지 않자, 종중(宗中)에서는 종손 송운(松雲) 공을 의심하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조상의 영예가 담긴 가문의 보물이면서 국가적 보물을 분실하였으니 조상에 대한 면목도 없을 뿐 아니라 종중에서 더욱 공(公)을 의심하기에 이르니, 선친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전전긍긍 몇 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친 장사식 공이 꿈을 꾸었다. 연복군 선조께서 꿈에 나타나 집안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며 패도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었다. ‘연복군(延福君) 사당 앞 어느 지점을 파 보라’고 했다. 이에 사식 공이 즉시 초롱불을 들고 나아가 현몽한 그곳을 조심스럽게 파 보았더니 과연 패도(佩刀)가 나왔다. 패도를 찾겠다는 간절함이 조상의 마음을 움직여 현몽(現夢)한 것이다. 추측컨대, 패도가 탐이 난 인민군 장교가 패도를 탐하여 나중에 취하기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 모르게 땅에 파묻은 것이다. 몇 년 간 땅 속에 묻혀 있어서 칼집들이 훼손이 심했다. 칼자루른 금제여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쨌든 가보(家寶)이고 국보(國寶)인 패도를 찾았다.
이렇게 극적으로 패도를 찾게 되었고, 선친께서는 조상에 대한 불효를 씻을 수 있었고 종중의 오해를 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전하는 패도가 겪어온 수난의 역사이다. 유물관에는 이 패도를 별도로 재현(再現)하기 위해 3D 기법으로 칼과 칼자루 그리고 칼집을 재현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정자 ‘송설헌(松雪軒)’과 문중 사당 ‘추원사(追遠祠)’ 그리고 연복군종친회관
장말손의 손자 장응신(張應臣)이 영주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순탄치 못했던 어린 시절과 유관하다. 장말손의 장남 장맹우(張孟羽)는 황해도 도사로 나가 있던 중 41세로 병사하여, 그 아들 장응신이 12세 어린 나이에 갈 곳 없이 되었다. 그 재주를 가상히 여긴 남평 문씨(南平文氏) 집안에서 데릴사위로 맞아들이면서 영주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응신마저 31세로 일찍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의 후손들에게는 “어지러운 정국에 휘말리지 않고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조용히 은둔하여 지내며 남 앞에 나서지 말라.”고 유언을 하여, 그 후로 그의 후손들은 지금의 꽃게에 터를 잡고 4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영주시 장수군 화기리 꽃계마을은, 장응신의 손자인 대호군 장언상(張彦祥)이 종택을 건립한 이래 인동 장씨 집성촌이 되었다. 종택에서 약 100여 미터 떨어진 산록의 송림 아래에 정자 ‘송설헌(松雪軒)’과 문중 선조들을 배향하는 사당인 ‘추원사(追遠祠)’가 있다. ‘송설헌(松雪軒)’은 안양공 장말손의 아호이다. 푸르고 푸르면서 우뚝한 것이 소나무[松]이고, 희면서도 차가운 것이 눈[雪]이다. 솔에 눈이 지나가면 곧고 굳은 절조(節操)가 드러나고, 눈이 솔과 만나면 그 흰 자태가 더욱 드러난다. 그 고결함은 주인의 풍격과 마음을 상징한다. 원래 예천 화장에 있던 송설헌은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로 옮겨 중건하여 보존되어 있다.
송설헌(松雪軒)
연복군, 예천으로 물러나 송설헌(松雪軒)을 짓다
47세가 되던 1477년(성종 8) 예천의 화장(花庄, 지금의 문경 산북)으로 잠시 낙향하였던 장말손은 1481(성종 12)에는 간신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인해 강순과 남이(南怡) 등이 처형되던 가운데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보임되었다.
그러나 곧 관직에서 물러나 예천 화장에 송설헌을 짓고서 은둔하며 학문에 힘썼다. 조정에서는 장말손을 연복군(延福君)에 봉하고 비를 세워 그의 공로를 현창하였지만,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1486년(성종 17)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시장의 문을 닫게 하고 국사(國師)를 보내어 묘자리를 잡게 하였으며, 안양(安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문경 땅인 당시의 예천 화장에 있던 송설헌을, 지금 있는 영주 장수면 화기리에 옮겨 온 내력에 대해서는 김흥락의 「송설헌후지(松雪軒後識)」에 밝혀 놓았다.
“안양공(安襄公) 장말손 선생은 문무의 재주를 겸하여 훌륭한 업적과 공훈으로 그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겼지만, 이런 일은 선생에게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선생은 오히려 당시 덕망 있는 학자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청백리로 이름난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등 어진 선비들과 도의로 사귀며 강론하고 연마하여, 그 학문으로 추중(推重)되었다. 나중에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功勞)로 그 이름을 드러냈으나 선생이 좋아하는 바는 학문에 있었지 훈공으로 이름을 구함에 있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영달에 초연하여 아직 젊은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자연과 더불어 소요하며 지냈다.
선생의 옛집은 예천 화장(花庄)에 있었는데, 그 집을 송설헌(松雪軒)이라 이름 지었던 것을 이제 영주 화기리에 옮기고 옛날 이름을 그대로 취한 것은, 선생의 후손들이 그 근본을 잊지 않고자 함이다. 다만 오랜 세월을 지나온 탓에 자세한 유래를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선생이 허다한 자연물 가운데 유독 소나무[松]와 눈[雪] 두 가지를 취하여 편액(扁額)했던 뜻을 알 만하다. 그것은 가을이 되어 다른 나무의 잎들이 다 시든 후 맨 나중에야 시드는 소나무의 꿋꿋한 절조를 본받고자 함이었고, 희고 깨끗한 눈의 더럽히지 않는 뜻을 좋아했기 때문이리라."
― 장말손 본인이 취한 자호 '松雪軒' 편액은 지금도 고택 뒤의 정자(亭子)에 의연히 걸려 있다. 세월의 빛바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송설헌처럼 해마다 봄이 되면 솔이 새 잎을 피어내어 사시사철 푸르고, 눈은 매년 겨울 세상의 혼탁함을 하얗게 덮어 깨끗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여전하다.
추원사(追遠祠)
송설헌 우측에 인동 장씨 선조들을 배향하는 사당(祠堂)인 ‘추원사(追遠祠)’가 있다. 너른 마당 위에 축대를 쌓고 그 위의 산록에 나지막한 기와-토담이 사당을 에워싸고 있다.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삼문(三門)이 있다. 삼문으로 엄숙한 경내로 들어가는 경건한 세 칸의 문이다. 경내의 마당, 정면에 사당의 편액 ‘追遠祠’가 걸려 있다. 종택에는 불천위 안양공 배향하는 사당이고 추원사는 종중의 선조들을 함께 모시는 사당이다.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던 이전의 추원사(追遠祠)의 재실 현판 ‘追遠齋’(추원재)는 종택의 화계정사 대청에 걸려 있다. 그 ‘追遠齋’ 현판 옆에 있는 '追遠齋記'에 저간의 상황을 자상하게 기록해 놓았다.
‘延福君宗親會館’(연복군종친회관)
송설헌과 진도사 아래 최근에 건립한 ‘延福君宗親會館’(연복군종친회관)이 있다. 산뜻한 벽돌로 지은 단아하고 정갈한 단층 기와집이다. 회관 앞에 ‘연복군 종친회관 건립 기념비’가 있다.
“연복군 선조께서는 1431년(세종 13년) 칠곡군 석적면 발영전에서 태어 나셨다. 휘(諱)는말손(末孫)이며, 자(字)는 경윤(景胤), 호(號)는 송설헌(松雪軒), 시호(諡號)는 안양(安養) 공이며, 연복군(延福君) 봉군(封君)을 받으셨다. 직제학공(直提學公 ; 桂)의 6세손이며 홍산현감(紅山縣監)을 지내시고 옥산군(玉山君)으로 봉해지셨던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안량( 安良)의 셋째 아들이시다. 23세에 사마양시에,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셨다. 36세에 아지발( 阿只拔)을 물리친 공으로 패도(佩刀, 보물 제881호) 한 자루와 옥피리[玉笛] 하나, 은배(銀杯) 한 쌍을 받으시고, 37세(1467, 세조 13년)에 이시애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셨다.
1467년 成宗 7年 46세에 가선대부(嘉善大夫, 從二品)에 올라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官), 세자강시강원 우부빈객(世子侍講院 右副賓客)에 오르셨다. 1482년 성종 13년 임인(壬寅)년 52세 봄에 화장(花庄)으로 낙남(落南)하셨다. 1486년 6월 7일 향년 56세로 돌아가시니 임금이 제문과 어풍을 보내어 예천군 호명면 범우리에 예장하였다. 1489년 성종 20년 나라에서 조령불천위(朝令不遷位)를 명하시어 영정(影幀)을 내리셨다.
1600년대 영주 화계로 집터를 옮겼다. 1971년에는 송설헌(松雪軒)과 추원사(追遠祠)를 정부에서, 1988년 4월 영정각(影幀閣)을 자손들의 힘으로 세웠다. 1988년도에는 종택 중수, 2005년 10월 유물각(遺物閣)을 정부 지원으로 준공하였고, 2018년 추원사(追遠祠) 앞터인 이곳에 전국에서 보내온 자손들의 성금으로 ‘延福君宗親會館’을 완성하고 성금을 보낸 후손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남기고자 한다. / 2018년(무술년) 9월 25일 / 延福君 十七代孫 宗親會長 張星河 짓고 延福君 十六代 宗孫 張德必 쓰다”
― 연복군종친회관 기념비 측면에는 성금(誠金)을 낸 후손(後孫)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인동 장씨, 연복군 송설헌 선생 유허비(遺墟碑) 제막
장수 화기에서 사당 고유제, 다음날 문경 화장에서 유허비 제막식
2019년 11월 16일, 인동 장씨 연복군파 전국종회(회장 장성하)는 연복군(延福君) 송설헌(松雪軒) 휘 말손(末孫) 선조께서 벼슬을 그만두시고 낙남하셨던 문경(예천) 화장(花庄) 정금산 아래 ‘延福君遺墟碑松雪軒張先生遺墟碑'(연복군송설헌장선생유허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했다. 인동 장씨 문중은 물론 영주·문경·안동·예천의 유림 등 400여 명 참석했다.
제막식을 하루 앞둔 11월 15일 화기리 종택 불천위사당에서 ‘延福君遺墟碑松雪軒張先生遺墟碑'(연복군송설헌장선생유허비) 제막 고유제(告由祭)가 봉행되었다. 고유제에는 장덕필 종손, 장성하 회장을 비롯한 종중 30여명이 참례했다.
이날 고유제 집사에는 헌관 장덕필 종손, 독고유 장병국 전 회장, 봉향 장봉덕 씨, 봉로 장범전 씨가 천망됐다. 고유제는 참례자 취위, 삼상향, 헌작, 독고유, 재배, 예필, 음복 순으로 진행됐다. 고유문은
“부군께 고하옵니다. 공께서는 국난을 극복하시고 조선 적개공신이십니다. 화장에 낙향 하신 후 오랜 세월동안 기록을 갖추지 못하다가 때는 늦었지만 종의(宗議)를 모아 유허비를 세웁니다. 아름다운 업적들을 드러내 감히 고하옵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잔을 드리오니 편히 드시옵소서. 정성을 다해 삼가 고하나이다.”
16일 문경 화장에서 제막한 연복군유허비는 전면에 「延福君松雪軒張先生遺墟碑」라 쓰고, 비문은 “선조께서는…” 으로 시작하여 낙향 세거지, 출생과 생애, 국난극복과 적개공신, 공의 후손들에 대해 적고, 말미에 “명(銘)에 이르노니 선덕을 쌓아 널리 베품을 만세토록 가본으로 삼을지어다. 2019년 11월 16일 연복군 17세 종친회장 장성하(張星河) 삼가 글을 짓고, 16세 종손 장덕필(張德必) 삼가 글을 쓰다.” — 이렇게 비(碑) 3면에 총 2천 400자로 비문을 새겼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