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1. 근본적 수용은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로, 명확히 보기와 자비의 두 날개를 필요로 한다.
2. 명확히 보기는 현재의 감정과 경험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챙김 수행이다.
3. 자비는 자신의 고통과 욕구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이다.
4. 두 날개가 함께할 때, 우리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5. 마음챙김만으로는 경험을 인식할 수 있지만, 자비가 없으면 자기 비난에 빠질 위험이 있다.
6. 자비만으로는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으며, 마음챙김이 이를 균형 잡아준다.
7. 근본적 수용은 과거의 패턴과 감정, 행동을 인식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8. 아이들과의 관계처럼,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9. 우리의 본질은 깨어있는 의식과 보살피는 가슴을 지닌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10. 수용의 두 날개는 삶의 모든 순간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한다.
유튜브 써니즈 오디오 채널
안녕하세요, 써니즈 오디오 채널입니다.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근본적 수용이란 무엇일까요? 진정한 수용에는 두 날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명확히 보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로 감싸 안기라고 하는데요.
오늘은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받아들임 - 타라 브랙, 옮긴이 김선주, 김정호, 출판사는 불광출판사입니다. <수용의 두 날개 펼치기> 무가치감의 트랜스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히 깨닫지도, 친절을 느끼지도 못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관점은 뒤틀리고 편협하며, 가슴은 삶에 대항하느라 딱딱해진다. 우리가 그 순간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스토리들을 내려놓고, 고통이나 욕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을 때, 근본적 수용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진정한 수용의 두 날개는 명확히 보기와 우리의 경험을 자비로 감싸 안기인데, 이 둘은 거대한 새의 두 날개만큼이나 상호의존적이다.
두 날개는 함께할 때 우리를 날 수 있게 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첫번째의 날개는 흔히 불교 수행에서 마음챙김이라 기술된다. 이것은 순간순간의 경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의식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마음챙김할 때, 질주하는 생각과 긴장되어 떨리는 몸과 도망가고 싶다는 욕구를 의식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려 하거나 없애버리려 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것을 의식한다. 주의는 모든 조건에서 자유롭게 열려 있는 상태다.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거나 다른 뭔가를 할 수 있기를 바랄 때조차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과 기꺼이 함께한다. 그 욕구와 생각은 우리가 수용하고 있는 것의 일부가 된다. 경험을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챙김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 경험의 진실을 인식하는 것이 근본적 수용의 고유한 특성이다. 만약 우리가 수용하고 있는 것을 명확히 볼 수 없다면, 경험을 진실로 수용할 수 없다. 근본적 수용의 두 번째 날개인 자비는 우리가 지각한 것과 부드럽고 호의적인 방식으로 관계하는 능력이다.
두려움이나 슬픔의 감정에 저항하는 대신에, 아이를 보듬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을 감싸 안는다. 주의를 끌려는 욕구, 혹은 초콜릿이나 섹스에 대한 욕구를 비난하거나 멋대로 충족시키기보다 부드러움과 배려로 감싼다. 자비는 우리의 경험을 존중한다.
이 순간의 삶과 있는 그대로 친해지게 한다. 자비는 우리의 수용을 전면적이고 완전하게 만든다. 명확히 보기와 자비의 두 날개는 분리될 수 없고, 둘 모두 우리가 트랜스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들은 함께 기능하며 서로를 강화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을 당한 경우, 무가치감의 트랜스가 강박적 사고에 빠져들게 해서 상처 준 사람을 원망하는 동시에 우리가 결함이 많기 때문에 버림받았다고 믿게 만든다. 우리는 격정적인 분노와 비통한 슬픔, 수치심 사이를 오가는 멈추지 않는 그네에 붙잡혀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근본적 수용의 두 날개는 무섭게 돌아가는 자동반응의 소용돌이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또한, 말과 행동을 선택하는 데 지침이 될 수 있는 균형과 명확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만약 근본적 수용의 과정에서 마음챙김의 날개만을 취하더라도, 가슴 통증과 얼굴을 붉히는 분노를 명확히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신은 희생자이고 항상 혼자이며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스토리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무엇보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서 괴로움이 더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치유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마음챙김과 자비가 함께해야 한다.
자비는 분노나 실망을 밀어내거나 판단하는 대신에, 부드럽고 친절하게 자신의 벌어진 상처와 함께할 수 있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마음챙김은 자비와 균형을 유지시켜 준다. 만약 마음에서 우러난 배려가 자기 연민으로 번지기 시작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좀처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는 또 다른 스토리가 생겨나더라도, 마음챙김이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함정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두 날개는 우리가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함께 돕는다. 이럴 때, 뭔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더 자유롭다고 느끼고, 선택의 폭이 열리고, 우리가 얼마나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하는지 더 분명하게 보게 된다.
근본적 수용은 무의식적인 자기 혐오와 비난의 습관을 치료하고 변화시켜서 그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근본적 수용은 순간순간의 경험을 대상으로 하지만, 생각과 느낌, 행동과 사건의 패턴들처럼 우리 삶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들에도 명확하고 친절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우리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의도를 더 잘 알아차리게 된다.
또한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위의 결과를 알아차리게 된다. 불교 심리학에서는 이와 같은 더 넓은 시야를 수용적 알아차림에 포함해서 '명확한 이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자주 화를 내고, 경멸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됐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자신의 의도를 점검하기 시작할 수 있고, 수용을 통해 그때 일어나는 생각과 느낌에 열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너무 힘들어서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아이들을 밀쳐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나는 지쳐있고, 나 자신의 인생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
이 생각에 덧붙여서 복부에 물결처럼 퍼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목이 꽉 막히는 감각을 느낄지도 모른다. 또한 자기가 아이들에게 저지른 행동의 실제 결과를 보거나 알 수도 있다. 아이들이 우리 앞에서 움츠러든 적이 있는가? 아이들이 우리 주변에서 말수를 줄이고 두려워하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가슴의 슬픔이 차오름을 느낄 수도 있다.
또한 화내는 행동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충동적으로 마구 해댄 다음에 스스로를 얼마나 외롭고 형편없다고 느끼는지 알 수 있다. 명확한 이해를 통해 얻게 된 더 넓은 시야는 예외 없이 우리를 자신의 가장 깊은 의도로 들어가게 한다. 우리는 고통을 받거나 고통을 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이 갈망 또한 명확히 보기와 친절로 마주한다. 이렇게 상황의 전체 맥락을 근본적 수용으로 봄으로써, 우리는 점차로 행동을 가슴에 동조시킬 수 있게 된다.
비수용이 바로 트랜스의 특징이기 때문에 꼼짝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근본적 수용을 향한 첫걸음을 어떻게 내딛을 수 있을지 궁금할 수 있다. 근본적 수용은 우리가 아무리 길을 잃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본질인 불성은 온전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믿음을 줄 수 있다. 우리 의식의 본질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 가슴의 본질은 보살피는 것이다. 우리는 끝없는 바다처럼 우리를 통해 일렁이는 삶의 파도를 감싸 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바다가 자기 의심의 바람에 거세게 흔들려도, 우리는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파도 한가운데서 광대하게 깨어있는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언제 판단하고, 저항하고, 집착하는 습관에 사로잡히고, 고통과 즐거움의 수준을 통제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으로 근본적 수용의 기초를 쌓을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냉혹하게 등을 돌릴 때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고, 삶을 사랑하려는 의도를 기억하는 것으로 근본적 수용의 기초를 쌓을 수 있다.
우리에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스토리를 내려놓으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명확하고 친절한 주의로 어루만지기 시작하게 된다. 우리의 계획이나 환상을 해방시키고, 이 순간의 경험에 관대해진다. 우리가 즐거움을 느끼든 고통을 느끼든, 수용의 두 날개는 늘 변화하는 삶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도록 한다.
오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