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비기나무Beach Vitex , 蔓荊子 , ハマゴウ浜栲
분류학명
순비기나무는 바닷가에서 짠물을 뒤집어쓰고도 잘 자란다. 동으로는 구룡포에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누비고 백령도 콩돌 해안까지 우리나라 남서부와 제주도를 포함한 섬 지방의 바닷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순비기나무는 통기성이 좋은 자갈밭이나 모래사장에서 흔히 자란다. 모래 위를 기어 다니면서 터전을 넓혀 방석을 깔아놓듯이 펼쳐나가므로 덩굴나무처럼 보인다.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것을 막아줄 지표고정 식물로 가장 적합하다.
오래된 줄기는 거의 팔목 굵기 정도에 이르지만, 대부분 손가락 굵기의 줄기가 이리저리 뻗는다. 넓은 타원형의 잎은 마주보기로 달리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초록 바탕에 은빛을 띤다. 잎 뒷면에는 회백색 털이 빽빽이 나 있어서 하얗게 보인다. 늦여름에 피는 보라색 꽃도 일품이다. 동전 크기만 한 꽃이 원뿔모양으로 꽃대를 타고 올라오면서 핀다. 아래 꽃받침은 유난히 긴 토인들의 아랫입술 같기고 하고 어찌 보면 술잔을 닮았다. 이색적인 꽃 모양과 함께 푸른 바다를 앞으로 두르고 흰 모래사장을 융단처럼 뒤덮고 있는 연보라색 꽃은 해수욕 시즌이 끝나고 조금은 을씨년스러워진 해수욕장의 풍경을 오히려 낭만으로 채워준다.
꽃이 지고나면 콩알 굵기만 한 열매가 열리고 겉에는 코르크로 무장한다. 가볍고 물에 잘 뜨며 방수기능까지 갖춘 코르크로 치장을 하였으니 종족을 번식시킬 만반의 준비를 한 셈이다. 또 유연한 적응력은 까다로운 나무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자기가 처한 곳이 따뜻한 남쪽지방이면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상록수였다가, 백령도와 같은 좀 북쪽에서 자라게 되면 겨울에 잎을 떨어뜨리는 낙엽수가 된다. 그래서 순비기나무는 일본과 동남아시아는 물론 호주까지 자람 터를 넓힌 마당발나무다.
순비기나무는 예부터 약으로도 그 쓰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동의보감》에 보면 “풍으로 머리가 아프며 골속이 울리는 것, 눈물이 나는 것을 낫게 하며 눈을 밝게 하고 이빨을 튼튼히 하며, 수염과 머리털을 잘 자라게 한다. 습비(濕痺)로 살이 오그라드는 것을 낫게 하며, 촌충과 회충을 없앤다. 술에 축여서 찌고 햇빛에 말린 다음 짓찧어서 쓴다”라고 했다. 그 외에도 “열매를 가을에 채취하여 햇볕에 말린 다음 베개에 넣어두면 두통에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잎과 가지에는 향기가 있어서 목욕탕 물에 넣어 향료로 쓰기도 한다.
이처럼 약으로 여러 쓰임이 있지만, 순비기나무는 그중에서도 특히 두통치료 효과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두통이 생기는 이유가 적어도 수십 가지는 될 터이니 실제로 어떤 두통에 영향을 미치는 지는 아직 듣지 못했다. 다만 깊은 바다에서의 물질로 평생 두통에 시달리는 제주 해녀들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해녀들이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있다가 물 위로 올라오면서 내는 숨소리를 ‘숨비소리’, 혹은 ‘숨비기 소리’라고 한다. 순비기라는 나무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순비기나무는 해녀들의 만성두통 치료제로 애용되었고, 또 그녀들의 숨비소리까지 들어주는 나무로 더 큰 사랑을 받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