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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관련 시에 관한 평론적 에세이
코비드-19시대 마스크를 쓴 시들, 그 이후*
이영숙
미증유의 세계다. 코비드-19로 인해 일상의 풍경과 삶의 패턴이 바뀌었으며, 공동체의 붕괴를 비롯해 직업과 여가, 전통적 관습과 교육시스템도 변화되었다. 감염에 대한 염려, 생계 문제 등으로 삶의 질은 저하되고, 불안과 공포는 상시화ㆍ내면화되어 우리의 미래는 예측 불가능해졌다. 그뿐인가. 다중이 이용하던 현실의 열린 공간이 비현실적 가상 공간처럼 느껴지고, 개인 공간이 폐쇄적 현실 공간이 되는 주객전도 현상도 하나둘이 아니게 되었다.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되자 도시의 익명성이 더욱 강화된 것은 물론, 사람들은 미소를 잊고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는데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처럼 과거는 이제 유토피아로 윤색되어 현재로부터 나날이 멀어져간다. 역사에도 지층이 있다면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지층은 아마도 전 세계가 숙명처럼 한 줄의 검은 띠로 연결되리라. 인류사에서도 문제적인 이 시기를 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알다시피 코비드-19는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으로 보고된 이후 짧은 기간에 전 세계로 대확산을 일으킨 역병이다. 국내에서는 다음 해 1월 20일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한 중국인 여성에게서 최초 발병했다. 그로부터 1년만인 2021년 1월 20일에 누적 확진자 73,518명, 누적 사망자 1,300명이었던 것이 2년만인 2022년 1월 20일에는 각각 712,503명으로 10배, 6,408명으로 5배가량 대폭 늘었다(참고로 2년째인 2022년 1/20일 전 세계의 누적 확진자는 435,206,392명이고, 사망자는 5,965,310명이다. https://www.worldometers.info/coronavirus/). 인도발 델타 변이(2021.4)보다 더 전파력이 강한 남아공발 오미크론 변이(2021.11)가 유입됨으로써 2022년 2월 6일에 누적 확진자가 100만 명대를 기록한 후 보름만인 2월 21일에는 200만 명을 훌쩍 넘은 2,058,184명이 되었다. 이는 첫 확진자 발생 후 100만 명에 도달하는데 2년이 조금 넘는 748일이 걸렸다면, 다시 100만 명을 갱신하는 데는 2주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100만명까진 2년ㆍ200만명까진 2주…」, <파이낸셜뉴스> 2022. 02. 21).
그러나 100여 종의 문예지와 웹진을 추적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코비드-19의 지속성이나 폭발력, 그 여파에 비해 이를 전면화한 시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료 발굴에 대한 개인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또 한 원인으로는 정치와 노동 의식의 폭발이 있었던 7,80년대 이래 극소수의 시인만이 정치시와 노동시를 경유했던 것과 같은 맥락일 수 있다. 문학의 미학적 실천과 현실적 참여가 분리되어왔던 문학적 전통에서 시인들이 팬데믹이라는 재난의 리얼리티가 미적 형상화로 가는 길을 가로막거나 지체시킨다고 지레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중 작품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시들을 일부 제외하면서 60여 편의 시를 발굴한 후 다시 15개의 매체에서 글의 주제와 관련된 25편을 골라 이곳에 인용할 수 있었다. 이 글은 ‘평론적 에세이’라는 형식과, 일상의 풍경―내면의 풍경―패러다임의 변화―미학적 실천―사태의 현상과 본질 및 전망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흘러갈 예정이다. 먼저 시에서 구현된 일상의 풍경들을 훑어보기로 하자.
마침내 인간의 입은 봉쇄당했다
아직 말문도 터지지 않은 어린아이
마스크를 낀 채 아장아장 걷는다
아가야 네 가는 곳이 어디냐
―조향미, 「마스크」 부분, 《내일을 여는 작가》 2021 하반기
최전방에서 바이러스와 고투하며 건강의 최후방을 방어하는 마스크는 기꺼이 이 시대의 살풍경을 완성한다. 말의 전달력과 표정의 다양함을 일정 부분 은폐함으로써 복잡한 인과관계를 단순화하고 대상을 타자화시키는 그것은 현대판 금줄이면서 시대정신이고 교양의 요건으로까지 비약했다. 그러나 이 시는 강제로 “인간의 입”을 “봉쇄”한 “마스크”와 “아직 말문도 터지지 않은 어린아이”가 낀 “마스크”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마침내”라는 부사가 어떠한 일의 결과로서 “인간”의 종국에 걸쳐져 있다면, 시에는 생략된 ‘이제’라는 부사가 종국을 출발점으로 하는 “아가”에게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비대면의 광활한 미래를 향해 “아장아장” 발을 뗀 “아가”로 인해 세계의 살풍경은 강화된다.
전염된다네. 당신이 좋아하는 초코케이크 딸기우유 박하사탕 사왔는데, 그냥 현관에 두라네. 이름을 적고 물러서니 직원이 소독약 뿌리네. 얼마 후 화면이 뜨네. 촛불 밝히고 박수하고 싶은데, 당신은 아기처럼 주무시네. 직원이 깨우며 화면을 가리키네. 누가 잠결을 빗질하나, 성성한 머리칼 속에 순두부가 되어버린 기억, 간수액에 물컹한 당신의 뇌, 나는 손을 흔드네. 잘 있어요? 안개가 흐르네. 당신은 베개 보풀을 만지더니 창밖을 보네. 촛농이 녹아 흐르고 쇠별꽃과 구절초들이 고개를 떨구네. 도데미풀들이 냄새를 풍기네. 그림자가 내 뒤꿈치에 뿌리를 내리네. 이제는 서로 바깥에서 건드리면 부러질 꽃대들이 닮아가네.
―박수빈, 「들꽃 요양원」 전문, 《시와 문화》 2021년 여름호
생의 출발점에서 막 발을 뗀 “아가”가 있는가 하면, 한편에는 한 생을 돌아와 “아기처럼 주무시”는 노인이 있다. “간수액에 물컹”해진 “당신의 뇌”와 “순두부가 되어버린 기억”으로 인해 자신이 “초코케이크 딸기우유 박하사탕”을 좋아했는지조차 모르고, “화면” 속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자식인지도 모른 채, 의미 없이 “베개 보풀을 만지”다가 무심히 “창밖을 보”는 노인. 손 한 번 잡아볼 수 없고, 말 한마디 건넬 수조차 없는 생이별의 현장에서 자식은 뜨거운 눈물(“촛농이 녹아”)이 앞을 가려(“안개가 흐르네”) “고개를 떨”군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그림자가 내 뒤꿈치에 뿌리를 내리네.”)을 돌리면서 “당신”과 “내”가 “이제는 서로”의 “바깥”에 머물게 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실시간 현재 상황이다. “학교 한 번 못 가보고도 대학생은 대학생/ 모니터 속 교수는 아들의 얼굴을 모르고/ 아들은 학교 가는 버스 노선을 모르”(류근, 「코로나 학번」, 《미네르바》 2020년 겨울호)는 현실 속에서 학교와 대학생, 아들과 교수, 아들과 버스 노선은 서로의 바깥이 된다. “역병 와중이라지만/ 모친의 빈소에 못 간 게 내내 걸렸”(손세실리아, 「누나라는 말」, 《문장웹진》 2021년 5월호)던 상주의 지인이나, “코로나19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장례식장에서 나와/ 천변을 걸었”(김현, 「간다」, 《문장웹진》 2022년 1월호)던 문상객은 상주는 물론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밥 한 상 고이 대접하는 고인과 서로 바깥에 있다. 이즈음의 풍속도는 “낙하하는 향기에도 놀라 손을 씻”고, “감염될지도 몰라 온라인으로 전하는 사랑의 방식”(송문희, 「슬픔 한 권―코로나19를 발췌하다」, 《두레문학》 2021년 제30호)으로 자연스레 바뀌고 있다.
체온을 잊었으나 멀리서도 잘 보이던 곳,
나는 비로소
긴 대기자의 행렬에서 격리되었다.
―채선, 「감염」 부분, 《시인수첩》 2021년 봄호
격리와 고립 역시 일상화된 풍경 중 하나다. 상황적 아이러니를 놓치지 않고 있는 이 시는 PCR(유전자) 검사를 받기 위한 대기열에서의 격리가 곧 자신의 ‘감염’ 때문임을 제목으로 암시한다. 격리가 물리적인 장치라면 고립은 심리적인 기제에 의한 내면의 풍경에 더 가깝다.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구를 지배하지도 않는다
꿈결 같은 생활이 여기에 있다
(중략)
사람들 모이는 데 가는 게 점점 귀찮아진다
영화관까지 가는 게 귀찮고
강연장까지 가는 게 귀찮고
맛집까지 가는 게 귀찮고
비행기 타고 가는 게 귀찮고
예식장 가는 건 아주 귀찮고
상갓집 가는 건 그나마 낫고
괴력난신 같은 건 내다버린 지 옛날이고
음악도 밀쳐 두고 백지 앞에서
노래 부르지 않는 노래를 하면서 지낸다
혼자서 혼자를 즐거워하며 지낸다
―박용하, 「생활의 실패」, 《현대시》 2021년 4월호
고립의 “꿈결 같은 생활”은 그러나 일상화된 격리의 반작용이다. “사람들 모이는” 곳이나 “영화관” “강연장” 등에 가는 것이 “귀찮”은 이유는 어느새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지만, “혼자서 혼자를 즐거워하며 지낸다”라는 자족적인 독백은 총체적으로 ‘생활의 실패’라는 인식을 담보로 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아이러니 속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나홀로 산행이나 나홀로 산책이 늘어난 가운데 “코로나로 묶인 발이” “중랑천변 텃밭”을 “아침저녁 부지런히 찾는” 이유는 비대면의 세계에서 홀로 걷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무성한 호박넝쿨이 칭칭 감아 옭아”매어 “상추 깻잎이 말라 죽어가고 있”(여국현, 「천변 풍경 3」, 《푸른사상》 2020년 가을호)는 상황을 코비드-19와 겹쳐 놓을 때 “중랑천변 텃밭”은 그대로 우리의 삶을 재현하는 현장이 된다. 머리를 식히러 간 곳에서도 우리는 다시 ‘바이러스’에 “칭칭 감아 옭아”매어진 우리 자신과 끝도 없이 대면하는 것이다. 관계 부재 증후군이라고나 할까.
네모난 원고지 독방에서 살아간다
하늘을 벗어난 저녁놀도 자가격리
밤이면 생각마저도
문을 걸어 잠근다
―박성민, 「비대면의 가을」 부분, 《문학청춘》 2020년 가을호
‘비대면’은 관계의 부재에서 관계의 결여까지를 오간다. 이 왕복이 의미하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는 이 시조 역시 극단의 고립 상태에 익숙해진 시인의 내면 풍경을 보여준다. 초장은 글 쓰는 행위와 삶의 행태를 겹쳐 놓았고, 중장은 “자가격리” 중인 인간과 자연현상인 “저녁놀”을 겹쳐 놓았으며, 종장에서 그것은 “밤”과 “가을”이라는 글을 쓸 최적 환경에서조차 “생각”이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는 자폐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 “마스크를 한 해가 오후 속으로 돌아서자/ 날카로운 건물 모퉁이도 비스듬히/ 제 그림자를 둥글게 말아 쥐고 건물을 나”(강영환, 「그늘에 앉은 남자」, 《실천문학》 2021년 가을호)서는 등 사물과 현상들이 모두 코비드-19에 깊이 연계된다.
종종 나만 남아서
세상의 모든 악몽을 혼자 실천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빠져나오는 길을 알려준 적 없기에
영영 아침이 오지 않아요
―김네잎,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부분, 《미네르바》 2020년 겨울호
나는 요즘 벌떡 일어납니다
어둠이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집니다
(중략)
이렇게 사는 게 맞습니까
(중략)
거기 사람 맞습니까
또 아침입니다
정말 이렇게 사는 게
맞습니까
―손미, 「불면」 부분, 《문장웹진》 2021년 5월호
출구 없는 꿈속에 갇혀 “세상의 모든 악몽을 혼자 실천”하는 고립감과 무력감은 역병에 감염된 우리 무의식의 단면이다. 또한 출구 없는 ‘불면’에 갇혀 “이렇게 사는 게 맞습니까”, “거기 사람 맞습니까”라고 절규하는 명료한 의식 역시 병리적 현상의 한 부분이다. “영영 아침이 오지 않아요”와 “또 아침입니다” 사이에는 “오늘인지 어제인지/ 열어봐야 할 서랍들이 자꾸 쌓이”는 정체불명의 시간이 끝없이 고이고 있다.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사이 다음 해가 왔지만
오늘인지 어제인지
열어봐야 할 서랍들이 자꾸 쌓이고 있습니다
어떤 서류도
연애도 명예도 발명도
목록에 묶인 채 정박 중
너에게로 가서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네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빈번한 어긋남에 중독되는 게 서기 2020년식 사랑법이었다고
문장들은 근육이 풀려 실용문이 되어가고
―이영숙, 「12월 32일」 부분, 《엽서詩》 2021년 1월호
2020년이 유독 혹독했던 건 시시각각이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면역력이 없는 감염병의 세계 대유행과 높은 전파력, 이제 막 개발되기 시작한 백신에 대한 기대 반 의심 반의 시선, 국경의 폐쇄, 흉흉한 괴담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가 동행하고 있었다. 2020년 12월 31일이 지나가고(“마지못해 해가 저물고”) 2021년 1월 1일(“다음 해”)이 왔지만, 시간의 경계는 무의미해졌고(“오늘인지 어제인지”)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은 늘어나고 있었다(“열어봐야 할 서랍들이 자꾸 쌓이고 있습니다”). 삶의 기반을 이루는 총체적 시스템(“서류”, “연애”, “명예”, “발명”)도 “목록에 묶인 채 정박 중”이었다.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대상의 부재(“네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와 욕망하는 것(“네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데서 비롯한다. 이런 되풀이(“빈번한 어긋남에 중독되는”)가 “서기 2020년식” 삶의 방식(“사랑법”)이었다. 운동과 활력이 사라진 곳(“문장들은 근육이 풀려”)에 건조하고 기계적인 일상(“실용문”)이 자리 잡은 것은 불문가지다. “소비되지 못하고 녹슬어가는 것도/ 이 시절에 우리가 소비되는 방식”(이은래, 「이 시절에」, 《푸른사상》 2020년 가을호)의 하나가 되었다.
조금 유명했던 사람이 마흔둘에 죽어서 그를 알던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다 (중략) 그 사람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주도하여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글을 여러 사람에게 받아 추모 도서를 냈다 그 책의 출간 파티가 있었다 그가 죽었을 시기에 한국은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인해 상점이 저녁 10시까지만 열었고 5인 이상 집합 제한이었고 (중략) 코로나19 이전에는 출간 파티가 열리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갈 때 길에서 택시 기다리는 것도 일이었는데 이렇게 10시에 헤어지니 좋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아냐면
시간이 흘러
추모 도서가 절판이 되고 그때 출간 파티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날 10시 전에 헤어져야만 해서 어땠나고
참 깔끔한 행사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일찍 헤어져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일찍 헤어져서 집에 가서 누워서 추모 도서를 읽으며 그를 추모하며 꺼이꺼이 울었다는 사람이 있었고
조금 울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사랑하는 내 남편 당신의 추모 서적 출간 파티는
산뜻하게 기억되고 있어요
좋죠
―김승일, 「추모 도서 출간 파티」, 《문장웹진》 2021년 4월호
실제로 “코로나19 이전에는 출간 파티가 열리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갈 때 길에서 택시 기다리는 것도 일이었”다. “상점이 저녁 10시까지만 열었고 5인 이상 집합 제한”이었던 시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출간 파티에서 “평균 맥주 2잔씩을 마시고” “10시에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아쉬”워 하기보다는 너나없이 “깔끔”하고 “산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적 화자인 고인의 아내 생각은 다른 것 같다. 그녀는 출간 기념회가 새벽까지 이어진다면 여러 가지 사정이 복잡해질 것 같아 “10시에 헤어지니 좋네”라고 생각했던 것일 텐데, 나중에 알게 된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고 있기 때문이다.
‘추모’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잊지 않음’이다. 시절이 이러하니 강제적으로 “10시에 헤어져야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터. 하지만, “일찍 헤어져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일찍 헤어져서 집에 가서 누워서 추모 도서를 읽으며 그를 추모하며 꺼이꺼이 울었다는 사람”에게서조차 아쉬움보다는 일찍 헤어져서 집에 ‘편히’ 누워 추모 도서를 읽을 수 있었던 사실에 더 마음이 끌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내 남편 당신의 추모 서적 출간 파티는/ 산뜻하게 기억되고 있어요 좋죠”라는 대목이 유니크한 것은 그 속에 진정한 ‘추모’ 대신 어느덧 인스턴트 격식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았다는 내포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의 “좋죠”에 담긴 미세한 감정의 파동으로 미루어 시인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멀리 계셔서 지금 안 보이고
오래 쉬셔서 오늘도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아주 인연 끊으시지는 아닌 것 이제 깨달았으니
용서해주소서, 하느님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르옵니다
―조창환, 「마스크 안의 기도」 부분, 《시인시대》 2021년 봄호
오, 도미누스dominus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언제 오시렵니까.
―전선용, 「전염, 그 현상에 대하여」 부분, 웹진 《시인뉴스포엠》 2022년 2월
만두 가게에서는 만두를 팔고 찰옥수수는 팔지 않고 분식집에서는 떡볶이를 팔고 찰옥수수는 팔지 않고 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찰옥수수를 사지 않아도 되는
아주 그리운 일상
―장우원, 「사회적 거리두기 2.5」, 《시와문화》 2020 겨울호
지구상에서 인간이 보잘것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된 것은 코비드-19의 긍정적인 면이 아닐까.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신을 향해 「마스크 안의 기도」에서와 같이 회개를, 「전염, 그 현상에 대하여」와 같이 절규를 바친다. 현재의 고통을 신의 섭리로 알고 용서를 구하며, 신의 자비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이다. 이 기도에는 숭고함이 있다. ‘나’를 비롯해 ‘우리’를 신 앞에 나란히 부복시킴으로써 우리를, 이웃을, 국가를, 더 나아가 인류를 공동운명체로 만들기 때문이다. 세속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회적 거리두기 2.5’가 시행되었을 즈음, 길을 사이에 둔 “만두 가게”와 “분식집”이 각각 “만두”와 “떡볶이” 대신 “찰옥수수”를 팔고 있다면 우리는 대략 세 가지의 태도 중 하나를 취하게 될 것이다. 무관심하거나, 둘 중 한 군데서 옥수수를 사거나, 시적 화자처럼 두 집 모두를 오가며 옥수수 사주기.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그들이 동종의 옥수수로 경쟁하지 않는 “아주 그리운 일상”을 기원하는 마음에도 숭고는 깃든다.
그러나 2021년이 되면서 과녁에 집중하는 양궁 선수처럼 코비드-19에 집중하던 리얼리즘 성향의 시들이 과녁 외적 요소들도 살펴보고, 유머와 미학적 감각도 덧입히고, 주제도 문체도 가벼워지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코비드-19의 옆구리, 그림자, 혹은 뒷모습 같은 것들이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이었다.
매일 하는 코로나19 브리핑 뉴스에서, 정은경 청장이나 무슨 본부장 어느 반장이 아픈 사람들처럼 현황, 주의, 당부 말씀 전할 때 옆에서,
노란 점퍼도 안 입고 마스크도 없이 수어사가, 위험천만의 표상처럼 아픈 자연처럼, 표정과 손짓과 몸짓으로, 그러니까 온몸으로 연기가 날 듯 온몸을
전달한다 그 침묵에 아- 하고 탄식, 탄식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말문이 콱 막히면 몸이 비상이 나서 통째로 출동하는구나 싶다가도 자꾸,
놓쳐요 그이는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못 들어요 정청장은 방역 교과서고 수어사는 불타는 방역 교과서인데도, 불이 눈앞에서
픽, 픽, 꺼지는 거, 이게 내 상태다 너무 급한 건 더뎌 나는 본래 귀머거리, 나는 드디어 눈 뜬 장님, 청장 브리핑 마치고 내려올 때 수어사들도,
교대합니다 교대하는 그 모습 힐끗, 안 보고선 채널 돌리는 내 눈곱 낀 눈에 딴 노란 점퍼 등장하고, 수어사 조용하고 폭발적인 몸부림 준비하느라 잔뜩
긴장한 얼굴, 그이는 말을 알아요 그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처럼 말 모르러, 진저리치며 떠나 간다 온통 출동합니다, 신음 한점 없는 자연처럼
―이영광, 「자연처럼」 전문, 《창작과비평》 2021 여름호
청각 및 언어 장애인들을 위해 “표정과 손짓과 몸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수어사”는 수어통역사를 줄인 말이다.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가 정례브리핑을 마련하는 것은 질병으로 인한 국가적 재난이 발생한 시점으로, 최근 2년 이상을 매일 같이 대국민 브리핑을 하게 된 건 아마도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수어사가 대중 앞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된 것도 이와 때를 같이한다. 이제 “정은경 청장이나 무슨 본부장 어느 반장” 등이 발표하는 내용을 TV의 한 화면 안에 나란히 서서 “전달”하는 수어사는 우리에게 낯익은 직업이 되었다. 그러나 시에 수어사가 등장한 적이 언제 한 번 있었던가.
이 시는 수어사가 통역하기 위해 등장하는 순간을 “말을” 아는 수어사가 “말 모르러” “온통 출동합니다”라고 표현했다. 말을 소거한 채 “온몸으로” “통째로 출동하는” 일은 수어사가 온몸을 통역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확진자와 위급환자, 사망자 수에 대한 통계를 “위험천만의 표상처럼” 전할 때와 “아픈 자연처럼” “표정과 손짓과 몸짓으로”만 연기(煙氣)가 날 정도로 자신도 모르게 “불타는” “연기(演技)”에 몰입하는 상태는 동시적이다. 수어사의 그 “조용하고 폭발적인 몸부림”과 “신음 한점 없는 자연”의 동일시가 압권인 이 시에서 정작 흥미로운 것은 연(聯)의 의도적인 배치다. “현황, 주의, 당부 말씀 전”하는 “노란 점퍼”들과 그 “말씀”을 통역하는 “수어사”의 동작들이 TV 시청자인 “나”의 의식의 들락거림에 의해 ‘해요’ 체와 ‘하다’ 체를 오가며 분절되기 일쑤인데, 이런 어수선함이 시의 무게를 덜어내는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것.
―석봉이한테 담배 주지 마시오
코로나19로 찾는 이 없는 무료급식소
먼지만 뒤집어쓴 냉장고 옆 다리 기둥에
아주 단호하게 새긴 글씨 쳐다보다
뜨끔, 담뱃불에 손이 데일 뻔했다
―김이하, 「당부」 부분, 《동안》 2021년 가을호
시가 시의 옆구리를 슬쩍 치면서 어퍼컷의 효과를 내듯, 부차적 인물이나 대상에 초점을 맞추면서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은 시의 특성 중 하나다. 그러나, 코비드-19 관련 시에서는 흔치 않다. 이 시는 “코로나19로 찾는 이 없는 무료급식소”가 주인공이 아니라 “무료급식소”의 “먼지만 뒤집어쓴 냉장고”하고도 그 “옆 다리 기둥”에 내걸린 ‘당부’가 주인공이다. 그 ‘당부’ 글을 보기 전에 화자가 이미 “석봉이한테 담배”를 주었던 일을 내심 들켰다는 듯 “뜨끔, 담뱃불에 손이 데일 뻔했다”는 정황이 웃음을 유발한다. 유머 펀치 어퍼컷이다.
모니터에는 개체 수에 맞는 줌(zoom) 창이 섬네일로 떠 있다. 사각형 안에 작은 사각형들이 다수 들어 있다. 하나의 사각형 안에는 하나의 벼랑을 마주한 한 사람이 하나의 벽처럼 서 있다. 그러한 사각형들의 집합을 띄운 거대한 모니터가 모니터 창시자 앞에 떠 있다. (중략) 한 세트의 창이 닫히고 모니터에 새로운 줌창이 오픈 대기중이다. 이 시는 절벽 위, 신발 한 켤레 아래 놓여 있었다. 메모지와 펜부터 꺼낸 그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신이 관심을 가지고 줌인을 한다.
―김효은, 「코로나 시대에 신은 줌(zoom)놀이를 한다」 부분, 『현대시』 2021년 9월호
“신”을 호출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신”은 인간의 탄원을 들어주거나 죄를 사해주는 종교적 의미의 절대자가 아니라 “모니터 창시자”와 동일시되는 존재다. “모니터 창시자”는 “줌창”을 주도하는 인간과 다시 동일시됨으로써 “신”은 줌으로 상징되는 기계 조작 능력이 탁월한 인간 그 누구, 혹은 줌이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재택근무, 실시간 온라인 수업, 화상회의 등 원격으로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신은 죽음(“이 시는 절벽 위, 신발 한 켤레 아내 놓여 있었다. 메모지와 펜부터 꺼낸 그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야 “관심을 가지고 줌인을 한다.” 비정한 신은 또한 게이머일 수도 있다.
봄에 신촌에서 만납시다 벚꽃 대국 함 가시죠 난 흑돌 진심으로 빛나는 까망 털은 길러도 좋구요 탈이요? 요즘은 마스크죠 백돌 같이 순백의 KF94가 먹어줍니다 대접 커피요? 독수리다방 대접 커피 말씀하시는 건가요? 진심 모르시나 본데 음악다방은 한물갔죠 정 그러시다면 통 크게 별다방 아메리카노 473ml 그란데 테이크아웃으로 쏘겠습니다 그런데 그란데가 뭐냐구요? 진심 모르시나 본데 미래와 음악다방은 한물갔다니까요 요즘 대세는 변이죠 미친 거 아니냐구요? 다행이네요 난 진심으로 울부짖는 돌멩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스트랄한 이 별에서 대접이나 받겠어요? 봄에 신촌에서 만납시다 마스크 대국 함 가시죠
―안현미, 「변신마스크」 전문, 웹진 《비유》 2021년 2월호
표면적으로 이 시는 노골적인 언어유희(pun)를 통해 벚꽃놀이를 권유하면서 “봄”에 대한 기대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면적으로 바둑에서 “흑돌”과 “백돌”의 “대국” vs 바이러스와 인간의 “대국”을 병치하듯, 표면의 명랑과 이면의 “울부짖”음을 대비하거나 비교하는 방식으로 시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탈/털, 탈/마스크, 백돌/순백의 KF94, 독수리다방 대접 커피/별다방 아메리카노, 그란데(473ml 사이즈를 일컬으면서 ‘그런데’의 방언이기도 함)/그런데, 대세/변이, 대접(그릇)/대접(待接), 아스트랄/별. 결국 “벚꽃 대국”이 “마스크 대국”임을 밝힘으로써, “봄에 신촌에서 만”나보았자 “마스크”의 행렬밖에 만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미래와 음악다방은 한물갔다”에서처럼 “변이”가 “대세”일 뿐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는 뼈아픈 현실을 이런 유희 속에 담아내다니!
반란이 시작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Ea21c에서
반란의 씨앗은 저 멀리 Cco19 행성에서 온 것일까
구구한 의문은 박쥐의 날개를 타기도 하고
천산갑의 등을 타기도 했다
사실은 Ea21c로 진화되기 전 Ea18c 시절부터 반란의 기운이 증기기관차의 연기를 타고 스멀스멀 곳곳으로 퍼지기 시작했 지만 모두 손뼉 치고 따라 하느라 충혈된 손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눈채치지 못했고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김은후, 「어처구니 보고서」 부분, 《우리시》 2021년 10월호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인류의 안녕을 위해 필요충분조건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발전시킨 과학이지 않은가. 그런데 단숨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제압당하고 오히려 그 원흉으로 내몰리게 되기까지 겨우 2년 남짓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과학의 실체는 무엇인가. 산업혁명을 추동한 저 18세기(“Ea18c”)의 “증기기관차”가 “반란의 씨앗”을 품고 달려와 문명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일기 시작했던(“눈치채지 못했고 눈치채지 못한 척”한) 20세기 중반을 관통한 후 21세기(“Ea21c”)의 초입에서 쿠데타라도 일으켰다는 것인가. “박쥐”와 “천산갑”은 우리가 직면한 재난에 있어 단지 조연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이 모든 종말과 파멸의 주범은
산불도 폭염도 미세먼지도 오존층도 아닌
태풍과 토네이도와 사라져가는 종다양성도 녹아가는 빙하도 아닌
박쥐도 천산갑도 멧돼지도 고양이도 아닌
사스도 메르스도 에볼라도 코로나19도 아닌
진실과 오랫동안 비대면해온
인간 그 스스로이다
우리가 끝내 우리의 유한한 삶과
무한한 세계에 대한 무한한 무지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한 도미노처럼 쓰러져가는
세계의 재난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파국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송경동, 「비대면의 세계」 부분, 《창작과비평》 2021 봄호
세계는 현상과 본질로 이루어졌다. 이 시의 제목은 이 두 가지를 중의적으로 포괄한다. ‘비대면의 세계’에서 현상이란 비대면 강의, 비대면 진료, 비대면 공연에서처럼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진행하는 어떤 상황들의 총체다. 반면 본질이란 “인간”이 “진실과 오랫동안 비대면해” 왔다는 것, 곧 인간 자신과 비대면한 결과로서의 최종 원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시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이 원인이 되어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현상이 원인이 되어 현상이 발생한다는 식의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산불”에서 “코로나19”까지의 현상들이 “이 모든 종말과 파멸의 주범”이라고 책임을 미룰 뿐, 그 원인과 책임에서 “인간”을 제외한 채 인간을 직시하는 걸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우리는 “무한한 세계에” 대해 “무한”하게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세계의 재난”과 “파국”은 “끊이지”도, “멈추지”도 않을 것이라고 시는 경고한다.
현재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듭하며 전혀 새로운 종으로 진화함으로써 예전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수고를 무위로 만들고 있다. 정책적으로 ‘위드 코로나(with korona)’가 선택되었지만, 바이러스의 진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미지수다. 더불어 인간의 삶과 동행하는 시의 행로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의 본령이 “재난”과 “파국”을 반복 재현하는 “재난”과 “파국”은 아니라는 것만은 엄연한 진실이다.
주의와 당부의 말씀 드리며, 이상으로 2020년 하반기부터 2022년 2월까지 생산된 시들에 대한 비정례브리핑을 마치겠다. 코비드-19시대에 ‘마스크를 쓴 시’를 쓰신 모든 시인과, 이 글에 영감을 준 25편의 시,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한다.
*「코비드-19시대 마스크를 쓴 시들」(《예술가》 2020년 가을호)은 코로나19의 발병 이후 약 6개월 동안 지면에 발표된 관련 시를 대상으로 쓴 글이다. 「코비드-19시대 마스크를 쓴 시들, 그 이후」는 선행 평론의 2부에 해당하는 글로서, 여기에서의 ‘이후’는 2020년 7월부터 2022년 2월까지 약 20개월에 해당한다.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코로나19 에술로기록’ 사업 결과물로 제출했던 작품임.
―월간 《우리詩》 2022년 5, 6월에 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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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숙 | 1991년 《문학예술》로 시 등단. 2017년 《시와세계》로 평론 등단. 시집으로 『詩와 호박씨』 『히스테리 미스터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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