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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고전읽기 자료입니다.
Ⅳ
그리스의 씨족
그리스 인들은 펠라스기 족과 기타 이와 같은 계열의 민족들처럼 이미 선사 시대부터 아메리카 인과 같은 유기적 계열에 따라 편성되어 있었다 : 씨족, 프라트리, 부족, 부족 동맹, 프라트리는 도리스 인의 경우처럼 없을 수도 있었다. 부족 동맹은 아직 어디서나 형성되어 있을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씨족이 단위였다. 그리스 인들이 역사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이미 문명의 문턱에 서 있었다 ; 그들과 위에서 말한 아메리카의 부족들 사이에는 두 개의 큰 발전 시기가 가로놓여 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므로 영웅 시대의 그리스 인들은 이로쿼이 족보다 앞서 있다. 따라서 그리스 인들의 씨족도 결코 이로쿼이 족의 태고 형태일 수 없다. 군혼의 흔적은 현저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모권제는 이미 부권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 이에 따라 발생 중에 있던 사적 부는 씨족 제도에 첫 번째 균열을 만들었다. 두 번째 균열은 첫 번째 균열의 자연적 결과였다 ; 부권제가 도입되면서 부유한 여자 상속인의 재산은 그녀의 결혼과 함께 그녀의 남편이, 요컨대 다른 씨족이 차지하게 되어 씨족법 전체의 기초가 파괴되었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그 여자의 재산을 자기 씨족 내에 보존하기 위해 처녀가 자기 씨족 내에서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의무적인 것(112)이 되었다.
그로트의 그리스사에 따르면, 특히 아테네의 씨족을 결속시킨 것은 다음의 것들이었다:
공동의 종교적 제사와 그 씨족의 시조로 추정되는 특정의 신을 모시는 제관의 배타적 권리. 이 신은 이 자격으로 특별한 별명으로 불렸다.
공동 묘지(데모스테네스의 『에우불리데스』를 참조하라).
상호 상속권.
서로 돕고 보호하고, 위해가 닥쳤을 때 서로 지원할 의무.
일정한 경우에, 특히 처녀가 고아이거나 여자가 상속인인 경우에 씨족 내에서 결혼할 상호간의 권리 및 의무.
적어도 약간의 경우에, 씨족 자신의 아르콘(수장)과 출납인을 두고 공유 재산을 소유하는 것.
그리고 몇몇 씨족들이 프라트리로 결합되기는 하였지만, 씨족만큼 긴밀하지는 못했다 ;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유사한 상호간의 권리와 의무, 특히 일정한 종교적 행사의 공동 거행, 프라트리원이 살해당했을 경우의 소추권 등을 보게 된다. 또 한 부족에 속하는 프라트리들 전체는 귀족(에우파트리데) 중에서 선출된 필로바실레우스(부족장)의 주재 하에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공동의 신성한 제전을 거행하였다.
이상은 그로트가 설명한 것이다. 맑스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의 씨족을 통하여 야만인(예컨대 이로쿼이 족)이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연구가 좀더 진전되면 야만인의 모습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즉, 그리스의 씨족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도 가지고 있다:
7. 부권제에 의해 혈통을 따지는 것.
8. 여자 상속인의 경우를 제외한, 씨족 내 결혼의 금지.
이러한 예외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법칙으로 정해 두고 있다는 것은 옛날의 규칙이 통용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여자는 결혼하게 되면 그녀가 속한 씨족의 종교적 제식祭式을 버리고 남편의 그것을 따르며 남편의 프라트리에 그녀도 편입된다는 원칙이 일반적으로(113) 통용되고 있었던 것에서도 추론된다. 이를 보더라도, 또 디캐아르쿠스의 유명한 한 구절을 보더라도, 씨족 외부에서의 결혼이 규칙이었다. 그리고 베커는 『카리클레스』에서 누구도 자기 씨족 내에서 결혼할 수 없었다고 단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9. 씨족에 편입시킬 권리 ; 이것은 가족에 편입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공개적인 수속을 밟아야 했으며 또 예외로서만 이루어졌다.
10. 수장을 선출하고 해임할 권리. 각 씨족이 각자의 아르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 그러나 이 직무가 특정한 가족에게 세습된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미개 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엄격한 세습제가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 추측이다. 이것은 부자와 빈자가 씨족 내부에서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상태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로트뿐만 아니라 니부르, 몸젠, 그리고 기타 고전적 고대를 다룬 종래의 모든 역사가들은 씨족이라는 암초에 부딪쳐 좌초하였다. 그들은 씨족의 많은 특징들을 올바르게 기록하였고, 또 씨족을 언제나 가족들의 집단으로 보았는데, 바로 그러한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씨족의 본성과 기원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족은 씨족 제도 하에서는 결코 조직 단위가 아니었으며,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는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두 씨족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씨족은 그 전체가 프라트리에 소속되어 있었고 프라트리도 그 전체가 부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 가족의 절반은 남편의 씨족에, 나머지 절반은 아내의 씨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국가도 공법상으로는 가족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은 오늘날까지도 사법에서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종래의 모든 역사 서술은, 특히 18 세기에 불가침의 것이 된 터무니없는 전제, 요컨대 문명보다 별로 더 오래된 것도 아닌 일부일처제 개별 가족이 핵이 되어 사회와 국가가 점차적으로 그 핵을 중심으로 결정을 이루어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맑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로트 씨에게 또 지적해 주어야 할 것은, 그리스 인들이 자기 씨족의 기원을 신화에서 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씨족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저 신화보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신들과(114) 반신半神들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그로트는 높은 명성의 소유자이고 또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증인이었기 때문에, 모건은 그를 즐겨 인용하였다. 그로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테네의 각 씨족에게는 그들의 상상 속의 시조에게서 유래하는 이름이 있었다. 솔론 이전에는 모든 경우에 그리고 솔론 이후에도 유언이 없는 경우에는, 사망자의 씨족원들(gennetes)이 그의 재산을 상속하였다. 그리고 살인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우선 피살자의 친척에게, 그 다음에는 씨족원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같은 프라트리원에게 범인을 재판소에 소추할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가장 오래된 아테네의 법률에 대해서 우리가 듣는 것은 모두 씨족과 프라트리로의 구분에 기초하고 있다.”
씨족들이 공통의 시조의 혈통을 잇는다는 사실은 “탁상 공론이나 하는 속물들”(맑스)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당연히 씨족의 시조란 순전히 신화적인 존재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서로 병존하고 있는, 원래 친족 관계가 전혀 없는 가족들로부터 어떻게 씨족이 성립했는가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래도 그들은 씨족의 존재만이라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허튼 이야기들을 반복하는데, 그 이야기들은 결국 다음의 명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 계보는 허구지만, 씨족은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로트에 와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삽입은 맑스의 것−가 나오기에 이른다:
“우리가 이 계보에 대해서 듣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왜냐하면 계보가 공표되는 것은 다만 일정한 경우, 특히 의식이 거행되는 경우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미한 씨족들은 그들 공통의 종교적 행사를 갖고 있었고” (기묘하군요, 그로트 씨!) “공통의 초인간적적인 시조와 계보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명한 씨족들의 경우와 똑같았다”(이 얼마나 기묘합니까, 그로트 씨, 미미한 씨족에서 그러하다니!) ; “그 기본 구도와 관념적 기초”(선생,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입니다. 독일어로 말하면 fleischlich한 것입니다!)(115)“는 모든 씨족들의 경우에서 동일하다.”
이에 대한 모건의 대답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원시 형태의 씨족−그리스 인들에게도 다른 유한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한때 이러한 형태가 있었다−에 상응하는 혈연 체계는 모든 씨족 구성원 상호 간의 친족 관계에 대한 지식을 보장해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혈연 체계를 유아기 때부터 실천을 통해서 습득하였다. 일부일처제 가족이 출현하면서 이것은 잊혀지게 되었다. 씨족명은 하나의 계보를 만들어 냈다. 여기에 비하면 개별 가족의 계보는 중요치 않은 것으로 보였다. 씨족명을 이름으로 하는 사람은 같은 혈통이라는 사실을 보장하는 것이 이제 이 씨족명의 역할이 되었다 ; 그러나 씨족의 계보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씨족원은, 비교적 근래의 공통의 선조를 둔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자기들 상호간의 실제적인 친족 관계를 더 이상 증명할 수 없었다. 편입시키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름 자체가 공통의 혈통을 갖는다는 증거, 그것도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와 반대로 씨족을 순전히 상상의 창작물로 바꿔 버리는 그로트와 니부르처럼 씨족원들 간의 일체의 친족 관계를 사실상 부인하는 것은 ‘관념적인’, 즉 책상물림의 율법학자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세대의 연쇄는 특히 일부일처제의 출현과 더불어 아득히 먼 과거의 일이 되고 과거의 현실은 신화적 환상에 반영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우직한 속물들은 환상적인 계보가 현실의 씨족을 창조했다고 결론지었으며 지금도 그렇게 결론짓고 있다!”
프라트리는, 아메리카 인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몇 개의 딸 씨족으로 분열되어 그것들을 통합하고 있는 모씨족이었다. 그리고 이 모씨족 덕분에 모든 딸 씨족들이 공동의 시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예컨대 그로트에 따르면,
“헤카테우스 프라트리에 속하는 당대의 모든 성원들은 동일한 신을 자신들의 16 대 시조로”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프라트리 내의 모든 씨족은 문자 그대로 형제 씨(116)족이었다. 프라트리는 호머에서는, 즉 네스토르가 아가멤논에게 충고하는 저 유명한 구절에서는, 아직 군사적 단위로서 나타나고 있다 : 프라트리는 프라트리대로 부족은 부족대로 정렬시켜, 프라트리가 프라트리를 원조하고 부족이 부족을 원조하도록 하라. −그 밖에 프라트리는 프라트리원에게 저질러진 살인죄에 대해서 소추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전에는 프라트리가 피의 복수의 의무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프라트리는 공동의 성전과 제사를 갖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 전체는 사실 고대 아리아 인의 전래의 자연 숭배에서 형성되어 나온 것인바, 이러한 형성과정을 본질적으로 규정한 것은 씨족과 프라트리였으며, 그것들 내부에서 이러한 형성이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프라트리에는 한 사람의 수장(phratriarchos)이 있었고, 또 드 꿀랑제에 따르면, 회의, 구속력 있는 결정, 재판권, 행정권 등이 있었다. 씨족을 무시했던 후대의 국가도 프라트리에 일정한 공적 직무의 집행을 허락하였다.
부족은 친족 관계에 있는 몇 개의 프라트리로 이루어진다. 아티카에는 네 개의 부족이 있었고, 각 부족에는 세 개의 프라트리가 그리고 각 프라트리에는 삼십 개의 씨족이 있었다. 각 집단이 이렇게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려면 자연 성장적으로 성립된 질서에 대한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간섭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언제,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그리스 역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리스 인 자신이 그리스 역사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영웅 시대 이후의 것들뿐이다.
비교적 좁은 영역에 밀집해서 살았던 그리스 인들의 경우에는 광대한 아메리카의 삼림에서만큼 방언의 차이가 발달하지 않았다 ; 여기서도 우리는 동일한 주요 방언을 쓰는 부족들만이 하나의 거대한 전체로 통일되었으며, 작은 아티카에서조차 특수한 방언이 쓰였음을 본다. 후에 보편적 산문어로서 지배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이 아티카의 방언이다.
호머의 시에서 우리가 보는 그리스의 부족들은 대개 이미 작은 부족 집단으로 통일되어 있었으나 씨족, 프라트리, 부족들은 그 내부에서 아직 그 자주성을 완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었다 ; 가축 떼와 전야 경작이 확대되고 수공업이 시작되면서 인(117)구가 증대하였다; 그와 함께 부의 차이가 증대하였고 또 그와 함께 옛날의 자연 성장적 민주주의 내부에 귀족적 요소가 성장하였다. 각각의 소부족단은 가장 좋은 지대를 점유하기 위해 또 당연히 전리품을 얻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수행하였다; 포로 노예제는 이미 공인된 제도였다.
이 부족들과 소부족단의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1. 상설적 기관은 평의회, 즉 불레 bule 였다. 이것은 원래는 아마도 씨족의 수장들로 구성되었겠지만, 후에 인원이 많아지면서부터 그중에서 선발된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이로써 귀족적 요소가 형성·강화되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사실 디오니시우스도 영웅 시대의 평의회는 귀한 신분의 사람들(kratistoi)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숨김없이 말하고 있다. 평의회는 중요 사안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예컨대 애쉴로스의 작품을 보면, 테바스의 평의회는 에테오클레스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장례를 치르지만 폴뤼니케스의 시체는 내버려서 개밥이 되게 하는, 당면 사태에 대해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후에 국가가 수립되면서, 이 평의회는 원로원으로 변했다.
2. 민회(agora). 우리는 이로쿼이 족의 경우에서, 남녀 인민이 평의회에 입회하여 정돈된 방식으로 토론에 참가하여 평의회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을 보았다. 호머가 묘사한 그리스 인의 경우에 이 ‘입회인’−고대 독일의 재판소 용어로 하면−은, 원시 시대 독일인들의 경우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미 완전한 민회로 발전해 있었다. 민회는 중요한 사안의 결정을 위해 평의회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 남자는 누구라도 발언할 수 있었다. 결정은 거수(애쉴로스의 『구조를 요청한 여자들』)나 갈채로 이루어졌다. 민회의 결정은 종국적인 지고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쇼에만(『고대 그리스』)이 말하고 있듯이,
“인민의 협력이 있어야만 수행할 수 있는 일이 문제가 될 때에 인민의 의지에 반하여 인민에게 그 일을 강제할 수단에 대해 호머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
기 때문이다.(118)
청년의 모든 남자 부족원이 전사였던 시대에는 인민과 대립할 수 있는, 인민으로부터 분리된 공적 권력이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 성장적인 민주주의는 아직 전성기에 있었다. 그리고 평의회나 바실레우스의 권력과 지위를 판단함에 있어 언제나 이 점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3. 군사 지휘자(바실레우스) 이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대다수가 군주의 타고난 종복인 유럽의 학자들은 바실레우스를 현대적 의미의 군주로 만든다. 이에 대해 양키-공화주의자 모건은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유들유들한 글래드스턴과 그의 『세계의 청춘』에 대해서 극히 빈정대는 어투로 그러나 또한 적절하게 이렇게 말한다:
‘글래드스턴 씨는 우리에게 영웅 시대 그리스의 수장들을 군주들로 소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신사들이기도 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다음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장자 상속의 관습 또는 법률은 충분히 명확해 보이지만 아주 명확해 보이지는 않는다고 여겨진다.’
아마 글래드스턴 씨 자신에게도, 충분히 명확하긴 하되 너무 명확하지는 않다는 단서가 붙은 장자 상속권은 있으나마나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로쿼이 족과 기타 인디언들의 경우에 수장직의 세습이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를 보았다. 모든 공직은 대개 씨족 내에서의 선거에 의한 공직이었으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씨족 내에서 세습되었다. 자리가 비었을 때에는 가장 가까운 씨족 내 친족이−형제가 혹은 자매의 아들이−, 배제될 이유가 없는 한 순차적으로 선택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권제 하의 그리스 인들의 경우에 바실레우스의 직무가 아들에게 또는 아들들 중의 한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이 통례였다 하더라도, 이는 이 경우에 아들들이 인민의 선거에 의해 후계자가 될 공산이 컸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인민의 선거에 의하지 않는 세습제가 법률상 유효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로쿼이 족의 경우건 그리스 인의 경우건 씨족 내부에 움튼 특별한 귀족적 가족의 최초의 맹아를 보게 되며, 더욱이 그리스 인의 경우에는 장래의 세습적 지배권 또는 군주제의 최초의 맹(119)아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 인의 경우에서 바실레우스는 인민에 의해 선출되어야 했거나 혹은 적어도 로마의 ‘왕’(rex)처럼 인민이 승인한 기관−평의회 또는 아고라−에 의해 확인되어야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리아드』에서 병사들의 통솔자 아가멤논은 그리스 인의 최고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한 도시를 포위한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 인들 사이에 반목이 생겼을 때, 오딧세우스가 다음의 유명한 구절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아가멤논의 이러한 자격이다: 지휘하는 자가 여럿인 것은 좋지 않다. 사령관은 한 명이 좋다 등등(이 구절에 이어서 나오는, 널리 인용되는 왕위에 관한 시구는 후세의 가필이다). “오딧세우스는 여기서 통치 형태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는 최고 사령관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 시를 포위했을 때는 그저 군인으로서만 나타나는 그리스 인도 아고라에서는 충분히 민주주의적으로 활동하였다. 아킬레스는 선물, 즉 전리품의 분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아가멤논뿐 아니라 그 어떤 다른 바실레우스도 분배자로 보지 않고 ‘아카이아의 아들들’, 즉 인민을 분배자로 본다. 제우스에게서 났다던가 제우스에 의해 길러졌다던가 하는 술어들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느 씨족이나 하나의 신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부족장의 씨족은 확실히 ‘더 고귀한’ 신−이 경우에는 제우스−을 시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양돈업자 에우마에우스 등등과 같은 인신적 비자유인조차 ‘신적’(dioi와 theoi)이다. 더욱이 이것은 『오딧세이』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일리아드』보다 더 후세의 일이다; 바로 그 『오딧세이』에서는 전령관 물리오스에게도 맹인 가수 데모도코스에게도 영웅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요컨대 그리스의 저술가들이 호머의 이른바 왕권을 가리키기 위해 쓰는 바실레이아라는 말은 (군사 지휘자라는 직책이 그 주요한 특징이기 때문에) 평의회 및 민회와 아울러−군사적 민주주의를 의미할 뿐이다.”(맑스.)
바실레우스는 군사적 직권 외에, 제관 및 재판권의 직권도 가지고 있었다; 후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전자는 부족 또는 부족 동맹의 최고 대표자로서 그 자격에 의해 주어지는 직권이다. 민사적, 행정적 권한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이야기되는 바 없다; 그러나 바실레우스는 직무상 평의회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실레우스를 Konig로 번역하는 것은 어원적으로 완전히 옳다. 왜냐하면 Konig(kunnig)는 kuni, kunne에서 유래하며 씨족의 수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바실레우스는 Konig라는 말의 오늘날의 의미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투키디데스는 옛날의 바실레이아를 명시적으로 파트리케patrike’라고, 즉 씨족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부르면서, 바실레이아는 확정된 따라서 제한된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웅 시대의 바실레이아는 자유민에 대한 지휘직이었고, 바실레우스는 군사 지휘자, 재판관, 최고 제관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실레우스는 후세의 의미에서의 통치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각주9]
이처럼 우리는 영웅 시대 그리스의 제도에서는 옛날의 씨족 조직이 아직 생생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또한 이 조직의 몰락의 여러 단초들도 보게 된다: 자식들에 대한 재산의 상속을 수반하는 부권제, 이로써 가족 내의 부의 축적이 조장되었고 가족이 씨족에 대립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 부의 차이가 세습 귀족과 왕권의 최초의 맹아를 만들어 냄으로써 이 제도에 미친 반작용; 노예제, 처음에는 포로의 노예제에 그쳤으나, 노예제 자체는 이미 같은 부족원 더 나아가 같은 씨족원까지도 노예화시킬 가능성을 이미 열어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옛날의 부족 대 부족의 전쟁이 가축, 노예, 재화에 대한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육지와 해양에(121)서의 조직적 약탈로, 요컨대 정규적인 영리 원천으로 이미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 요컨대 부가 최고의 선으로서 찬미되고 존경받았으며, 옛날의 씨족 제도들은 부의 폭력적 약탈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한 가지만은 없었다: 개인이 새로 획득한 부를 씨족 제도의 공산주의적 전통에 대항하여 안전하게 지켜낼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그토록 경시되었던 사적 소유를 신성화하고 이 신성화야말로 모든 인간 공동체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 점점 발전해 가는 재산 획득의 새로운 형태들 따라서 점점 속도를 더해 가는 부의 증식의 새로운 형태들에 일반적인 사회적 승인의 도장을 찍는 하나의 제도; 이미 시작되고 있던 계급들로의 사회의 분열을 영구화할 뿐만 아니라 무산 계급을 착취할 유산 계급의 권리와 후자의 전자에 대한 지배를 영구화하는 하나의 제도.
그리고 이 제도는 나타났다. 국가가 발명된 것이다.(122)
[각주9] 그리스 인의 바실레우스와 마찬가지로, 아즈텍 인의 군 지휘자도 현대적인 군주로 변조되었다. 처음에는 오해와 과장의 소산이었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날조된 에스빠냐 인의 보고들에 모건은 처음으로 역사적 비판을 가하여 다음의 것들을 증명하였다. 멕시코 인이 미개의 중간 단계에, 그것도 뉴 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것과 왜곡된 보고에 근거하여 판단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제도는 그러한 단계에 상응한다는 것: 세 부족의 동맹이 있었고 이 동맹이 다른 몇 개 부족들을 복속시켜 공납을 바치게 하였으며, 또 하나의 동맹 평의회와 한 사람의 동맹 지휘자가 이 동맹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 동맹 지휘자를 에스빠냐 인은 ‘황제’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출처]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6권, 김세균 감수, 박종철 출판사, 1997, 11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