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서울대미술관에서 일본 에도시대를 주제로 전시를 한 적이 있다. 이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난학蘭學의 실체였다. 대략 17~19세기에 쓰인 박물학 저술들 가운데 섬세한 컬러도판으로 식물이며 동물을 그린 것이 적지 않아 무척 놀라웠다. 이게 난학의 수준이구나, 했다. 그렇게 감탄하면서도 심정이 참 복잡했다. 우리의 잃어버린 300년이 생각나서였을까?
전근세 해양사 분야의 권위자인 김문기 부경대 교수가 「『玆山魚譜』와 『海族圖說』- 근세 동아시아 어류박물학의 갈림길」(『역사와경계』, 101, 2016)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을 반갑게 읽으면서 잊었던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제목의 『자산어보玆山魚譜』와 『해족도설海族圖說』은 서로 다른 책이 아니다. 둘 다 정약전이라는 한 사람이 지은 같은 책이다. 그런데 왜 제목이 다를까? 말하자면 『해족도설』은 애초에 구상했던 책의 제목이고, 『자산어보』는 방향을 틀어 최종 완성된 책의 제목이기 때문이다. 해족도설과 자산어보의 사이, 여기에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다.
동생, 해족도설이란 걸 지어볼까 하네
형님, 글로 자세히 쓰시고 그림은 그만두시지요.
『자산어보』의 저자 정약전과 그의 동생 정약용 사이의 우애는 잘 알려져 있다. 형은 흑산으로, 동생은 해남으로 유배되어 편지를 왕래하며 서로 의지했다. 정약전은 그 까마득한 절해고도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에 대한 전문서를 구상했다. 그것은 바로 그림이 곁들여진 ‘도설圖說’의 형태였다. 정약전은 자신의 계획을 동생에게 전하고 의견을 물었는데 동생이 부정적인 견해를 담아 편지를 보내왔다.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
책을 저술하는 한 가지 일은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매우 유의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해족도설』은 아주 기이한 책으로 이것 또한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도형圖形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로 쓰는 것(文字)이 그림을 그려 색칠 하는 것(丹靑)보다 나을 것입니다. 학문의 종지宗旨는 먼저 그 대강大綱을 정한 연후에 책을 저술하여야 유용하게 될 것입니다.
정약전이 애초에 보냈던 편지는 남아 있지 않다. 위의 정약용의 답장에 대한 반응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림 없이 나온 『자산어보』라는 책이 정약전의 생각을 말해줄 따름이다. 1960년대 말, ‘한국생물학사’를 정리했던 이덕봉은 김려金鑢(1766~1822)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와 더불어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근대과학적 어보의 쌍벽’으로 “실학파의 저술 중 가장 근대과학적인 관찰을 거친 기록”이라고 평가했고 이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한글로 번역된 1970년대 말 이후 『자산어보』에 대한 평가는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심지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판본 비교연구가 진행되었고 급기야 “동아시아 최초의 수산생물 전문서”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까지의 연구는 중국과 일본의 어보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평가를 내린 부분이 적지 않다. 예컨대, “동아시아 최초의 수산생물 전문서”라고 한 평가는 중국과 일본의 어보들을 검토하면 무색할 지경이라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시각적 재현이 없다는 점이다. 왜 정약전은 애초의 계획대로 하지 않았을까. 그간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서였다고 생각해왔다.
이어 논문에서는 『자산어보』의 저자 비정 문제(정약전 외에 공저자 2명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랜 세월 세밀한 관찰에 따른 정확한 지식을, 다른 한 사람은 문헌에 의한 보충을 담당한 듯하다), 명칭이나 묘사 등에서의 원칙과 사례 등을 개괄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손에 잡힐 듯이, 바로 앞에서 보는 듯이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자산어보』의 가장 큰 특징이라 강조한다.
동시대 중국의 학의행과 일본의 탄슈와 비교
자산어보 지나치게 높은 평가
이어 저자는 정약전과 동시대에 살면서 어보를 남긴 중국의 학의행郝懿行(1757~1825)과 일본의 쿠리모토 탄슈栗本丹洲(1756~1834)의 작업과 비교 검토를 시도한다. 가계와 학문, 벼슬, 그 외의 삶의 여건 등을 꽤 자세히 비교한 다음, 정약전의 『자산어보』, 학의행의 『기해착記海錯』, 탄슈의 『율씨어보栗氏魚譜』가 출현하기까지 지식의 흐름을 훑어보는데 매우 자세하고 유용하다. 중국 산둥 반도 해양생물을 기록한 『기해착』에는 해양생물 45종, 해양식물 2종, 광물 2종으로 전체 49종을 싣고 있다. 해양생물에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돌고래, 게, 해파리, 해삼, 담채, 물개, 새우, 굴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학의행은 명칭을 검증하고, 고적을 인용하여 고증하고, 자신의 관찰에 의거하여 평가하고, 이전 사람들의 정오正誤를 판단하고, 자신의 견해를 진술했다. 저자는 이를 전반적으로 살펴본 뒤 몇 가지 한계를 지적하는데, “생물형태나 습성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간략, 과장이 심해 사실과 부합하지 못함” 등으로 볼 때 『자산어보』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자산어보』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약점을 지니고 있다.
정약전이나 학의행이 문인관료였던 것에 반해 구리모토 탄슈는 의사이자 본초학자였다. 총 20권인 『율씨어보』는 5권이 없어져 15권만 전해진다. 여기서 그림만 680점이 실려 있고 채색된 그림들이 매우 사실적이라고 한다. 주로 선어鮮魚를 재료로 그림을 그렸지만 입수가 불가능한 것은 건어乾魚를 사용했고 어떤 경우라도 실체를 성실하게 생생하게 그려냈다. 탄슈의 어보들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오늘날 어류학자들이 그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어떤 물고기를 그렸는지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정약전이나 학의행도 세밀하게 관찰하고, 미비한 부분은 현지사람에게 물어보았던 점은 탄슈와 동일하다. 그들이 탄슈에 못지않은 뛰어난 관찰자였음에도, 그들의 어보에 실린 기록들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그들이 서술하고 있는 해양생물이 오늘날 무엇인지 정확하게 비정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는 사실이다”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바로, 어류지식의 ‘도상화’ 여부였다.
16세기 이래로 유럽의 동물, 식물지식의 체계화에서 도상은 핵심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이 ‘16세기의 문화혁명’에서 배태되었음을 지적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박물학의 전성시대에 등장한 경이로운 박물도감들은 지식의 체계화에 도상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남송대에 활약했던 정초鄭樵는 일찍이 이를 주목해『통지通志』를 저술하면서 “그림(圖)은 날실(經)이고 글(書)은 씨실(緯)이니, 한 가닥의 날실과 한 가닥의 씨실이 서로 섞여서 무늬(文)를 이룬다. 그림은 식물이며 글은 동물이니, 한 식물과 한 동물이 서로 문드러져서 변화를 이룬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자산어보』 중엔 ‘조사어釣絲魚’라는 것이 등장한다. 이에 대한 묘사를 보면 도상이 없을 경우 아무리 묘사가 자세하더라도 쉽게 짐작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사어란 무엇일까? 몸의 일부인 ‘낚시줄(釣絲)’을 늘어뜨려 다른 물고기를 유인하여 잡아먹는 물고기이다. 정약전은 이 물고기의 사냥방법에 깊은 인상을 갖고, ‘낚시하는 물고기(釣絲魚)’라는 한자이름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정약전은 속명을 기입해 두었다. 바로 ‘餓口魚’이다. 사실 우리가 이것이 ‘아귀’라는 것을 알고 글을 보면 모양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 심해어를 쉬이 접할 기회가 없었던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이 글만으로 그 형체를 대충이나마 그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여러 도보에서 아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넣고 있다. 밑에서 본 것, 옆에서 본 것, 낚시줄이 없는 다른 종의 아귀 등을 작은 점 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그렸기 때문에 그림만으로도 이 물고기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탄슈의 『율씨어보』도 마찬가지다. 정약전은 귀상어에 대해서도 매우 공들여 서술해 중국 어보의 설명을 뛰어넘지만, 중국 어보에는 귀상어가 그려진 것이 있다. 설명이 부족해도 그림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윤리학’적 입장이 싹트는
‘생물학’적 입장을 압도하다
탄슈의 『율씨어보』에 실린 물고기 도상
앞서 그간 연구자들이 『해족도설』이 그림 없이 글자만으로 완성된 이유가 그림 그릴 줄 아는 이를 구하기 힘들어서였을 거라고 추정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문자文子 우위의 문화’라는 시대환경이다. 정약용은 『해족도설』을 구상했던 정약전에게 학문의 종지를 지키라고 충고했다. 효제라는 유교덕목을 근본으로 삼는 것, 그것이 학문의 종지였다. 이를 바탕으로 농포農圃‧의약醫藥‧역상歷象‧산수算數‧공작工作 등에 활용되어야 하며, 만약 이를 벗어난다면 저술할 가치가 없었다. 정약용은 윤리학의 입장에서 생물학을 지향했던 형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물고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이 현실의 성리학질서에 어떤 교훈을 주고 기여할 수 있는가였다. 저자는 아래와 같이 최종 결론을 내리며 사라져버린 해족도설을 아쉬워한다.
정약전은 동생의 이런 의견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는 윤리학자이기보다는 생물학자이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동생의 충고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던 것은 두어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홍어가 교합 중에 한 쌍으로 올라오는 것을 설명하면서, “암컷은 먹을 것 때문에 죽고 수컷은 음탕함 때문에 죽는 것이니, 음란함을 탐하는 자들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고 했다. 전복을 설명하면서, 전복을 노리던 쥐가 전복에게 붙잡혀 밀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도적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고 했다.167) 이 두 사례를 제외하면 정약전은 자연과학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그림에 부정적이었던 동생의 충고를 받아들여 해족도설을 포기했던 점이다. 문자(譜)라는 ‘청각’에서 도상(圖)이라는 ‘시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갈림길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요즘 다산 정약용을 실학의 집대성자로 보는 기존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실학의 성리학적 집대성자로 더 좁혀 엄격히 바라보고 있다. 김문기 교수의 이번 논문은 이러한 연구들과 함께 읽고 생각을 갈무리해나간다면 좋을 것이다.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