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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서울이여(6)
"굉장히 무서운 질문입니다. 당시 살아보지 못했고 글로써 보았다던지 이야기를 들은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 바랍니다." 최박사의 꼬리 자르기 말법이 시작된다.
이 증언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김상호씨의 당시 형무소 사건 하나를 예로 들기로 한다.
김회장은 당시 이태원에 육군 형무소가 있었는데 헌병 분대장(일등중사)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진한다는 국군이 어떻게 밀리게 되었는지 육군 형무소는 시흥(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있고 그전에는 도하단이 있었던 자리다)의 보병학교로 이동하면서 수감된 죄수 중 900여명은 가석방하게 되고 사형수 20여명은 즉결처형하게 된다.이때 김회장은 다른 대원6명과 즉결 처형조에 편성되어 서대문 구치소에서 27일 23시경 사형수를 인수받아 한강변에서 처형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흥으로 이동하려 한강 인도교로 가보니 다리가 폭파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도 굳이 꼬리를 달면 한강인도교에서 마포나루까지 해봐야 얼마되지 않아 아무리 사형을 집행하는데 철저하게 은밀하게 집행했다치더라도 그 광폭음을 못들었을리는 없고 아마도 다리를 폭파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라 보는 것이 옳다.
한강을 넘어갈 방법이 없어서 평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빙고 나루터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무려 몇천명의 피난민이 모여 있는데 난리가 났다. 배는 한척이고 가야할 사람은 많고 뒤에는 폭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지 어떻게 하나 김회장이 들고 있는 칼빈총으로 몇발 갈려 시민들을 진정시킨다음 60명 단위로 도강을 시켰다.
6월28일 새벽부터 이튼날 날이 밝을 때까지 그당시 있던 피난민은 도강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박수하 준위와 김덕용상사 등이 타고 나니 김회장과 호의신 대원이 승선할 수 없어서 다음차례에 승선하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그 당시는 비가 많이 내려 한강이 넘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다.
그런데 맞은 편으로 가던 배가 도착지점에 근접해서 그만 전복되어 많은 사람이 강물에 흽쓸려 가고 몇은 헤엄으로 뭍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바라보다 어쩔수 없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고 인근 마을에서 잠시 쉬기로 했는데 눈을 붙이려는 순간 웬 할아버지가 와서 인민군이 바로 앞에 와 있다고 한다. 다시 도선장으로 달려와 저 건너편을 보니 쪽배 한척이 있는데 누가 있는 것 같아서 소리를 질러도 인기척이 없다
그래서 그쪽을 향해 총을 쏘고 한 한시간을 실갱이 하고 나니 누가 일어나는 것같아 빨리 오라 소리질렀더니 배가 왔다. 와서보니 얼마전 전복된 배의 ㅂ뱃사공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잠이 들었던 것이다. 일행은 급히 쪽배를 타고 서빙고 나루터를 떠났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
그리고 영등포를 경유하여 수원으로 내려가 본대와 합류했다고 한다.
그럼 여기서 총살당한 그 20명의 사형수, 하지만 서대문 구치소나 마포구치소등에 수감된 사상범이나 기타 죄수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북한군이 올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다 적 탱크가 들이닥쳐 풀려나와 만세부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많은 수는 이렇게 어쩔수 없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내용을 남기지 않고 있다.
한강변에서 총살된 그 시체는 어떻게 처리 되었을까. 그저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을 뿐!
"이해하시겠씁니까, 그때는 그렇게 죽어간 인원이 많을 겁니다. 지금은 무고한 생명이... ."
바로 전쟁의 소용돌이는 너무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오고 인간을 피폐하게 만든다.
우린 명예의 전당에 들러 묵념을 올리고 전쟁 기념관을 관람했다.
이때 한통의 전화가 왔다. 본인이 수도사 17연대 소속으로 "서울 수복작전간 인민군 16명을 사살해 매장했다."는 이야기로 노량진에 사신다 한다. 우린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나이는 90세를 넘으셨다. 17연대 소속 최00 할아버지라 하신다. 17연대는 옹진반도에서 전투하다 해상 철수한 부대로 미군이 처음 들어와 전투한 수원의 외삼미동 죽미령 전투 후 다음 후퇴하면서 전투 장소가 평택의 갈곶리인데 해상철수 하여 다시 인원을 추수려서 이곳에서 미군과 전투를 하고 다음에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진천의 봉화산-문안산전투와 청주 국사봉 전투 그리고 화령장에서 북한군 1개연대를 묵사발낸 역전의 연대였다.
이 부대는 안강기계전투에서도 8월중순부터 9월초까지 곤재봉전투간 16번의 탈환전을 감행한 용감무쌍한 부대로써 인천 상륙 작전시 편성되어 배를 이용하여 인천으로 상륙하는 한국군 연대로써 해병은 차후 행주산성을 깃점으로 서울의 북서쪽으로 기동하여 지금의 연희동 옆 성산의 104고지에서 그 유명한 연희고지전투를 하며 서울에 입성하여 중앙청에 붉은 깃발을 내리고 다시 태극기를 게양하여 9.28서울 수복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때 17연대는 한강을 따라 동남방향에서 지금의 광진구지역으로 올라서 망우리 공동묘지를 넘어 서울의 동측방을 진격한 부대다.
우린 사육신묘 앞에 게시는 할아버지 한 분을 찾았다. 전화를 하신 분이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떻게 거동은 불편하지 않으신지요?" 지팡이를 짚고 계시는데 차량 이동은 문제 없다고 하신다. 우리는 차에서 달리면서 이야기를 듣기로 하고 차를 화양동 동사무소로 네비게이션을 찍고 달린다. 할아버지는 국방경비대시절부터 군에 들어가 옹진지구에서 갑작스런 적의 기습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돛배를 이용하여 탈출에 성공했다 한다. 배가 인천으로 들어와 함께한 동료들이 모여서 이동중 평택에 본대가 있다하여 그곳으로 가서 합류해 내려간 것이 7월초순인데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수도사단 통제를 받아 진천에서 전투다운 전투를 최초로 했단다.
원래 17연대는 육군직할부대인데 이때 수도사단에 배속 되었다고 한다.
'50년9월10일경까지 안강에서 곤제봉 탈환작전을 하는데 갑짜기 다른 부대가 들어오고 17연대는 빠져서 부산으로 내려가 배 승선 훈련을 받고 9월24일 미7사단에 배속되어 배를 이용하여 인천으로 상륙하여 부평에서 흑석동을 지나 한부대는 지금 강남의 신사동에서 강건너 보광동으로, 한부대는 한남동에서 무학봉으로, 한부대는 하왕십리에서 중랑천을 따라 망우리 공동묘지 방향으로 진격하는데 망우리 방향으로 가는 부대에 편성하였다 한다.
그런데 차량을 이용하여 달려나가고 북한군은 허겁지겁 걸어서 도망치는데 이건 완전히 전세역전이라 그놈들은 대항하지도 않하더라고 한다. 가다가 길옆에 풀속에 숨기도 하고 아예 살려달라 손들고 서 있기도 하고 포로가 얼마나 많이 잡히는지 처치곤란할 지경이 되었단다. 그런데 잡고 보면 대다수 학생들로 낙동강 전투에 끌려왔다 다시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는데 집들이 이천 안동 문경 영동 대전등이었다. 포로처리는 하는 인원들이 있어 인계하고 트럭을 이용하여 한양대에서 중랑천 뚝방을 건너 천호동 방향으로 가려고 지금의 어린이 대공원 못미쳐 마찬가지로 차량으로 이동하다 차가 고장이 났는지 길거리에 서 있던 인원을 20여명 붙잡았는데 신분이 보니 모두 장교였단다.
"몇이 달아나려한다. 그냥 땡겨버려 현장에서 몇이 죽었다."
수없이 죽어간 내 전우들의 원한이 쌓여있는데 누가 쏘라말라할 순간도 없었다. 그랬더니 모두 손들고 꿇어 앉는다. 이미 이들은 무기도 없다. 방망이 수류탄 몇발씩 들고 옷은 그래도 군관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한놈이 수류탄을 잡으려 한다. 바로 칼빈 소총으로 갈겨버려 모두 죽었다. 해는 중천에 떠올라 무덥지근한데 길거리에 피가 낭자하다.
자주 보아온 모습이지만 그래도 약간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중랑천이 옆이고 그때만 해도 밭에 고구마순이 자라고 있고 벼도 자라 한여름이었다. 지나가는 피난민인지 동네사람인지 몇을 데려와 그 개천 둑방 밑으로 집어넣어 버리라 지시하고 떠나갔다 한다.
차는 드디어 화양동 동사무소 앞에 멈춘다. 우린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길거리에 내려 섰다.
"어르신, 이곳이 바로 개천 길이고 저기가 중랑천 입니다." 그때는 조그만 다리가 있었다 한다. 그 자리에 지금 교량이 있는데 크기가 3~4배는 되었다. 그러니 뚝방 밑이라 해야 다 복개되고 위치만 명확하지 흔적은 찾을 길 없다. 옆에 지나가는 나이드신 할아버지 한분을 불러 혹시 고향을 물으니 전라남도 완도라 한다.
"왜 고향을 물어보슈?" "네, 다른 의미는 없고 혹시 이동네에 오래 사셨는가 해서요. 6.2전쟁때 이곳에서 전투를 했고 아군도 죽고 북한군도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분이 그때 여기서 서울수복 당시 전투한 참전용사님입니다. 오늘 저희랑 여기와서 그당시를 되돌아 보는데 위치는 분명 맞은데 너무 많이 변해서 잘 모르겠다고 하시거든요. 무려 북한군 장교를 16명이나 사살한 분입니다.
할아버지는 나이는 최어르신보다 5살이 적었다. 그러나 17살인가 되니 이곳에 살았다면 그래도 소문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난 5살에 서울에 올라와 여기서 살았으니 여기가 고향이요, 처음에는 피난도 못가고 집에 있다 나중에 학도의용군으로 끌려간다고 해서 저 용마산 아차산으로 도망쳐 징집을 피하고 수복될 때 아군이 여기로 오길래 산속에서 나왔다고. 밥이야 동네 다 아니 몰래 부모님이 밥을 갔다 한곳에 놓고 가면 그걸 몰래 가져다 먹기도 하고 참 숨어사는 것도 쉬운게 아니냐. 갑작스레 한강쪽에서 포탄이 날아오고 하더니 북한군들이 바로 저 넘어가 그당시는 강둑인데 거기로 숨더니만 누가 나와서 호르라기 한번 부니까 전부 사능로 도망치고 남쪽에서 군인들이 몰려 오는데 나야 누군지 아나."
"이래 보니까 국군이야. 그런데 적들이 아직 방공호속에 있는데 그냥 가느거야. 다 죽었지."
순식간에 아군 여럿이 죽어버렸다. 인민군들이 호속에서 나오더니 죽은 사람 몸을 뒤니더니 뭔지는 모르지만 자기들 호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손에는 시계를 차고 옷을 베껴 가는데 빤스까지 다 베껴 가버리면서 발로 한구 한구 차서 저 냇가에 집어 넣고 도망가 버렸단다.
아무리 아군이라해도 그당시는 누가 나서 시체를 거둬드릴 생각을 안한다. 모두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겨를이 없었단다. 그러고 족금 있으니 북한군들이 트럭에 타고 나타나는데 한 20여명이 되었지. 하지만 이때는 아군이 먼저와서 죽은 시체를 확인하다가 차 소리가 나니 그 호속에 들어가 있다 다가오는 차량이 덜덜 거리며 하필 그 앞에 멈추는데 뭐 그냥 총소리가 요란하고 모두 죽어버렸지." 죽는 모습은 보았는데 하도 무서워서 집안으로 도망쳐 들어가 시체를 어떻게 했는지 몰라요."
그러다 할아버지도 '50년 12월에 국민방위군에 불려나가 울산 서생국민학교에 갔다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그때가 '51년4월로 봄인데 바닷가인 서생부터 쌀 한말하고 차비를 얼마 주었는데 쌀을 어떻게 하겠어. 불면 날라가는 쌀인데 처음에는 메고 걷다가 무거워 어느 동네에서 밥하고 바꿔 먹어 버렸지. 아니 내려 올때도 걸어서 내려오는데 양평에서 어디로 해서 문경세재를 넘는데 공비인지 뭐가 나타나 기습을 하여 일부는 거지서 죽고 먹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겨울인데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지.
원래 난리가 나면 더 춥고 더 덥고 비 많이 내리고 눈 많이 내리는 것이라더니 딱 그 말이 맞아요. 굶어 죽고 병들어죽고 서생 국민학교인지 바로 밑에가 바다던데 많이 죽어서 들것에 들어서 서쪽 산쪽에 다 갔다 묻어 버렷다고 해.
거의 천여명 있었는데 백명도 더 죽었지. 장질부사인지 돌림병에 다 죽으니 훈련도 없어요.
그저 빈둥빈둥 왔다갔다 하다 밥도 밥인지 개밥인지 주면 먹고 안주면 굶어야 하고 끄래서 몇명이 밖으로 나가 밥을 구걸해서 먹기도 했어. 그러다 장교한테 걸려서 죽도록 맞기도 했어. 거기 가서 파보면 엄청 나올겁니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들어 놀라지도 않는다.
결국 최할아버지와 능동이나 군자동일대의 뚝방 탐사는 아쉬움만 남겼다. 그 당시 비가 너무 내려 홍수가 나서 다리도 끊어지고 다 떠내려 갔고 그후 도로확장이나 포장을 하면서 주변이 완전 개벽되어 알 수도 없다. 우린 쓸쓸한 마음을 안고 노량진으로 차를 돌렸다. 할아버지를 모셔다 들여야 한다.
"괜히 말 한마디 했다가 헛걸음 했네. 미안하오." 할아버지는 계속 그러신다.
"우리는 사실 제보를 받으면 10건 중 1~2건 맞으면 잘 맞는다고 합니다.50년 60년이 지났는데 강산이 변해도 몇번인데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헛걸음한 것 아니고 아까 국민방위군 관련 이야기도 들었잖아요. 얻는 것이 많고 이곳 화양동이나 능동을 통해 아차산으로 진격한 것도 알았으니 망우리 공동묘지도 가봐야 하고 좋은 정보 많이 얻었습니다."
할아버지를 내려들이고 우린 사육신 묘에 올라섰다.
고층 아파트을 지어 전망이 조금 막혔다. 백팽년 묘지 위로 올라서면 한강철교와 인도교 모두 보인다. 이 조그만 동산에서 1개소대 규모가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냈던 곳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많은 수의 유해가 있었다는 제보로 우리는 묘지뒷 부분을 서울시와 유가족측 협의를 거쳐 발굴 했으나 치아 한점과 어린아이 유해1구를 찾았다. 치아는 성인 어금니이지만 상태가 나빠 DNA감식 자체가 불라능하고 어닌 아이는 개인호 속에서 나왔는데 아마도 누군가 애장을 몰래한 것 같았다. 그리 많다던 유해는 어디로 갔을까. 세월이 약이라더니 세월이 흐르니 알 수가 없다.
저 멀리 선유도가 보인다.
그곳 또한 여의도와 같이 당시 쌍방간에 서로 점령하려 했던 곳이다. 그러니 당연히 어딘가에는 유해가 있을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어떤 분은 휴전직후에는 선유도에 피난민이 가득히 모여 게딱지처럼 집을 간이로 짓고 살았는데 본인도 그곳에서 살았고 그때는 주변에 파편뿐만 아니라 해골도 있었다 한다. 다만 그것이 전사자의 두개골인지 아니면 적군 또는 사형수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인데 집짓고 주변 정리 하면서 다 치워버려 흔적도 없을거라 한다.
사실 그 선유도 주변에는 미군 전투기도 한 대 떨어져 그 잔해를 찾으려 미군 측에서 장비를 가지고와 수중탐사까지 한적이 있다. 하지만 비행기 잔해를 찾지는 못했다.
이렇게 해서 일요일 오후, 우리끼리의 서울 탐문활동은 끝이 나고 있었다.
우린 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전방 관광오피를 탐문하여 6.25전쟁의 흔적을 찾기로 이미 약속했다. 먼저 인제로 이동하여 을지전망대에 오르고 나오면서 오마치 고개를 가고 다시 북한군 유격대장 길원팔 중장이 죽어간 필레 약수터에 들어가 백골병단의 전투현장을 탐문하고 한계령을 넘어 오색 약수터 근처에서 1박을 하기로 한다.
그 다음날은 가라피전투현장을 보고 강릉을 거처 '50년10월1일 38도선을 넘어 최초로 북진을 한 하조대의 기사문리에 갔다가 양양 영혈사에 들러 이름없는 무명용사 위패의 진실을 알아보고 강현면 둔전리에 들어가 관모봉 계곡에 있는 굴속에 1개소대 병력이 죽었다는 제보자를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고성 평화 전망대에 갔다 오는 여정을 잡았다. 이번에도 운전은 다시 조목사님이 하기로 하고 인제 터미널에서 아침에 만나기고 한다. 가을은 이제 절정으로 가고 있다.
일요일은 조용하게 그리고 아주 의미있게 지나고 있다. 김실장이 집으로 버스로 집으로 떠나고 나홀로 차를 몬다. 이때다. 저멀리 충북 단양에서 전화다.
"네, 이용석입니다.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기 단양인데 인민군이 1구 묻혀 있는데 발굴하지 않습니까?"
차로 운전중이라 집에 도착하여 다시 전화 하기로 하고 일단 전화를 끊는다. 사실 인민군은 발굴하지않는 것이 원칙이다.
"횡성 하궁리에 동네 친구 아버지가 불발탄을 가지고 집에서 분해하다 터져 집 다 타고 애들까지... ."
사연은 이렇다. 박흥식 아저씨는 52년생으로 사실 전쟁은 모른다. 그런데 대강면 성금리란 곳에 주차장이 있는데 돌무덤이 옆에 하나 있다. 내려오는 이야기가 6.25전쟁 당시 아군이 북진해 올라가고 미처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이 산속에 숨어살다 배가 고파서 동네로 내려왔다가 아군에게 걸리어 총맞고 죽어서 사람들이 돌로 시체가 안보이게 묻었다고 한다. 그러니 발굴해서 북한에 보내달라 한다. 하지만 법적인 근거가 중요한데 우린 국군을 발굴하는 것이고 중공군이나 북한군은 발굴 도중에 함께 나와서 피아판단결과로 지금 중공군은 중고으로 보내고 북한군은 원치 앟기 때문에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 묘지에 매장하게 된다고 설명해 드렸다.
그러자 본인이 고향이 횡성군 우천면 하궁리란 곳인데 60년말에 산에 오르면 탄피 폭탄 수류탄 해골등이 널려 있었다 한다. 탄피는 가져다 엿장수에게 주면 엿을 엄청 많이 준다고 한다. 그러니 그곳에 가서 발굴하면 군인을 발굴하리라 본단다.
어렸을 때는 동네 어른이 주어온 불발탄을 분해하다 한 집이 다 날라가고 옆에서 구경하던 아니들 3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입어 지금도 그 후휴증에 시달리고 있다 한다.
나는 연신 알았다고 답변하면서 지도를 펴기 시작한다.
하궁리는 영동고속도로 새말 인터체인지에서 가까운 곳이다. 우천면과 둔내면 중간에 있는 산으로 둘려 싸인 곳, 남쪽에는 668m의 봉화산이 북쪽에는 640m의 죽림산 동쪽은 700m의 덕고산 서쪽은 500m고지군으로 이사이에 영동고속도로와 13번도로 6번도로 19번 도로가 지나지만 하궁리 안쪽은 한가지 길밖에 없다.
이곳은 '51년 2월 중공군 2월공세시 우리 3사단과 5사단이 중공군과 북한군(특히 북한군에 많은 피해를 본 곳)에 큰 피해를 보게 되는데 사단이 불과 몇개 대대만 생존하는 비극의 현장중 하나다. 서쪽 학곡리 학담리 방향에서는 국군 8사단이 중공군에게 무려 8000여명이 전사 또는 실종된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당연히 전사자가 있을 것이며 피아가 다 있을 것이다. 이어서 3월에 우리가 재 진격간에는 3사단이 안흥 강림에서부터 봉화산 방향으로 북진한 곳이다라고 알려 주었다.
이러다 보면 일요일은 진수성찬이다. 너무나 좋은 제보를 받았으니 기쁘지 않은가.
물론 하궁리 지역은 지난 몇년간 발굴 작전을해서 유해 20여구를 하대리 팥자봉 258m고지군과 굴운리 479m 고지군일대에서 발굴했다.
하지만 몇번이 발굴이라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제보의 특성상 오늘 만나는 사람은 오늘 이야기 이고 내일 만나는 사람은 당시에는 없다가 귀농한다던지 집안의 일로 잠깐 들어와 만나는 가운데 전혀 다른 제보를 받을 수 있고 더욱이 부역등의 보이지않는 피해의식으로 말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주 찾아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지역주민과 유대강화를 하여 어떤 징후를 발견한다던지 들으면 즉시 연락해 주는 관계유지도 발굴 못지않게 중요하다.
차후에 들려 확인하겠다하고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