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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자매샬롬하우스 원문보기 글쓴이: 예수님 심장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미국 FOX 채널에서 방영 중인 인기 드라마 ‘글리’의 등장인물들. |
▲ 미국 FOX 채널에서 방영 중인 인기 드라마 ‘글리’의 등장인물들.
미국 유학을 꿈꾸는 학생이나 학부모가 요즘의 미국 사회, 특히 젊은이들의 생각과 사고를 알기 위해 반드시 섭렵해야 할 자료가 있다면 무엇일까. 필자가 권하는 최고의 추천물은 텔레비전 드라마 ‘글리(Glee)’이다.
글리는 2009년 5월 첫 방영 이후 올해 두 번째 시즌을 끝냈다. 세 번째 시즌에 들어가는 9월 20일 첫편은 벌써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뮤지컬 코미디이자 청춘드라마인 글리는 지난해 타임지의 ‘타임100’에 선정되고, 골든글로브 최우수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뽑혔다. 현재 한국은 물론 세계 전역에서 방영되는 글로벌 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음반·게임 등 글리에 관련된 모든 제품이 100% 흥행을 보장하는 ‘미다스의 손’이 되고 있다. 한 편의 방영 시간이 45분 정도이며 지금까지 44편이 방영됐다.
드라마의 배경은 고등학교이다. ‘글리 전국대회’에 나가려는 교사와 합창단 학생 등 전부 15명이 출연해 만들어내는 사랑, 우정, 경쟁, 질투를 주제로 한 드라마이다. 원래 글리는 무반주 합창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결코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강한 오락물이다.
미국 평균치 오하이오주 배경
드라마 글리의 가상공간은 오하이오주(洲)이다. 이민 대국 미국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인종·인구·직업·소득·연령대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 평균치에 해당하는 ‘멜팅 포트(Melting Pot)’가 바로 오하이오이다.
극 중에서 합창단 지도교사는 스페인어를 가르친다. 그리스어, 라틴어를 공용했던 로마가 그러했듯이 영어와 스페인어를 함께 사용하는 미국의 현재 모습을 읽을 수 있다. 합창단원으로 나오는 고등학생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스킨헤드족처럼 양쪽 머리를 민 미식축구선수 출신의 퍼커만, 언어소통이 원만하지 못한 중국계 코헨 창, 하반신을 못 쓰는 휠체어 장애인 에이브러햄, 미남에다 키도 큰 운동선수 출신의 허드슨, 치어리더 출신인 히스패닉계의 로페즈, 게이 남학생 후멜,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빼다 박은 트리터니 피어스, 치어리더 출신으로 외모에 가장 신경을 쓰는 백인 여학생 파브레이, 패션에 민감한 흑인 여학생 존스, 내성적이지만 남다른 노래 실력을 가진 히스패닉계의 베리.
이민 대국 미국을 상징하는, 멜팅 포트에 기초한 캐스팅이다. 배경 자체가 전부 ‘멀티컬러’이다. 고등학생들에게서 기대되던 ‘모노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리얼한 모습’들이 이들 멀티컬러에 의해 연출된다. 리얼한 모습은 여러 각도로 해석될 수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리버럴의 모습’이다. 굳이 다르게 표현하면 오바마 대통령의 슬로건인 ‘체인지(Change)’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제의 논리가 아닌 새로운 프레임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내일의 논리가, 드라마 글리가 갖고 있는 가이드라인이다. 그러나 글리에서 비쳐지는 리버럴은 단순히 과거의 가치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아예 과거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첨단 리버럴’이라 볼 수 있다.
“성에 노출된 반종교적 드라마”
수퍼볼 경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지난 2월 8일 밸런타인데이 특집편을 예로 들어보자.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청춘남녀 간의 결합 여부(?)가 밸런타인데이의 최대 관심사이다. 드라마 속에서 인상 깊은 ‘적나라한 부분’을 압축해서 살펴보자.
1. 의류매장에서 일하는 남자친구를 찾아가 고백을 하는 게이 남학생.
2. 글리클럽 운영비를 벌기 위해 여학생들을 상대로 한 1달러짜리 남학생 키스 비즈니스.
3. 키스 비즈니스를 벌이던 남학생의 감기 바이러스에 감염된 ‘여학생들’.
4. 상담실의 학교 여선생과 ‘숨김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남학생.
5. 뚱보 여성 합창단원에게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남학생.
6. 젊고 날씬한 아시아 여성과의 만남을 ‘성적 측면’에서 꿈꾸는 남학생.
7. 교실 내에서 이뤄지는 남녀 학생들 간의 짙은 애정표현.
8. 동정을 사기 위해 일부러 언어장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여학생.
미국 고등학생들이 사상의 노예가 되어 좌나 우를 선택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얘기이다. 공부하는 장면 하나 없는 드라마 글리에서 정치 얘기는 외계인의 관심거리 정도로 치부된다. 그러나 폭발적 인기를 누리는 글리를 접한 청소년이라면 결과적으로 리버럴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청소년에게 맞지 않는, 성적인 면이 너무 노출된 반종교적 드라마.”
글리 방영 이후 텔레비전평가부모회(PTC)를 비롯해 학교의 리버럴화를 우려하는 보수적인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시즌1에 전개된 고등학교 동급생 사이의 임신 스토리와 원치 않게 탄생된 아이를 남에게 넘기려는 얘기는 인륜 문제로까지 번졌다. 타임지는 2009년 12월 7일자 기사에서 “속이고, 훔치고, 거짓말로 얼룩진 드라마를 보면 성경 십계명을 거의 전부 어기는 것처럼 보인다”라고까지 분석한다.
그러나 ‘이성과 지성에 의한 차가운 분석’은 리버럴이 대세로 굳어져가는 미국 사회의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다. 키스라는 육체적 관계를 통한 비즈니스를 통해서라도 기부금을 모으려는 투철한 봉사정신에 대해, 누가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보수주의 미디어 FOX의 딜레마
게이, 언어장애 아시아인, 열심히 노력하는 뚱보, 휠체어를 탄 기타리스트, 치어리더의 미인 군단에 항상 당하기만 하는 못생긴 단원, 고등학생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새 생명, 글리클럽을 전국 무대에 올리려는 이혼남 교사….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정치적 의미의 리버럴이 아닌 약자를 돕는 사회적 의미의 리버럴, 즉 소셜 리버럴리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 공립도서관 안에서 흑인 어머니 옆에 있는 두 살짜리 어린이가 10여분간 장난을 치며 소리를 질러도 제지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흑인과 어린이’라는 약자 보호 논리 때문이다.
결국 글리는 시청자들을 약자를 위한 복지에 주목하는 민주당 지지자로 내모는 교과서라고 볼 수 있다. 민주당 이념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뭔가 틀을 잡고 가치를 요구하는 보수 성향의 공화당의 가치가 싫기 때문에라도 리버럴로 나갈 수밖에 없다.
1970년대 초 베트남전 당시 대학에서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는 학생은 시대착오적인 ‘반동(反動)’으로 여겨졌다. 40여년이 지난 2011년, 고등학교에서 보수주의 성향을 가진 학생은 시대착오적인 ‘바보’로 취급될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리버럴 전사 양성소 역할을 하는 드라마 글리가 보수주의 미디어의 대표격인 FOX채널를 통해 방영된다는 점이다. 리버럴을 팔아서라도 연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미국 보수주의의 실상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