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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씨ᄋᆞᆯ이 서 있습니다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무엇보다 먼저 드려야 할 것은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죄의 말씀입니다. 3월호를 4월 초가 지나서야 보내드렸고, 4월호는 이미 늦었기 때문에 5월 것과 합해서 합병호를 내기로 했는데, 오늘이 5월 15일인데 지금에야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무엇이라 말씀을 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다만 제 잘못입니다.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어느 때면 잊을 수 있습니까? 또 무슨 다른 일이 있을 것이 있습니까? 이것이 단 하나의 일이요, 여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인데 이렇습니다. 제 마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이 마음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억지로는 아니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잡지란 생각을 할 수도 없고 월간이다, 정기간행이다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면서 잡지를 내는 사람이 잡지라는 상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니 어떻게 합니까? 등사판으로는 아니 된다, 꼭 활판으로 내야 한다, 일정한 인쇄소와 계약을 하고 내야 한다, 세 번만 연거푸 못내면 자동적으로 폐간이 돼버린다 하는 칼날 같은 이 법 아래서 내야하면서(그 목적과 근거는 어디 있는지 난 몰라)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꼭 지키자는 생각을 못하니 어떻게 합니까?
가뭄에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 심정입니다.
사실 씨알이 그 소리를 어찌 돈으로 하며 돈이 되기 위해 할 수 있습니까? 말을 어찌 날짜를 정해놓고 페이지 수를 한정해놓고 할 수 있습니까?
생각은 구름처럼 일어나는 것 아니며, 소리는 바람처럼 떨려오는 것 아니며, 말은 비처럼 쏟아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을 짜내고 소리를 지어내고 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나는 손톱 깎고 머리털 밀고 몸에 거적 써 스스로 제사 돼지 모양을 하고 여섯 가지로(六事) 제 죄를 나루며 언제 열릴지 모르는 하늘만을 바라보며 7년 동안을 비를 빌고 있었던 탕(湯)임금 모양 감감한 내 마음의 하늘만 쳐다봐야 합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사실 내 마음의 하늘은 여러분의 마음을 내놓고 다른 데 있을 수 없습니다.
육사(六事)가 무엇입니까?
정부일여(政不一歟)아? 정치가 고르게 못됐는가?
민실직여(民失職歟)아? 백성이 직업을 잃었는가?
궁실승여(宮室崇歟)아? 궁궐을 너무 화려하게 지었는가?
부알성여(婦謁盛歟)아? 계집을 많이 가까이 했는가?
포저행여(苞苴行敏)아? 뇌물이 오고 갔는가?
참부창여(讒夫倡歟)아? 간신배들이 판을 치는가?
이것이 다 민중의 가슴을 들여다보며 그것이 열리기를 바라서 하는 반성이요 사죄요 애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니 큰비가 왔다는 것 아닙니까?
사람의 마음 열리면 하늘 열어 우주의 대조화가 제대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 닫히면 무르익는 가을에도 노랑 봄철입니다.
금년은 참 비가 잘 옵니다. 그래 꽃이 만발했고 지금은 녹음방초가 우거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대한(大旱) 칠 년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자연만으로 계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늘이 열릴 때까지 기도를 올립시다!
씨알은 외로워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많은 동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선 그 소식부터 전해드려야겠는데. 씨알의 소리가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것인데,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문 잡지가 뭐 하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라디오 텔레비는 정말 약과 술과 화장품이나 팔아먹기 위해 있는 것입니까?
그래, 그것이 문명이요 근대화요 복지요 번영입니까?
팥은 풀어져도 솥 안에 있다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 우리의 동지들은 살았나, 죽었나, 목을 졸리우고 있나, 살을 뜯기우고 있나,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현실을 씹으십시오.
현실이란 의미를 덮는 누더기입니다.
들여다보십시오. 들여다보면 뚫어집니다.
눈에 아니 뵈는 것은 눈으로 보지 말란 말이요 귀에 아니 들리는 것은 귀로 들으려 하지 말란 말입니다.
씨알은 듣지만 귀에 있지 않습니다. 보지만 눈에 있지 않습니다. 말하지만 입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뺏겨진 것은 보다 더 힘있게 보고 듣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뺏을 수없이 참으로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눈으로보다, 귀로보다, 입으로보다, 손으로보다, 더 힘있게 가지는 것은 사랑입니다.
씨알은 사랑입니다.
나찌스의 포로수용소에서 존재의 밑바닥까지를 내려가서 체험하고 사람은 의미에 살고 보람에 산다는 것을 밝혀내어 로고테라피(말씀으로 고침)를 부르짖는 오스트리아의 프랑클은 그 수용소 안에서 악마 같은 파수병들의 혹독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사랑하는 아내 생각을 하니 “그녀가 옆에 있건 없건 몸으로 살아있건 죽었건 상관없이 그녀와 대화를 계속할 수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거기 있더라” 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자를 명상하십시오.
거기 있습니다. 있어서 말을 합니다.
지나간 날의 기억을 되새가는 것만 아닙니다. 산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의 뜻을 말해주고 장차 올 역사의 방향을 말해줍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거기입니다!
거기를 알기 위해 물을 필요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 이르기 위해 무슨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 거기 선 자리에, 있는 그 모양 속에 있습니다.
거기 너와 나와 우리는 있습니다.
거기 도둑놈 없습니다. 어떤 문명의 기술을 가지고도 거기 못 들어옵니다.
거기 여우도 없고 사냥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기 감출 것도 잃을까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유입니다.
씨알의 소리를 내서 우리가 대화를 하는 것 아닙니다. 대화가 먼저 활발히 오고 가서 씨의 소리가 나옵니다. 5월도 되기 전에 6월호 내고 금년도 가기 전에 명년호를 내는 그런 잡지는 나는 내지도 못하고 낼 마음도 없습니다. 씨알의 소리에는 낡은 호도 새 호도 없습니다. 알맹이가 있는 한 씨는 언제나 과거요 현재요 미래이듯이 씨알의 소리도 그렇습니다.
하늘이 열려. 비만 오면 언제든지 아구를 트고 아구만 트면 패연(沛然)을 숙능어지(孰能禁之)리오. 막을 놈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늘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지 방해자가 강하거나 악해서가 아닙니다.
해가 올라오면 도깨비는 저절로 없어집니다. 도깨비가 따로 있는 것 아니라 해를 못 보는 마음이 곧 도깨비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면서도, 제자들이 목자를 죽일 때의 양같이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터럭만큼도 패배감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는 누구에게 잡혀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살 권세도 있고 죽을 권세도 가졌노라고, 그래서 더. 크게 살기 위해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진해서 생명을 내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여도 죽는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참 무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죽는 놈이 두려워하고 울부짖는 재미에 합니다. 죽여도 죽지 않을 때 죽이는 자와 죽는 자는 서로 바뀝니다. “내가 너를 죽일 권세도 있고 놔줄 권세도 있는 줄 모르느냐?” 하는 빌라도의 말을 듣고 “하늘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소” 하고 예수가 대답했을 때 사형선고 받은 것은 빌라도와 그에게 권세를 준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씨알의 소리가 나오거나 못 나오거나 씨알은 언제든지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끊임없는 말을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씨알의 소리는 이집트의 죽은 폭군의 무덤 속에 4,5천년을 갇혀 있다가도 햇빛과 물만 나면 아구를 트든 피 모양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권력보다도 돈보다도 악한 자의 마음보다도 장수하는 것이 씨알입니다.
여러분이 작은 씨알을 자본주의의 그물에서 국가주의의 고랑에서 해방시켜주십시오.
여러분이 “잡지가 왜 아니 나옵니까?” “글을 왜 쓰지 않습니까?” “요새는 왜 힘이 없습니까?” 하면 있던 것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책이 나오거나 아니 나오거나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으면 프랑클의 아내 모양으로 죽어서도 살았고 말을 합니다.
장선생은 여전히 백병원에 계시는데 병이 조금 낫다는 소식이고 4월 20일 밤에 대성 빌딩 강당에서 씨알의 소리 발간 4주년 기념 강연회를 열어 법정 스님과 김동길 박사와 이태영 박사와 내가 말을 했는데 청중이 참 많았고 장소가 좁아 그저 돌아간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하신 말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김박사가 어디론가 거처를 알 수 없이 없어져 버렸고 나에 관해서도 국내 국외로 잡혀갔느니 어쨌느니 하는 소문이 많이 돌아 국제전화로 안부를 물어줌을 받을 정도였으나 아무 일없이 잘 있습니다.
잘 있는 건지 잘못 있는 건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별 일 없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허락 아니한다면 터럭 하나도 아니 떨어지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가잘 때는 언제나 집으로 가자는 아기같이 선뜻 일어서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믿어주지 못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면 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잡지가 3년을 못 나와도 믿어주시기를 마지않는다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거기, 거기에 씨알이 있습니다.
씨알의 소리 1974. 4,5월 32호
전작집; 8- 168
전집; 8-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