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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유적 답사
2007. 3. 21. 오늘은 72회 동기회에서 처음으로 기획, 실시하는 문화유적 답사의 날. 아침 8시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주차장으로 이00, 부00, 김00, 김00, 윤00, 이00가 각자의 마나님들을 모시고 나타나고, 최00, 허0, 한0, 임00, 류00, 김00 그리고 오늘의 답사가이드 김봉렬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부가 같이 참가한다던 정00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대신 그의 아내만 외로이 등장하시고... 차는 분당에서 황00, 박00 부부와 남궁0, 안00을 태우고 서산으로 Go!
차안에서 이어지는 한국종합예술대학 김봉렬 교수의 백제 유적 설명. 사실 오늘의 답사는 김교수가 있기에 가능하였다. 내가 몇 번 김교수의 문화유적 답사팀을 따라다니며 김교수의 해박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런 기회를 우리 동기들에게도 제공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김교수에게 아무리 여기저기서 모셔가느라 바쁘지만 동기들에게도 봉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여 서로 일정을 맞추어 드디어 오늘 실행에 옮긴 것이다.
첫 번째 도착한 곳은 서산 운산면 용현리의 가야산 끝자락인 수정봉 암벽에 새긴 국보 84호인 마애3존불.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탄하는 백제의 미소라기에 진작부터 와보고 싶었지만 나도 오늘에서야 백제의 미소를 대하게 된다. 김교수의 맛깔스런 설명에 다들 귀를 쫑긋. 모범생 훈이와 기현이 아내는 노트까지 준비해와 열심히 필기까지 하고 있다. 차에서 내려 계단을 돌아 오르니 과연 조그만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이 따뜻하고 푸근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한다. 백제의 미소는 시시각각 변하는 광선에 의해 다양한 미소를 연출하는데, 그 동안 보존을 한답시고 마애불 앞에 보호각을 덧씌워 이러한 미소를 잃어버렸다고 다들 애통해 하였었지. 그런데, 미소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백화 현상까지 진행되고 있어서 보호각을 철거해야만 했다고...
3존불중 가운데 있는 것이 본존불인 석가여래입상이고, 왼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입상, 오른쪽은 미래불인 미륵반가사유상. 이 마애삼존불은 1958년에 발견되었다는데, 그 동안 이 마애삼존불이 땅속에 묻혀있었던 것은 아닐 테고,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이 마애삼존불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리라. 발견 당시 부여 박물관장이었던 홍사준 선생이 한 나무꾼에게 근처 산에 불상 같은 것 본 적이 없느냐고 물으니, 나무꾼은 불상은 모르겠고, 산 중턱 절벽에 한 산신령이 본처와 첩을 데리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나? 봉렬이는 우리에게 누가 본처고 누가 첩이겠냐고 묻는데, 딱 보니 알겠다. 오른쪽 미륵불이 다리를 꼬고 앉아 오른손 손가락을 뺨에 대고 있는 것이 꼭 첩이 '용용 죽겠지'하고 있는 것 같고, 왼쪽 제화갈라보살은 양손을 모아 구술을 감싸고 있는 것이 꼭 본처가 화가 나서 장돌을 들고 있는 것 같네.
돌아온 백제의 미소.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불상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런 미소는 정말 처음 본다. 저 미소는 바로 저 마애불상이 만들어질 당시의 백제인들의 미소련가? 원래 이곳은 백제의 수도 공주와 부여에서 당나라로 향하는 항구 당진 - 그래서 포구 이름도 당진(唐津)이다. - 으로 가는 길목이라 상업으로 번성하였고, 그렇기에 상인들의 재력으로 많은 불상들과 절이 만들어졌다. 마애불을 만들 때 주문자의 얼굴로 불상을 만들었지 않을까 추측하는데, 주문자가 윤택한 상인이었기에 이런 푸근한 미소가 만들어졌나?
마애불을 나와 우리가 두 번째로 간 곳은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강당계곡 내의 대사찰이었던 보원사(普願寺) 절터. 차를 타자마자 얼마 안 가 하차. 이런! 이렇게 마애불에서 얼마 안 떨어져 있는 줄 알았으면 천천히 걸으며 강당계곡의 백제의 숨결을 느껴보아도 될 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 강당계곡을 설명하면서 좁은 계곡 입구를 지나면 별천지와 같은 마을이 전개되기에 계곡 입구의 마을 고풍리를 무릉동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강당계곡이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나기에 이곳에 대사찰과 암자가 들어섰나보다. 전설에 의하면 아무리 강당계곡이 터가 좋다지만 사찰과 암자를 100개까지는 채우지 말라고 하였음에도 100번째 사찰 백암사를 짓는 바람에 모두 망하여 이렇게 절터와 암자터만 남게 되었다고 하네.
절터로 다가선다. 절터에는 발굴조사를 위하여 땅을 구획을 정하여 절개해놓고 있는데,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발굴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발굴조사 기간 동안은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정된 관람로를 따라 일반인들의 관람을 허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청을 하면 직접 유적 발굴 작업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예전에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를 갔을 때에도 일반인들의 참여를 받아 유적 발굴을 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나라도 이제 이렇게 국민이 함께 하는 열린 발굴 작업을 하는구나.
보원사는 화엄 10찰중의 하나로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백제가 멸망한지 얼마 안 되는 때라 의상이 통합의 종파인 화엄종의 사찰을 이곳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화엄종의 사찰이 신라말이 되면 선종의 사찰로 변하게 된다. 신라말이 되면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각 지방으로 호족이 세력을 떨치게 되는데, 호족들은 6두품하의 신라사회에서는 신분상승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불교를 환영한 것. 김교수는 보원사 스님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이런 호족들과 - 김교수는 머리 나쁜 학생들이 잊어버리지 않게 지역 조폭이라고 표현 - 결탁하면서 선종 사찰로 변하게 된 것이라 한다.
보원사지에서는 철불(鐵佛)이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여기서 철불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보원사가 호족과 결탁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 즉 당시 호족들로서는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자체 대장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철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철이 들어가므로 스님들로서는 이런 점에서도 호족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님들은 호족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호족이 필요로 하면 호족의 병사가 되기도 하였다는구나. 보원사는 이렇게 번성하여 한 때 1,000여명이 되는 많은 승려가 이곳에서 북적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바로 앞의 당간지주와 그 너머로 5층 석탑이, 그 뒤로 부도탑과 비석, 그리고 석조(石槽)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옛날 화려한 영화를 자랑하던 곳이라 남아있는 것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는 커다란 당간지주 옆을 지나 5층 석탑으로 나아가는데, 중간에 개울을 건넌다. 원래 절을 세울 때부터 이렇게 절 경내로 개울이 흐르지는 않았을 텐데? 봉렬이는 당연히 절이 커지면서 절 앞에 흐르던 개울이 이렇게 절 가운데로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보원사는 절간의 승려가 하도 많아 쌀을 씻은 뜨물이 내를 흐르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는데, 이 내가 쌀을 씻은 뜨물이 흐르던 내인가? 석조는 스님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인데 길이 384cm, 너비 175cm, 높이 65cm로 이 석조만 보더라도 당시 보원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5층 석탑 뒤의 부도탑은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부도탑이고, 그 옆의 비석은 법인국사의 일대기를 적어놓은 비석으로 법인국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 활약하던 승려인데 광종 25년(974)에 국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보통 부도탑이라면 절 입구에 세워놓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은데, 탄문이 국사인지라 이렇게 절 뒤에 특별히 모셨나보다. 이제 발굴지를 돌아나오려는데, 발굴지 옆으로는 기와 건물이 몇 채 있어 나는 처음에는 이곳 발굴현장의 현장사무소 정도 되는 건물인줄 알았더니, 다가가니 보원사 절이었다. 아마 보원사지 발굴이 완료되면 이 절터에 그 옛날의 화려했던 보원사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지금은 이렇게 미래의 꿈을 꾸면서 옆에서 조용히 발굴 현장을 지켜보고 있나보다.
보원사지를 나오니 이미 시간은 12:30분이 다 되어감이라 점심 예약을 한 식당 '꽃 피는 산골'로 출발. 그런데, 버스는 얼마 안 가서 스톱. 식당도 맨 보원사지와 같은 골짜기에 있었던 것. 한꺼번에 28명이 밀어닥치니 얘기를 업은 아줌마가 식사 준비하느라고 쩔쩔 맨다. 아하! 이래서 서울에서 출발할 때 미리 식사 주문을 하라는 얘기였구나. 그럼, 얘기를 확실히 해야지. 이 아줌마, 점심 메뉴를 맨 백숙 종류로만 얘기하니 우리는 이 아줌마가 미리 비싼 메뉴 주문 받으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는, 주문은 도착하여 하겠다며 굳이 지금 하라고 강요하면 다른 식당으로 옮기겠다고 은근히 협박까지 하였지뭐야.
식사를 마치고 개심사로! 개심사로 향하는 도로 왼쪽은 나무들을 싹 밀어낸 대지에 파란 풀들이 덮여져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의 삼화목장이라는데 총넓이가 638만평이나 된다네. 이 넓은 목장에 터를 잡고 살던 농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공화당 시절, 서슬 퍼런 권력의 2인자 앞에서 농민들이 어찌 땅 파는 것을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개심사(開心寺) - 마음을 여는 절이라... 개심사는 충남 4대 사찰중의 하나로서 백제 시대 혜감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 섰다. 이곳 대웅전은 보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보통 대웅전 하면 석가모니를 주불(主佛)로 모시는데 이곳의 주불은 아미타불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이라고 하네. 그런데, 나의 눈길을 끄는 곳은 심검당 부엌문의 창방과 문설주다. 어떻게 저렇기 휘어진 목재를 그대로 창방과 문설주로 쓸 생각을 했을까? 휘어지면 휘어진 대로 그대로의 멋을 내는 우리네 선조들의 미학. 이런 휘어짐의 미학은 서운산의 청룡사, 백봉의 묘적사 등 전국 여러 사찰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같은 동방 3국이라도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은 도저히 생각해볼 수 없는 한국인만의 멋이 아닐까? 불심이 깊은 임지생은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경건하게 절을 올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추사 고택(古宅)으로 향한다. 추사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의 남편인 김한신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ㅁ자 형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ㅁ자 형이라면 문득 폐쇄된 공간이 연상이 되는데 퇴청마루에 앉으니 바깥의 낮은 언덕이 담장 너머에서 기웃거린다. 경복궁 근정전 마당에서도 인왕산이 이웃하자며 기웃거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듯 우리네 삶의 공간은 서양처럼 안과 밖이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밖이 안으로 들어오는 닫힌 듯 하면서도 자연으로 열려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집안 처마밑이나 기둥, 방안에는 추사의 글씨가 여기저기 걸려있고, 추사의 그 유명한 그림 세한도도 걸려있다. 세한도는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저기에 걸려 있는 저 그림이 물론 원본은 아니리라.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라야 소나무는 여전히 푸르름을 알 수 있다고 했나? 추사가 중국까지 가서 자기를 위해 책을 구해와 선물하는 제자 이상적의 마음 씀씀이를 생각하며 저 그림을 그릴 때의 마음 느낌은 어떠했을까?
고택에서 나오니 고택 오른쪽 조금 위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추사의 묘소도 있다. 나는 추사의 묘소를 들른 후 나머지 유적지도 마저 둘러보기 위해 서둘러 고택 왼쪽편으로 가는데, 이미 탐구심이 강한 최상기가 먼저 와 둘러보고 있다. 이쪽으로는 김한신의 부부 합장묘가 있는데, 왕의 사위라 비문은 영조의 어필(御筆)이다. 열녀문도 있다. 웬 열녀문? 화순옹주가 열녀란다. 아니 공주로서 시집왔으면 콧대가 세었을 텐데 어떻게 열녀 소리까지 들었을까? 화순옹주는 남편이 38세에 세상을 뜨자 영조가 말림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죽음의 길을 택하였기에 열녀로서 이렇게 정문(旌門)도 세워진 것. 그러나, 영조로서는 그렇게 자기 말을 듣지 않고 굶어죽은 딸이 야속하였기에, 이 정문은 영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정조가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곳 열녀문은 문의 정면 위에 홍살을 세우고 붉은 칠을 한 현판을 걸어 특히 홍문(紅門)이라 부르고 있다.
그 옆으로는 백송공원이다. 왜 추사 고택 옆에 공원을 만들었을까 하였더니 천연기념물 106호인 백송(白松)이 있어 만들어진 공원. 추사고택 옆의 공원이니 당연히 백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 추사를 기념할만한 조각이나 글, 그림 등이 공원을 꾸미고 있다. 백송은 중국 북경 부근이 원산지인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에 의하여 처음 우리나라에 심겨지기 시작하였다고... 이곳 백송의 나이는 300여년 되었다는데 특이하게도 한일합병이 된 1910년부터 갑자기 생장을 거의 멈추다시피 하다가 해방된 1945년 이후부터 서서히 정상을 되찾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 조선 왕조와 영욕(榮辱)을 같이 하였기에 일제시대에는 스스로 생장을 멈춘 것인가?
공원에는 내가 좋아하는 추사의 글씨 명선(茗禪)도 있다. 작년에 전남 무안의 초의선사 고향 유적지에 들렀을 때에도 이 '茗禪'이라는 글씨를 보았지. 추사가 다성(茶聖) 초의선사로부터 차를 선물 받고 보내준 글씨가 바로 이 '茗禪'이기에 이렇게 추사의 고향과 초의의 고향 양쪽에 '茗禪'이 새겨져 있구나. 그러고보니 몇 년 전에 간송미술관에서 '茗禪' 진품 글씨를 보면서 감동에 젖던 것도 생각이 난다.
바삐 공원을 둘러보는데 상기의 핸드폰이 울린다. 다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이런! 이것저것 둘러보느라고 너무 지체하였구나. 덕분에 추사 고택 앞에서 기념촬영 하는 데에도 우리 둘만 빠져버렸다. 기다리다 못한 버스가 아예 우리 있는 곳으로 온다. 죄송! 우리 둘이 탑승함을 마지막으로 버스는 서울로 출발! 다들 의미 있는 여행을 하였다는 뿌듯함이 얼굴의 표정에 나타나니 이번 행사를 주관한 나로서도 기분 띵호아! 우리는 6월에도 안동 하회마을에서 계속 이어질 봉렬이의 멋진 해설을 기대하며 버스는 고속도로에 들어서며 서울로 향하는 긴 차량대열 속으로 합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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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병욱교수님 고향에 다녀 오셨군요. 마애삼존불에 미쳐 보존각이 있을때, 옛날 전등이 없던 시절의 미소는 어땟을까 고민끝에 촛불2-3개만 껴고 촬영 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보존각을 해체 했군요. 그렇게 바랬던 일인데~~여명이 떠오를때와 해가지는 미소가 압권인데--좋은 사진 찍으셨네요. 개심사는 지인들과 자주 드나들고 묵던 곳인데, 어머니, 할머니 품속 같이 우리을 끌어 안아 주던곳 인데, 나무 외다리 밑으로 폋쳐진 수련은 아직 보지 못하셨겠죠?? 삼존불 사진 우측을 더 자르고 좌측의 하늘 공백을 더 나오게 하면 더 좋았을 텐데--후후
단비속에 답사기가 감칩니다. 전설님덕에 세상이 환~~ 김봉렬교수님 봉사가 기대되네요!
세월이 흐르면 이병욱 교수님 생가도 추사고택처럼 답사객들이 찾아드는 곳이 되겠지요? 그리고, 사진 지적 감사합니다. 산행을 하면서 사진을 계속 찍다보니까 사진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