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신윤복의 혜원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중 노중상봉~>
혜원전신첩중 노중상봉(路中相逢)이다.
지팡이를 짚은 것으로 보아서 원거리 장도(長途)에서 우연히 만난 두 부부가 반갑게 만나서 상봉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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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면서생(白面書生) 하원은 과거시험지만 들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다.
수많은 나날, 그렇게 공부해서 차곡차곡 머릿속에 박아 놓았던 그 많은 글들은 꼭 꺼내려 할 때 왜 모두 날아가 버리는가!
그 누가 칠전팔기라 했던가?
여덟번째 과거에 또 낙방을 하고 그놈의 지긋지긋한 공부를 때려 치우기로 작정했다.
낙향하면 한양에 언제 다시 와 보랴 싶어 여기저기 구경하며 개성까지 갔다가 제물포까지 구경하고, 친지들 얼굴을 피하려고 설날에도 객지에서 머문 뒤 고향 안동으로 발걸음을 뗐다.
단양팔경을 구경하고 죽령을 넘는데, 눈발이 휘날리더니 이내 폭설로 변해 발길은 허리춤까지 빠지고 시야는 댓걸음 앞이 안 보인다.
기운도 떨어지는데다 길을 잃어 허우적거리다, 춥고 배고파 허리춤에 찬 표주박을 풀어 콸콸 약주를 마시고 나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닥치는대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몸이 허공에 떴다는 것만 어렴풋하고 정신을 잃었다.
하원이 정신을 차렸을 때 따뜻한 방에 그가 누웠고, 가물거리며 얼비치는 소복 입은 한 처녀가 보였다 안 보였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분명 누워 있는데도 떠 있는 것 같고 여기가 이승인지 저승인지 몽롱하기만 하다.
관솔불이 꺼지고 칠흑 같은 방에 소복 입은 처녀의 옷 벗는 소리만 스슥스슥 적막을 깼다.
어느새 하원의 옷도 모두 벗겨졌다.
발가벗은 처녀를 안고 음양의 조화를 부리는데도 그녀의 몸은 차가웠다.
비몽사몽간에 합환을 하고 나자 처녀는 옷을 입고 하원의 옷도 입혀 줬다.
그녀를 안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동창이 밝아 잠에서 깬 하원은 깜짝 놀랐다.
하원의 품에 안긴 그 처녀는 시체였다.
죽은 지 몇달이 지났는지 얼굴은 알아볼 수 없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방은 싸늘하고 문풍지는 뚫어져 바닥엔 낙엽이 뒹굴었다.
하원이 옆방을 열어 보자 처녀의 부모인 듯한 시체가 누워 있었다.
하원은 부리나케 뛰쳐나와 내닫기 시작했다.
그러다 스무걸음도 떼지 않아 멈춰 섰다.
초가삼간 오두막으로 되돌아가 남향받이 뒷산자락에 눈을 치우고 구덩이 세개를 파서 세사람을 묻고 어설프지만 봉분도 올렸다.
허리에 찬 표주박에 술이 남아 있어 한잔씩 따르고 제도 올렸다.
온종일 일이 되어 또다시 날이 저물었다.
그는 그곳을 떠나며 초가삼간에 불을 질렀다.
성큼성큼 힘든 줄 모르게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밤길을 걸어 어느 주막에 이르렀다.
“여기가 어디요?”
“영주 땅이요.”
주모를 잡고 꿈같은 얘기를 했더니 그녀가 내막을 들려 줬다.
“하룻밤에 눈쌓인 그 험한 산길을 이백리나 걸어왔다니 믿을 수 없소만, 그쪽에 작년 가을 역병이 돌아 산골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은 떠돌았소.”
하원이 주막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소복입은 그 처녀가 나타나 큰절을 올리다 말고 어깨를 들썩이며 하염없이 울었다.
“부모님과 소녀는 서방님 덕택에 발을 뻗고 자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책을 아궁이에 넣지 말고 한번만 더 과거를 보십시오.”
그해 봄~
하원은 팔전구기를 했다.
# 백면서생(白面書生) : 한갓 글만 읽고 세상일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