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양 / 양선례
사건이 터졌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이 요란하다. 사무실에 있던 동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홍이가 또 터진 것 같은데요?” 그날은 교감으로 승진하여 발령받은 지 한 달이 채 안되는 날이었다. 2층으로 가니 소리는 더 확실해졌다. 온 학교를 쩌렁쩌렁 울리는 괴성. 담임교사가 양팔을 붙들고 있다. 교실은 이미 난장판이다. 열두 명의 아이들이 쓰는 책상은 모두 엎어져 있고 책상 속의 물건과 사물함 위의 자료 바구니도 나뒹굴고 있다. 교실이 아니라 전쟁이 지나간 폐허 같다. 반 친구 열한 명은 컴퓨터실로 피신한 상태였다.
무슨 일인가에 기분이 나쁘면 서너 시간 괴성을 지르고 교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물건을 집어 던지고, 사물함 위에 전시해 둔 미술 작품을 다 망가뜨린다.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다. 한번은 말리던 보건 교사의 말이 귀에 거슬렸는지 물건을 집어 던져서 가로 1미터가 넘는 앞문의 유리창이 박살났다. 피하기 망정이지 그대로 맞았더라면 얼굴에 크게 상처가 났을 거다. 담임이 팔을 잡고 있으니 발버둥을 치며 다리를 찬다. 화가 나 있는 상태라서 힘도 장사다.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쉽지 않다. 교실 문을 붙잡고 나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남자 선생님 서넛이 겨우 힘으로 제압하여 승용차에 태우면 차는 요동치고 아이의 반항은 더 심해졌다. 집으로 가는 20분 동안에-아이의 집은 학교에서 가장 멀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데려다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지켜볼 수만도 없었다. 한 건물에 전교생이 있었기에 그런 날은 하루 종일 학교가 들썩들썩했다.
교직 생활 동안 이렇게 심한 아이가 있다는 걸 주변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교감 초임인 해에 이 아이를 만났다. 담임은 3월 24일자로 신규 발령을 받은, 이제 대학을 막 졸업한 24살의 여교사였다. 그 아이가 있는 학급을 기존 교사가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하는 바람에 뻔히 신규 교사가 올 줄 알면서도 그렇게 배정할 수밖에도 없었다. 원 담임은 학기 중간에 군대에 입소하여 후임으로 온 것이다. 사회 초년병이 겪는 예방 주사라고 하기에는 아이의 상태가 너무 심했다. 행여 교직 자체에 회의감이 들면 어쩌나 걱정이었으나 아이가 전학가지 않는 이상 별 도리가 없었다.
홍이가 난리를 피우기 시작하면 공부도, 생활지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황 상태가 된다. 같은 반 아이들은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초연하다. 어떤 때는 공부하지 않고 적당히 불편한 이 상태를 즐기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아이들을 불러다가 좀 조심하지 그랬느냐고 야단을 쳐도 그때뿐이었다. 화를 내는 지점을 종잡을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이 아이들은 가장 큰 피해자다. 서로를 잘 아는 시골 학교이다 보니 아이들도 그 부모들도 알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도시 학교였다면 남은 아이의 수업권 때문이라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반 아이들은 홍이의 발작-그건 단순한 화가 아니라 발작이었다-을 1학년 때부터 지켜보고, 또 한편으로 참아주는 과정에서 생긴 분노와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교육청 상담 센터의 집단 상담 결과로도 그 정도가 심각하다고 나왔다.
홍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우울해 보였다. 내성적이고 묻는 말에도 잘 대답하지 못했다. 대화를 할 때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아이는 5학년이라고 볼 수 없으리만치 지적 수준이 낮았다. 받침 없는 글자를 겨우 읽는 수준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쓸 때조차 ‘ㅎ’을 바로 쓰지 않고 동그라미 부분만 쓰고 ‘ㅗ’와 받침 ‘ㅇ’을 쓴 뒤 맨 위로 올라와서 남은 부분을 썼다. 낱자 ‘ㅎ’을 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받침 없는 글자를 읽거나 쓰는 건 거의 되지 않았다. 1부터 100까지 수 세기도 되지 않았다. 매년 기초학력 부진아였고, 통과되지 못한 채 새 학기를 맞았다. 5학년 교과서의 내용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인 것이다. 사회성이 발달하지 못하여 반 아이들과도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등교해서 친구들이나 담임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교장, 교감을 비롯해 다른 선생님을 복도에서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공부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아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펴 놓지도 않고, 얼굴에는 불만,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가정환경도 좋지 않았다. 재혼 가정으로 부모의 나이가 열네 살 차이가 났다.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폭력으로 다스렸다. 어머니는 상황에 따라 담임에게도 거짓말을 일삼았다. 중학교에 다니는 이복형에게 홍이는 관심 밖의 동생일 뿐이었다. 그가 소란을 일으키면 어머니에게만 연락했다. 아버지가 알게 되면 또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녀는 날품으로 감자를 캐거나 농사일을 하다가 학교로 왔다. 교장, 교감, 보건, 담임이 몇 시간에 걸쳐 설득하고 달랜 노력이 무색하게 그녀만 오면 순식간에 얼굴이 바뀌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갔다. 아이는 분노조절 장애였다.
한번은 아침 11시쯤 시작한 소란이 퇴근 시간도 넘겨 오후 6시까지 이어진 적이 있었다. 급식도 먹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를 보다 못해 112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대뜸 이까짓 일로 불렀냐며 화를 냈다. 자초지종을 듣고는 아이를 한쪽 구석에 데리고 가서 회유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화를 내며 위협도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더 거칠게 소리쳤다. 결국 경찰도 포기하고 돌아갔다.
점심도 거른 채 몇 시간을 울다 보니 아이는 탈진 상태가 되었다. 천식도 있는 아이가 걱정되어 이번에는 119구급대를 불렀다. 세 명의 구급대원 중 여자 대원이 아이의 처지에 감정 이입하여 울먹이면서 아이를 달랬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런 아이가 다 있느냐며 학교를 동정하는 말만 쏟아내곤 돌아갔다.
그런 소란이 한번 일어나면 열흘가량의 무단결석이 이어졌다. 친구들 보기가 부끄러웠을까, 아니면 미안해서였을까? 선생님도 반 친구들도 아이를 향한 미움과 원망이 다소 옅어졌을 무렵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났느냐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다시 오곤 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런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였다. 부모는 아이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자신은 어릴 때 그보다 더한 일도 했지만 이렇게 잘 살아가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어머니는 인근 병원에 규칙적으로 다니며 약을 받아 오는 걸로 부모의 역할을 다한 듯 말했다.
아이를 진단하는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순한 아이가 무슨 문제가 있느냐며 오히려 엄마를 이상하게 쳐다본단다. 당연하다. 아이는 29일 동안은 조금 무기력하고 온순하고 우울할 뿐이지 문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 하루가 문제였다. 친구의 무시하는 말, 놀리는 말 등에 자극받아 어느 순간 폭발하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가슴에 안은 것처럼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했다.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하려고 나주에 있는 전문 병원에 의뢰해 놓고 부모의 동의를 기다렸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부모가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교육청 위(Wee)센터 선생님이 운전하기에 동행만 하면 되는 데도 말이다. 아이를 정신 병자 만들 일 있느냐는 말로 쫓아내기 바빴다. 심지어는 위(Wee)센터 로고가 박힌 차량이 자신의 집 앞에 서는 것도 싫어했다. 아이의 진단비로 예산을 책정해 놓았으나 부모의 동의 없이는 학교나 교육청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참고 견디는 것뿐.
며칠 전 배우이자 엠씨(MC) 박소현씨를 오은영 박사가 에이디에이치디(ADHD,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로 진단하는 걸 보았다. 그녀는 연예계 내에서 소문난 건망증 소유자란다. 20년 넘게 라디오 디제이(DJ)를 하면서도 수년간 함께했던 피디(PD) 얼굴을 못 알아본다거나 남자와 소개팅으로 만나 식사까지 했으면서도 몇 달 후에 그런 자리에서 또 만나고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등 증상이 꽤 심각했다. 그러고 보니 한때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광고 모델을 한 것도 그녀의 그런 특성을 활용한 거였나 보다. 어렸을 때부터 치료를 받았더라면 그녀의 건망증이 지금보다는 나았으리라고 오박사는 말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이는 이제 19살, 고3이 되었겠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으려나(중학교 1학년 때 부모의 이혼으로 그 지역을 떠났다). 여전히 치솟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을까. 홍이도 오박사의 말처럼 증상이 일어났을 때부터 진단과 치료가 있었다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훨씬 수월하진 않았을까.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 뒤를 살피면 그런 부모가 있다.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훨씬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회적인 비용도 많이 든다. 부디 길 잃은 한 마리 양이었던 그가 이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빌어 본다.
첫댓글 수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 자세하게 그려 내다니 부럽기만합니다.
가끔 사회적 비용을 크게 치른 뉴스를 들으면 교육자로서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번 강릉 산불 사건도 비용을 너무 크게 치른 사건이었습니다. 홍이 부모의 양육 태도가 문제의 발단이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별 탈 없이 살아 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게요.
교장 선생님도 지켜 보셨으니 누군지 잘 아시지요?
아드님 훈련장에 데려다 줘야 하는 날도 홍이가 폭발한 날이었구요.
다행히 교단 수기처럼 써 놓은 글이 있어서 쉽게 쓸 수가 있었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내심 궁금합니다.
글에 쓰지는 않았지만 저랑도 크게 부딪친 적이 있었거든요.
잘 살아가길 빌어야죠.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아이였네요. 그 정도로 심하면 학교에서는 어떻게 감당할 수 없지요. 이럴때는 부모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데 안타깝습니다. 그 아이가 바르게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가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으니 정말 힘들었답니다.
어서 졸업하기만 학수고대하였지요.
중학교도 비상이어서 전화오고 그랬는데 얼마 후에 전학갔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짠하지만 다른 학생들에게 주는 피해도 엄청나서 아이가 미울 때도 많았지요.
도와주고 싶지만 담임 선생님과의 생활은 일년 뿐이라 그것도 한계가 있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부모님이 깨어야 할 텐데요.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네요.
목포로 전학갔다는 말만 들었어요.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얼마나 힘들까 눈에 보였어요.
글을 쓰지고 잘 읽지도 못하니까요.
안타깝지만 부모의 동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날이었어요.
참 안타깝네요.
우리 반도 지난 주 정서행동특성검사에서 자살 위험이 높게 나온 아이가 있어 보건 선생님이 상담해 보니, 구체적으로 자살 계획까지 세웠다고 하더군요. 학기 초에도 표정이 어둡고 속이 안 좋다고 점심을 몇 번 굶어서 가정 방문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터라 엄마에게 전화로 알리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도록 권유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우리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 애는 그런 것을 숨기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를 설득해서 상담을 받기로 했는데 부모가 동의해 줄지 걱정입니다.
오늘도 잘 써 주셔서 그 상황을 생생하게 느끼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문제 아이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에 우리 아이들은 너무 여리고 미성숙한 존재지요.
좋은 아이들이 망가져가는 걸 지켜볼 때면 안타깝기 짝이 없지요.
선생님 반의 아이도 손 내밀어주는 한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글쓰기 선생님들의 글을 보면서 소명의식 없이는 할 수 없는 위대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사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사가 미칠 때 쯤 방학을 하고, 엄마가 미칠 때 쯤 개학을 한다."
아마 방학이 없었더라면 정신적으로 문제를 보이는 교사가 꽤 많았을 겁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입니다.
육체적으로도 힘들고요.
방학이 있어서 지친 마음과 몸을 회복하여 다시 또 아이들을 사랑할 힘을 얻고 오는 것이지요.
대부분 몸이 다치거나 상처가 나면 병원에 쉽게 가지만 마음이 아프거나 병이 나면 그렇지 않아요. 안타깝습니다. 다양한 심리검사나 치료 방법이 많습니다. 심리치료나 상담에 대해 학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잘 알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제가 정년 후 이 분야에서 봉사 겸 일을 해보려고 임상심리사 1급 자격을 취득하면서 진즉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후회가 됐습니다.
그러게요.
저도 지금 하고 있는 기초학력 부진아 방법을 그때 알았더라면 아이를 그렇게까지 방치하지는 않았을 텐데...하고 후회했답니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걸 다시 실감한답니다.
이렇게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갈수록 늘어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