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병들었다 / 안순희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해서 누리는 즐거움이 크지만 늘 그랬음으로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24 절기 중 으뜸인 입춘 무렵이면 양지쪽엔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하얀 줄기가 기다란 봄풀이 자랐다. 남향집 담장 밑에 모여 그 풀을 곱게 다듬어 묶어서 풀각시 만들어 놓고 소꿉놀이하던 시절이 아련하다. 솔밭이 푸르고 보리밭도 푸른,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가득해서 매서운 추위를 겪었어도 산야는 초라하지 않았다.
창공에 종달새 높이 떠서 어느 먼 곳의 소식을 전하려는 듯 종일 재잘거려 그 뜻이 몹시 궁금했지만 아직도 알 수 없는 신비로움으로 남았다. 길가엔 작은 풀꽃들이 피어나고 자운영 씀바귀 등 봄나물이 지천으로 자라나서 떨어져가는 쌀 대신 가난한 이 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된장과 봄나물의 조합은 환상의 궁합 이었다. 장독대엔 장이 읶고 봄이 짙어 갈수록 서민의 삶은 고단했지만 이웃 간의 단결은 끈끈했다.
아무리 힘겨워도 뒷동산에 자리를 다듬고 제일 고운 옷으로 단장한 여자들이 봄꽃처럼 화려한 놀이판을 벌이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막걸리도 만들고 화전도 부치고 산나물을 무쳐 먹으며 하루를 즐기면 충분히 보릿고개를 넘을 힘을 얻었을까? 장고를 메고 온 종일 뛰던 엄마 모습이 애처롭게 기억된다. 그 긴긴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온다는 변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 사람들은 고난의 언덕을 거뜬히 넘었다.
언제부터인지 자연의 질서가 깨지기 시작하더니 4계절의 경계가 무너졌다. 봄가을이 차츰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을 거란 말을 들었을 땐 설마 했는데 점점 명확해 지는 것 같다. 3월의 기온이 여름처럼 더웠다가 때 이른 봄장마가 오기도하고 9월이 저물도록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 벼가 익지 않는 현상은 처음 보았다. 예년 같으면 추수가 끝났을 10월이 말로 가는데 아직도 푸르던 벼가 갑자기 된 서리가 내려 억지로 잎이 말라 죽는 건 농업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신호이니 심각한 일이다.
늦도록 기온이 높아 벼가 잘 여물 걸로 기대했는데 반대로 나타난 현상을 보며 깨닫게 되었다. 여름풀인 바랭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싹이 봄에 돋아서 긴 여름을 가지만 뻗다가 가을이 되면 씨앗이 여무는데 생장기가 길어서 순을 잘라버리면 씨앗은 못 여물 줄 알았더니 시간이 없는 줄 아는 풀이 씨방을 달고 올라오는 걸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났다 벼도 같은 화본과 식물이라 기온이 높으니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줄 알았다가 서리를 맞아 말라버렸으니 너무 급하게 변하는 기후에 적응을 못 하는 것 같아 아찔하다.
이렇듯 자연의 질서가 무너지면 겪게 되는 생태계의 혼란보다 사람들이 받을 충격은 더 끔찍할 것이다. 보릿고개를 겪던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세계 10위권의 부자 나라답게 세상에서 좋다는 것만 골라 먹고 넘쳐나는 각종 명품으로 사치를 부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나거나 기후 이변으로 수입이 끊기면 견뎌낼 비책이 있을지 걱정이다. 지금 자연 질서의 변화는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줄 여력이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에는 10월 23일이 상강 절기여서 그 때부터 서리가 내린다고 했는데 올해는 9월 말부터 서리가 내렸다 또 갑자기 여름처럼 뜨거웠다가하니 지구가 큰 병에 걸린 건 아닌지 걱정이다. 가난했어도 예전의 우리 강산은 건강했다. 아무대서나 떠 마실 수 있는 단 물이 솟아났고 그냥 뜯어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이 널려있었다. 어쩌면 그때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첫댓글 아직 먼 일이라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위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날씨 변하는 것 보면서도 별 상관하지 않고 눈 앞의 이익에만 매달리는 둔감하고 어리석은 인류, 참 걱정입니다.
요즘 날씨 보면 걱정이 되긴 합니다. 공익 광고처럼 메일 하나라도 더 삭제해서 탄소를 줄이는데 힘써야겠습니다.
올해 벼농사가 잘 되었다는데 수확이 적게 나온다 하네요.
기후 위기, 큰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