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人情)과 범법(犯法) 사이/ 곽주현
살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을 때가 있다. 군 복무 중에 사소한 실수(?)로 불미스런 경험을 한 것도 그랬다. 군대에 갔다 온 남자들은 ‘라때(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그 어렵고 힘들었던 군 생활을 무용담으로 격상하여 말하곤 한다. 그런데 나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큰 곤욕을 치른 부끄러운 사건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게 그렇게 힘들었다.
내가 복무한 부대는 대대 규모로 해안선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부대보다도 규율이 엄하고 훈련 강도가 높았다. 행정을 담당하는 필수 인원을 제외하고 병사들 대부분이 밤새 보초를 서고 낮에 잠을 자는 올빼미 같은 생활을 했다. 영내에서도 취침 시간만 빼고는 항상 철모를 쓰고 있어야 했다. 혹시 용무가 있어 밖에 나가게 되어도 단독 군장을 갖추고 나다녔다. 부대가 후방에 있었지만 이처럼 늘 준전시 상태였다. 가끔 해안으로 간첩이 침투해서 24시간을 초긴장하며 근무해야만 했다. 더구나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북에서 넘어온 그 유명한 김신조 간첩단 사건 직후라 통제가 더 강화되었다. 35개월 만에 제대했는데 외출이나 외박이 한 번도 허용되지 않은 어둠의 시절을 보냈다.
11월 하순쯤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치르는 훈련, 위생, 보안 등을 점검하는 시기다. 공무원들이 종합 감사를 받듯 군대에서도 비슷한 것을 하는데 그것을 측정이라 불렀다. 상급 부대 지휘관들이 내려와서 며칠씩 모든 분야를 살피며 항목별로 점수를 매긴다. 부대별로 등수가 발표되기 때문에 전체 부대원이 3, 4개월 전부터 준비하느라 진땀을 뺀다.
그 점검의 마지막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병사 대부분이 훈련에 참여했다. 나에게 정문 위병소 조장을 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통신 병과에서 부대 편제상 위병소에 근무한 적이 없었다. 병사들이 훈련에 모두 동원되었으므로 하루만 자리를 메꾸라는 것이다. 오늘은 느긋하게 지낼 수 있겠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부대가 점검을 받고 있어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입대하자 부사관 교육을 받았다. 전혀 원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 혹독한 훈련을 거쳐 ‘일반 하사’(직업군인이 아닌 하사를 그렇게 불렀다) 계급장을 달았다. 그래서 조장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졸병 한 명과 함께 아침 여덟 시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오전 내내 왕래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도 앞에 서 있는 초병의 교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규정상 두 시간마다 다른 병사로 바꾸어 주어야 하는데 네 시간이나 지나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상황실로 몇 번이고 독촉해도 인력 자원이 없다며 잠깐만 기다리라고만 했다. 거의 부동자세로 총을 잡고 서 있어야 해서 한창때의 장정이라도 두 시간 이상은 무리다. 그러다가 점심시간도 지났다. 나는 어떻게 식사를 했지만, 그는 탈탈 굶고 있었다. 오후 세 시가 되어도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 식당과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규정상 그곳으로 밥을 배달할 수도 없었다.
그날따라 바람이 세차게 불고 손발이 얼얼하게 쌀쌀했다.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는 입대해서 이제 갓 이등병 계급장을 단 신병이었다. 고흥에서 농사를 짓다가 왔다고 한다. 부대가 경상도에 있어 전라도 사람을 만나면 고향 마을에서 온 것처럼 반가웠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였다. 오후 세 시 무렵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안타까워서 총을 세워 놓고 잠깐 들어와 쉬라고 일렀다. 5분쯤 지났을까, 지프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면서 획 지나갔다. 긴 안테나를 달고 있었다. 아차 했다. 언뜻 보았지만, 연대장 차라는 직감이 왔다.
얼마 안 있어 헌병대 차가 들이닥쳤다. 우리 두 사람을 부대장실로 긴급 호출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바로 두 손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계급장을 뜯고 허리띠, 신발 끈도 풀어 가져갔다. 근무지를 이탈했고 더구나 군인의 생명줄인 총을 버렸다는 죄목으로 졸지에 범죄자가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설명했으나 오히려 귀싸대기 세례를 몇 번 받았을 뿐이다.
상급 부대인 연대 영창에 갇혔다. 이틀간은 엉덩이가 불이 나도록 맞았다. 그때의 형편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오직 법대로만 처리하고 있었다. 헌병이 창살 너머로 계속 지켜보며 감시하고 기록했다. 혹시나 자해할까 봐 그런 것 같았다. 3일째 되는 날부터는 영창 밖으로 끌어내서 계속 일을 시켰다. 그런데 그 작업이 좀 황당했다. 오전 내내 웅덩이를 파게 하고는 오후에는 그것을 다시 메우라고 했다. 또 흩어진 돌을 줍게 하고는 멀리 떨어진 곳에 가져다 뿌리라고도 했다. 그런 작업을 반복적으로 시켰다. 수인(囚人)이 된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하찮은 일로 큰 고통을 받았다. 군대였지만 뜻하지 않게 그런 낭패를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정과 범법 간의 틈을 늘 의식하며 살았다.
고흥의 그 병사는 잘살고 있겠지. 그가 생각난다.
첫댓글 가슴 조리며 읽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시지프의 벌을 직접 경험하셨네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신조가 나온던 시절 군대 얘기군요.하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옛날 일을 어찌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는지, 선생님의 기억력에 늘 놀랍니다.
이제 군대 막 다녀오신 듯 생생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 선생님이 1학기 내내 군대 이야기만 하시고 미술 수업만 진행하셨어요. 여름 방학 때 돌아가셨어요. 큰 경험하셨는데 군은 안 봐준다고 들었어요.
아이고, 하필이면 그때.
정말 라테시대 얘기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권이 바닥이던 시절인데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을 고마워해야겠어요. 생각하니 아찔하네요.
선생님 글은 문장도 깔끔하지만 스토리가 정말 재미있어요. 화수분처럼 계속 나오네요.
옛날 이야기를 이렇게 기억을 잘 하시는 것은 일기장이든 어디에다 메모를 해 두셨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새악을 해 봅니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일기는 필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와, 이제 군대 얘기까지. 선생님 이야기 보따리가 궁금해 일상의 글쓰기를 떠날 수 없겠는데요. 하하.
슬픈 얘기 전 재밌게 읽었습니다.
선생님한테는 아픔일테지만 읽는 내내 긴장되고 염려도 했습니다.
얼마나 조마조마 했을까요. 당연히 무사해야 되는데 무사하게 마무리 지어 다행입니다. 고생 하셨습니다.
말이 안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