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롬 !!
신우회 예배(2023.10.18.수요일)
전래 동화 : 요술맷돌
옛날 어느 마음에 착한농부와 욕심쟁이 부자 영감이 살었어, 어느날 한 할아버지가 부잣집으로 밥을 얻어먹으러 왔어. “흥! 영감한테 줄 밥이 어디있어.” “딴데 가서 알아보시오!” 쫓겨난 할아버지는 착한 농부의 집 근처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대. “할아버지,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착한 농부는 할아버지를 들쳐 업고 집으로 달려왔어. 없는 곡식을 모두 떨어 죽을 만들어 먹이고는 밤새 잠도 안자고 정성껏 돌봐줬지. “정말 고맙소,” “가진 거라고는 이 맷돌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받으시오.” 할아버지는 맷돌을 주고서는 바람같이 가버렸어.
착한 농부는 빈 맷돌을 슬슬 돌리면서 혼자말을 했지. “맷돌에서 쌀이나 술술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자 맷돌에서 장말로 쌀이 술술 쏟아져 나오는게 아니겠어? “아니 이게 웬일이야!” 착한 농부는 옷 나오라 하면 옷이 나오고 “돈 나오라” 하면 돈이 나오는거야. “이거 요술 맷돌이로구나!”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요술 맷돌 덕분에 부자가 된 착한 농부는 큰 잔치를 벌였어. 그 소문을 듣고 욕심쟁이 부자 영감은 착한 농부 집에 찾아갔어. “오호! 이게 바로 요술맷돌이구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나 혼자만 써야겠다!” 부자 영감은 맷돌을 안고 멀리 멀리 도망갔어, 아무도 찾지 못하는 먼곳으로 도망가려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지. “자, 어디 한 번 돌려볼까?” 옳치 소금이 좋겠다! 수리수리 소금 나오라!“ 그러자 돈보다 귀하고 쌀보다 비싼 소금이 줄줄 흘러 나왔어. 조그만 배가 소금이 점점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지. ”이제 나는 큰 부자다! 부자 영감은 자꾸 자꾸 맷돌을 돌렸어. 그러자 배가 무거워서 그만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지. 지금도 바닷 속에선 맷돌이 뱅글뱅글 돌면서 소금이 계속 나오고 있대. 그래서 바닷물이 짠거란다.
본문 말씀 : 누가복음 16장19-31절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제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 올 수도 없다.
말씀 선포 : 요술맷돌과 소금 (The Magic Milestone & Salt)
교회력으로 2023년 창조절 기간 동안 성도가 회복해야 하는 언어로 ‘비유로 말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비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말하는 것을 ‘비유’라고 합니다. 사람이 대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그 대상을 굳이 다른 대상에 빗대어 말하냐면 듣는 청자가 말하는 화자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고 상세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일종의 그림언어입니다. 문자는 한 번에 하나 그 이상의 의미를 청자에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이와 달리 그림언어는 청자가 화자가 전하는 의도를 자신의 상상력을 활용하여 바라보기에 더 풍성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문자가 발명되기 전 그림언어가 널리 사용됐던 이유도 의사소통에서 비유가 가진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놀라운 상상력을 가지고 자신의 의도를 풍성하게 이해하도록 비유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이라고 빗대어 말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을 뜻하는 대표적인 비유로 비그리스도인들도 널리 알고 있는 단어입니다. ‘소금’을 문자로 표현한다면 사람은 소금을 자신이 알고 있는 짠 맛을 내는 결정체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소금이 하나님 백성을 빗댄 표현인 것을 깨달을 때 소금은 결정체 그 이상의 어떤 대상으로서 인식됩니다. 소금이 대표적으로 활용되는 ‘맛을 내는 조미료’와 ‘상처를 치료하는 소독제’입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소금’으로 빗대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와 같은 대상의 특수한 역할과 더불어 이해하게 됩니다. 성도는 스스로가 이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이 되도록 일하며 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의 아픈 부분이 덧나지 않게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인식합니다.
교회를 ‘소금’으로 빗대어 말하는 것과 관련해서 성도가 쉽게 오해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백성을 ‘소금’으로 처음 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긴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을 소금으로 자주 빗대어 말씀하셨으니까 말입니다. 속사도 마가는 예수님이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의미로 그들을 소금으로 빗대어 말씀하셨음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야웨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고대 이스라엘 백성을 소금과 관련하여 말씀하셨음을 세상에 알립니다. 야웨 하나님은 민수기 18장에서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자신과 그들이 소금 언약을 맺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비유입니다.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소금을 통해 언약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으로 자신에게 예배드릴 때 소금을 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야웨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로 자신과 단일가족이 된 이들이 서로에게 신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함을 소금을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전부터 자신과 백성이 신실하게 지켜야 하는 삶의 기초를 표현하는 비유로서 성도를 ‘소금’으로 말했습니다.
소금 언약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분과 한 가족이 된 백성이 통치자이자 제사장 나라로서 인생 전체를 통해 신실하게 지켜야 하는 삶을 표현하는 비유입니다. 야웨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은 자신의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말씀하셨죠. 이 말의 핵심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에 참여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백성은 오직 그분의 은혜로만 야웨 하나님과 단일가족이 되었기에 주님이 단일가족으로 삼으시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불공평하게 대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사람이 소금을 빗대어 말할 때 가지게 되는 두 가지 그림, 상처를 치유하고 더욱 세상이 살맛나는 곳으로 변하게 하는 성질을 가집니다.
야웨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을 소금언약으로 비유하셨던 것처럼 신약시대의 교회도 같은 소금언약의 백성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교회 공동체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맡겨진 동일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과 그 후손인 유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타민족을 불공정하게 대했지만 (자기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던 헷 사람 우리야를 잔인하게 목숨을 잃게 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님 백성이 된 교회 공동체와 언약을 체결하시고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모든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이 크신 은혜를 잊지 않고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정의를 행하는 통치자이며 제사장인 ‘소금’의 역할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이 소금으로서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합당한 부를 허락하십니다. 성도가 이 땅에 살며 가지게 되는 모든 부요함은 소금으로서의 삶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돌아보아 섬기라고 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소홀히 대한다면 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안타까운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이 이 땅에서 사는 일만 생각하며 돌본다면 이 사람은 절대 하나님 백성인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기에 비유로 말하는 언어습관을 주님 안에서 회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