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나는 친구들과 백두산을 가 볼 기회가 있었다. 맑은 날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여행 복(福)이 있어서 인지 날씨가 아주 좋아 천지의 장엄한 광경을 보는 행운을 가졌다. 또 백두산 아래로 펼쳐진 능선과 하늘과 맞닿은 천지의 장관은 그 아름다움의 오묘함과 신비함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높고 깨끗한 하늘과 희귀한 꽃들, 야생화의 어우러짐은 잘 꾸민 어떤 정원보다 아름답고 편안함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이 머문 것은 두메 양귀비였다. 무리 지어 웃고 있는 투명하고 엷은 노란색의 꽃은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백두산 높은 곳 자갈밭에서 바람을 이기기 위함인지 줄기나 잎을 털로 감싸고 뿌리를 땅속 깊이 내려서 지면에 바짝 붙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더욱이 겨우 5~10㎝밖에 안 되는 키로 지탱한다니 그 강인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꽃잎은 네 개의 둥글고 옅은 노란색인데 가끔은 귀하게 흰색도 있다고 한다. 꽃말이 꿈길, 망상, 망각이라고 하며 얇은 네 잎으로 되어 있다. 산양귀비라고 불리기도 하며 두메가 주는 소박함과 화려한 양귀비의 매력이 함께 하는 듯해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양귀비 같다고 하고 뜨거운 정열의 표현으로 빨간 양귀비를 떠올리기도 한다. 양귀비는 5~6월에 피며 우아하고 곱기도 하지만 향기는 사람을 홀린다. 꽃이 피기 전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꽃만 피면 고개를 바짝 치켜드는 것이 얼굴값을 하는 듯 보인다. 덜 익은 양귀비 열매를 칼로 베어 흘러나온 진인 아편은 그 마력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게 된다. 사람의 의지력을 망가뜨리고 파멸로 이끌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모습이나 고운 색깔은 사랑 받을 매력을 지니고 있다.
양귀비는 중국 당 나라 때 명황(明皇)에게 간택되어 입궁했으나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지냈다. 어느 날 우울함을 달래려고 화원에서 꽃을 감상하며 무의식 중에 함수화를 건드렸다. 그때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함수화는 바로 꽃잎을 말아 올렸다. 당 명황(明皇)은 꽃을 부끄럽게 할 만큼 아름다운 그녀에게 감탄해서 절대가인(絶對佳人) 또는 함수화(含羞花) 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얼굴을 돌려 한번 웃을 때마다 백가지 미태(媚態)가 생긴다’는 사랑을 노래한 서사시도 있다.
사람의 얼굴은 열 번 변한다고 한다. 환경과 마음상태에 따라 변하는 것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듯 마음을 보여주는 창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언짢아 찌푸린 얼굴을 하면 ‘낙태한 고양이 상 같다’고 한다. 얼굴에 기운이 없으면 금방 풀이 없고 누렇게 떠 보인다. 또 사랑을 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살 때에는 밝고 환하게 보인다.
시대가 변하고 미인의 조건도 많이 달라졌다.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어떤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자기가 갖고 있는 개성을 조화롭게 연출하면 멋스럽고 아름다운 미인이 되는 때인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주위에서 보면 눈이나 코를 고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턱이나 광대뼈도 붙이고 깎아 내고 다리나 팔도 가늘어 보이게 하는 과감한 성형수술도 한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복부에 있는 지방이나 허벅지에 있는 지방 제거수술을 하다 목숨까지 잃는 일도 있었다. 지나치게 외모를 중시하는 이 시대의 슬픈 단면을 보며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눈 밑의 주름도 제거해보려는 생각도 하고, 경락 마사지를 하면 얼굴도 작아진다니 잠시 미인이 된 내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篇)에 중국의 사대 미인 중 하나인 서시(西施)의 미모에 관한 얘기가 있다. 서시가 강변에 있었는데 맑은 물이 그녀의 고운 자태를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들이 헤엄을 멈추고 천천히 가라앉았다고 해서 그녀를 침어(浸魚)라고 부를 만큼 아름다웠다. 고향 마을에 돌아온 서시가 몹시 우울해 찡그리고 다녔더니 동네 처녀들이 모두 서시를 흉내 내어 찡그린 얼굴을 하고 다녀 마을 사람들이 창을 닫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것은 외모에만 관심을 두고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소홀히 하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리라. 그러나 시대는 변해도 외모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성형을 해서라도 미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하겠지만 마음을 곱게 가꾸는 것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것이다.
백두산 높은 곳의 강한 바람 속에서 작은 키를 가지고 앙증맞게 하늘거리며 두메의 소박함을 지닌 두메 양귀비가 마음을 더 이끈다. 강한 바람과 척박한 땅에서도 고요하고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두메 양귀비가 지니는 아름다운 속성을 내가 지닐 수만 있다면 무엇을 탐내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