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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오규원 시인) '날(生)이미지'의 시인.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직관적 인식
(오진현) 체험적 시론집『마음의 시학, 꽃의 문답법』을7 통해 탈관념의 시론을 감각적으로 보여줌.
-고정관념은 '반복되는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견고하게 형성(편견적 인식)
-직관은 판단이나 추리 등의 사유작용을 덧보태지 않은 상태
-탈관념의 본질이 '본성이 비치는 마음에 있음을 명료한 비유로 설명
※(관념시)사물을 단순한 사물로 보지 않고 어떤 관념의 등가물로 보는 방식.이렇게 되면 사물은 자기의 순수를 잃게 됨. 우리는 사물을 관념으로 읽으려고 함
- "시는 도다. 정서를 닦아 시를 낳는 것이며,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참된 시를 쓴다."는 소신도 피력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탈관념의 시학을 더욱 확장해 관념을 배제한 시를 쓴다는 의미의 "시를 찍는다'는 세계로까지 나아가게 됨.
- (방법론) 여행, 명상, '마음의 꽃 피우기' 감성 훈련, 느낌 움직이기'로 공간적으로 자유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훈련,
일상적으로 보는 것을 180도 돌아서서, 또는 비틀거나 반대편에서 보는 것을 머리속에 연상하는 방법 등
(본문)
관념적이지 않은 울림과 공감이 큰 시를 위한 관념성 극복하기
[좋은시 쓰기 십계명 6]
오진현의 탈관념의 시학
<꽃의 문답법>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
시인 / 김용만
아름다운 것들은
땅에 있다
시인들이여
호박순 하나
걸 수 없는
허공을 파지 말라
땅을 파라
김용만의 시 <시인>은 '허공의 관념이 아니라 땅의 현실 감각'을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시가 관념적이고 현실성이 결여되면 공허해진다는 뜻인데요.
그렇다면, 허공이 아닌 ‘땅의 감각’은 어떤 시 쓰기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이와 망초 / 오규원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
돌 없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날개를
몸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날이미지'란 상투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사물을 새롭게 보며
반복했다 그 때마다 날개를
몸속에 넣은 돌이 허동으로 날아올랐다. 새로운 이미지로써 사유하는 것입니다.
오규원 시인은
'날(生)이미지'의 시인으로 유명하죠.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직관적 인식,
그것이 '날이미지시'의 핵심인데요.
“날개를/ 몸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라는
구절의 감각은 환상적입니다.
수직 운동을 되풀이하는 돌멩이에서
숨겨진 날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는 구절도
무척 정밀하고 객관적인 묘사입니다.
데굴데굴 굴러갈 때는 돋아난 발을 보고,
몸속으로 들어간 발을 보는 감각이죠.
오규원은 이렇게 늘 보는 자연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관찰하며
이들을 손에 잡힐 듯 감각적으로
형상화해냅니다.
오규원의 '날이미지 시'는 이렇게 사물을 인간의 관념에서 해방시킵니다.
김춘수는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하는 관념 제로(0)의 시에 대비해 세계를 관념으로 묶는, 의미 부여의 시가 있다고 했습니다.
세계를 관념, 의미로 묶어서 그 관념을 독자에게 강요하려는 관념시를 그래서 의지의 시라고도 했는데요.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 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박두진의 대표작 <해>는 명령형으로 어떤 의지의 단호함을 보여줍니다.
사물을 단순한 사물로 보지 않고 어떤 관념의 등가물로 보는 방식이죠.
이렇게 되면 사물은 자기의 순수를 잃게 되는데요. 이처럼 우리는 사물을 관념으로 읽으려고 합니다.
감성에 의존하기 보다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관념시는
고독이나 슬픔, 자유, 평화 세월, 효, 애국, 기쁨, 사랑,
미움, 우정, 도덕적 또는 철학적 명제 등
우리의 심리상태 또는 마음을 나타내는 개념어에 의존합니다.
시에 관념어를 쓰면 독자들은 막연해지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고 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강요하는 시가 되어 버립니다.
반면, 구체어는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물, 책상, 의자, 수첩, 산, 책, 연필 같은 단어들이죠.
그래서 ‘고독’이나 '사랑' 같은 관념어가 아닌 독자가 시를 읽고 ‘고독하다’,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 있도록 구체어를 쓰러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관념의 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진현은 1999년 펴낸 자신의 체험적 시론집
『마음의 시학, 꽃의 문답법』을 통해 탈관념의 시론을 감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오진현은 시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뭘 골치 아프게 시를 쓰려고 해."하며 온갖 빌미를 달아 돌려보내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진정으로 시 배우기를 열망하면 주변에 있는 꽃을 꺾어 들고 묻습니다.
"이게 무엇이지?" 그러면 당혹스러워 하면서 "꽃이지요.”하고 불안스러운 투로 대답합니다.
그러면 시인은 그 꽃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며 소리치죠. "이래도 꽃인가? 쓰레기지!"
선문답 같은 이런 파격적인 질문 공세는
고정관념에 젖은 일상적인 사고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사물의 순수 본질에 접근하도록 유도합니다.
이것이 '탈관념 시학'의 첫 관문입니다.
이 문답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패턴을 지녀
"시인의 뇌라는 박스 속에 언어나 자극이 들어가서
새로운 이름이 탄생 되"는 원리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런 ‘꽃의 문답’을 통해
'꽃'이라는 이름의 고정관념에 일대 충격을 가한 다음
시인은 김춘수의 시 <꽃>을 감상시킵니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그러면 다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꽃>이란 시의 새삼스런 음미에 황홀해 합니다.
그러면 다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꽃>이란 시의 새삼스런 음미에 황홀해 합니다.
이 과정을 거듭하면 비로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생각이 자유를 얻고 새로운 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신비한 '직관력'을 갖고 있습니다.
직관은 판단이나 추리 등의 사유작용을 덧보태지 않은 상태, 즉 갓난아기처럼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의 '아는 것'으로 존재의 본질을 투시하는 내적행위를 말하죠.
그러나 성장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나름의 사유체계를 갖게 되어 ‘생각 즉, 관념'을 갖게 됩니다.
'꽃'이라고 하면 지금까지 알고 경험한 꽃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이 그 안에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굳어진 것이 바로 고정된 관념, 즉 '고정관념'입니다.
"만상(象)을 내가 보았으나 그것은 자신이 비치는 상(심상, 마음)일뿐 참은 아니다.
따라서 만상을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자아)을 보았다 함이 옳을 것이다.
붕어빵에서 붕어를 본 것은 바로 자신 생각이 보인 것이다." 라거나, "마음은 본래 비어 형상이 없고,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들의 만상(心象)이 있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물을 보면 물이 되고 바람을 보면 바람이 된다.
내 손에 꽃을 들고 있을 때, 마음이 화병이면 꽃이 되고
마음이 쓰레기통이면 쓰레기가 된다."는 인식은 모두 이 고정관념을 바탕에 두고 있죠.
사람의 일생은 끊임없는 '만남'으로 이루어지고,
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요소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 요소들이 결국 시의 '내용과 표현'을 결정합니다.
고정관념은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견고하게 형성되는데, 이로 인해 편견적 인식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다만 우리는 여행이나 환경 변화 등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벗어남을 통해, 또는 처음의 상태로 사물을 보려 하는 참선과 같은 직관적 깨달음의 수행을 통해,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어느 정도 깨뜨릴 수 있게 됩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생각을 바꾸면 마음의 눈이 환히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눈앞의 모든 사물에 긴장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느낌'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왜일까요. 시란 기본적으로 주체인 시인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정서작용이며, 시간 변수에 따라 '만남->긴장->느낌'에 이르는 본질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오진현은 "시는 '마음의 정서'이다.
바로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성품이 작용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정서'는 성품이 투사된 '느낌'이다" 라고 정리합니다.
이를 확인시키고 ‘고정관념 깨기'의 다음 단계로 이끌기 위해 시인은 다음의 시를 준비합니다.
시탁(詩鐸) / 오진현
그날, 다른 날과 달리 방에 난향이 은은하고
상쾌한 분위기였는데,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미당은 예를 받고 나서 옷 매무새를 추스르고
염불을 하려는 듯이 목탁을 집어 치기 시작했다.
‘똑 또그르르 똑 또그르르’
목탁 소리가 아주 맑게 방안을 울리고 밖으로 울려갔다.
그러자 나는 마음 경건히 하여
무슨 독경이나 해주려니 기다렸는데,
문득 아래층에서 “이예!”하고 며느님이 올라왔다.
난 어리둥절해 버렸다. 선생님은,
"오군이 왔네. 차 가져 오게!" 말하고 나서
빙긋 웃고 나를 보며, "오군! 벨소리는 운치도 없고 해서 …
이 소리 참 좋지 않은가?"하는 것이었다.
오진현의 시 <시탁(詩鐸)>은,
미당 선생께 사사를 받을 당시의 일화를 시화한 작품인데요.
'멍!' 뒤통수를 커다란 솜방망이로 치는 느낌이다.
'그렇다! 저 스님이 목탁을 쳐 사람을 부르는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오진현은 고정관념에 대해 큰 깨달음을 얻고 모든 사물을 새롭게 보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론을 '시탁'이라 이름 짓습니다.
아무리 시인이라 해도 사물을 새롭게 보는 탈관념의 세계를 일상화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아무리 새롭게 보려 해도 일상적인 시선에 머물게 되고, 아무런 새로운 긴장감이나 시적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진현은 여기서 '탈관념의 꿈꾸기' 또는 '사물을 새롭게 보는 법'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마음의 꽃 피우기' 감성 훈련입니다.
손에 든 꽃을 하나하나 분해하면서
일일이 눈을 맞추게 한 뒤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해
손에 든 꽃을 모두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죠.
그러면 꽃은 없게 되고 느낌만 남게 되는 데, 이 느낌만 가지고 '마음의 꽃'을 피우게 합니다.
꽃을 보지 않고 꽃을 생각하면서 꽃잎과 꽃술들을 자유롭게 만들게 하면 어느새 새로운 긴장과 느낌이 일어나고 "영감이 쏟아집니다.
자동기술(自動記述) 훈련의 하나인데, 이러한 '탈관념의 꿈꾸기'는 어떤 새로운 질서의 공감각과 방향이 있어야만 망상에 빠지지 않게 되죠.
질서는 반드시 '자연'에서 취해야 하며, 그 방법은 '직관'에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자연스런 질서'는 시의 성공에 중요한 척도가 되는데, '이 '자연스런 질서'를 잃게 되면 시는 '난해(難解)'의 바다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자동기술훈련애는 최면을 활용한 다음의 방법도 활용합니다.
방법도 활용합니다.
"자,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편안히 호흡을 고른다.
이제 감각 여행을 떠난다. 태양! 태양을 마음에 그린다.
태양을 향해서 둥둥 떠간다. 경비행기 속도로 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생각한다. 1초, 2초, 3초․…
태양! 태양이다. 느껴본다. ...뜨겁다. ...탄다! ...눈을 뜬다."
이런 식으로 최면을 통한 훈련을 하고 눈을 뜨면, 바라보는 사물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되죠.
여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하나의 느낌을 말하는데,
몇 분 전만해도 무감각하게 보아 넘겼던주변의 사물들, 예를 들어 커피 잔, 스푼, 화분, 의자 등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정서가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느낌 움직이기'로 공간적으로 자유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훈련입니다.
지구 밖의 한 점에서 사물을 보게 하면 지구의 자전에 따라 낮에 서 있던 물상이 밤이면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이 되죠.
그 상태에서 마음속에 바람 부는 모습을 떠올리면
여자의 머리칼이 물속에서 부유하듯 산발해 있는 어떤 충격적인 심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일상성을 깨뜨릴 수 있는 탈관념의 좋은 체험 훈련이 되는 것이죠.
다음 시는 이런 훈련 속에서 빚어진 감각적인 탈관념 시편의 한 예입니다.
구의역에서 / 한성례(1955~)
둥둥 떠가는 구의역
내 앞에 누워 있는 길.
뱉어낸 사람들
물살로 흘러 흘러서
무시로 흩어져 간다.
질주하던 길이
문득 산밑에 가서 머문다.
길 한 줄기 시선 끝으로 붙잡으면
녹음이 무찔러 와서
밀려드는 차 물결
쏟아질 듯 곤두박힐 듯
가로수 함께 일렁이다가
몇 조각 틀어지고 조각난 풍경
판토마임의 내가
거꾸로 서서 자막 속을 걸어간다.
감색 치마폭의 하늘은
지평에 닿아
잠시 눈 뜬 플랫폼
흘러 흘러서 인파
투사하듯 입력되는 곳
구의역
셋째는 일상적으로 보는 것을 180도 돌아서서, 또는 비틀거나 반대편에서 보는 것을 머리속에 연상하는 방법입니다.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보게 하여 시야를 입체적으로 열어주는 훈련이죠.
이러한 담론과 체험 훈련을 통해 고정관념 깨기의 감각이 어느 정도 익혀지면 그 다음 단계로 감성을 움직이고 어떤 사물을 직감하는 훈련을 쌓아나갑니다.
그리고 다음의 감성적인 시들을 보여주며 탈관념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죠.
죄가 없는 돌 / 오진현(1946-2010)
시 쓰는 돌이라고 손 가리킨다. 바보같이 따라오는 눈길.
또 시 쓰는 돌이라고 손 가리킨다.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눈길 돌이 있다. 있는대로, 지금 길거리에서 공사장
근처에서 세포 속에서 시 쓰는 돌이라고 손 가리킨다.
문득 눈감아!' 한다. 징소리, 또 비가 올 때마다 확실히
소리를 내고 오는 시를 따라 가자. 있는 대로 죄가 없는 돌이 있다
내가 구겨서 버린 바다 / 오진현(1946-2010)
(전략)
팔딱이다가 해가 쏙 빠져
물고기들이 눈을 부릅뜨고
보는 바다 속은 불밭.
생각이 없는 돌을 집어
던져서 수정 속의 바다
진주가 될까. 아닐까
머리를 부딪는 언어들이
잔잔히 울음이 되어 주름진다.
내가 구겨서 버린 바다
오진현의 시
<죄가 없는 돌이나 <내가 구겨서 버린 바다>는
제목부터 무척 감각적입니다.
<내가 구겨서 버린 바다>는 시인이 연안부두에 갔다가 문득 초감각적인 심상들이 파도에 밀려오며 은박지처럼 주름지는 체험에서 빚어 올린 시팬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를 예로 들며 '달관념을 설명해도 시에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본질적인 어떤 의식 혁명, 즉 감성을 기르고 사물을 새롭게 보는 눈을 갖게 하는 깨우침의 훈련인 '감성 지도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
오진현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띈다.
점점 더 높이 튄다.
빌딩 콘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로 쏟아내려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간다.
퐁퐁퐁퐁 내려 온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갇힌 공간에 앉아 눈을 감고 최면적인 방법으로 이 시를 천천히 읽어주거나 스스로 눈을 감고 혼자 읽게 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깨끗하고 아름다운 공을 상상해 그린 뒤 시의 진행에 따라 공을 튀기어 보도록 하는 것이죠.
튀는 상상을 반복해 마침내 공이 하늘에 별로 박힐 때까지를 반복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시의 모든 것을 몸으로 느끼고 감상할 수 있게 되는데요.
이렇게 심상이 실제로 뚫고 지나갈 수 없는 관념의 벽인 천장도 뚫고 벽도 뚫고 나가는 것을 스스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감성'의 의미를 실감나게 느끼도록 합니다.
설명이 여기에 이르면, 이성 안에 갇힌 관념의 이야기에서 오는 감동보다 깨끗한 탈관념의 세계에서 우러난 감동이 훨씬 강렬한 것임을 스스로 확인하게 됩니다.
직감만으로 느낀 근원적인 감동은 물론 그것의 무의식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내용까지 만날 수 있게 되죠.
위의 작품에서 직감만의 표현으로도 달과 공과 운동권 학생들의 뛰는 모습의 본질적인 느낌이 저절로 융합되고 자연스런 질서 속에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탈관념은 보다 본질적인 진실에 접근하게 되고 그 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탈관념의 시 창작에서 오진현은 명상을 통한 마음공부, 마음의 정화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물을 증류시키면, 아무 맛없는 무미한 순진무구한 물이 되는데, 이것이 수도자들이 추구하는 '마음'이라면 황톳물을 가라앉혀 정화시킨 토장수의 '물맛 있는 물'이 탈관념에서 추구하는 마음이고, 그 심상이라면서.
탈관념의 본질이 '본성이 비치는 마음에 있음을 명료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이와 함께 "시는 도다. 정서를 닦아 시를 낳는 것이며,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참된 시를 쓴다."는 소신도 피력합니다.
이어 시는 감동을 지나 독자의 영혼까지 정화시켜야 한다."는 세계에까지 가 닿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오진현이 전위적인 시운동으로 펼쳐 보인 '탈관념의 문학 선언 문답법의 대강의 요지입니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탈관념의 시학을 더욱 확장해 관념을 배제한 시를 쓴다는 의미의 "시를 찍는다'는 세계로까지 나아가게 되죠.
그의 '디지털리즘 선언'이란 글이나 시론집 『이상의 디지털리즘』 등은 언어를 인체에 비유해 '언어의 사물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시에서 관념을 배제하자'는 오진현의 이러한 탈관념의 문학 선언에 대해 최진연과 심상운이 반론에 재반론을 이어갔는데요.
이번 영상의 목표가 시 창작에서 탈관념에 대한 이해와 감각을 높이는 데 있는 만큼 이들 두 시인의 반론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오진현의 '꽃의 문답을 통해 어떻게 하면 관념적이지 않은 울림이 큰 시를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았습니다.
시에는 관념적인 요소가 존재하기 마련이죠. 앞에서 읽은 박두진의 대표작으로 관념시라 할 수 있는 시 <해>가 한국 시사에 길이 남는 고전이 되고 있는 것처럼 관념시라 하여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된 시는 사물의 진실을 보여주는 시라 하겠습니다.
울림을 주고 감동을 주는 시는
현실성과 서정성에 그 바탕을 둔 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 또는 안경 깨뜨리기 / 심상운(1943~)
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못 하나. 우리의 눈.
풍경들은 시시각각 새롭게 변화하고 치장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스스로 환히 보여주고 있다.
이미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계곡의 숲길이나 꽃나무들, 묵은 생각이
그려내어 벌려놓는 화판 위의 그림.
이젠 그 관념의 안경을 깨뜨려 버려라. 우리의 눈.
순간순간 펼쳐 보이는 풍경의 색깔이나 모양,
변화의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눈부신 육체와
혼을 찾아내어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면서 교감
순백과 눈 맞춰라, 우리의 눈, 뇌세포 속에
푸른 반점으로 남아 있는 몇 만 년 전의
원시기억까지 모두 지울 수 없다.
우리의 눈 먼지 묻고 얼룩진 유리창을 계속 깨뜨려라.
들어오는 밝은 빛을 굴절시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형상들을 계속 깨뜨리고 또 깨뜨려라. 우리의 눈.
오오, 아무 배경
없는 순수인식
그 한가운데서 투명하게 빛날 새 눈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