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교리문답 참회 2
① 고해성사는 종교개혁을 통해 제거되었으나, 자발적인 죄의 고백(참회)은 여전히 유효하다.
② 마음의 참회는 자신의 과오를 오직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행위다.
③ 개인의 참회는 사제 앞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제자매 간에 하는 고백이다.
참회에서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확실히 구분하고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은 보잘것없으나 하나님의 일은 높고 위대하다는 것을 주목합시다. 참회하러 오면서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인 양 하지도 말고, 자기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제공하러 온 것처럼 행동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이 얼마나 선하고 악한지 스스로 점수 매기지도 말고, 그런 말을 하려면 참회하러 오지도 마십시오. 참회에서 중요한 것은 ①당신의 곤궁을 탄원하는 것, 그리고 ②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신다는 것, 그리하여 ③하나님이 당신의 마음과 양심을 가뿐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입니다.
참회란 사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다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이렇습니다. ‘기꺼이 마음이 아닌 채 억지로 사죄선언 들으러 참회하러 가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말리십시오. 또한 자기의 지고한 신앙을 자랑하려고 참회하러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도 역시 돌려보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드리는 권면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회하면 당신의 곤궁을 가감 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일’을 드러내는 공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회의 목적은 듣는 데 있습니다.
거기에는 당신의 죄를 용서하겠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이 사죄 선언의 말씀을 고귀하고 위대한 보화로 여겨 온 마음과 감사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는 절실함으로 참회에 임하라
누구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오는 절실함으로 참회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회를 억지나 강요의 수단으로 오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회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양심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불안과 공포를 몰아내고, 오직 기쁨 안에서 참회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참회하는 자는 가난하고 불쌍한 거지처럼 바로 그 자리에서 적선을 바라며 돈과 옷이 자기에게 나눠지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했으니 두들겨 맞고 쫓김을 당할 몽둥이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거기 기다리고 있다면, 참회자는 자신이 현재 가진 것마저 빼앗길까 봐 그 자리에서 힘껏 도망칠 게 분명합니다.
솔직히 말해 자기가 얻어 갈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인데 아무 이유 없이 거기로 달려갈 거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도 하나님의 계명을 이런 식으로 준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배고픈 거지가 아무것도 가져갈 것도 없고, 그저 자기의 가난과 비참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될 곳이라면 거기 갈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그 어떤 기쁨도 위로도 생길 리 없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적개심만 점점 더 커질 게 분명합니다.
이제껏 교황의 설교자들은 이런 식으로 풍성한 연보와 엄청난 보물들을 긁어모았지만 그런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습니다. 단지 참회하라고 강요하면서 그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얼마나 불결하고 부정한지 보여주는 데로 몰아붙였을 뿐, 그 이상의 목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좋아서 그런 곳에 참회하러 가겠습니까?
우리는 참회가 그런 것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참회는 우리가 얼마나 죄로 가득 차 있는지 보여주는 거울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참회에 대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당신의 상황이 딱하고 비참합니까? 그렇다면 참회의 장소로 가십시오. 거기서 당신을 위해 준비된 치료제를 사용하십시오. 자신의 비참과 곤궁을 느끼고 있다면, 누구든지 그곳으로 기쁘게 달려가십시오. 거기서 당신이 구하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참회를 경시하는 자,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참회란 이렇듯 훌륭하고 고귀하며 위로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권면하겠습니다. 큰 시련을 당할 때 이 귀한 선물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오직 필요한 것은 참회의 장소로 나아가는 당신 스스로의 열심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와서 구원과 은총과 위로의 특권을 나누어 주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참회를 우습게 여기면서 참회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판결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게다가 성만찬의 기쁨을 함께 누리러 올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경멸해서는 안 될 것을 경멸했으며, 당신 스스로 죄 용서가 필요 없다고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당신이 복음을 경멸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교회가 교인에게 참회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에 참회를 시행해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설교와 권면을 듣고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의 작은 조각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렇다면 참회를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해도 기쁘게 달려온 것이고, 우리에게 참회에서 나올 사죄의 복음을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강요의 방향이 변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회하라’는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당신은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발적으로 이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강제적인 참회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우리에게 와서 설교와 성례전을 베풀어 달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이제 당신이 우리를 재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죄 선언을 요구해야 한다
참회에 대하여 권면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싶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만일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간다면, 아마도 저는 참회의 장소로 당신을 인도할 게 분명합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죄에서 풀려나기를 바라며, 기쁜 양심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것에 갈급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위와 기갈에 쫓기던 사슴이 물로 달려들듯 떡을 향해 달려들게 될 것입니다.
시편 42:1 말씀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는 나의 양심이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있을 때, 시원한 샘을 갈망하는 사슴처럼 사죄 선언과 성례전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참회하러 올 때 기쁨과 사랑 가운데 달려오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손을 높이 들고 찬송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복된 깨달음과 은총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