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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이루는 영원한 관계 (고린도전서 4:1~5) 2024년 5월 12일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전서 4:1~5)
<기도>
하나님 아버지, 종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시길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이 친히 우리 성도들을 도와주시고 또 저들의 삶을, 길을 밝혀 주실 것을 믿고 또 저들의 삶 속에서 능력이 되어 주실 것을 간절히 믿습니다. 주께서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작업을 우리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우리의 일입니다. 한 평생동안 우리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뿐, 우리의 구원받는 삶을 달리 더 절묘하게 설명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표현은 이렇게 시적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삶은 하나님의 굉장한 축복과 사랑을 받은 것과 또 몹시 타락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 두가지 사이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이에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온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려 주신 축복에 만족스럽게 우리가 응한다면 100프로 천국 가고, 1000프로로 은혜 받을 것입니다. 영광의 나라로 갈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으로 위로 받을 것입니다. 인간 삶을 몇 십년 밖에 안 살았는데도 영원히 보상받을 것입니다. 그만큼 강력한 것이 바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번 빠지면 누구도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강락한 은혜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고마운 것 그 이상입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과 내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유명한 누구를 아는데, 내가 그 사람의 팔촌의 옆집에 사는 사람의 동생이야.” 하는 식으로 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내 형입니다. 우리는 그가 가시는 길을 똑같이 왔으니, 주님의 옷을 물려 입듯이, ‘나는 이제 컸으니까 내 옷을 물려줄게. 동생아, 이 옷 입어라.’ ‘와~좋다’ 하고 주님의 입던 옷을 이렇게 입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형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배려입니다. 다른 신들은 이쪽은 공기가 나쁘다고 내려오지도 않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오신 그런 분이십니다. 그렇게 오신 것인데, 그런 구원을 훌렁 어디 흘려 버린다면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를 구원하실 그 의사가 마음 속에 가득합니다. 구원을 베풀려는 하나님의 그 너그러움 마음은 특정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향해 있습니다. 설령 그가 만세 전에 누구, 누구, 누구를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셨다 할지라도, 그는 모든 자를 부르십니다. 일단 모든 자를 부르시고, 모든 자에게 그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다만, 그 부르심이 많은 자들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한 자들만이 그의 구원을 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일컬어 ‘충성된 자가 구원받는다.’라고 오늘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충성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충성하면 열심히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하는 충성은 이 땅에서만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열심히 하는 척하면 뭐합니까? 우리는 사태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제일 충성되다 싶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교회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성경이 꼼꼼히 말하고 있는 충성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나를 알아줄 것을 위하여 나는 꾹 참고 간다. 그날을 위하여, 억울한 것 참는다. 100배, 1000배로 갚아주실 것을 믿는다. 그분만이 내 마음을 알고 계시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인간의 타락상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강 위를 징검다리를 따라 건너가야 합니다. 굉장히 도전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기의 인간성 타락, 내가 타락한 것을 인정을 하고, 나를 의심을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시작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안전하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곳으로 가려면 하나님과 손잡고 가야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 저 혼자서도 잘 갈 수 있어요. 하나님, 보세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견인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 나를 내일까지 옮겨다 주세요. 내일까지 도와주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내일까지 옮겨주셔야 됩니다. 다음날 일어나서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 나를 책임져 주시고, 오늘 나를 맡아주세요. 오늘 마지막 시간까지 나를 맡아 주세요. 나를 내일로 견인해주세요!’ 그렇게 하고 가야 합니다. 나는 내 타락성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의심해야 될 이유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타락성으로 인해, 우리에게서는 충성에 반대되는 성격이 나옵니다. 충성에 반대되는 모습이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럴듯 한데 진정 마음의 닻을 내리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큰 배는 몇 백 킬로짜리 고리로 이어진 사슬들이 수천 개가 우르르르 쏟아지는데, 그 사실을 내리는 데만해도 한 4-5분이 걸립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이 견고하게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날라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말씀을 들어야 하지만, 그 자체가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은 나와 주님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관계가 돼야 합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인도자입니다. 당신은 나의 구원자입니다. 나는 당신을 의지하고 갑니다.’ 나와 주님 사이에 걸림돌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 지금은 그래도 제가 위대하지 않습니까?” 하는 식 말고, “주님, 다 아실 것이지만, 나 이런 범죄했습니다. 나 마음이 더럽게 치사해서 교회에 대하여 이 치사함을 내가 행했습니다. 나 지나고 보니까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 주의 교회 사랑하지 않더군요. 그 순간에 나도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하나님, 나는 지옥에 들어가야 딱 맞습니다. 그러나 바랍니다. 오늘 살려 주시옵소서.” 하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해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고장난 마음을 고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17장 보면, ‘사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된 것은 마음이라.’[1]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앙인들은, 우리 과거에 그런 사람들 많았는데, ‘과연 회개한 사람인가? 성경에 회개라고 말한 건 무엇인가?’ 하는 의심이 들게 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것은 신경쓰고 있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우리의 망가진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치사하고, 우리의 거짓되고, 우리의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덕이 없는, 다른 사람을 공격할 여지가 가득하고, 미워하고, 깔아 뭉개고, 자기 혼자 이기고 싶어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속을 뭐라고 할까? 지금 언급한 부분뿐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 썩어 있습니다.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만물 중에 가장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어떨 땐 개를 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너무 훌륭합니다. 우리 개가 있는데 주인이 밥을 먹을 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바라봅니다.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해서. 개들은 확실합니다. 주인을 그저 아끼고, 걱정합니다. 주인이 그리 예뻐하지도 않고 구박을 하는데도 따라다닙니다. 저는 그리 반기지도 않는데도 그렇게 저를 좋아합니다. 저는 제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예뻐할 겨를이 없습니다. 에너지가 딸리다 보니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데, 그런데도 그냥 와서 꼬리를 흔듭니다. 진짜 체면이고 뭐고 없습니다. 자기를 예뻐하지 않는 주인인데도 그렇게 따릅니다. 그럴 때 보면 개가 형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상한 이 마음을 다스려 줘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께 원수 된 그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나를 눌러 주시고 나를 구원해야 합니다. 그날까지 그가 나를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인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너무 다행입니다. 만일 ‘선지자를 통하여만 듣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시다. 이끌어 가신다.’ 하는 식으로 기독교의 이론이, 기독교 교리가, 기독교 신앙이 전개됐다면 참 곤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으로 오셔서 이제 사람으로 함께 가신다는, 우리 바로 옆에도 계실 수 있는 그러한 인격임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가 여기 계시지 않지만, 우리 신앙생활 하는 건 왜 합니까?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참으로 주님께 충성하고 싶습니다.
과거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에도 보니까 ‘충성합니다.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습니다! 나를 목사로 안수해주십시오!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했던 사람이 제일 먼저 배신했습니다. 그런 식의 충성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나는 너무 많이 그런 것을 실제로 경험하다 보니, 이제 그런 말에 신뢰가 안 갑니다.
우리가 여기 왜 있습니까? 종교성? 필요없습니다. 종교성은 따라오는 불순물에 불과합니다. 여러분과 나는 예수님을 의지하기 위해, 그것 때문에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이끌어 줄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내 삶속에서 이 부실하고 이 망가진 나의 인격을 그래도 품어주시고 ‘너는 천국 아들이라!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 너는 내 백성이라! 원래 백성이 아니었던 너희를 내 백성이라 삼겠노라.’ 하셨습니다.
충성은 마지막 날까지 변치 않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충성이란 말을 좀 엉성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충성’ 하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영어로는 faithfulness고 하는데, 견고한 믿음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충성하면 그냥 ‘열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충성이라 할 때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할지 제가 맞춰 볼까요? ‘열심히! 당분간은 열심히!’ 이거 생각할 것입니다. 틀렸습니다. 충성이라 하면 보통 누구를 향해 그냥 열심히 봉사해주는 것, 이런 것을 떠올리는데,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괄호를 치고 아주 조그마한 글씨로 ‘변할 수도 있음’ 하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충성은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신다.’ 아까 말씀드렸죠? 예레미야서 17장에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본다’고 했습니다. ‘심장을 보고, 폐부를 시험하신다’ 그랬습니다[2].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속을 그렇게 열어 보실까? 사람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시지, 겉모습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과 다릅니다. ‘저 사람 훌륭한 것 같은데!? 사울이라는 이 사람 되게 큰 것 같은데.’ 다윗의 형제들 중에서도 ‘오! 멋있는 사람 있는데.’ 했지만 하나님께는 아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제일 아닐 듯한, ‘왜 저 사람을 뽑지?’ 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데려가시고 사용하십니다. 우리와 보는 눈이 다른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이시니라.’[3]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에 속이지 않고, 그 마음이 일관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그것을 보십니다. 내 교회를 내가 사랑해야 합니다. 내 교회, 내가 왜 사랑해요? 내 주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께 도움이 돼야 합니다. ‘나 주님께, 정말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에 진짜 100만분지의 1도 안 되겠지만 내가 도움되길 원합니다. 나로 인해 주님이 조금이라도 도움되길 원합니다.’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나 여기 신길동, 혹은 여기 신도림동 여기 만난 하나님께 왜 그렇게 내가 하는 것일까요? 충성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마지막날까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충성은 오늘은 여기에 충성하고, 내일은 저기에 충성하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냥 열심입니다. 아주 볼드체로 해서 ‘당분간은 열심히. 상황이 변할 때까지.’ 이런 것이죠.
과거 우리는 무슨 실적을 내면 천국이 확보가 되는 것처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무슨 ‘장’을 했으니 이제 천국 가는 것은 어느 정도 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 했으니까, 나는 됐겠지?’ 이 세상에서 무슨 능력이 있어서, 실적이 있으니까 ‘나는 좀 인정받는다.’라고 생각해서 그런 모습을 우리가 열심히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또 무슨 지식 있는 사람은 교회를 다 때려 부셔도 되는 것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천국은 이미 확보해 놓았다는 마음에서일까요? 이미 자기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걸 다 받았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심한 게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이 없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했다 해도 그 사랑은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나를 통해 이 땅으로 또 좌우로 전달되어져야 되는데, 나는 사랑을 전달해주는, 투과해주는 자기의 역할은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게서 다 투과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감동받고, 그 사랑이 나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서 내 정성으로, 내 땀으로, 내 아픔으로 투과 시켜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방법 그대로, 우리를 살려주신 방법 그대로, 우리도 그 사랑을 자기에게서 투과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다 작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했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성경 지식으로 전 세계를 집어 삼켰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종교성이 다분했습니다. 교회를 마구 부수면서도 예배는 또 계속 드립니다. 종교성을 지키느라고 몇 명이라도 모여서 예배합니다. ‘내가 몇 십 년을 이렇게 해 왔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멀리 계신, 큰 망원경으로 봐야 겨우 보이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 땅에 오신 내 그리스도입니다. 인격이신 분입니다. 내 왕입니다. 내가 “왕이시여.” 하고 절도 올릴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영 속에 내 영처럼, 내 혼처럼 내 속에 계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가까이 오셨는데도, 종교성만 가지고 그런 주님을 뿌리쳤습니다. 종교성, 소용없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것이고, 자기의 죄, 일단 자기가 ‘나 죄인이다. 나는 큰일났다! 나는 가망이 없다!’라고 ‘나는 오늘 어떻게 지나가나?’ 하고 느낌이 팍 오지 않으면 주님 만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주님이 오늘 내 손을 잡고, 나를 안아 주시고, 이끌어 주셔야 하는데,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런 주님은 내 팽개쳐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러면 육신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말로는 성령으로 한다고 했지만, 성령으로 한다는 사람들이 교회 부시고, 자기 스승을 죽이려 하고, 배반하고 교회를 공격합니다. 교회가 무너지길 바랍니다. 너무 사랑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지옥 가는 것이 너무 타당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지옥 간다고 하면 ‘아유! 잘됐습니다! 아이고~ 잘 불에 타네! 잘도 타네!’ 하고 박수 쳐 줘야 합당한 자들인데, 그런 자들이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조심할 것입니다. 구질구질한 원수의 것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자는 주님을 못 만났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두절미하고, 히브리서 3장에도 보면 모세도 충성했다 그랬습니다[4]. 어떤 의미가 될까요?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다 열심히 합니다. 뭐가 중요합니까? 모세는 참으로 자기 하나님께 마음의 충성을, 마음의 사랑을, 마음의 진심을 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도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5]. 사랑하지 않는데 충성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마음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종교성으로 자기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서 구원받았다고 확신합니까? “내가 몇 십년을 신앙생활 했는데!?” 지옥 가는 것이 확정 됐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았는데. 하나님 사랑을 받았으면 자기도 사랑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받았으면 지옥이 무서운 걸 알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받았으면 오늘을 무사히 건너갈 것을 너무나 간절히 하나님께 소원할 것입니다. 오늘의 살아있는 것을, 오늘의 시간이라는 것에, ‘앗 시간이 가는 것을 내가 보니, 나 살아있네?!’ 하고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인지를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살아있다는 것은 엄청난 상징성이 있습니다. ‘내 주님으로 내가 영원히 살 것이다. 나는 죽지 않았구나. 내 눈으로 이 초침이 가는 것을 보니 나는 살아있구나. 이와 같이 오늘처럼 그가 나를 영원히 살리시리라.’ 마음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는 우리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에게는 어렵더라도 하나님께만은 마음으로 대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저 자기 욕심만을 챙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님들도 아이들에게 “너… 그냥 세상에서 그냥 똑똑해야 돼! 다 이겨야 돼! 근데 걱정 사실은 많이 안 해. 너 영재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누가 너를 괴롭혀? 그러면 너도 싸워! 쓰러뜨려!”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말아야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피를 보더라도 너 훌륭해야 된다. 너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너의 정직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네가 억울하더라도 네가 옳은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이런 걸 가르쳐야, 그가 하나님을 뵙기 좋을 것 같습니다. “네가 그냥 싸워서 쓰러뜨리고! 네가 이겨버려!” 이런 식으로 누가 뭘 잘못했는데도 상관도 하지 않는 태도를 부모가 자식에게 보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 부모가 아이에게 잘못했으면 어린 아이라도 “아빠가 잘못했다. 이렇게 하면 안되지.”라고 진중하게 나와야 할 텐데, “조그만 게 까불고 있어, 이게 어디 어른한테 대들고 있어?” 하는 식으로 말하면 그 아이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집니다. “나는 너를 요만큼 밖에는 돕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너를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게 하겠다.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 되실 것이다. 너의 하나님 아버지를 잘 좇아라.” 하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이렇게 아이를 하나님 만날 수 있는 훌륭한 인격을, 바탕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너 속여서라도 너 훌륭하게 돼야 돼.” 하는 식 말고요. 온 세상이 다 자기를 버려도 하나님을 잘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 찾아갈 수 있는 성품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세상에서 태어나 성공한들, 하나님을 향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귀는, 영원한 관계를 가지신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더 접근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역사해 주시옵소서. 감동하여 주시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처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거하시기에 합당한 곳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잠시라도 내 마음에서 보람을 느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 나를 역사하시고 우리 모두를 이와 같이 역사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나를 감동하여 나를 완전히 변화시킬 것으로, 또한 변화시켰을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역사해 주시고 오늘 이 시간부터 나와 내 삶을, 내 매일의 삶을 친히 직접 인도해주시옵소서.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푸시고 하나님 정말 진지하게 모든 열심을 다하여 또 충성스러운 마음을, 풍성을 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우리가 영광의 우리 구원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인생의 삶, 매일매일 위기를 계속 맞고 지나치지만 우리 하나님 도와주실 것을 간절히 원하오며, 주께서 견인해 주실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맡아 주시옵시고, 우리의 회개가 반드시 이루어지고 우리가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우리의 신앙을 드리고, 우리 마음에 계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2]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2 23)
[4]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히 3:5)
[5]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6)
[출처] 20240512 마음으로 이루는 영원한 관계 (고린도전서 4:1~5)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