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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涯集(낙애집)鄭光天(1553 ~ 1594)...栗亭別業, 書呈張順伯孝元, 遊八公山(10수), 竹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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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재집(樂齋集) 서사원(徐思遠)생년1550년(명종 5)몰년1615년(광해군 7)자행보(行甫)호낙재(樂齋), 미락재(彌樂齋), 만오당(晩悟堂), 고시자(顧諟子)본관달성(達城)특기사항정구(鄭逑)의 문인. 장현광(張顯光), 손처눌(孫處訥) 등과 교유 * 〈過牙琴巖〉은 鄭師哲과 아들 鄭光天이 거처하는 곳을 지나며 父子의 덕을 노래한 것이다.
樂齋先生文集卷之一 / 詩 / 過牙琴巖 鄭林下師哲及子洛涯光天俱居于此。
盛德高風父子雙。鸞停鵠峙影澄江。幾回杖屨同心賞。此日孤吟咽老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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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南人物考 卷九 / 大丘 / 鄭師哲
鄭師哲字季明, 號林下, 東萊人。 襄平公種曾孫。 明宗庚寅生。 宣祖庚午司馬, 除南部參奉, 不就。 癸巳卒。
幼而沈重寡默, 有若成人。 及長, 氣像雄放, 文章富贍。 與裵洛川紳、郭參議越齊名。
與寒岡鄭先生遊, 盡棄舊業, 日講性理書, 沈潛反覆, 不得不置。
每鷄鳴, 令子弟省謁。 昧爽興, 盥櫛衣冠, 坐中堂受朝參禮, 男左女右, 再拜四拜, 一從古禮。 正至朔望, 深衣幅巾, 先行廟茶禮。 家後築望墓壇, 節日朔望, 就壇上望拜。 祭祀則沐浴齋三日, 旣祭無違禮, 則油然而喜。
與伯氏居異處, 擇健步奴, 每朝問安, 每以不得同爨爲恨。
訪崔孤雲古跡於錦城山中, 闢書齋, 約宋松溪言愼、徐樂齋思遠曁諸同志讀朱子書。 東岡金公亦肩輿來, 相與講論。
壬辰春, 謂子弟曰: “今年倭寇必發, 不可無遠慮。” 卽修築先壟以祭, 伏哭極悲痛。 及夏, 倭果豕突。 公乃倡義募兵, 方擬勦討, 適官軍覆沒, 遂以塡補。
避地江右寓於高陽, 亦設壇, 望拜先壟如前日, 行祭祀亦如之。 蔡夢硯撰行狀。
[주-D001] 宋松溪言愼 : 《林下集・林下鄭先生行錄》에는 “朱松齋愼言”으로 되어 있다.[주-D002] 陽 : 《林下集・林下鄭先生行錄》에는 “靈”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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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 한강연보 제1권 / [연보(年譜)]
명(明)나라 세종 숙황제(世宗肅皇帝) 가정(嘉靖) 22년 우리나라 중종 공희대왕(中宗恭僖大王) 38년 계묘(1543)
24년 우리나라 선조 29년 병신(1596) 선생 54세
○ 9월에 참봉(參奉) 정사철(鄭師哲)과 문생(門生) 진섬(陳暹)을 그들의 고향에 반장(返葬)하라고 명하였다. - 정사철은 대구(大丘) 사람으로 선생이 일찍이 그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고, 진섬은 경산(慶山) 사람으로 또한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임진년 전란 때 정사철은 거창(居昌)에서 죽고 진섬은 영천(永川)에서 죽었는데, 이때 선생이 그들이 타향에서 죽은 것을 슬퍼하고 관곽을 갖춰 반장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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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立齋集) 정종로(鄭宗魯)생년1738년(영조 14)몰년1816년(순조 16)자사앙(士仰)호입재(立齋), 무적옹(無適翁)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 최흥원(崔興遠)의 문인. 남한조(南漢朝)와 교유. 영남 남인의 석학 *達城十賢
立齋先生文集卷之四十一 / 墓誌 / 松潭蔡公墓誌銘 幷序
| 蔡應麟 | 1529 | 1584 | 仁川 | 君瑞 | 松潭, 灘隱 |
| 蔡應麟 (1529~1584) | 松潭蔡公墓誌銘 幷序 | 墓誌 | 鄭宗魯 | 立齋集 |
松潭先生蔡公歿幾二百年。其八世孫必勳。請余誌公墓曰。先祖德行。載達城誌。盖十賢中第三賢也。頃年鄕人士。已俎豆於柳湖社。又有歸巖李公所爲銘及海左丁尙書所爲狀。皆可傳信於百代。而惟誌文尙闕焉。敢以請。余辭不獲。遂謹書如左曰。公諱應麟字君瑞。松潭其自號也。蔡氏出仁川。在高麗有贈同知事先茂大將軍愼徵。禮部尙書錦城公寶文。其後世襲簪纓。至公曾祖諱禧祖諱胤周幷擧進士。考諱泓參奉。妣永川李氏參判滎之女。以中廟己丑十二月日生公。氣度雄豪。性聰穎。文藝夙就。二十七登上庠。然自見乙巳士禍。無進取意。卽廢擧。早有志於性理學。六經以下羣聖賢微辭奧旨。皆潛心翫究。時溪東全公慶昌嘗受業於陶山門下。公爲其餘敎可徵。公長溪東三歲而師事之甚謹。其求道之切如此。又與槐軒郭公再謙,樂齋徐公思遠。相講磨以樂。平居篤孝友敦行誼喜施與。賙竆恤急如不及。雅好佳山水。築二亭於琴湖之上。與諸名碩觴詠自得。翛然無埃𡏖氣。遠邇章甫。皆慕稱之。宣廟甲申六月日卒。從先兆塟公山內洞負坎原。配李氏進士逢女無子。申氏習讀寬女。有七男二女。男先知僉知,先行,先正,先言佐郞,先見參奉,先謹出繼,先容都事。女徐得龍,李潤雨參議。先知,先行俱無嗣。先正男楨出繼先言。取先容男樴爲嗣通政。女李陽晉。先見男集。先容男𣓶,樴。李潤雨男道昌都事,道長應敎,道章直長。女朴敏修,金𥖝。樴男瀛俊。榏男之瀛,之沆,之經進士。公之著述。逸於龍蛇之燹。銘狀所載事蹟又甚略。然其遺風餘韻。數百載猶未沫。至爲之尸祝以報。則是非其實地有感人者深而能然乎。且以公落落氣岸。其不恥溪東之少於己而師事之者。夫何故。此尤可法於後世也夫。銘曰。
琴湖之水。汪洋而歸滄海。公山之麓。逶迤而自白頭。公居其間。宜乎有是志而有是求也。脫略謝塵氛。瀟灑送日月。想於公之心。必有無限悅。今不可得而知兮。彼流不盡而靑未了者。或彷彿也歟。
입재집 제41권 / 묘지(墓誌) / 송담 채공 묘지명 병서〔松潭蔡公墓誌銘 並序〕
송담(松潭) 선생 채공(蔡公)이 돌아가신 지 거의 200년이 되었다. 그의 8대손 필훈(必勳)이 나에게 공의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면서 “선조의 덕행이 《달성지(達城誌)》에 실려 있는데, 달성 십현(達城十賢) 중에 세 번째 현자입니다. 지난해에 달성 고을의 인사들이 이미 유호사(柳湖社)에 제향하였습니다. 또 귀암(歸巖) 이공(李公)이 지은 묘갈명과 해좌(海左) 정 상서(丁尙書)가 지은 행장은 모두 백대토록 믿을 만한 것을 전하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오직 묘지명이 아직까지 누락되어 있으니 감히 지어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드디어 삼가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응린(應麟)이고 자는 군서(君瑞)이며 송담(松潭)은 그의 자호이다. 본관이 인천(仁川)인 채씨(蔡氏)는 고려 시대에 증(贈) 동지사(同知事) 선무(先茂)와 대장군(大將軍) 신징(愼徵)과 예부상서(禮部尙書) 금성공(錦城公) 보문(寶文)이 있었으며 그 뒤에도 대대로 고위 관직을 지낸 이가 있었다. 공의 증조부는 휘가 희(禧)이고 조부는 휘가 윤주(胤周)로 모두 진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휘가 홍(泓)으로 참봉을 지냈고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참판을 지낸 이형(李滎)의 따님이니, 중종 기축년(1529, 중종24) 12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기상과 도량이 웅장하고 호걸스러웠으며 성품이 총명하였다. 문예(文藝)를 일찍 성취하여 27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본 뒤로부터는 벼슬에 나갈 뜻이 없어 곧바로 과거 시험을 그만두었다.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어 육경(六經) 이하 많은 성현들이 남긴 글의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에 대하여 모두 잠심하여 완미하고 연구하였다. 이때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이 일찍이 도산(陶山)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공이 그 여교(餘敎)를 징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공이 계동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스승으로 섬기기를 매우 삼갔으니, 구도(求道)의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또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과 서로 강론하고 절차탁마하여 즐거움으로 삼았다.
평소에 효우(孝友)에 독실하고 행의(行誼)에 돈독하며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다. 궁핍함을 주휼하고 위급한 자를 돌보아 줌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였다. 본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금호강(琴湖江)가에 두 개의 정자를 짓고 여러 명현 석학들과 시주로 자득(自得)하여 훌쩍 초탈하여 세속의 기운이 없었으니, 원근의 선비들이 모두 사모하고 칭찬하였다. 선조 갑신년(1584, 선조17) 6월 모일에 죽으니, 선영을 따라 팔공산(八公山) 내동(內洞) 감좌(坎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첫째 부인 이씨(李氏)는 진사 이봉(李逢)의 따님으로 자식이 없었다. 둘째 부인 신씨(申氏)는 습독관(習讀官) 신관(申寬)의 따님으로 7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선지(先知), 선행(先行), 선정(先正), 좌랑을 지낸 선언(先言), 참봉을 지낸 선견(先見), 양자로 나간 선근(先謹), 도사(都事)를 지낸 선용(先容)이고, 두 딸은 서득룡(徐得龍)과 참의(參議)를 지낸 이윤우(李潤雨)에게 시집갔다. 선지와 선행은 모두 자식이 없었다. 선정의 아들 정(楨)은 양자로 나갔다. 선언은 선용의 아들로 통정대부를 지낸 직(樴)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이양진(李陽晉)에게 시집갔다. 선견의 아들은 집(集)이다. 선용의 아들은 익(榏)과 직(樴)이다. 이윤우의 아들은 도사(都事)를 지낸 도창(道昌), 응교(應敎)를 지낸 도장(道長), 직장(直長)을 지낸 도장(道章)이고 딸은 박민수(朴敏修)와 김렴(金𥖝)에게 각각 시집갔다. 직의 아들은 영준(瀛俊)이고 익의 아들은 지영(之瀛), 지항(之沆), 진사 지경(之經)이다.
공의 저술은 임진왜란의 병화에 산일되었고 묘지명과 행장에 실려 있는 사적이 또 매우 간략하다. 그러나 공의 유풍여운(遺風餘韻)은 수백 년이 지나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아 서원에 제향을 받는 보답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공이 실제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이 깊음이 있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 공이 장대한 기상을 가지고도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계동을 스승으로 섬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어찌된 것인가. 이 점이 더욱 후세에 법이 될 만한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금호강의 물이 / 琴湖之水
넘실거리며 질펀하게 바다로 돌아가네 / 汪洋而歸滄海
팔공산의 산맥이 / 公山之麓
구불구불 백두산으로부터 왔네 / 逶迤而自白頭
공은 거기에 사니 / 公居其間
이런 뜻이 있고 이런 구함이 있음이 마땅하네 / 宜乎有是志而有是求也
초탈하여 티끌 세상을 사절하고 / 脫略謝塵氛
청초하고 말쑥하게 세월을 보내네 / 瀟灑送日月
상상컨대 공의 마음에는 / 想於公之心
반드시 무한한 기쁨이 있었으리라 / 必有無限悅
지금 그것을 알 수 없으나 / 今不可得而知兮
저 강물의 흐름은 다함이 없고 산의 푸르름이 끝이 없는 것이 / 彼流不盡而靑未了者
아마도 공의 모습과 비슷한 것이리라 / 或彷彿也歟
[주-D001] 달성 …… 현자입니다 : 원래는 십현(十賢)으로 정해졌지만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나중에 점차 첨가되어 십칠현(十七賢)이 되었으니 성명은 다음과 같다. 達城十賢 사월당(沙月堂) 유시번(柳時蕃), 송재(松齋) 주신언(朱信言),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동호(東湖) 채선각(蔡先覺),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양직당(養直堂) 도성유(都聖兪),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양졸재(養拙齋) 정추(鄭錘),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 도곡(陶谷) 박종우(朴宗祐)이다.[주-D002] 유호사(柳湖社) : 대구광역시 북구 불로동에 위치했던 것으로 숙종 기묘년(1699)에 사림들 사이에 곽재겸(郭再謙)과 채응린을 제향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유호사를 건립하였다. 정조 갑진년(1784)에 최흥원(崔興遠)이 유호사를 유호서원으로 승격시키고 두 사람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훼철되고 남아 있는 건물이 전혀 없다.[주-D003] 귀암(歸巖) 이공(李公) : 이원정(李元禎, 1622~1680)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이다. 1652년(효종3)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과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나 1680년(숙종6)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유배되어 장살되었다. 나중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주-D004] 해좌(海左) 정 상서(丁尙書) : 정범조(丁範祖, 1723~1801)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이다. 1763년(영조39)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지냈고 《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그가 지은 행장은 《해좌집》 권35에 실려 있는 〈진사채공행장(進士蔡公行狀)〉이다.[주-D005] 전경창(全慶昌) : 1532~1585.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계현(季賢), 호는 계동이다. 이황(李滉)의 제자이다. 1555년(명종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6)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과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06] 곽재겸(郭再謙) : 1547~1615.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익보(益甫), 호는 괴헌이다. 전경창(全慶昌)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이끌고 창녕의 화왕산성전투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그 공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제수받았다. 대구의 유호서원(柳湖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07] 서사원(徐思遠) : 1550~1615.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이다. 이황(李滉), 조식(曺植),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형조 정랑과 호조 정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과 청안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재집》이 있다.[주-D008] 익(榏) : 원문에는 맹(𣓶)으로 되어 있으나, 뒤에 익(榏)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므로 그렇게 고쳤다. 정범조의 《해좌집》 권35 〈진사 채공 행장(進士蔡公行狀)〉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영옥 송희준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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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별집 제1권 / 원행록〔遠行錄〕
신미년(1631, 인조9) 6월 6일 무신. 봉화(奉化)에 조문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고(故) 승지 반천(盤泉) 김 어른은 내가 어렸을 적에 배웠던 분인데, 소상(小祥)이 지난 뒤 늦게 부음을 듣고서 시마복을 입고 곡위를 만들어 곡하고서 그 아들에게 부의(賻儀)와 위장(慰狀)을 보냈다. 그리고 길이 멀고 몸이 병들어 몸소 궤연의 아래에 나아갈 수 없었음을 항상 한스러워하였다. 지금 대상(大祥)이 13일이라고 듣고서 더위와 비를 생각지도 않고 길을 나서 현풍(玄風)에서 묵었다.
22일 갑자. 빗줄기가 잠시 그쳐 선생에게 나아가 배알하고 이내 하직인사를 올렸다. 선생께서 성산(星山)에서 온 편지를 보여주셨는데, 서쪽 변방에서 온 급한 소식을 들었다. 또 상소와 비답(批答)을 내가 가는 길에 부쳐 그것을 이 담양(李潭陽) 영공에게 전하게 하여 부득이 매원(梅院)으로 길을 향하였다. 반저(潘渚)에서 장 원장(張院長)을 방문하여 점심을 먹은 후 말을 달려 매원에 도착하니, 담양공이 매우 정성스레 대접하였다. 나는 선생께서 보낸 성상의 비답을 드렸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 추숭하는 일이 불가하다는 뜻을 상소하여 힘써 진달하였는데, 성상께서 내리신 비답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담양공이 그 비답을 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보낸 것이다. 담양공이 나를 만류하여 묵게 하려고 하였는데, 내가 갈 길이 매우 바쁘다고 말하고, 이에 추로주 세 잔을 마시고 이내 일어났다. 저녁에 대구 묘동(妙洞)에 있는 박군석(朴君錫)의 집에서 묵었다. 군석이 그의 맏아들을 인사시켰는데, 자못 옛 친구의 은근한 뜻을 내보였다.
23일 을축. 밥을 먹은 후 길을 나섰다. 마침 현풍(玄風)의 가태(嘉泰) 사람을 만났는데, 군석의 며느리 집 하인이었다. 그의 보호를 받고 강을 건너 넘어지고 빠지는 근심을 면하였다. 저녁에 쌍산역(雙山驛)에서 묵었다.
24일 병인. 천내(川內) -일명 내한정(耐寒亭)이다.- 에서 아침밥을 먹고 비를 무릅쓰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창녕(昌寧), 지포(池浦), 영산(靈山), 산지(山旨)를 지나났다. 강가에 물이 넘치고 막혀 물을 피해 산을 오르니 몸이 또한 병나고 피곤하였다. 고생스럽게 내내(柰內)에 도착하니 하늘은 이미 어두웠다.
[주-D047] 묘동(妙洞) :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이다.[주-D048] 박군석(朴君錫) : 박종우(朴宗祐, 1587~1654)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군석(君錫), 호는 도곡(陶谷)ㆍ하빈조수(河濱釣叟)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37년(인조15) 이후 자칭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하고서 종신토록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달성 10현(達城十賢) 중의 한 사람이다. 저술로 《도곡집(陶谷集)》과 편저인 《병자록(丙子錄)》이 있다.[주-D049] 가태(嘉泰) :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이다.[주-D050] 쌍산역(雙山驛) :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부리 구쌍산 마을에 있던 역이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정현섭 양기석 김현진 구경아 김익재 강현진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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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 별집 제5권 / 봉안문(奉安文) / 이강서원 도곡 박공 봉안문〔伊江書院陶谷朴公奉安文〕
삼가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 伏惟先生
타고난 품성이 아름다운 자질로 / 生禀美質
학문은 진제를 강구하였네 / 學求眞諦
일찍부터 귀의할 곳을 얻었고 / 早得依歸
만년에는 학문의 조예가 심오하였네 / 晩深造詣
어버이를 섬김과 선조를 받듦에 / 事親奉先
효도와 봉양을 지극히 하였네 / 孝養克致
상소하여 선생의 무고함을 변명하였고 / 䟽辨師誣
성의는 도를 보위함에 간절하였네 / 誠切道衛
병자호란에 의병으로 참전하고자 하였으나 / 國難欲赴
어버이께서 연로하시어 어찌할 수가 없었네 / 親老無奈
대신에 청나라를 방어할 계책을 두어 / 策有禦戎
적개심의 충정이 막대하였네 / 忠莫敵愾
거적과 흙덩이에 몸을 맡겨 지내며 / 身委苫凷
죄를 지은 것으로 자처하였네 / 負罪自處
남한산성에서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 及聞下城
눈물을 뿌리며 깊이 문을 닫았네 / 雪涕深閉
평생 지은 글을 불태우고 / 焚生平藁
숭정처사라 칭하였네 / 稱崇禎士
대개 공은 본래 온축한 학문이 있어 / 盖公素蘊
붓 가는 대로 기록한 글이 있었네 / 信筆有記
영남의 문장의 으뜸이요 / 嶺外文伯
해동의 석상진(席上珍)이었네 / 海東席珍
명문 집안에서 빼어나서 / 挺出名門
성대하게 현인이 되었네 / 蔚爲賢人
행실을 역력히 관찰해 보면 / 歷觀行治
누가 흠모하지 않겠는가 / 疇不欽慕
생각해 보니 이강서원은 / 念玆伊院
낙재 어른이 제향된 곳이네 / 樂老享所
문하의 제자로 배향됨은 / 門弟配食
진실로 마땅한 도리에 합치되네 / 允合其宜
이에 길일을 잡아 / 爰卜吉日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였네 / 式擧縟儀
영령한 귀신이 감응하여 / 盻蠁神理
서로 기뻐하며 싫어하지 말지어다 / 胥悅無射
부디 와서 제 술잔을 흠향하여 / 庶幾歆右
억만 백성을 은혜롭게 도와주소서 / 惠佑千億
[주-D001] 이강서원(伊江書院)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에 있는데,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과 박종우(朴宗佑, 1587~1654)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서사원의 문생(門生)인 도성유(都聖兪)와 박종우가 고을의 사우(士友)들과 도모하여 서사원이 강학하던 자리에 묘우(廟宇)를 세운 것에서 출발한다. 1639년(인조17)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박종우가 추향되었다. 1871년(고종8) 훼철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 별도의 재실에서 춘추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주-D002] 도곡 박공(陶谷朴公) : 박종우(朴宗佑, 1587~1654)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군석(君錫), 호는 도곡이다. 서사원(徐思遠)과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에 참전하려고 하였으나, 90세 된 양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청군을 물리칠 열 가지 대책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에게 제안하였다. 청나라에 굴복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북향하여 통곡하면서 평생 동안 지어 모은 글들을 태우고는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칭하면서 이후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도곡집(陶谷集)》과 《병자록(丙子錄)》이 있다. 달성십현(達城十賢) 중 한 사람이다.[주-D003] 진제(眞諦) : 불교 용어로서 현상계의 미(迷)한 세계를 말하는 속제(俗諦)에 대해, 진지(眞智)에 의하여 터득하는 궁극적인 진여(眞如)의 세계를 말한다.[주-D004] 상소하여 …… 변명하였고 : 1610년(광해군2)에 정구(鄭逑)가 정인홍(鄭仁弘)의 일당인 박이립(朴而立)에 의하여 무함(誣陷)을 입자 서사원 등 많은 학자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변명(辨明)하였다.[주-D005] 석상진(席上珍) : 선비의 재덕(才德)을 뜻한다. 《예기(禮記)》 〈유행(儒行)〉에 “유자는 석상의 진귀한 보배처럼 자신의 덕을 갈고 닦으면서 임금이 불러 주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 하였다.[주-D006] 낙재(樂齋) : 서사원(徐思遠, 1550~1615)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ㆍ미락재(彌樂齋)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주자학 및 이황(李滉)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에는 후진을 가르쳤다. 청안 현감(淸安縣監)을 역임하였고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菁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숭호 송희준 (공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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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순조 > 순조 31년 신묘 > 9월 6일 > 최종정보
순조 31년 신묘(1831) 9월 6일(을묘)
31-09-06[08] 예조가 행행(幸行)했을 때의 격쟁 원정(擊錚原情)에 대해 복계(覆啓)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또 아뢰기를,
“박기협은 ‘저의 13대조인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은 병자년(1456, 세조2)에 죽었는데 이때 한 가문의 9인이 동시에 모두 순절(殉節)한 사실이 국사(國史)에 분명히 실려 있습니다. 저의 12대조인 진사(進士) 박순(朴珣)은 충효(忠孝)를 온전히 하기 위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죽기로 결심하여 처형을 받을 때 웃으며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나를 난신(亂臣)이라 여기지 말라.」 하고는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신해년(1791, 정조15)에 우리 선대왕께서 계유년(1453, 단종1)과 병자년에 순절한 신하들을 친히 뽑아 장릉(莊陵)에 제단을 설치하여 배향(配享)하고 육신(六臣)의 아버지와 자식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라는 하교까지 하셨습니다. 박순의 아내 이씨(李氏)가 다행히 유복자(遺腹子)를 품고 있었는데 산달이 같은 가비(家婢)가 딸을 낳자 자식을 바꾸어 기르기를 원하였으니 바로 저의 11대조 박일산(朴一珊)입니다. 성묘(成廟) 임진년(1472, 성종3)에 박일산은 17세였는데 죄인과 연좌시키라는 조정의 명령이 자신에게 걸려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고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선조를 저버릴 수 없으며 살기를 구차히 바랄 수 없다고 하면서 모자가 서로 부축하여 서울에 와서 자수하니 특별히 용서해 돌려보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의 남겨진 고아로 충성하고 효도하는 가법(家法)을 정통으로 이어받아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기까지 하였으나 증손이 귀한 탓에 아직까지 충효를 표창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저의 7대조 박종우(朴宗祐)는 바로 박일산의 현손(玄孫)입니다. 경학(經學)에 전심(專心)하여 조예가 매우 높으니 바로 세상에서 일컫는 달성십현(達城十賢)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병자년(1636, 인조14) 난리를 당해 곧장 분연히 달려가 적을 무찌르려고 하였으나 90세가 된 양친(兩親)이 계셨기 때문에 차마 곁을 떠나지 못하고 도신 심연(沈演)에게 적을 방어할 10개의 계책을 속히 올리고 근왕병을 일으키기를 권하였습니다.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노천에 거처하면서 「주상께서 포위되어 있으시니 내가 초야의 미천한 신하이기는 하나 어찌 감히 침소에서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지 50일이 지나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마침내 평생 지은 글을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백성이 오랑캐가 될 것이니 어찌 다시 글을 짓겠는가.」 하고, 이어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칭하며 19년 동안 두문불출하였습니다. 여러 아들과 조카들은 숭(崇) 자를 항렬자로 삼아 명나라를 사모하는 뜻을 담았습니다. 우리 단묘(端廟)께서 양위하시자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었으나 감히 세상에는 간행하지 못하였는데 박종우가 계유년과 병자년의 사실에 오류가 있는 것을 개탄하여 근거할 만한 글을 수집하고 가전(家傳)에 실린 실제 행적을 기록해 1책으로 합쳐 만들고 《병자록(丙子錄)》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단묘 조정의 군신에 관한 사실이 250여 년이 지난 뒤에 다시 환히 드러나게 하여 선조(先朝)께서 그 초본을 을람(乙覽)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진사 박순이 사복시 정에 추증된 점을 굽어살피시어 박일산과 처사 박종우의 충효와 절의(節義)에 정려(旌閭)하고 작위와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박순은 충정공의 아들로 화색(禍色)이 가득한 때에 처형을 받으며 말한 한마디가 백세 이후에도 당당히 남아 있습니다. 그 아들 박일산은 유복자로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에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선조를 저버릴 수 없다 하여 천 리 밖에서 서울로 달려가 자수하여 처벌하는 명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니 진실로 이러한 아들과 손자가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5대손 박종우는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고 《춘추》의 의리를 지켰으니 《병자록》 한 책에서 세도(世道)를 부지하는 믿을 만한 문장을 볼 수 있고 용병(用兵)하는 10조목의 계책은 또한 명나라를 존중하는 고심에서 나왔습니다.
이상에서 거론한 3인의 충효와 절의가 이처럼 뛰어난데 아직까지 현양하여 기리는 일이 없었으니 박순과 박일산은 모두 정려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박종우는 증직하는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사의에 부합할 듯합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하여, 모두 윤허하였다.
[주-D001] 박종우(朴宗祐) : 원문은 ‘宗佑’이다. 《도곡선생문집(陶谷先生文集)》에 근거하여 ‘佑’를 ‘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2] 남편 : 원문은 ‘父’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우재 (역)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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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와집(餘窩集) 목만중(睦萬中)생년1727년(영조 3)몰년1810년(순조 10)자유선(幼選)호여와(餘窩)본관사천(泗川)특기사항채제공(蔡濟恭), 신광수(申光洙), 정범조(丁範祖), 이용휴(李用休) 등과 교유
餘窩先生文集卷之十七 / 碑銘 / 郭槐軒遺墟碑銘
| 郭再謙 | 1547 | 1615 | 玄風 | 益甫 | 槐軒 |
入其鄕。必先問其賢士大夫。世遠人亡。愛而不見。則江山文藻。徘徊指點。若將撰杖屨翫琴書於簾閣几案之間。廼古人禮於其廬之遺意也。達城十賢。郭槐軒先生處其一。解顔古縣琴湖之陽上香里。厥有遺墟。八公山峙其北。有溪發焉。迤過龍巖九曲。南至香巖。西入于琴湖。公婦家永川李氏舊居之。李氏無後。歸之公。公家世苞山。其徙達城。實自公。諱再謙字益甫。考諱超。祖諱之藩。文科歷臺省。官至司成。曾祖諱瑋。國子兩試。官縣監。高祖承華國子進士。與寒暄堂同學於金佔畢。佔畢常並稱之曰金,郭兩秀才。歿享道東別祠。明,宣之際。同堂多賢人。諸父則存齋忠烈公䞭。兄弟則忘憂堂忠翼公再祐。與之年比志合。同游裵洛川之門。寒岡鄭文穆公䓗竹舊交而亟師事之。文穆公則顧曰子吾之益友也。東岡金文貞公薦遺佚。除官不起。旣卜居琴湖。復築柳溪書社。日與鄕里諸君子。探賾陶山遺緖。時文穆公講道泗上。相去一舍而近。徐樂齋行遠分江南北。蔡松潭應麟隔溪上下。相與就質丈席。聚講溪社。旅軒張文康公時自玉山來會。愚伏鄭文莊公亦以地主屢枉。一時儒術之盛。與湖山映發。壬辰國被兵。糾旅倡義。往來論兵於諸將間。助權應銖鏖戰達城。協忠翼公保全火旺。勞績甚多。亂平復還舊居。年益高。進修益篤。誨子侄則著十六圖。先之以蒙養存省之方。上達天人性命之原。繼之以愼終追遠之道。訓諸生則月朔設講於硏經書院。習爲禮容。皆可爲後法。築小壇於書社之北。朔望遙拜先壟。及嬰疾。文穆公執手訣曰吾道孤矣。子國子生員涌。世其學。公歿未幾亦逝。世漸替宅遂墟。書社亦隨廢。肅宗己卯。鄕士大夫議重建社享公。正宗甲辰社始成。並祀蔡松潭。而百弗菴崔徵君合柳溪與琴湖。名之曰柳湖書院。始公手植三槐於堂後。取以自號。前植一杏。杏下爲壇。日夕消搖其間。歲久槐死。唯杏壽數百年。忽爲風雨所摧。三年而朽腹中復生二株。今可一圍餘。童童可蔭。方其營始院役也。盤石據土中。敲之有聲。去其石有井。深可五六尺。亦公衡泌間古甃也。公之後今已七世八世。其嗣孫柱南懼年代愈逖。陵谷易改。名蹟之日就湮晦。竪碑舊墟。徵余文記之。嗚呼。此學之不講久矣。安得安得守道林樊。礪志麗澤。毋失先正軌範如公當日之爲。則俗尙何由不美。士氣何由不振。又何憂於異說肆行而莫之遏也。噫。銘曰。
猗嗟前輩。先正是式。後學何述。前輩是傚是則。
餘窩先生文集卷之十三 / 記 三十篇 / 達流齋記 並祀蔡松潭應麟,郭槐軒再謙於柳湖書院。○己未
| 정조 | 23 | 1799 | 기미 | 嘉慶 | 4 | 73 | 1월, 한성부 우윤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里社而改號書院。所以致虔於鄕賢一也。而院視社體貌益重故也。達城十賢。第三松潭蔡公。第六槐軒郭公。俱受業於退陶之門人。隱居求志。郭公舊宅在柳溪。與蔡公琴湖故亭。隔江相望。後人卽其地。建社合饗焉。百弗菴崔公名之曰柳湖書院。房之東上者曰近思。西上者曰潛修。小山李公之所名也。東西齋舍力詘未卽擧。歲丁巳春。西齋先成。蔡生必勳來問名於不佞。且請傡及於東齋之未就者。以爲後日圖。不佞告之曰夫水之發乎其源。其性未有不順且潔者也。及其行漸遠而趍愈下。或觸石而激爲狂瀾。或淤泥而溷爲濁浪。汎濫而橫潰。壅遏而不通。本性之與存者幾希矣。譬猶人之初生。本善之性。未始不同。而唯其利欲誘於前。陰邪攻其中。一擧足而聖狂斯判。毫釐差而千里謬矣。是以善治水者。䟽而鑿之。障而導之。先從淺易處下手。漸至深奧之境。則狂瀾之旣倒者可使納於安流。濁浪之已汩者可使變爲淸波。以至支派末裔之漸遠而愈下者。無不復其順潔之性而流無所不達矣。吾儒明善復初下學上達之工。亦若是已。今諸君之藏修斯院。私淑先正之化者。臨江流而思䟽鑿之功。衛道脈而勉廓闢之道。其源旣潔。其流益順。左右逢原。盈科而進。則何患乎不能遵琴湖之故道。溯泗濱之波而達乎溪上之餘流也請以達流名是齋。他日以溯源名東齋可乎。蔡生曰唯唯。執事旣命之矣。願有以記之。使吾黨小子。達於觀水之術。知所儆而有所跂及焉。不佞少學迷方。年已迫耄。何能及此。竢東齋成。更就世之知言君子而求焉。姑書之以爲達流齋記。尸齋役者蔡師穆,郭利澤。上距二公俱七世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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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집(俛宇集) 곽종석(郭鍾錫)생년1846년(헌종 12)몰년1919년자명원(鳴遠), 연길(淵吉)호면우(俛宇), 유석(幼石)본관현풍(玄風)개명도(鋾)특기사항이진상(李震相)의 문인. 허유(許愈), 이종기(李種杞), 이승희(李承熙) 등과 교유
俛宇先生文集卷之百五十九 / 墓碣銘 / 北巖處士蔡公墓碣銘 幷序○癸丑
| 蔡伯仁 | 1654 | 1728 | 仁川 | 顯卿 | 北巖 |
公諱伯仁字顯卿姓蔡。始祖諱先茂。顯于麗朝。封仁川以爲氏。歷屢代簪組相承。至典書諱貴河。丁麗鼎之移。自靖于杜門洞。世所稱多義堂先生。謚曰貞義。其子泳。仕本朝官少監。若大司憲耆。副司正云實。進士禧。進士胤周。參奉泓。其繼世也。參奉之子生員應麟號松潭。以學行爲達城十賢之一。士林俎豆之。是爲公玄祖。曾祖曰先容都事。祖曰榏考曰之瀛。並以文行著。妣朴氏密陽人正郞挺之女。寧陵甲午公生。生而穎秀。甫上學能通大義。旣冠蔚有文聲。屢擧而躓于省闈。則乃曰與其役心於外。曷若專意於吾內。遂求之於洛閩諸書。劬精硏旨。樂而不倦。如恐不及。已而曰堯舜之道。孝弟而已。事親服勤無方。先於養志。甘旨之奉。亦未甞不竭其力。前後居喪。致哀謹禮。幾危於毁。與伯公廬于墓。晨昏哭省。大風雨不懈。婦孺人士莫不感嘆。平居日謁于廟。愀然若有見。當祭而齊。栗栗然如有奉而恐失之。曰齊乎外而不齊乎內。非所謂齊也。事昆仲敬而友。有無同須。家無間言。訓子姪必以小學作度曰治平之道。不外此也。接人坦夷慈諒。不作畦幅。見人善若己有之。有過徐諭之以道。人莫不愛慕欣欣焉。嘗扁其居曰北巖。相羊嘯詠以沒世。英廟戊申。其壽限也。葬于達府北礪峯向庚之原。配安東權氏。士人機女。有壼範。後公卒。從葬于左麓寅阡。是擧六男。允諧無嗣。允成,允升,允若,允昌,允錫。孫男五。時璜,時淵,時祿,時敏,時晉。盖五房之各一子也。以下不可具也。今其耳孫涇植。徵余以銘于墓。銘曰。
外焉而得丘山之隆。曷若一毫自慊於衷。汎窮宇宙之變而無從。孰如跬步踏實於階庭之中。北巖幽翳。碩人寤寐。有山若礪。君子永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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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南人物考 卷九 / 大丘 / 徐思遠
徐思遠字行甫, 號樂齋, 大丘人。 明宗庚戌生。 以學行被徵命, 官正郞。 光海乙卯卒。 享大丘伊江書院。
公每讀聖賢書, 慨然求道。 聞寒岡早遊退溪先生門, 學有淵源, 專意就正。
常整飭衣冠, 對越方冊, 常若親承警誨。 常謂“欲學孔、孟, 當以程、朱爲準的”。 最喜朱書及《退溪集》曰: “朱夫子、孔・孟後一人, 退溪先生又吾東朱夫子也。” 乃與同志入淸涼山, 景仰遺躅, 周旋水石間, 洗滌査滓, 浩然而歸。
所居伊川在琴湖下流, 松翠繞屋, 梅芳竹潔, 卒歲婆娑。 取紫陽遺意, 以敬義、玩樂名其齋宇。 作精舍學規, 警學徒曰: “‘志不可一日惰, 心不可一日放’、‘莊敬日疆, 安肆日偸’兩句尤當體認。”
授淸安縣監, 爲政務安輯流逋。 先治聖廟, 每就學舍, 自爲講解, 傍近翹秀競來執業, 彬彬可觀。 邑人刻石追思。 李敏求撰碣。
壬辰之難, 公與台巖李輈、慕堂孫處訥、林下鄭師哲倡義於公山, 召募兵糧。 邑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