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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 석대암
경향신문 기사 입력일 : 2007.07.20.
이상훈기자
동행자 :〈이우형|현강문화연구소장〉
-‘지장신앙’ 성지 중 성지… 절터의 속살이 펼쳐졌다-
단숨에 올라가려 했다.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헛된 오만함이란….
만만찮았다. 지장신앙의 성지를 찾는 길은 쉽지 않았다. 경기 연천 최고봉인 환희봉(877m) 정상 밑 해발 630m에 자리잡은 석대암 가는 길.
비무장지대가 아닌데도 ○사단 공보 장교가 따라나선 이유가 있었다. 지름길로 가려면 군부대를 관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병장을 가로지르면 심원사지 부도군이 보이고, 바로 그 위에 옛 심원사(647년 창건) 터가 펼쳐진다. 부도군은 2기의 비석과 12기의 승려 사리탑으로 이뤄졌다. 휴정스님(1520~1604)의 법맥을 이은 스님들의 탑과 부도란다.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인 심원사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철원 동송 상로리로 이전했다. 군부대 안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의 자리엔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기자가 찾아가는 석대암은 바로 심원사에 딸린 암자다.
# 거미줄, 날벌레, 포격소리, 끝없는 돌길
단순한 암자가 아니다. 그야말로 지장신앙 성지의 성지다. 이우형씨(현강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원래 석대암 가는 계곡을 ‘절골’이라 했다. 석대암을 포함해서 무려 9개의 암자가 있었다니까.
심원사 터에서 차를 ‘버리고’ 산중에 몸을 ‘던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길. 삐죽삐죽 제멋대로의 돌로 이어지는 산행은 고달팠다. 길목마다 투명한 그물을 꿰어놓은 거미줄의 훼방. 실로 오랜만에 사람의 땀 냄새를 맡았다는 듯 끊임없이 공격하는 온갖 날벌레들. 막춤을 추듯 연방 두팔을 휘저어가며, 그것도 모자라 온몸을 배배 꼬며 쫓아내도 아랑곳 없다. 귓전을 끊임없이 맴도는 ‘윙윙’ 소리에 절로 진저리가 난다.
‘꽈당! 쿵!’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벌레와 산새, 그리고 개천의 물 흐르는 소리만이 산행을 재촉하는 순간이었는데….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이게 무슨 소리죠?”
“포격 훈련하는 소립니다.”
“혹시 이쪽으로 떨어지는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니니 걱정 마세요.”
대포 소리가 계속 이어진 탓에 제법 익숙해 질 법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 불탄 지장성지
온갖 악재 속에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니 ‘석대암 50m’ 표지가 보였다. 몇 걸음이면 다 되었으려니 했는데 또 끝이 없다. 한번도 쉬지 않고 속보로 가겠다고 다짐했던 기자는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럴 때 가장 힘이 빠진다. 다 왔겠거니 하면 다시 가야할 길이 보이고…. 이제 끝났겠거니 하면 다시 고비가 생기고….
마지막 시험이 아닌가 싶다. 지장보살님을 뵙기 전에 인간의 모든 오만한 찌꺼기를 털어내라는 가르침인가. 단숨에 올라가려던 헛된 욕심을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올라간 길. 마침내 환한 공간이 펼쳐졌다. 따사로운 햇빛이 석대암 절터에 쏟아진다. 어둠 속을 비추는 한줄기 빛처럼.
여기가 바로 지장신앙의 본산인가.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었고 한국 불교의 성지로 꼽히던….
지장보살. 그 분은 누구인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는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보살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한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6도를 윤회하면서 고통받는 중생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원력보살.
눈부신 햇살에 잠깐 눈이 멀었던 기자의 눈에 절터의 속살이 펼쳐진다. 물론 인간의 눈으로 보면 실망이다. 축대와 건물지, 우물지, 그리고 밑동만 겨우 남은 채 죽어버린 나무만이 처연하게 남아있을 뿐. 한 50m쯤 떨어져 그것도 나무 숲에 싸여 잘 보이지도 않은 곳에 있는 지장영험비는 제자리에서 뽑혀나간 채 위태로운 모습으로 기우뚱하게 서 있다. 하기야 한국전쟁 때 ‘인간의 손’에 의해 불탔으니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상하다. 다른 유적이 이런 몰골이었으면 흥분했을 이우형씨였지만 웬일인지 담담한 표정이다.
“그냥 두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괜히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어놓으면 더 흉한 몰골로 변하니까요.”
하기야 지장보살은 자비행을 철저하게 실천하려고 중생의 업고(業苦)를 자기 업고로 대비(大悲)하는 보살이 아닌가. 보관(寶冠)이나 영락(瓔珞)으로 치장하지 않고 오로지 가사만 걸칠 뿐이다. 그러니 인간의 헛된 몸치장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수없이 이곳을 찾았을 이우형씨였지만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이곳은 지장보살상이 발견된 우물이고요. 이곳은 보살님이 앉아 계셨던 곳이고요. 이곳은…. 이곳은….”
# 19살 청년의 인생역정
그의 인생 역정을 품에 안은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이다.
“절터 덕분에 농사꾼이었던 제가 이렇게 문화 유산에 빠져 살게 됐습니다.”
19살 때인 1984년. 석대암과 인접한 보개산 자락에 살고 있던 이우형씨가 본격적으로 암자터를 찾으러 나섰다.
“동네 사랑방에서 어르신들이 하는 얘기를 귀동냥 했어요. 지장보살님의 사연이 담긴 석대암이 이곳 어디엔가 있다는 말씀이었죠.”
지금도 이 암자터는 1년에 1~2명이 찾을까 말까 할 정도로 외진 곳이다. 포천쪽 보개산 정상을 거쳐 넘어오는 길이 있지만 한국전쟁 이후엔 군부대 훈련장이어서 민간인들이 감히 출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청년 이우형은 그런 살벌한 환경에서 3~4번이나 답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속 허탕을 쳤는데 하루는 산꼭대기(환희봉 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절터로 안성맞춤인 터가 보이지 않겠어요?”
단숨에 달려간 그는 마침내 자연상태 그대로 남아있던 암자터를 찾았다. 지장보살의 성지를 일개 농사꾼이 찾아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문화유산 답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우형씨가 찾아낸 석대암은 창건 기록도 소설처럼 흥미롭고, 그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는 상서로운 감응과 이적(異蹟)으로 국내 제일의 영험한 생지장도량으로 성가를 높였다.
멀리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오비이락·烏飛梨落)’는 속담이 탄생한 곳이며, 가까이는 광복 3일 전에 8·15 해방과 남북분단을 한꺼번에 예견한 이른바 쌍광방(雙放光), 즉 두 줄기의 빛이 쏟아진 곳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목은 이색이 “보개산 지정석상의 상서로운 감응은 세상이 모두 아는 바이다(地藏瑞應世所共知)”(보개산 석대암 지장전기)라고 했을까. 이제 석대암에 나타나신 생지장보살의 이야기를 해보자.
‘덩굴쥐고 절벽잡아 바람부는 천제 향해 오르니(攀羅문壁上風梯)/암자 오랜 뜰 소나무엔 학 한 마리 깃들었네(庵古庭松一鶴棲)/숲 아래 경쇠소리 바람 밖에서 간절하네(林下磬聲風外切)/서쪽 봉우리 남은 해는 찬 시내로 떨어지네(西峰殘照落寒溪)’
김시습의 ‘매월당집’에 묘사된 석대암의 풍경이다. 시에서 ‘바람부는 천제에 오르니’라는 대목은 풍수지리를 염두에 둔 구절이다. 석대암 뒤편 환희봉 정상에서 뻗은 능선의 솟은 많은 봉우리가 풍수지리학상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天梯)’ 형세라는 것이다. 또한 석대암은 예부터 바람이 심하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 사냥꾼과 금돼지
과연 석대암에 서면 김시습의 표현이 얼마나 절묘한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자! 이제 고려 말 학자 민지(1248~1326)가 지은 ‘보개산 석대기’를 토대로 창건 설화를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1287년 전인 720년. 성덕왕 19년 때였다. 사냥꾼인 이순석·순애 형제가 한 마리 금빛 멧돼지를 보고 힘껏 활을 쐈다. 멧돼지는 피를 흘리며 달아났다. 형제가 그 혈흔을 추적하니 환희봉(877m) 쪽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돼지가 멈춘 곳에 닿으니 금빛 멧돼지는 간 곳 없었다. 다만 샘물 가운데 머리만 빠끔히 내놓은 석상만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 어깨 가운데 순석이 쏜 화살이 꽂혀 있었다. 형제는 대경실색했다. 둘은 화살을 석상의 몸에서 뽑으려 했다. 그러나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제는 두려워져서 선 채로 맹세했다.
“대성(大聖)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소서. 우리를 이 속계의 죄에서 구제해주시려고 이 같은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우리들은 마땅히 대성의 뜻에 따라 출가 수도하겠나이다!”
다음날 긴가민가해서 이곳을 다시 찾은 형제는 또 한 번 놀랐다. 석상이 그 돌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출가하겠나이다!”
형제는 곧 300여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암자를 창건했다. 스님이 된 형제는 숲속에 돌을 모아 대(臺)를 쌓아 그 위에서 정진했으므로 석대라 이름지었다. 형제는 훗날 득도해서 열반했다. 그런데 이 지장보살의 영험한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해 이어진다.
# 생지장의 영응
풍악도인 문일장노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그는 세상에서 견성득도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그런 그가 여러 문도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중국에 있을 때 경복사의 장노가 나에게 만날 얘기했어. 삼악도(三惡道:악인이 죽어서 간다는 지옥, 아귀, 축생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보개산, 풍악산, 오대산에 머무르면 된다고….”
“그래서 두세 도반(道伴)과 더불어 이 산에 들어와 심원사에서 환희봉을 바라봤지. 그런데 봉우리 아래 상서로운 빛이 촛불을 하늘에 켜놓은 것처럼 서기(瑞氣)가 하늘에 가득하고 따사로운 바람이 훈훈히 일지 않겠어. 그런데 불보살형상의 구름이 화려하게 피어오르고 종소리는 은은하게 구름 밖으로 울려퍼지는 거야.”
“그래 난 마음에 희열을 느껴 그곳에 갔지. 그러니까 지장석상이 화현(化現)해서 영응을 보이시는 거야.”
문일장노는 곧 샘물로 발을 씻고 마지(摩旨·부처님께 올리는 밥)를 올리려 했다. 그러자 지장석상이 큰 형체로 변하면서 자비롭고 밝은 빛을 두루 비추었다고 한다. 그 밝은 빛 속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광대무량의 넓은 세계)가 뚜렷하게 보였다고 한다.
이 이적의 기록을 남긴 민지는 “보개산 전체가 지장진신이 늘 머물며 설법하는 곳”이라고 했다. 또 있다. 사경불사의 위업으로 알려진 남호 스님(1820~72)은 출가 전 피부병 치료를 위해 이곳에 왔다. 그는 3·7일간 기도하며 지장보살을 염송하자 흰옷을 입은 여인으로 변한 지장보살이 나타나 병을 낫게 해주었다. 구한말 포도대장 한규설의 부인인 박기우·기석 자매는 백일기도 중에 빛줄기가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깨진 옥등잔이 깜쪽 같이 붙은 일, 불기와 전곡을 훔쳐 밤새 달아나던 도둑이 석대암의 미나리광 앞에서 잡힌 일 등등….
그런데 순석 형제가 석대암에 모셨던 지장보살상은 지금은 철원 동송으로 이전된 현재의 심원사에 있다. 남북분단의 쓰라린 역사가 석대암을 덮친 것이다.
# 지장보살마저 괴롭힌 전쟁, 그리고 남북분단
해방 이후 38선 이북인 이곳은 북한땅이었다. 5년간의 북한정권 치하에서는 보개산 내 여러 사찰이 법난의 아픔을 겪었다. 한국전쟁 때 이곳은 피아간 1만3000명의 생명을 앗아간 격전지였다. 석대암을 비롯한 암자들은 한국군이 모두 불태웠다. 남북이 교대로 생지장의 성지를 무참하게 짓밟은 것이다.
다행히 지장보살상은 극적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직전 지장석상은 인편을 통해 월남한 것이다. 이 석상은 전쟁통에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54년 지금의 심원사(철원 동송 상노리)에 봉안되었다.
기자가 석상을 친견하니 소탈한 모습에 왼손엔 여의보주를 받들고 있고 자비로운 미소는 보는 이의 가슴 속에 잔잔하게 적신다. 석상의 색깔은 마치 어제 오늘 만든 것처럼 하얗다. 돼지보살로도 일컬어지는데 높이는 63㎝, 좌폭은 43㎝ 정도다.
“원래는 청흑색이었는데…. 완전히 탈색한 것 같네요.”
그렇게 탈색한 것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보개산 석대기’에도 청흑색으로 돼 있는데 인위적으로 색깔을 바꾼 것이 옳은 일인지.
불교신자가 아니어도 신령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순석 형제가 쏘았다는 화살 자국이다. ‘보개산 석대기’에도 “좌측 어깨에 길이 한 치가량 되는 비낀 흔적이 있으니 이는 창건 당시 이순석 형제가 쏜 화살에 맞은 흔적”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자국이 남아 있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쯤해서 한 가지 의문. 산짐승과 날벌레들의 보금자리·쉼터로 변해버린 석대암 터는 어찌 할꼬. 걱정이 되어 계속 구시렁대자 이우형씨는 “괜히 복원한답시고 잘못 놓으면 도리어 망친다”고 누차 강조한다. 괜시리 되지도 않은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물에 지장보살님을 모실까봐 어지간히 걱정되는 모양이다.
“지금도 민간인들이 출입하기 꺼려하는 곳이잖아요.”
지장보살은 육도중생(六道衆生·6도 즉 미혹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거듭하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있는 곳마다 임하여 민중의 아픔을 구하고 행복을 얻게 하시는 분이라잖는가. 오늘 이 순간 폐허가 돼버린 이 석대암 터에서 나는 무엇을 빌 수 있을까. 그래 이왕이면 거창한 소원 하나. 서로 죽일 듯 미워하고 싸우며 수십년 살았던 그래서 (지장)보살님마저 이리저리 괴롭혔던 남북이 두 손을 꼬옥 맞잡기를….
〈이기환 선임기자|연천 석대암터에서〉
36곳 경승지 있는 보개산… 고려땐 60곳이 넘는 사찰
지장보살의 숨결을 담고 있는 보개산은 그리 간단한 산이 아니다.
휴전선 인근, 즉 경기 연천 신서면과 연천읍, 포천시 관인면, 강원 철원읍과 동송읍에 걸쳐있는 군산(群山)을 통칭한다. 남북으로 25㎞, 동서 14㎞에 둘레만 해도 180리에 달한다. 보개산군은 고대산(832m), 환희봉(877m·지도엔 지장봉으로 잘못 표기됨)을 사이에 두고 내보개, 외보개로 구분한다.
산내 최고봉은 금학산(947m)이며 석대암 뒤편의 환희봉은 내산의 최고봉이다. 보개산군엔 고려 때만 해도 60곳이 넘는 사찰이 있었다. 지금도 저마다 각각의 사연을 간직한 28개의 봉우리와 36곳의 경승지가 있는 영험한 산이다.
특히 미륵을 자처한 궁예와 관련된 설화가 줄을 잇는다. 금학산이 대표적. 금학산은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은 자태를 지니고 있는데, 학이 알을 품은 형상이란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터를 물색했을 때의 일이다.
풍천원 억새밭에 엎드려 있던 궁예는 도선의 지시(도선이 들판을 한 바퀴 돌고 올 때까지 엎드려 있으라고 했다)를 어기고 일어서는 바람에 불행이 생긴다. 그만 학이 날아가 고암산(풍천원 태봉국 도성의 진산)이 아니라 금학산에서 알을 낳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300년 도읍지의 힘은 금학산 쪽으로 옮겨갔으며, 고암산을 진산으로 한 풍천원 태봉국 도성터는 30년 도읍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쨌든 300년 도읍지로 각광받은 곳은 금학산을 주산으로 한 지금의 철원 동송읍 이평리와 오지리 일대다. 학의 형상인 금학산의 남쪽 발등과 북쪽 발등 사이인데, 지금 봐도 도읍지로 손색이 없을 만큼 드넓은 평야 지대다.
지금도 보개산군의 관인봉 능선엔 보개산성이 남아있다. 전설에는 궁예가 부하 장졸들에게 “내 신통력으로 이 성을 쌓을 것이니 너희는 보고만 있으라”면서 싸리나무 가지를 꺾었다. 그리고는 한 번 휘두르니 웅장한 보개산성이 한순간에 완성됐다고 한다. 이런 수많은 전설이 깃든 보개산군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초토화된다. 한국전쟁 직후 보개산군의 원시림을 대부분 벌목하여 전쟁 복구사업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산군의 대부분이 군작전지역. ‘덕분에’ 벌목 이후 생긴 2차림이 어느덧 자라 제법 울창해졌다. 이젠 개발이다 뭐다 해서 건드리지 말고 제발 이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다.
석대암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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