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생교회사(我生敎會死),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
평안북도영변 출신의 박관준(朴寬俊) 장로님이 계십니다. 1937년 평양의 삼숭(三崇), 숭실전문·숭실중학·숭의여중이 신사불참배로 폐교위기에 놓였다는 기사를 읽은 뒤 신사참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일제와 합법적으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수차례 총독부를 방문하여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여의치 않자, 일본 중의원에 직접 청원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종교 법안이 심의되는 1939년 3월 24일 회의장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이다”라고 외치면서 준비되었던 건의서를 단상을 향하여 던졌습니다.
이 일로32일간 경시청에 갇히게 됩니다. 귀국 후에는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전개하다 검속되어 6년간의 옥고 끝에 평양의 옥중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그가 가진 삶의 원칙은 ‘아생교회사(我生敎會死),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이었습니다 ‘내가 살면 교회는 죽고, 내가 죽으면 교회는 산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이미지가 추락한 이 시대에 우리는 ‘내가 죽을 때 교회가 산다’라는 순교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에카타콤이 있습니다. 카타콤은 ‘무덤’이란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네로의 박해를 피해서 은신하게 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네로황제 때부터 콘스탄티누스 때까지 약 250년간을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에서 생활했던 것입니다. 화려한 로마 도시의 문화를 뒤로 한 채 어두컴컴한 지하공간 속에서 생애를 보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체의 본성을 좇았다면 죽는 것이 무서워 화려한 도시의 삶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옛사람을 지하무덤에 묻어 버린 채 여생을 카타콤에서 지내기로 한 것입니다.
오래전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의 피를 간직하고 있는 전라도 영광에 있는 염산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교회 앞에는 77인의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얼마전 총회 역사위원회가 한국기독교 순교사적지 1호로 지정하였습니다. 1950년에 염산교회에 김방호 목사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목회를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6,25가 일어난 당시에도 교인들의 가정을 돌아보면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며 신앙으로 열심을 내셨던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에 의해서 그의 가족 8명이 죽임을 당하고, 그 교회 성도들은 그 교회 앞에 있는 바다에 돌이 묶인 새끼줄에 묶여서 줄줄이 수장을 당하게 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새끼줄에 포박된 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바다에 빠지는 성도들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라는 찬송을 부르며 나아갔습니다. 죽음 후에 주님을 뵙게 될 것을 믿으며 두려움을 내려놓고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순교자는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고결한 희생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썩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일임을, 주님의 쓴잔을 마실 수 있는 영광의 잔이었음을 믿기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